김봉곤 소설가는 첫 작품 이래 계속 사랑을 말해왔다. 그의 소설 속에서 ‘나’는 스스로 게이로 정체화하기 전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재회하고, 학교에서 만난 선배에게 빠져들었다 그가 휘두르는 폭력에 상처 입는다. 오래 사귀었던 남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계절은 속절없이 흐른다. 커밍아웃한 게이 소설가로 사랑하듯 쓰는 그의 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을 읽으면 “소설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나 어떠한 사건을 겪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맞이하는 것”(85쪽)이라는 말에 소설 대신 사랑을 넣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계절의 순환이 주는 의미
전작 『여름, 스피드』 표지가 바다에 앉은 남자의 뒷모습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의 표지는 신록 속에서 셔츠를 입은 남자가 등을 보인 채 있어요.
사실 그림의 제목은 ‘Leafy, June’이어서 6월 초여름이긴 하지만, 한여름처럼 ‘한봄’이라는 느낌을 환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종이 질감이나 후가공은 편집부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무척 마음에 들었고 상상한 것 이상으로 좋게 나왔어요.
책에 실린 「마이 리틀 러버」의 중제목도 계절을 표현하는 단어였죠. 계절이 소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창작 수업에서 문체나 플롯 못지않게 소설을 쓰는 데 날씨가 중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생각해 보니 저는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더라고요. 계절의 순환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고 계절감이 있는 걸 발견하려고 하다 보니, 점점 더 계절을 많이 고려하게 된 것 같아요. 계절이 유비하는 것들도 있고요. 봄은 겨울을 품고 있기도 하고 다가올 여름을 품고 있기도 해서 생각보다 이채로운 계절이에요.
이번 소설은 어떤 사랑의 처음과 끝을 다루는 느낌이었어요. 일 년이 지나 계절이 다시 돌아오듯이요.
이번 소설에서 그린 봄은 한 계절을 다시 돌아서 온 봄이라기보다 『여름, 스피드』 이전의 봄이었어요. 과거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거든요.
「마이 리틀 러버」에서 ‘H’와 ‘나’는 헤어질 듯 말 듯 계속되는 관계 안에 있어요.
등단작에서 그렸던 ‘형섭’이라는 인물이 이번 작품의 ‘H’가 될 거예요. 어떻게 보면 형섭 연작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제 실제 연인으로서의 시간과 상상으로 써본 관계가 담겼어요. 「엔드 게임」은 오토 픽션으로 쓴 소설이에요. 있는 그대로 쓰려고 노력했고,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제가 가진 경험과 상상력과 어쩌면 그랬을지 모를 기원 같은 것, 과거의 상상력, 모든 것을 담아서 끝을 내고 싶었어요.
자기 생활을 많이 집어넣을수록 공력도 많이 들 텐데요.
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내기 때문에 힘듦이 있는 것 같아요. 똑같이 힘든데 노력을 들이는 방향이 다른 거죠. 저는 있는 그대로를 가져와서 쓰는 일 자체는 그렇게 힘이 드는 편은 아니에요. 단지 내외부적으로 조율해야 할 것들에 힘을 많이 들이는 편이에요. 화자와 나 관계의 거리감을 조정한다든지요.
내외부의 조율해야 할 것에는 어떤 게 있나요?
실제 인물에게 허락을 구하는 부분도 있고, 현실을 변형하거나 가공할 때 오는 제 불만족도 있고요. 쓰는 것과 사는 것을 순환하게끔 쓰려는 저로서는 글쓰기에 대한 죄책과 부차적인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겠죠.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면서 당시 생각했던 일들이 다시금 재정의되기도 하나요? 그때 생각했던 감정들이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든지요.
「데이 포 나이트」를 쓰면서 그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요. 결론을 내지 못한 소설 중 하나거든요. 소설을 쓰면 뭔가 해소될 줄 알았는데, 쓰고도 해소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어요. 현실에서도 소설에서도 종결짓지 못하고 여전히 의문을 품고 가야 하는 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랑이 그런 것 같아요. 특히 20대와 30대의 사랑이 다르기 때문에 뒤돌아보면 이해하지 못하죠.
후회가 있죠. 자신을 지키는 쪽으로 정신승리를 하게 되기도 하고요.
지금 작가님의 사랑은 어떤가요?
그렇게 크게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예전 사랑도 생활에 가까운 사랑을 좋아했어요. 동거 애호가들이 있잖아요. 사랑하면 동거하는 편이었고, 지금 애인과도 같이 살고 있어요. 누군가는 저에게 생활로 묶이지 말라고 하지만 저에게 사랑은 생활로 서로 겹쳐지는 것들이에요. 때로는 멀어졌다 집에 가면 다시 만나고 가족이 되는 연애를 예전에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해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지시하기
브랜드나 지명, 인명에 실제 이름을 쓸 때가 많아요.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업소명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도 데이팅 앱을 통한 아웃팅 등 많은 사건이 있지만, 정확한 명칭을 적시하는 게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적시했을 때 위축되는 사회가 잘못된 거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줘도 문제가 없는 세상을 꿈꾸기에 그렇게 쓰게 된 것 같아요.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갈등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볼 만한 문제예요.
실제하는 것들이 나올 때 독자들이 순식간에 현실로 느끼는 효과도 있겠죠.
실감을 확 느낄 수도 있고, 모르기 때문에 배척될 수도 있죠. 다른 집착은 없는데 어떤 것이 흘러 감정까지 가는 걸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 욕심은 있어요. 종일 알맞은 단어를 찾을 때도 있고요. 있는 그대로 지시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감정을 표현하는 말도 정확한 단어를 찾는다는 거군요.
끝까지 찾아지지 않는 감정도 있는 것 같아요. 짧은 외국어로 찾아보면 호환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다른 단어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이라 집어 말할 순 없어도 최소한 정확한 단어를 말하려고 노력하는 게 저의 문학관이자 소설 쓰는 방식이지 않을까요?
다른 작가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환경을 묘사한다면, 작가님은 느낌을 직접 설명하는 방식을 택해요.
한창 제가 글을 배우고 쓸 무렵에는 말하기보다 보여주는 게 훨씬 좋다는 우위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것의 근사함은 알고 있지만, 외로움을 외롭다고 말하면 되는데 왜 에둘러서 그림으로 보여줘야 할까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어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지시하면서 정확히 말해서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것들을 원했어요.
“모든 것을 말하고 싶지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325쪽)는 문장이 있었어요. 소설을 쓰면서 점점 더 그 생각이 강해지나요?
첫 소설집은 정말 멋모르고 쓴 게 많아요.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조율하고 정리하는 데 신경을 썼다면, 이제는 소설론이나 작법으로서도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이 생겼어요. 둘러봐야 할 주변 상황들도 생기고요.
완전한 픽션과 완전한 에세이 사이
써야 할 내용보다는 소설을 쓰고 싶은 기분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요즘도 여전히 그래요. 이상하게 소설을 쓰고 싶다는 기분이 출근길에 많이 들어요. 아주 옅은 비감 같은 게 동반되는 것인데,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이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게 어떻게 보면 제가 소설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고도 생각했어요.
출근길에는 비감이 들죠.
다들 슬프잖아요(웃음). 그런데 옅게 슬퍼요. 출근하면 싹 다 잊어버리고, 쓰고 싶은 생각도 안 들고요.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출근길에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잖아요. 음악이 기분을 환기해서 뭔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무엇을 쓸지 정하고 책상 앞에 앉는 편인가요? 아니면 일단 책상 앞에 앉나요?
쓰고 싶은 게 없이는 앉지도 않아요. 쓰고 싶었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고 비로소 그 기분과 어떤 이야기가 접합되었을 때 앉아서 쓰기 시작하는지라, 굉장히 늦게 자리에 앉고 금방 쓰는 편이에요. 쓰고 있지 않은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죠.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될 것인지 수없이 연결하면서 생각하다 나오는 문장들이 있기 때문에 쓰지 않지만 또 쓰고 있다고도 생각해요.
일본 문학의 영향을 받은 듯한 부분이 있어요.
날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일본 문학이나 애니메이션, 문화에서 주는 서정성을 좋아해요. 일본적인 면이 제 유년 시절의 모습과 닿아있어서 더 애호하게 되는지도 모르고요. 일본 문화에서 그리는 장르적 특성의 가짜 계절감조차도 좋아하는 편이에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이 서정을 풀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문장에 붙임표를 쓰기도 해요. ‘흘렀다’가 아니라 ‘흘-렀-다’가 되는 거죠.
일본어에서 강조하는 느낌의 연극적인 말투이기도 하고,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문장의 리듬감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어요. 영화적 기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고요. 읽는 사람마다 읽는 속도도 다 다르겠지만 작가가 어느 정도 지시를 해서 같은 마음과 속도로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때때로 쉼표나 붙임표를 이용해 말미를 주기도 해요.
붙임표가 나오는 순간 속도가 달라지더라고요.
가독성에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속도를 바꾸기도 하는 거죠. 쉼표를 많이 쓰는 편인데, 한창 습작하던 시절에 이인성 선생님 소설을 많이 읽었고 거기서 오는 리듬감이 좋아서 쓰고 있어요.
자신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는 형식에 더 끌리는 이유로 정체성을 들어주셨는데, 왜 그런 걸까요?
제 기질과도 닮아있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오픈리 게이로 살아왔기 때문에 제 정체성을 말해왔고, 문학에서도 일관되게 퀴어 정체성을 말하면서 글을 써왔어요. 퀴어 정체성을 가졌다고 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쓸 필요는 없겠죠. 더 멀리 가버릴 수도 있지만, 게이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할 기회도 사실 없잖아요. 만나자마자 “안녕하세요, 게이예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요. 제가 쥐고 있는, 제가 쓰는 소설에서만큼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실제 생활에서 그런 기회가 덜하기 때문에 더 말하고 싶은 거죠.
어떻게 보면 커밍아웃의 일환이 될 텐데, 커밍아웃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하죠. 문학 속에서 경험을 들이고 쓰면서 자기 자신이 소진되는 느낌도 있을 거예요.
저 역시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한창 소설을 쓰면서 소진된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어요. 하지만 쓰면서 쓰일 수 있는 ‘나’와 말하고 싶은 ‘나’가 다 줄어들고 나서도 여전히 할 말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축복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하고 싶고, 어떻게 보면 의지와 상관없이 쓰이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젊은 작가를 꼽으라면 대부분 여성 소설가가 꼽히고, 박상영 작가님과 김봉곤 작가님이 그중에 꼽히죠. 페미니즘과 퀴어의 대표성을 띠게 되는 것 같아요.
대표성을 띠는 사람이라고도 알고 있고 의식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때는 그걸 버리고 써야 한다는 생각도 있어요.
대표성을 의식하면 프로파간다가 될 테니까요.
그렇죠.
박상영 작가님과는 데뷔 이래 계속 같은 자리에 불리게 되는 때가 많죠? 두 분 다 퀴어 문학을 이야기하지만, 방식은 사뭇 달라요. 작품 세계를 다르게 가져가야겠다는 의도도 있나요?
단군 이래 최대 커플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의도적으로 멀어지자, 달라지자는 생각은 없어요. 아마 박상영 작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처음 썼을 때부터 타고난 기질이 달랐다고 생각하고 그게 바뀌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해요. 다만 각자 맡은 역할을 의식하고 있을 테고, 박상영 작가의 페이소스가 조금 더 사회적이라면 저는 내밀하고 서정적인 감정의 결을 쓰는 작가로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감정을 소설로 풀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이 확실히 있다고 생각해요. 에세이에서 상상력은 현실에 얽매일 수밖에 없죠. 현실이 너무 강렬해서 재해석할 여지 없이 튕겨 나가고요. 하지만 이것을 소설로 생각한다면 제가 개입할 여지와 상상해볼 여지, 다른 사람이 될 여지도 생기는 자유로움의 매력이 있어요. 완전한 픽션과 완전한 에세이 사이 어딘가에서 제일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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