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강상우 감독은 한 연극의 제작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다. 조선대학교병원 근처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주옥 씨는 당시 만난 광주 시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15년 5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문을 열었다. 그곳을 찾은 주옥 씨는 강상우 감독과의 통화에서 시민군의 사진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고 말했다. “동네에서 ‘김군’으로 불린 넝마주이 청년”이라는 것.
바로 그 사진이, 비슷한 시기에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에 업로드됐다. 1980년 5월에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투입됐고, 사진 속 청년(주옥 씨가 김군으로 기억하는 청년)이 2010년 평양에서 촬영된 사진 속의 인물과 동일인인 북한특수군이라는 주장이었다. 한 달 뒤, 우익 논객 지만원 씨는 일베에서 제기한 사진적 유사성이 ‘5.18 북한특수군 개입설’의 결정적 증거라고 말했다.
강상우 감독은 “사진 속 얼굴에 제 이름을 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거창한 문제의식이나 사명감보다는, 그저 궁금했다. “그는 왜 총을 들었을까. 그리고 어쩌다 항쟁의 선봉에 서게 됐을까.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렇게 시작된 ‘김군 찾기’는 5년 여간 이어졌다. 100여 명의 생존자를 만나 200회 이상 인터뷰를 했고, 그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을 완성했다. 85분의 러닝타임이 다 담아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은 책 『김군을 찾아서』에 기록됐다. 오월의 광주, 그곳에 존재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이들과 기록되지 않거나 삭제된 서사들을 실증적으로 쫓았다.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담다
프롤로그에서 말씀하시길 “강소영 편집자님의 제안으로 책을 썼다”고 하셨어요.
네, 편집자님께서 제안을 주셔서 쓰게 된 거예요. 영화가 나오고 나서 ‘전쟁없는세상’의 이용석 활동가에게 번호를 물어 연락을 주셨어요. 책을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저희가 100여 명의 생존자 분들을 인터뷰했는데 영화에서는 스무 분 정도의 말씀밖에 못 담았어요. 아카이브를 정리하는 작업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는데, 적기에 제안을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영화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책에 담겼겠어요.
영화는 85분의 러닝타임 안에서 김군 한 분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주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순간순간 벗어나는 부분들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담지 못해서 아쉬웠던 부분들이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넝마주이와 관련된 증언들 같은 거예요. 처음 영화 편집본을 만들었을 때는 넝마주이 분량이 되게 많았어요. 당시에 있었던 하층 계급의 강제 수용과 관련된 역사들까지 다룰 수밖에 없어서, 사실은 5.18 이야기에서 벗어나는 것들도 많았거든요. 영화 <김군> 같은 경우는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군 김군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수많은 생존자들, 그리고 생존하지 못하신 수많은 희생자 분들의 존재를 알리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저희가 선택을 했어야 됐어요. 책에서는 한 챕터 안에 저희가 들었던 넝마주이, 고아, 구두닦이와 관련된 증언들을 최대한 담았어요.
4부의 제목 자체가 ‘넝마주이’죠. 이들의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루신 이유가 있나요?
예를 들어서 무등갱생원과 관련해서는, 기존의 5.18 연구자 분들 사이에서도 이 분들이 항쟁 때 다 돌아가셨다는 게 정설로 굳어있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저희가 생존자들의 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됐거든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공유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 항쟁의 선두에 섰던 넝마주이와 구두닦이 분들이 이후에 이야기되는 방식을 보면, 계엄군의 학살에 의해서 사라진 하층계급들에 대한 죄책감을 자극하는 서사로써만 소비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실제로 만났던 무등갱생원의 여성 시민군 선생님은 그런 소문들에 대해서 ‘나쁜 소문’이라고 일축하시면서 당시의 경험들을 말씀해주시기도 했어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넝마주이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김군처럼 이름이 남지 않은 분들 중에는, 넝마주이 분들과 비슷한 서사를 가진 분들도 있었겠죠.
취재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금남로 근처의 황금동에 계셨던 성노동자 분들이 당시에 헌혈이라든지 시신 관리를 할 때 많이 참여하셨다고요. 김지은 선생님의 미투 이후에 처음으로 5.18 여성 시민군 선생님이 계엄군 성폭력 증언을 하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혀 부끄러워할 피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30여 년이 지나서야 증언을 하셨잖아요. 그런데 성노동자 분들은 광주 안에서도 생존자로서 (항쟁에) 참여했다는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는 게 되게 안타깝고... 그런 부분에서는 더 이야기를 담고 싶었지만 못 담았던 부분들이 많아요. 앞으로 누군가 계속 발굴해주거나, 당사자의 삶에 피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기록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에필로그에서 “많은 경우 기록은 가해자의 편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떠오르네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 <김군>과 책 『김군을 찾아서』와 같은 작업이 필요한 것 같아요.
5.18 항쟁도 그렇고, 운동의 최전선에서 제일 고생하고 희생하셨던 분들이 그 운동으로 빚어진 긍정적인 결과의 혜택을 입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때때로 되게 엉뚱한 사람이 그 운동에 대한 발언의 권력을 얻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요. 사실은 저도 굉장히 조심스러운 게, 저는 저널리스트가 아니고 그런 책무감이나 의무감도 없거든요. 누가 어깨에 힘주고 정의로운 척하는 걸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고(웃음), 구석에서 투덜대면서 쭈그려있는 게 제일 편한 사람인데(웃음). 사실 지금도 되게 불편해요. 책임감 때문에 시작한 작품도 아니고 호기심 때문에 시작했고, 하고 보니까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거거든요. 이 책을 냄으로써 그런 걸 조금 털고 싶어서 다 정리를 한 거예요.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은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잖아요. 중간에 ‘길을 잃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나요?
항상 그렇죠. 대화를 나눌 때도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달리 상대방이 전혀 딴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예전에 극영화를 만들 때도 계속 어딘가로 미끄러지는 방식의 이야기가 되게 재밌었어요. 영화 <김군>에도 보면, 김용균 선생님이 김군과 닮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할 때 뜬금없이 (그때) 자신이 이뻤다는 이야기를 하셔서 어이가 없으면서도 되게 좋았어요. 개인적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거든요. 필요하고 해야 되는 이야기를 할 때도 중요하지만, 사실 제 마음이 동할 때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였어요. 뜬금없이 자신의 청년 시절, 정말 아름답던 시절의 회한이나 감정들을 노출할 때. 저한테는 되게 울컥하게 만든 순간이었어요. 그렇게 미끄러지는 순간들을 되게 좋아하는데, 촬영할 때는 좋았지만 편집할 때는 되게 고생했죠(웃음).
이 부분을 어느 지점에 붙여야 하나, 고민되셨나요?
김군을 찾아가는 이야기이지만, 뿐만 아니라 5.18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관객들이 봤을 때도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5.18의 본질에 대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는 서사를 만드는 게 목표였거든요. 애초에 총을 든 무장 시민군의 사진에서 출발한 건데 사실은 순결한 피해자, 무고한 피해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되게 무섭고 험악하고 총을 든 군인 같은 남자의 이미지잖아요. 저한테는 그것이 주는 여러 가지 이상함들, 질문들이 있었어요. 답이 쉽게 나오는 이미지가 아니어서 ‘왜 이 사람이 총을 들 수밖에 없었고, 어떤 상황에서 군복처럼 보이는 옷차림에 기관총처럼 보이는 총을 들고 있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당시의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왜 시민군으로 활동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생존자들의 입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됐어요. 김군 한 분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수많은 광주 시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필요했는데, 100여 분의 목소리를 다 채집하고 나서 ‘어떻게 기승전결로 구성할까’를 생각했을 때는 고민이 너무 많았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올 때 (관객이 느끼는) 피로감도 있으니까, 냉정하고 전략적으로 영화적인 고민도 해야 했고요.
생존자의 기억은 가장 강력한 증거
첫 번째 김군 후보였던 오기철 씨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난 오늘도 자네한테 이런 얘기하고 나면 잠 못 자. 왜? 잠 재웠던 거 또 깨우니까 못 자.” 그런 힘듦을 이유로 만남이나 진술을 거부하신 분들도 계셨을 것 같아요. 어땠나요?
현재의 삶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요. 광주 안에서 생존자 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은 저희 작업과 관련해서 딱히 요청을 드리지 않아도 자주 연락을 주시고 만나자고 하시고 ‘이런 제보가 있으니 같이 가보자’고 하시면서 소개를 시켜주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사실은 오기철 선생님도 제일 많이 도와주신 분들 중에 한 분이세요. 본인이 활동가로 오래 활동하셔서 진실을 알려야 된다는 책임감이 있고, 동시에 증언을 했을 때의 고통도 있고, 두 가지가 딜레마처럼 계속 공존하는 분이셨던 것 같아요. 어쨌든 광주 안에서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동료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분들은 상대적으로 편하신데요. 광주 바깥에서 동료들과의 교류 없이 혼자 섬처럼 사시는 분들의 경우는 저희가 연락을 드렸을 때 5.18과 관련해서 증언하는 걸 꺼리시는 분들도 많으셨어요.
기억나는 분들이 있나요?
마지막 증언자이신 최진수 선생님도 그런 분 중에 한 분이었고요. 또 만나보고 싶었던 분이 계셨는데, 어렸을 때부터 넝마주이 청년들과 같이 월산동에서 많이 생활하셨던 분이었어요. 김태일 감독님의 다큐멘터리 <오월애>에도 출연하셨던 선생님인데, 저희가 연락드렸을 때 이제는 (항쟁을) 떠올리고 이야기하는 게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더 연락드리지 않았어요. 딱히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더라도 5.18 관련자 혹은 희생자로서 정체화 돼서 공개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셨고요. 인터뷰를 허락하셨다고 해도 말하고 싶어 하시지 않는 부분들이 있죠.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분들 본인의 피해에 대해 묻지 않았어요. 최진수 선생님처럼 피해 증언 자체가 김군을 찾는 데 중요해서 들어야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저희는 그냥 김군과 관련된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아는 단서들이 있는지 여쭤봤고요. 본인들이 원하실 때만 목격담을 말씀하셨어요.
‘생존자의 기억은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쓰셨는데요. 법정에서도 기억이 강력한 증거로 채택되나요? 예를 들면 지만원 씨나 일베는 사진 속의 시민군이 ‘광수’라고 주장하는데요. 실제 주인공들이 법정에서 ‘내가 사진 속의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당시 기억을 증언하면, 진실로 받아들여지나요?
성폭력 사건 같은 경우도 증언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 증언이 일관되고 있다거나, 여러 가지 주변 환경과 맥락을 고려했을 때 (사실이라고 판단되면), 피해의 물리적인 증거가 없다고 해도 증언만으로 유죄가 선고되는 경우들이 많아요. 지만원 씨 사건과 관련해서는 1980년 당시에 찍은 사진만 제출해서 증명이 되는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5.18과 관련된 기록물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 기록물들에 정리된 사실과 증언을 대조했을 때 증언이 굉장히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다고 전문가들이 판별할 수 있으면 되는 건데요. 단순히 피해자라고 주장해서 그걸 다 팩트로 믿는 게 아니라, 전문가들이 세워놓은 여러 기준과 정황들, 맥락들에 기반 해서 ‘이 증언은 사실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고 생각해요.
생존자 분들을 인터뷰하실 때도 그 부분을 염두에 두셨겠어요.
5.18 관련해서는 시기별로 수천 명의 증언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 있어서, 저희는 선생님들이 말씀하신다고 다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항상 대조 작업을 거쳤어요. 영화에서는 한 분 한 분의 목소리만 나오지만 사실이 아닌 이야기는 항상 그 뒤에 다른 분들이 반박하신 내용을 담았고요. 많은 근거들로 이 증언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한 경우에는 영화에 담았거든요. 어쨌든, 법적으로나 실제로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증언만으로 판별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 믿는 편이에요.
직접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또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진술이 있죠. 그럴 때 증언은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고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디테일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을 발견하면서 믿게 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날짜나 시간대나 몇 명이 있었는지 같은 내용들은 얼마든지 틀릴 수 있지만 감정과 결부된 기억 같은 경우는 오래 기억에 남는 편이고요.
책을 읽으면서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두 번째 김군 후보였던 이강갑 씨의 경우 ‘진짜 김군을 찾은 것 아닐까’ 싶어서 흥분이 고조됐는데요. 촬영하면서 그렇게 짜릿했던 순간은 없었나요?
이강갑 선생님을 만났을 때 그랬던 건 있었죠. 정말 찾은 게 아닐까 싶었는데, 뭔가 짜릿하다기보다는 긴가민가했던 순간들이 되게 길었던 것 같아요. 짜릿했던 순간은 누군가 제보를 해주실 때, 그런 전화를 받을 때였던 것 같아요. 한창 편집을 하고 있던 2017년에도 전화를 받고 혼자 광주까지 내려갔는데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김군이) 아니었어요. 그런 일들이 되게 많아서 긴장된 순간도 굉장히 많았는데요. 김군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분을 찾아가는 실패의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생존자 분들의 목소리를 담는 게 저희한테 중요했어요. 그런 분들 중에 저희한테 좋은 감흥의 순간들을 말씀해주신 김용균 선생님, 오기철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계셔서 실망하거나 그러지는 않았고요. 나중에 가서는 책임감이 너무 커졌기 때문에 ‘(김군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모두 다 김군이었다’라는 식의 결론은 내고 싶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던 것 같아요.
『김군을 찾아서』에서 5.18 관련 사진 자료도 볼 수 있었어요. 수집하고 정리하시는 데 공을 많이 들이신 것 같아요.
강소영 편집자님, 신덕호 디자이너님께서 정말 심혈을 기울이셨어요. 영화에서 보여지지 않은 사진 속의 디테일을 날짜, 시간, 순서에 따라 분석하는 작업을 굉장히 열심히 하셨어요. 그걸 시각화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셨고요. 굳이 5.18이라는 사회적 이슈가 아니더라도, 사진 이미지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어요.
김군 찾기,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화 <김군>이 상영될 때,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실패를 하더라도 좋은 실패를 하고 싶었다’고요. 영화 <김군>과 책 『김군을 찾아서』는 좋은 실패인가요? 아니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우선 저는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영화는 결국 관객이 완성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책도 독자가 완성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실패와 성공은 있을 것 같아요. 아니면 그냥 미지근한 체험이 될 수도 있고요. 한 분 한 분에게 어떻게 다가올지는 제가 단정 지을 수 없는 것 같은데, 작업을 한 개인으로서 저에게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어요. 영화를 만들고 나서 되게 흥미로웠던 게, 보신 분들 각자가 ‘김군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맥락이 너무 다르더라고요.
같은 영화를 보고도 누구는 ‘김군을 찾는 데 성공했다’고 말하고, 누구는 ‘김군을 찾는 데 실패했다’고 말했죠.
실제로 살아있는 분을 만나는 게 찾은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었고, 죽음을 확인한 것이 찾은 거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최진수 선생님의 기억만으로 (김군의) 죽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저널리즘적인 교차검증이 되지 못한 거라 확실하지는 않다고 결론내신 분들도 있고, 그런 저널리즘적인 것과 상관없이 수많은 생존자들이 김군이라는 시민군의 경험을 증언해줬기 때문에 찾은 거라고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관객 분들의 피드백을 통해서 찾았다, 성공했다, 실패했다, 라는 말의 의미가 저한테 되게 풍성하게 다가와서 그게 재밌었던 것 같아요.
최진수 씨는 김군을 기억하고 있고, 자신의 기억을 공동의 기억으로 남기려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시잖아요. 죽은 사람은 물질이 아닌 남은 사람의 기억으로써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김군 찾기’는 성공한 게 아닐까 싶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최진수 선생님은 지금도 김군의 시신을 찾을 수 있기를 애타게 원하시거든요. 사실 김군의 시신을 찾는다는 건 되게 안티고네적인 작업이라고도 생각해요. 시신을 찾더라도 사진 속 인물의 것인지를 증명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기술이 발달해서 사진 속 인물의 골격과 대조하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2000년대 초에 유족인 어머니와 DNA를 대조해서 망월동 묘역에 묻혀 있던 시민군 청년의 신원을 찾은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김군은 신원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시신을 찾더라도 친족이 DNA로 증명을 할 수가 없어서 불가능한 작업인데요. 최진수 선생님이 그 불가능한 일을 실현시켜야 된다고 계속 주장하시는 게 저한테는 큰 자극이었어요. 영화를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기억 속에서 김군이 계속 살아남는 것을 조금이나마 보조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김군>은 ‘5.18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담은 5.18 이야기’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만약 감독님이 5.18을 경험한 세대였다면, 작품이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을까요?
되게 어려운 질문인데요. 당시에 항쟁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현장에는 없었지만 동시대에 항쟁에 대해 접했던 사람들이 있잖아요. 같은 세대라 하더라도 경험의 결들이 너무 다르고, 같은 연령대라 하더라도 계급과 성별 등의 차이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개의 존재에 따른 차이가 계통의 차이를 압도하는 경우도 많이 보는데, 저는 개체를 보는 게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고요. 세대나 개체의 평균치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저한테는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고,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저한테는 세대나 시대를 막론하고 ‘잼’과 ‘노잼’으로 구분되는 것 같아요(웃음). 어떤 영화든 어떤 글이든 재밌게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요. 언제 어디서나 개인들, 개체들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감독님을 ‘정치적인 이야기를 영화에 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정치적으로 특정 진영에 더 가깝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요. 영화 <김군>이나 책 『김군을 찾아서』가 창작자로서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정당 정치의 맥락에서 어느 진영을 택하는 문제라면 너무 싫지만, 삶의 모든 행위가 정치적이고 모든 영화는 다 정치적이라고 생각해요. 장르를 불문하고 재밌는 영화와 재미없는 영화가 있고, 자극을 주는 영화와 자극을 주지 않는 영화가 있는 거죠. 저는 생존자들, 실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촬영하는 본격적인 작업을 <김군>을 통해서 처음 해봤고, 그것이 얼마나 그분들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큰 트라우마를 안기는 작업인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트라우마적인 사건의 생존자들의 실제 삶을 다루는 작업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애초에 이 작업을 시작할 때 ‘5.18 이야기를 할 거야’ 해서 시작한 게 아니고 되게 작고 사소한 곳에서 출발했고요.
굉장히 솔직한 답변인 것 같아요.
저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들, 소수자적인 이슈들에도 관심이 있지만,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했을 때는 그런 이슈에서 출발했을 때는 작업 안에서 제 운신의 폭이 너무 좁아지고 답이 뻔히 나오는 작업으로 귀결되는 위험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업에 흥미를 느끼고 그런 작업을 하고 싶은 욕심과 고민이 있어요. 이번에도 똑같았고요. 저한테 재밌느냐 재밌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 같고, 그것만으로도 고민이 큰 것 같습니다.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