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도 높은’ 글을 쓰는 정치학자 김영민 서울대 교수가 세 번째 책을 출간했다. 『공부란 무엇인가』. 2018년 <경향신문>에 기고해 큰 화제를 모았던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칼럼이 연상되는 제목이다. 미취학 아동 시절과 군 복무, 유학을 앞둔 낭인 시절을 제외하고는 학교를 떠난 적이 없었던 김영민 교수. 취업난에 몰린 학생들을 보며 “젊은 날 공부할 기회를 박탈하는 건, 그 화려한 시간에 대한 모욕 아닌가?” 질문한다. “생각할 수 있는 근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평생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김영민 교수는 이번 책을 펴내며, 자신의 서명 옆에 “배우는 사람은 자포자기하지 않는다”고 썼다.
“공부에 매진해본 사람만이 제대로 쉴 수 있습니다. 당겨진 활시위만이 이완될 수 있듯이, 공부라는 긴장을 해본 사람만 이 휴식이라는 이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부끄럽지 않지만, 공부를 안 해서 제대로 못 쉬는 것은 부끄럽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할수록 쉬는 일은 쉬워집니다.” -「에필로그」 중에서
해야 하는 말은 아직도 많이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학업도 어렵게 하고 있다. 교수의 일상은 어떤가?
평소처럼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며 살아간다. 책이 나왔으니, 출판사가 진행하는 후반 작업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이것저것 노력 중이다. 이와 같은 인터뷰도 한 예이고. 신간 일부 내용을 낭독하는 파일을 최근에 만들었다.
학교 수업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상황에 맞추어 탄력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대면 수업과 비대면 수업을 일정 비율로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이번 학기는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빨리 대면 수업이 가능해져서, 학생들과 함께 정신적 필라테스 수업을 하고 싶다.
작년 말, 논어 에세이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을 출간한 후 세 번째 책이다. 김영민 교수의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책이 아닐까 싶은데. 독자로서는 접근성이 용이한 주제이기도 하고.
내가 오랫동안 학생이었고, 또 교직에 몸담아왔다는 점에서는 『공부란 무엇인가』가 내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복수의 정체성이 있지 않은가. 접근성에 관해서는 글쎄. 한국 사람들이 늘 공부하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온, 공부에 살짝 미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을 읽고 나니 좀 찔리더라. 그간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했던 말과 글들이 떠올라서. 이 같은 독자의 반응을 읽으면 저자로서 어떤가?
“찔린다”는 것은 분명한 반응의 일종이니까 반갑다. 저자로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은 무반응 아닐까. 자신의 생각을 책에 담아 세상에 내놓았는데, 아무 반응도 없다면 맥이 좀 빠질 것 같다. 반응 중에서는 당연히 긍정적인 반응이 좋을 텐데, “찔린다”는 것은 “가렵다”나 “느끼하다”보다는 긍정적인 반응인 것 같다.
“저자들은 대개 관심종자(143쪽)”라고 썼다. 굉장히 동의한다. 그리고 “진짜 관심종자는 드러내기보다는 숨긴다”고 밝혔는데, 그렇다면 김영민 교수는 ‘진짜 관심종자’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부란 무엇인가』에는 저자의 진심이 어느 정도 투명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하나?
명시적으로 서술한 부분에서 제 진심을 숨긴 부분은 딱히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공부에 관한 모든 사항들을 다 썼다고는 할 수 없다. 읽기, 쓰기, 말하기, 생각하기에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아직도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할 기회가 오면, 누가 아나? 후속편이 나올지.
유학 생활에서 느낀 다양한 장단점을 솔직하게 밝혔다. 해외에서 공부한 이력이 무엇을 확장시켰나?
유학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기회가 온다면, 처지와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도 혹은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 다닐 때만해도 해외 경험을 하기 어려웠다. 해외여행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그보다 나중 일이다. 그러다 보니, 유학은 제게 해외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활짝 열어준 셈이었다. 학생들에게 유학을 꼭 권하지는 않지만, 해외 경험은 많이 갖기를 권한다. 실제로 학생들과 함께 해외 답사를 많이 다니기도 했고. 국내에만 있다 보면, 아무래도 자신을 객관화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물론 해외에 나간다고 저절로 자기 객관화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에 관한 이야기는 특별히 없더라. 학창 시절 좋은 학습 기회를 마련해준 스승이 있었나?
중학교 때 선생님들로부터 배움에 관련해 여러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첫 부임한 젊은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은 뭔가 해보고자 하는 에너지가 충만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에너제틱한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 한 분이 이영희 선생님의 『우상과 이성』을 권해서 읽은 기억이 난다. 아마 그 선생님의 대학 시절 독서가 미친 영향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어쨌거나 어려운 책을 권해주는 선생님들이 계셨던 것은 제게 도움이 됐다.
대학 시절에는?
문학평론가 김우창 선생님과 김인환 선생님의 강의로부터 많이 배웠다. 그분들이 문학평론가이기는 하셨으나, 수업 내용은 사상에 대한 논의로 가득했다. 김우창 선생님의 경우는, 당시 대학 영어 시간에 플라톤이나 야스퍼스의 저작을 읽히곤 했다. 김인환 선생님의 경우는, 문학작품 중에서도 사상의 깊이가 있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권했다. 김인환 선생님은 올해 봄에 에세이집 『타인의 자유』를 쓰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한다.
쉬운 글이 곧 재미있는 글은 아니다
첫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후 많은 출간 제안을 받았을 것 같다. 이색적인 주제가 있었나?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여기저기 훌륭한 디저트 가게를 다니면서 음미하고 글을 쓰자는 제안이었다. 목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아 응하지는 못했는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잡지에 연재해도 좋을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또 언젠가 내가 흥미롭게 읽은 만화책의 열전을 써보고 싶기도 하다. 세상에는 형편없는 만화도 많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훌륭한 만화들도 많다. 그에 대해 좀더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과 국내외 답사를 많이 다니기 때문에, 그 연장선에서 여행 에세이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다. 먼저 해야 할 다른 심각한 프로젝트들이 기다리고 있다.
“해상도가 높은 글을 써야 한다”고 항상 강조해왔다. 이번 책의 해상도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스스로 평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글을 쓸 때, 스스로가 즐겁기를 바란다. 그리고 독자들도 즐겁기를 바란다. 맛없는 디저트를 먹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듯이, 지루한 글을 쓰고 읽고 있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내 글이 피상적으로 재미있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재미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을 거다. 독자의 관심을 자극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로든 재미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쉬운 글이 곧 재미있는 글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쉽지만 지루한 글이 얼마나 많은가? 동시에 어렵지만 재밌는 글도 있을 수 있다. 사람 사귈 때도 그렇지 않나? 상대가 너무 이해가 잘 되어서 “쉽다”고 느껴질 정도라면, 다음에 또 만날 만한 동기가 생기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오히려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그저 쉽기만 한 글은, 자신이 이미 아는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 글일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려면, 쉽고 지루한 글보다는, 어느 정도 어렵지만 재밌는 글을 찾아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로서는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면 최상이다.
“현재 한국어로 통용되는 글 다수에 ‘깊은 빡침’이 있다”고 말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글은 어떤 글인가?
다른 걸 다 떠나서 일단 비문이 적길 바란다. 그 정도는 노력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낼 수 있다. 비문이 적으면, 일단 참고 읽을 수 있다.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때, 즐겁나?
세상에는 말수가 너무 적어서 답답한 사람도 있고, 영원히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자들도 있다. 나는 말이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사람과 대화할 때가 즐겁다. 그리고 말을 리드미컬하게 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좋다. 한없이 만연체로 말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졸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권위적인 사람과는 대화는커녕 한 공간에 있고 싶지도 않다. 의외로 잘 씻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잘 씻고 다니는 사람과 대화할 때가 즐겁다. 그리고 어딘가 뒤틀려버린 사람, 주화입마에 빠진 사람, 의제를 숨겨놓고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힘이 든다.
평소 정면 사진을 찍지 않는다. 인터뷰 때도 옆모습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능하면 사진을 찍고 싶지 않은데, 매체에서는 늘 사진을 원한다. 옆모습을 찍게 되는 것은 사진을 찍고 싶지 않은 제 마음과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매체의 마음이 타협한 결과다. 특별한 미남이 아닌 한, 나 같은 한국 중년 남자의 얼굴 사진은 민폐가 되기 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직장 홈페이지에도 내 사진을 올려 놓지 않았다. 사진으로 인해, 혹시라도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저를 알아보게라도 되면 그것도 불편한 일이다. 세간에 돌아다니는 정면 사진은 꽤 오래 전에 찍은 사진이라서 지금의 면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디저트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다. 올 여름에 가장 기억 나는 디저트가 있나? 또는 그밖에 누리는 작은 사치들에 관해 이야기해준다면.
올 여름 최고의 디저트라면, 부암동에서 먹은 빙수를 들 수 있다. 서울 시내 최고의 빙수가 그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 밖에, 청운문학도서관이 있는 부암동 자락에는 좋은 볼 것, 먹을 것들이 많다.
'먹물 느와르' 연재할 예정
후속작은 한국어판 중국 정치 사상사인가? 논어 에세이 2권은 언제 출간될 예정인가?
올해 안에 출간을 목표로 하는 다음 책은 한국어판 중국 정치 사상사다. 몇 년 전에 영어책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를 출간한 바 있다. 지금 준비 중인 한국어판 중국정치사상사는 그 영어책의 단순한 번역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확장되고 풍부하게 서술된 책이다. 따라서 실제 나와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1000쪽이 넘는 소위 벽돌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책 출간이 마무리되고 나면, 내년 중에 논어 관련 저서를 낼 계획이다. 논어 에세이의 2탄이 아니라, 논어를 주석하고 해설한 책의 1탄이다. 논어 프로젝트는 장기 프로젝트이고, 매해 1권씩 꾸준히 낼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올해 말 창간 예정인 계간지 <서울 리뷰 오브 북스(SRB, Seoul Review of Books)에 단편소설을 실을 예정이라고 들었다. 어떤 내용인가?
여러 분들과 준비하고 있는 <SRB>는 서평지다. 하지만 서평만 싣지는 않는다. 중심이 되는 서평 이외에도 에세이, 소설 등 다양한 글들을 싣고자 하는 것이 편집진의 뜻이다. 창간호에서 서평이 아니라 소설을 싣게 되는데, 내가 소설을 통해 시도하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내 전공인 정치사상사 영역에서는 정치사상을 문학적 양식을 활용해서 전달하는 전통이 존재한다. 나도 그와 같은 작업을 시도해 볼 생각이 있다. 일단 <SRB> 창간호에 싣는 단편소설은 그러한 정치사상의 본격적 시도는 아직 아니다. 창간호에서는 내가 “먹물 느와르”라고 부르는 특정 장르의 소설을 개척하고자 한다. 소설에 말 그대로 배운 먹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사랑, 배신, 죽음, 고뇌가 담긴다. 만약 내 에세이집에 실린 에필로그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께 특히 권하고 싶다.
김영민 교수가 쓴 책을 모두 읽은 예비 대학생 독자가 “대학 생활을 알차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어차피 들어야 하는 수업인데, 수업을 잘 골라 들으라고 하고 싶다. 같은 대학의 수업이라고 해도 수업의 질은 천차만별이고, 또 자신에게 맞는 수업도 다 다를 거다. 너무 수월하다고 해서 좋은 수업도 아니고, 너무 어렵다고 해서 좋은 수업도 아니고, 학점을 잘 준다고 해서 좋은 수업도 아니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해서 꼭 좋은 수업도 아니다. 대면 수업이 가능해진다면, 인터넷 강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수업을 하는 수업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많이 읽히고, 많이 쓰게 하고, 토론이 있고, 또 기말과제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는 수업이 좋은 수업일 가능성이 높다. 지식의 전달 뿐 아니라, 영감을 주는 수업을 찾아내기 바란다.
시간 활용도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이다. 학생들에게 운동을 하길 권한다. 예전 대학 신입생들은 술독에 빠져서 지냈던 것 같다. 요즘 대학생들은 그만큼 술을 마시거나 하지는 않아도, 건강에 각별한 신경을 쓰진 않을 거다. 정성들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도 대체로 건강이 유지되는 세대라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가능하면 일찍 운동을 생활의 일부로 만들기를 권한다. 학창 시절 그러지 못했던 것이 나는 후회스럽다. 딱히 운동할 기회가 없다면, 플랭크나 스쿼트라도 꾸준히 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산책과 달리기도 좋다. 산책과 달리기는 몸뿐 아니라 마음의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
곧 추석이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명 칼럼을 쓴 필자로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은 추석은 어떻게 보내야 좋을까?
올해 추석의 특징이라면 보통 사람의 해외 여행이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사실, 추석 연휴를 여행의 기회로 삼았던 젊은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말이다. 어디 멀리 갈 수 없으니, 자신만의 다락방을 찾아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기를 권한다. 독서도 일종의 여행이다. 책은 어떻게 읽는 게 좋냐고 질문한다면, 이 또한 『공부란 무엇인가』에 답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