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원칙은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는 다양성의 존중’이라고 말하는 의사 추혜인. 그는 왕진 다니는 의사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경제적인 이유가 있거나, 저마다의 사연으로 병원을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은 이웃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추혜인은 따릉이를 타고 골목 곳곳을 누빈다. 어떤 환경 속에서 누구와 함께 어떤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꼼꼼히 살핀다. 단순히 질병으로 정의되는 환자가 아니라, 고유한 삶의 주인으로서 한 사람과 만난다. 그는 말한다. “조금 더 건강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페미니즘 진료”라고.
한때 건축학도였던 그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면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증언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고, 본과 1학년 때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 대해 알게 됐다. 오랜 준비 끝에 2012년, 국내 최초 여성주의 병원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의원)의 문을 열었다. 여성으로, 페미니스트로, 동네 주치의로 살아온 20여 년. 그동안 진료실 안팎에서 만난 사람과 이야기들을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에 담아냈다.
페미니스트 의료인의 오진율이 낮은 이유
처음 ‘의료협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셨을 때,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의대에 다닐 때 2000년 의약분업이 있었어요. 그때 저는 학교를 잠깐 쉬고 여성단체에서 일하고 있어서 중심에서 뭔가를 했던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한테까지 파장이 오게 됐어요. 의약분업을 지지하는 선생님들과 반대하는 선생님들이 싸우게 됐는데, 사실 저는 의약분업에는 지지하거든요. 의약분업은 잘 이뤄졌다고 생각하고 그 방향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랑 생각이 달랐던 선배들이나 친구들도 이상한 사람들은 아니었거든요. 사람을 살리고 싶어서 의대에 들어와서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이었는데, 그 친구들이 실제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의약분업에 반대하면 다 돈만 밝히고 밥그릇 싸움하는 의사들로 몰리는 걸 보면서 조금 마음이 아팠어요.
그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왜 이렇게 몰릴 수밖에 없을까... 서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고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서로를 너무 적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특히 의사와 국민이 잘 지내려면 잘 지낼 수도 있는 사이인데 너무 사이가 나쁜 것 같았어요. 국민들은 나도 병원에 아는 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사 집단에 대해서는 너무 불신이 큰 거예요.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수가 시스템 자체가 행위별 수가이니까, 검사를 하면 할수록 환자는 돈을 많이 내고 의사들은 돈을 많이 벌게 되는 구조잖아요. 이런 시스템 하에서는 어떤 검사나 처치를 하자거나 약을 쓰자고 해도 환자들 입장에서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다른 선배들이나 친구들이 의료협동조합이라는 게 있다고 하는 거예요. 지역 주민들이랑 의사들이 같이 돈을 모아서 만드는 거라고, 거기에서라면 어떤 검사나 치료를 하자고 했을 때 조금 신뢰를 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지금도 ‘의료협동조합’이 낯선 개념인데, 당시에는 더 했겠죠?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진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병원은 의료인들이 만드는 거고 우리는 그걸 이용하는 거라는 시스템만 알고 있었던 분들에게 돈을 모아서 같이 병원을 만들고 운영하는 거라고 이야기하면 ‘다단계야?’, ‘병원에 투자하는 거야? 수익 나면 나눠주는 거야?’라는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어요(웃음). 영리 병원이 아니니까 병원에 투자를 한다고 해도 수익은 돌려줄 수가 없고 이자는 없고.. 이런 이야기들을 하며 설득을 해야 했죠(웃음). 그래서 동네 축제란 축제는 다 가서 부스를 차리고 주치의 상담을 했어요. 그러면서 주민들하고 친해지기도 했고요.
조합원이 되어 달라고 홍보도 하셨겠죠? (웃음)
네(웃음). 상담이 마음에 드셨던 분들이 어느 병원이냐고 찾아가겠다고 하시면 ‘저희가 아직 병원이 없고 이제 병원을 만들 거다, 조합원이 되어주시면 하루라도 빨리 병원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죠(웃음).
조합원이 되어주신 분들은 ‘의료협동조합’의 필요성에 공감하신 걸 텐데요. 어떤 병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던가요?
조금 항생제를 덜 쓰는 의원, 아니면 약을 처방할 때 이 약을 왜 처방하는지 설명을 잘 해주는 병원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요. 초반에는 ‘협동조합의료기관’이라는 걸 설명하기 너무 힘드니까, 생협(생활협동조합) 같은 걸 하시는 분들에게 ‘그 방식으로 의료기관을 만드는 거예요’라고 설명하는 게 훨씬 쉬웠어요. 그래서 먹거리 생협 하시는 분들, 공동육아협동조합을 하시는 분들, 그런 분들이 초창기 조합원으로 많이 가입하셨어요.
“페미니즘은 내 진료에 필수적”, “당신이 혹시 나의 진료를 마음에 들어 했다면, 그것은 내가 페미니스트 주치의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쓰셨습니다. 의사로서 페미니스트인 것과 아닌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되게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통계적으로 페미니스트 의료인들의 오진율이 조금 더 낮은 걸로 되어 있어요. 환자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믿고 환자가 자신의 몸에 대해서 충분히 주권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존중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환자들의 통증이라든가 불편함 호소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거죠. 환자와의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부권적이고 권위적인 의사들보다 소통이 조금 더 잘 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진이 줄어들거나, 오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로잡거나 혹은 소송으로 가지 않을 가능성이 조금 더 높은 거죠. 그래서 저는 페미니스트 의사가 조금 더 실력이 있는 게 아닐까, 의사들이 다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요(웃음).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페미니즘은 어떤 건가요?
특히 진료실에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원칙은 다양성을 존중하되 차별이나 혐오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는 다양성 존중이 페미니즘의 원칙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혐오와 차별 때문에 건강하지 못한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조금 더 건강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게 페미니즘 진료라고 생각해요.
모두에게 주치의가 생긴다면?
“단 한 번이라도 환자의 집에 가본 경험이 있는 의사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쓰셨어요. 진료실 안에서만 환자를 만나는 것과, 환자가 사는 공간을 직접 찾아가서 보는 것은 확연히 다르겠죠.
네. 제가 오늘 오전에도 왕진을 네 군데 다녀왔는데...
수요일에만 왕진을 다니시는 줄 알았는데요. 아닌가요?
수요일에 갈 때도 있고, 목요일에 갈 때도 있고, 진료 마치고 야간에 갈 때도 있어요.
시간 되실 때마다 가시는 거예요?
네, 환자 분들이 갑자기 아프신 경우도 있으니까 그럴 때는 급히 가기도 해요. 정해놓은 시간은 보통 수요일이고요. 오늘은 급하게 요청이 들어와서 가게 됐는데, 같이 왕진 가본 적 없는 간호사 선생님이랑 갔어요. 그 분도 간호사로 10년 정도 일하셨는데 왕진을 나가본 건 오늘이 처음인 거예요. 다른 간호사님들이 왕진 다녀왔다는 이야기들은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집에 갔더니 상상만 해봤던 것과 너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저희가 동주민센터에서 이야기를 듣고 가게 됐거든요. 다리에 상처가 있어서 소독해야 되는 분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이 분은 다리의 상처가 문제가 아닌 거예요. 165cm 키의 남자 분인데 몸무게가 30~32kg 정도로 너무 마르셨어요. 매트리스가 없어서 바닥에 아주 얇은 이불을 깔고 지내시는데, 저희가 왔다고 잠깐 일어나셨다가 앉으시는데 쿵 소리가 나서 뼈가 부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발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드시는 것, 씻는 것, 이부자리, 모든 것들이 다 문제인 거예요. 같이 간 간호사님은 여기에 안 와봤으면, 이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몰랐으면,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집에서 나올 때는 동주민센터 직원에게 매트리스나 전동 침대 기증된 것 없느냐고 물어보시고요. 그러니까 직접 가봐야 우리가 연결할 수 있는 자원들이 뭐가 있는지, 더 찾아봐야 될 건 뭐가 있을지, 알 수가 있거든요.
만약, 그 분을 진료실에서 만났다면 어땠을까요? ‘왜 몸 상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병원에 안 오셨어요?’, ‘가족은 없으세요?’ 하면서 계속 문답만 하지 않았을까요? 환자가 말해주지 않는 정보는 알 수 없었을 테고요.
동주민센터 직원이 그 분을 너무 병원에 모시고 가고 싶었대요. 그래서 몇 번을 찾아가서 병원에 가자고 말씀드렸는데 가기 싫다고 하셨다는 거예요. 본인이 병원에 가서 좋은 대접을 받거나 친절하게 대해진 경험이 한 번도 없으셔서 안 가겠다고 하신 거죠. 그래서 동주민센터 직원이 ‘그러면 의사 선생님이 집에 오시는 건 어떠시냐, 한 번만 진찰을 받아보자’고 설득해서 저희가 가게 된 거거든요. 동주민센터 직원이 진짜 애를 많이 쓰신 거죠. 그렇게도 설득이 안 되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책에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나요. 뇌출혈로 누워 계시는 분의 집이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의 4층에 있었죠. 병원에 갈 때는 119를 부르고 돌아올 때는 이송료를 주고 사설 구급대를 불러야 하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필요할 때마다 병원에 갈 수 없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119를 불러야만 병원에 갈 수 있으니까, 사실은 동네 병원에 올 만한 문제들로도 응급실을 가게 되시는 거예요. 119는 동네 병원에는 데려다 주지 않거든요. 조금 설사를 해서 동네 의원에 가서 영양제 주사를 맞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죠. 그러려면 사설 구급차를 타고 동네 병원에 와야 하니까요. 정말 작은 문제로도 응급실에 가니까, 응급실에서는 왜 이 정도 문제 가지고 응급실에 오냐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점점 응급실도 안 가고 어떤 병원에도 안 가는 상태가 되시더라고요.
동네 의원 의사로서, 가정의학과 의사로서, 자부심을 갖고 계신 게 느껴져요.
저는 큰 병원과 저희 같은 작은 동네 의원이 함께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어떤 분이 위암이 의심돼서 위암 전문가에게 진료를 받는다고 하면, 앞으로 계속 위암 전문가에게만 진료를 보시는 건 아니거든요. 위암만 전문으로 보시는 선생님은 그 분이 가지고 있는 다른 증상들이 위절제술을 받은 상태와 연관성이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상담하기가 힘드세요. 시간도 너무 없으시고요. 그래서 저희가 환자와 의료 전문가 사이에서 적절하게 중재자나 소통의 역할, 통역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형 병원에서의 진료 과정이나 결과를 잘 알고 해석해서 결과적으로 환자분이 더 건강해지실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자들이 바라는 의사는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세요?
조금 통합적으로 봐주는 의사를 바라세요. 너무 세부적인 전문과 과목의 의사들을 많이 만나 오셔서, 환자분들이 진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그건 제 전공이 아니에요’, ‘그건 다른 데 가서 물어보세요’라는 거거든요. 그럼 어디에 가서 물어봐야 되는지를 혼자서 알아서 찾아내야 되는 거죠. 문제를 통합적으로 보면 이 분이 이야기하는 증상과 연관된 다른 문제들까지 넓게 볼 수도 있고, 전문과를 가야 된다면 특정해서 어떤 과목의 어느 병원을 가면 좋을지 의뢰할 수 있거든요. 환자들도 그런 걸 원하세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도 주치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모두가 자신의 주치의에게서 진료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점이 달라질까요?
일단 진료 기록이 잘 관리될 것 같아요. 저희가 많이 답답한 게, 예를 들면 이런 경우가 있어요. 15년 동안 고혈압 약을 먹어왔는데 앞으로는 살림의원에서 진료를 받고 싶다고 하세요. 그러면 처방전이나 최근의 진료 기록, 검사 결과지 같은 것들을 주셔야 되는데 아무것도 없이 오시는 거예요. 말씀을 들어보면 여기저기 의원에서 그런 식으로 진료를 받아오셨던 거고, 그래서 기록들이 여러 의료기관에 산재해 있는 거예요. 그러면 통합적으로 관리할 책임은 환자에게 있는 거거든요.
맞아요. 병원마다 찾아다니면서 진료 기록을 다 떼어야 하는데,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에요.
네. 그리고 같이 드시면 안 되는 약들이 있는데 그런 것도 관리가 안 되는 거예요. 동시에 서너 군데 병원을 왔다 갔다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저희가 약을 정리해 드리는 게 되게 큰일이에요. 드시는 약을 다 가져오시라고 하고 약을 펼쳐놓고 보면 비슷한 위장약을 두세 개 같이 드시고 있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비슷한 약들을 불필요하게 많이 드시면 빼드리고, 또 같이 드시면 안 되는 약들은 빼드려요. 이를테면, 이런 경우도 있어요. 어떤 약을 드시고 숨이 차는 증상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 약을 처방했던 병원에 가서 증상을 호소하시는 게 아니라 다른 병원에 가서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병원에서는 무슨 약을 드시고 증상이 나타난 건지 모르니까 숨이 찬 증상에 대한 약이 추가돼요. 한 가지 증상에 대해서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약이 막 추가되는 건데, 알고 보니까 약 부작용 때문에 다른 약이 추가됐던 거죠. 그래서 모든 약을 끊고 나서 좋아지시는 분들도 있어요.
오래오래 살고 싶은 마을을 꿈꿉니다
환자들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무엇인가요?
의사들은 진료하는 환자들을 잘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잖아요. 그러려면 그 분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환경들을 같이 파악해야 되니까, 그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 같아요. 저는 그게 페미니즘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 있는 사람이고 어떤 관계적인 맥락 하에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를 밝히는 게 여성주의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환자들을 진료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이 분이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 있는지 보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서 제 진료에 페미니즘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진료실 안팎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일들’과 마주하실 때가 많죠? 책에서 다양한 사례를 들려주셨는데, 일례로 엄마들은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책하잖아요. 주위에서는 ‘엄마가 몸이 약해서 그런가 보다’라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요.
아토피 아이의 엄마들이 그런 자책을 많이 해요. 임신 중에 제가 뭘 잘못 먹었나 봐요, 이런 이야기를 되게 많이 하세요. 엄마들이 너무 심하게 자책을 하고 있어서 ‘엄마가 왜 그랬어요?’, ‘엄마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죠’ 이런 이야기를 진짜 하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많은 의료 기관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오세요. 심지어 방을 너무 깨끗하게 관리하면 아토피가 심해진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면 ‘제가 너무 결벽증적으로 방을 치워서 아이가 아토피가 있나 봐요’ 하면서 자책하세요. 그래서 엄마들의 자책을 가라앉혀 드리기도 해요. 엄마 탓이 아니라고요.
“원래도 딸은 살림 밑천이라 했는데, 요즘에 딸은 돌봄 밑천이다”라고 쓰셨습니다. 왕진 다니시면서 이런 사례를 많이 보셨을 것 같아요.
네, 결혼을 하지 않은 딸들이 부모님을 모시는 경우를 되게 많이 봤어요.
딸이 아니더라도 보호자는 주로 여성 아닌가요? 아내라든지.
그렇죠. 어머니인 경우도 있고요.
누나인 경우도 있을 테고요.
남자 보호자는 한 분 봤던 것 같아요. 극진히 어머니를 모시는 남자 보호자였어요.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이런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위험한 것 같고요.
그렇죠. 사회적으로 남녀의 임금격차가 있으니까 노부모님을 모셔야 될 때 남자가 직장을 포기하기보다는 여자가 너무 쉽게 직장을 포기하고 집에 머물게 되는 거죠. 부모님을 모시는 데에도 어쨌든 돈이 드는데, 그만큼을 여성이 직장에서 일하면서 벌 수가 없으니까요.
의료계 안에서의 성차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어요. 일단은 여성들이 의료계에 많이 진출해서 수적으로 평균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조금 더 많이 진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의사는 남성으로 상징되어 있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제가 처음에 의사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간호사들과 여자 의사들의 사이가 안 좋은 경우가 많았어요.
그렇게 되도록 조장하는 분위기가 있지 않나요?
‘여적여’ 같은 말들 있잖아요. 그런 것도 있고. 남자 의사들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의사로서 뭔가를 지시하면 간호사들이 크게 불만이 없는데, 이를테면 젊은 여자 의사가 나이 많은 간호사에게 뭔가를 지시하면 관계의 문제들이 생기고 그랬어요. 지금은 여자 의사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가야 되는지를 의사들도 간호사들도 서로 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지금은 분위기가 되게 좋아요. 제가 보면 여자 의사들이 간호사들이랑 더 잘 지내는 것 같거든요.
‘돌봄 센터’ 건립을 계획하고 있으시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돌봄 받고 임종을 맞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신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병원보다 집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저도 가능하면 병원 신세를 많이 안 지고 집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왕진을 가보면 신체적 조건이나 경제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병원에 가기 싫어서 집에 머무시는 분들도 많아요. 병원에 안 가시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해보니까, 아무래도 병원에 가게 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질환 중심으로 보이고 내 삶을 잃어버리게 되는 과정이 생기는 것 같아요. 병원에서 적절한 진료를 받으면서도 본인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 삶이 연속될 수 있는 돌봄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병원이나 요양원 같은 시설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 않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노인 돌봄 시설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언제 완성될지, 지금은 알 수 없겠죠?
내년에 만들 거예요. 저희 건물 샀습니다(웃음).
축하드려요(웃음).
아직은 계약만 한 상태고요. 건물 살 돈을 모으고 있어요. 조합원들이랑 10억 모으기로 했거든요. 집에 머무는 분들을 케어하기 위한 재가 케어 중심부터 시작할 거고, 궁극적으로는 요양원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살림의원부터 돌봄센터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활동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시나요?
일단 우리 동네에서 보자면 정주율이 높아지는 변화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계속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야 동네가 뭐가 필요하고 나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니까요. 오래오래 살고 싶은 마을이 됐으면 좋겠어요. 다른 지역에서도 내가 오래 살고 싶은 마을이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자원들을 개발했으면 좋겠어요. 의료협동조합도 그런 중요한 자원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마을 운동 같은 것들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어떨까요? 어떤 일생을 살게 될까요?
공동육아협동조합을 만들었던 선배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우리 마을에서 태어나서, 마을에서 자라서, 마을에 좋은 일자리도 많아지고, 마을에서 안심하고 나이 들어서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코로나 같은 전 세계적인 재앙이 닥치고 보니, 저도 마을이 되게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코로나는 동선이 길면 길수록 더 많이 빠르게 퍼지는 특성이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다른 마을이랑 교류하면 안 된다는 건 아니고요. 우리 마을에도 충분히 좋은 병원이 많이 있고 좋은 직장도 많이 있다면, 그렇게 멀리까지 출퇴근 하면서 동선이 복잡하게 꼬이지 않아도 행복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마을을 꿈꾸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책이 나오고 나서 아빠가 그러시더라고요. ‘엄마 이야기는 많이 나오는데, 내는 없대~?’ 되게 서운해 하셨어요(웃음). 그래서 두 번째 책을 쓰면 아빠 이야기를 꼭 많이 실어드리겠다고 약속드리고 싶습니다(웃음).
*추혜인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의 가정의학과 의사. 199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으나, 1학년 겨울 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다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료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진로를 변경해 이듬해 같은 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에서 수련을 받았으며, 여성 단체에서 만난 어라 님과 뜻을 합쳐 2012년,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조합)을 창립했다. 건강하고 행복한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온 8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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