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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연구가 정옥희 “사연을 알면, 춤이 더욱 재밌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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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에도 ‘운명’이 있다면 어떨까? 마치 사람처럼 탄생하고 커리어를 쌓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춤들. 무용연구가 정옥희는 첫 저서 『이 춤의 운명은』에서 무용수나 창작자가 아닌, ‘춤’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우리에게 익숙한 <백조의 호수>는 남성 무용수들이 우아함을 뽐내는 무대가 되고, 파리지앵을 사로잡은 <뱀춤>은 검은 깃발이 휘날리는 현대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대체 이들은 무슨 사연들이 있길래?

정옥희 저자는 2년 동안 작품을 선정하고 글을 썼고, 사진 자료를 한데 모았다. 춤을 잘 모르는 독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다. 춤의 역사를 안다면, 무대 위의 춤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품은 사연을 듣고 친구가 되듯, 현재의 춤은 더욱 친밀하고 빛나 보일 것이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했고,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에서 무용학을 가르치는 정옥희 저자를 서면으로 만났다.




2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 멋진 책이 완성되었습니다. 검은 깃발이 휘날리는 표지부터 참 멋진데요. 책을 받고 기분이 어떠셨나요?

코로나 상황 때문에 표지 시안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이미지파일만 보고 결정했고 서점에 입고되고 며칠 후에야 책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저의 첫 단독 저서라 마치 아홉 달 품고 있던 아이를 낳았을 때처럼 낯설고도 친숙한 느낌이 신기해 자꾸 들여다보았습니다. 표지의 경우 좀 더 대중적인 시안도 있었지만 결국은 제 마음에 든 이미지를 골랐고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용책들은 대개 멋지게 포즈 잡거나 뛰어오르는 무용수 사진을 표지에 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관습에서 벗어나 왜 휘날리는 깃발로 춤을 얘기하는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습니다. 

처음 구상 단계에서 어떤 책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책은 월간지 <객석>에 연재했던 글을 모으고 확장한 것입니다. <객석>은 음악이 중심이기에춤에는 덜 익숙한 독자에게 대표적인 춤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첫 목표였습니다. 책으로 발전시키며 목표했던 것은 ‘<해설이 있는 발레> 다음 단계의 책이 되겠다’라는 것입니다. 국립발레단의 <해설이 있는 발레>는 발레를 쉽고 친근하게 설명한 무용계의 대표적인 기획 공연입니다. 책으로 치자면 춤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입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다음 단계의 책, 그러니까 일반인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전공자의 관점을 녹여낸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독자들을 춤계에서 멀찍이 떼어놓고 춤에 대한 상식을 알려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춤계 내부의 고민과 논쟁에 참여시키고자 했습니다.

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현재의 무대를 즐기면 되지 춤의 역사를 배워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춤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신 계기와,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솔직히 무용수들은 공연이나 영상기록을 많이 안 봅니다. 좀 쑤시게 앉아서 남을 보는 것보다 자기가 춤추는 게 더 중요하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무용수일 때의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나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자 좀 다른 것들이 보였습니다. 사람이 혼자 자기 의지대로 사는 것 같아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받으며 살아가듯 작품도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작품의 겉모습만 보고 즐기는 것도 좋지만 맥락을 알게 된다면 보다 풍성하고 섬세한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예술은 과거의 것들을 인용하고, 비틀고, 뒤집으며 놉니다. 따라서 그 재료를 모른다면 예술가가 건넨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농담은 고도로 지적인 유희이지요. 어리둥절하지 않고 함께 폭소를 터뜨리려면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책의 표지로도 사용된 윌리엄 포사이스의 〈검은 깃발〉. 로이 풀러의 「뱀춤」의 핵심인 운동성을 이어받아 커다란 천이 끊임없이 휘날린다. 2014. pp.94-95.

다채로운 사진 및 그림이 수록되어 책이 더욱 풍성해요. 저작권을 해결하고 자료를 한데 모으느라 긴 시간을 들이셨다고요. 그 과정에서의 에피소드가 있나요?

2020년 1월부터 11월 말까지 꾸준히, 그리고 집요하게 사진을 모았습니다.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외국 기관이나 예술가들이 연락이 잘 안 되었고, 직업을 잃게 생겼는데 한가하게 사진을 부탁한다며 언짢아한 작가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유럽이 심각해졌을 때 두어 달 이메일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사우스랜드> 원작사진의 경우 학술논문에 실린 오래된 사진을 얻기 위해 저자, 학술지, 무용잡지, 다른 학자, 다른 무용단, 무용수의 딸 등 숱한 시도 끝에 막판에 허락받았습니다. 물론 백방으로 연락했지만 결국 포기한 사진이 더 많습니다. <학춤>의 경우 사진 소장자가 허락하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다가 선배 언니가 소장한 오래된 책에서 사진을 찾아내 쓴 것도 있습니다. 유료 사진들의 경우 사용료가 너무 비싸 이 책이 상업서적이되 상업성이 참으로 없다는 걸 설득해 할인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격려와 도움을 많이 받았고, 예전 발레단 동료를 만나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원작자나 무용수가 아닌 ‘춤의 생애사’라는 점이 새로웠습니다. 원작자의 손을 떠난 후, 춤은 오해도 받고 변형도 되면서 마치 사람처럼 고유의 커리어를 쌓아 나가는데요. 이런 관점을 택한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제가 학생일 때 무용사 책을 지루하게 읽었던 이유는 춤 작품들이 거대한 기념비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초연이 그 춤의 본질로 박제되고 나면 이후엔 먼지만 쌓여갈 뿐인 거죠. ‘또 <백조의 호수>라니 지겹다’ 이런 생각만 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저는 한 작품을 고정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 작품이 쌓아온 독특한 커리어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춤을 볼 때 초연만 고집하거나 걸작이라 경외하지 않고 우리처럼, 그리고 우리와 함께 변화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면 다른 게 보입니다. 우리가 제각각 살 듯 춤도 제각각 산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혹은 춤들이 이렇게 다르게 살아간다면 우리가 각자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것도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관조하며,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상이 나의 인생이든 춤 작품의 인생이든요.

예술춤을 잘 모르는 사람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게 작가님만의 위트가 곳곳에 숨어 있어요. 스타 발레리나의 탄생 비화를 ‘아이돌 만들기’로, 작품 <불새>를 만든 발레단을 ‘스타트업’에 비유하신 게 너무 재밌었는데요. 춤의 세계를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 특히 노력하신 부분이 있다면요?

저는 미술 작품을 해설한 책들을 재미있게 읽어왔는데 상대적으로 춤에 대해선 낯설어하고 어려워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춤을 만들거나 감상하는 것이 전공자들끼리의 놀이이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무언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다양한 비유를 사용하여 낯선 표면 아래의 친숙한 논리나 상황을 끌어내려 노력했습니다. 발레 뤼스라 하면 와 닿지 않지만 스타트업은 와 닿을 테니까요.  


로이 풀러의 「뱀춤」을 구성하는 풍성하고도 생생한 실크 천의 움직임. 풀러는 여성 무용수의 몸매나 성적 매력, 기교에 대한 관습을 거부하고 움직임 자체에 주목했다. 1902. p.85.

‘명작’들을 숭고한 것으로만 그리지 않으려는 태도도 느껴졌습니다. <뱀춤>, <학춤> 등 다양한 작품을 조명하시고, 신화화보다 당대의 맥락과 변화 과정에 집중하셨는데요. 이런 관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용사 책은 명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좋은 작품들이고 하나하나 의미 있는 성취를 한 작품이지요. 하지만 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외우다 보면 지금 여기에 있는 나와 연결시키긴 어렵습니다. 위인에게 감정이입하긴 어려운 법이니까요. ‘마리우스 프티파의 3대 발레’를 줄줄 외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작품들이 맞닥뜨린 난제나 의문을 이해하고 이를 내 곁으로 끌고 오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뱀춤>의 경우 무용전공자들도 모던댄스의 초기작으로 외우고 지나치는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테일러 스위프트의 고민이나 윌리엄 포사이드의 최신작과 연결된다면 동일선상에서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을 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듯 춤 작품에 대해서도 때론 낯설게, 때론 가깝게 조절하며 바라볼 때 나의 경험과 연결되며 보다 깊은 이해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발레는 동경의 대상인 만큼, 오해받아온 면도 있을 것 같은데요. 직접 춤을 전공하시면서 느끼셨던, 발레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소개해주신다면요? 

발레만큼 동경과 폄하, 찬사와 오해를 한꺼번에 받는 장르 혹은 직업군이 있나 싶어요. 여러 춤 장르 중에서도 발레는, 이제는 충분히 대중화되었음에도 여전히 대상화됩니다. 사람들은 발레를 특정한 모습으로만 소비하려 하지 그 안의 다양성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합니다. ‘발레리나들은 새모이만큼 먹지요? 발레는 예쁜 척하는 거 아닌가요?’ 전공자들은 평생 이런 시선을 겪어냅니다. 때론 이런 대상화에 스스로 갇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부에서 바라보는 발레는 훨씬 건조하고 체계적이며 전문적인 영역입니다. 발레무용수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단련된 이들입니다. 또한 발레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안엔 다양한 모습이 공존합니다. 어처구니없이 성차별적이거나 인종차별적이기도 하고, 냉철하고 철학적이기도 하며, 세상을 바꾸어놓기도 합니다. 전공자로서 저의 역할은 이러한 다양한 모습을 끌어내서 발레가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빔 벤더스의 영화 「피나」에 삽입된 넬켄라인. 피나 바우슈의 「넬켄」 속 마지막 ‘사계 행진’을 모티프로 한 넬켄라인은 모든 이를 행진에 초대한다. 2011. pp.222-223.

발레가 대중화된 한편으로, 고전적인 발레가 선호하는 여성성, 마른 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의견도 있는 것 같습니다. 발레의 다채로운 모습을 잘 아실 작가님의 의견이 궁금했습니다. 

요즘은 여성 발레무용수를 지칭할 때 이름 뒤에 ‘~리나’를 붙이는 게 유행이지만 저는 발레리나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피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발레리나는 아름답고 우아하고 무엇보다도 깡마른 여성으로 정형화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바뀌는데 우리나라 발레계는 유독 마른 몸을 선호하고 강요합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교수법이 체계화되면서 발레무용수에 대한 잣대가 더욱 높아져만 가는 데다 우리나라 발레무용수들이 세계적으로 활약하다 보니 내적 성찰도 더딥니다. 저는 우리나라 발레가 이제껏 발레 종주국을 따라잡느라 노력했으니 이제는 그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들을 해결하고 우리 내부의 다양한 주체들을 포용해가며 폭을 넓혀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단지 체형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매우 이질적이고 괴이하며 불편한 발레가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풍부한 사진 자료를 수록했다

마지막으로 예술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춤 공연을 즐기는 팁을 소개해주신다면요?

예술춤을 즐기는 법은 단박에 이해하리라는 기대를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어려운 가곡을 이해할 수 없듯 몸을 가졌다고 해서 춤을 즉각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은 결국 오랫동안 쌓아 올린 장르적 규칙과 변형 속에서 노는 것입니다. 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춤 안에서 나에게 흥미로운 점을 찾아내고 즐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언니와 컨템퍼러리댄스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추상적이고 조금 지루하여 걱정했는데 공연이 끝나자 언니가 “네온 핫팬츠가 신나게 춤추니 멋지더군”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옥희

춤과 춤이 아닌 것, 무용수와 무용수가 아닌 이의 경계에 대해 탐구한다.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초빙 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공역서로 『발레 페다고지』(2017), 『미디어 시대의 춤』(2016)이 있고, 『월간 객석』과 『조선일보』 ‘일사일언’ 코너 등의 매체에 기고했다.




이 춤의 운명은
이 춤의 운명은
정옥희 저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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