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 『기분이 없는 기분』으로 평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던 구정인 작가가 신작 『비밀을 말할 시간』을 출간했다. 아버지의 고독사를 다뤘던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는 주인공 ‘은서’가 어린 시절 겪은 성추행 사건을 스스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만화는 은서가 친구들과 즐겁게 쇼핑을 하고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며 시작된다. 9년간 친구들, 선생님에게도 쉽게 고백하지 못했던 사건. 은서는 복수를 꿈꾸지만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오랜 고민 끝에 은서는 가장 친한 친구 ‘지윤’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당연한 분노를 표출하는 친구로부터 은서는 용기를 얻고 스스로 상처를 극복한다. 그리고 고백한다.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고 잘못되지도 않았다는 걸. 나는 괜찮다.”
지난해 겨울,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한 구정인 작가와 이메일로 만났다.
보시는 분들이 괴롭지 않았으면 했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제주 생활도 궁금합니다.
저 역시 다른 분들처럼 집에 있습니다. 『비밀을 말할 시간』 원고를 마친 뒤로는 한가해서 잠을 많이 자고 있어요.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고구마를 구워 먹고 아이와 부루마블 게임을 하고요. 그래도 저희 동네는 한적한 시골 바닷가 마을이라서 사람이 없는 바닷가나 시골길을 산책하곤 합니다.
어린이책 디자인 작업도 꾸준히 하고 계신가요?
어린이책 디자인은 띄엄띄엄 꾸준히 계속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제주도에 이사 온 이유는 그냥 제주도에 살고 싶어서입니다. 서울에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와이낫? 하며 큰 고민 없이 왔는데 와 보니 역시 좋군요.
제주에 오고 나서, 변화가 있을까요?
마음에 더 여유가 생겼습니다. 느긋해지고 걱정도 덜 하고요. 남편도 아이도 더 예뻐 보이고요. 높은 건물이 없어 넓은 하늘과 바다를 매일 보고 살아서 그런 것 같아요. 처음 제주에 내려왔을 때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바닷가를 걸었어요. 이제는 좀 무뎌지긴 했지만요.
이번 작품은 최은미 작가님의 단편 「눈으로 만든 사람」 영향을 받으셨다고 밝히셨어요. 이 소설을 읽은 후, 이 작품이 출발된 건가요?
네. 처음에 구상한 이야기는 소설을 좋아하는 주인공이 「눈으로 만든 사람」을 읽은 뒤 어린 시절 성추행 사건을 떠올리고 후유증을 걱정하게 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였어요. 점점 다듬어지다 보니 「눈으로 만든 사람」은 빠지고 지하철 성추행 사건이 발단이 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요.
은서라는 인물을 만들 때, 염두에 두신 부분은 무엇인가요?
평범한 중학생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특별히 잘나거나 모난 데가 없는 평범한 아이. 그래서 독자들이 주인공을 자기 자신 또는 자신과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지을 때도 흔한 이름으로 지었어요. 전작 『기분이 없는 기분』의 주인공도 30대 여성에게 흔한 이름 ‘혜진’으로 지었거든요. 은서를 그리면서 저의 청소년기를 많이 돌아보았어요. 집에서는 걱정 안 끼치는 딸이었고 학교에서는 명랑한 친구였지만 속으로는 이런저런 고민으로 많이 우울하고 기댈 곳이 간절히 필요했거든요.
마지막 장면의 대사,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고 잘못되지도 않았다는 걸. 나는 괜찮다.”라는 대사가 작품의 메시지를 집약하고 있다고 느꼈는데요. 은서와 비슷한 일을 겪은, 혹은 보고 들은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고 위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친구 지윤의 “이 나라에서 여자로 살면서 성추행 안 당해 본 게 더 신기하다”는 말 역시 그랬는데요, 여성들의 연대가 담겨 있기도 하다고 느꼈습니다. 친구 지윤이와의 에피소드를 그리면서 어떤 점을 보여주고 싶으셨나요?
내가 지윤이라면 은서에게 뭐라고 말해 줘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위로를 해 주기는 하지만, 너무 큰일로 느껴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고, 동정하거나 대상화하지도 않고, ‘우리의 일이니 함께 해결하자!’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당신의 부탁」이라는 영화를 보면 임신한 여자 고등학생이 나오는데, 이 아이에게 친구가 “우리 이제 어떡하냐”라고 하거든요. 그 말을 듣고 여자아이가 고맙다고 해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은서가 과거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은 그리시는 데에 더욱 조심스러우셨을 것 같은데요, 텅 빈 놀이터 장면이 많은 것을 압축하는 시퀀스처럼 느껴져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은서가 과거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들에서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으셨을까요?
보시는 분들이 괴롭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리는 저도 괴롭지 않아야 했고요.
비난하는 말들을 귀담아듣지 마시라
제목이 전작과 글자 수가 같아요! 『기분이 없는 기분』 『비밀을 말할 시간』 의미가 있을까요? 또한 비밀을 ‘말한’이 아닌 ‘말할’이라고 제목을 지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딱히 글자 수를 맞춘 것은 아닌데 세트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이번 제목은 창비 출판사에서 지어 주셨는데 듣자마자 딱 마음에 들었어요.
요일로 목차를 꾸린 이유도 궁금합니다.
화가 났다 슬펐다, 원망했다 자책했다… 결국은 벌떡 일어나 출구를 찾는 은서 마음의 변화를 잘 보여 주려면 감정이 하루씩 달라지게 구성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의 후유증이 더 걱정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기억에 남아요. 혹시 비슷한 일로 마음의 후유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비난하는 말들을 귀담아듣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 비난은 다른 사람의 말일 수도 있고 자신의 목소리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비난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가해자라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어른이 주변에 있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어른은 어떤 사람인가요?
어른이 되면 세상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말이야, 쯧쯧’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렇게 된 데에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은서 엄마에게 혹시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은서 엄마는 은서를 자식이라기보다는 동지처럼 여기는 인물로 그렸어요. 살기가 힘든데 은서가 잘 커 주니 돌보아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라 함께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로 여기게 된 거죠. 그래서 은서가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가게에 갔을 때도 학교에서 별일 없었냐 묻지 않고 오늘 장사가 힘들었다는 얘기만 해요. 은서 엄마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긴 하지만, 저는 사실 은서 엄마한테는 마음이 덜 쓰여요. 그래서 은서 엄마에게 은서는 아직 아이니까 은서 마음을 더 돌봐 주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
『비밀을 말할 시간』을 특별히 읽었으면 하는 독자층이 있을까요?
청소년들을 주 독자층으로 생각하고 썼지만 어른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 기댈 곳이 필요한 아이들을 발견해 주길 바랍니다.
작가님의 2020년 올해의 책 1권이 궁금해요.
다드래기 작가님의 만화 『안녕 커뮤니티』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와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버무린 이야기는 어떻게 만드는 거죠? ‘나도 이런 만화를 만들고 싶다!’라고 부러워하며 읽었습니다.
후속작이 어떤 이야기일까요?
요즘 꿈을 꾸면 꿈속에서도 ‘앗, 이 이야기 소재로 써야 해! 기억해 두자.’라는 생각을 해요. 깨고 보면 그냥 황당하고 별거 아닌 이야기지만. 꿈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걱정이 되긴 하나 봐요.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어요. 그렇지만 이러다 또 뭔가 이야기가 찾아오겠죠.
*구정인 어린이책을 만드는 디자이너로 오랫동안 일하다 만화가가 되었습니다. 『기분이 없는 기분』은 첫 만화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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