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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인간은 추하지만 물건은 아름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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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심윤경 작가는 우연히 노랗게 변색된 앨범에서 어린 자신이 할머니 품에 안겨 있는 사진을 한 장 발견한다. 할머니 뒤편으로 유럽식 탑과 흰 톱니 모양 테두리의 창문이 있는 대저택이 찍혀있었다. 그 아름답고 눈에 띄는 저택이 왜 사라졌을까. 이 질문이 8년을 소설가의 마음에 남아 한 편의 소설 『영원한 유산』이 되었다. 소설은 악명 높은 친일파 윤덕영이 일제강점기에 지은 저택 ‘벽수산장’이 1966년 식목일에 불이 나는 실제 사건을 향해 나아간다. 주인공 ‘해동’은 해방 이후 벽수산장에 둥지를 튼 ‘언커크(UNCURK,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외교관 ‘애커넌’의 통역비서이자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24살의 나이에 어린 해동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가슴에 품은 인물이다. 이 외로운 인물이 갑작스레 저택에 등장한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을 지켜보며 “내 일도 아닌 것의 대가를 왜 내가, 나만, 치러야 하는 것인지”(235쪽) 고통스럽게 자문한다. 심윤경 작가는 소설을 통해 적이라는 것, 적이 남긴 유산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많이 생각했다며 한 사회가 할 수 최선의 있는 일은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정확한, 사실에 기반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택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오래 준비한 소설이라는 느낌이 바로 오는 작품이었어요.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저택이라는 소재가 아주 훌륭하다는 것은 저택의 존재를 알자마자 느꼈어요. 2012년이었는데요. 이렇게 아름답고, 눈에 띄는 것이 존재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흔한 건 아니잖아요. 그 일 자체로 아주 흥미롭고, 소설적으로 중요한 소재가 되겠다는 사실은 바로 알았죠. 그런데 그냥 저택이 있었다 사라졌다는 사연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어요. 이 소설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저택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많았고요. 그러다 2019년 무렵 여러 뉴스를 보면서 정리가 됐어요. 적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것, 명예를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라는 것이 저택에 기대 할 수 있는 이야기겠다 생각했어요. ‘적산(敵産)’이라는 것이 중요한 키워드구나 깨달았던 거예요.  

말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저택을 소설에 복원하기 위해서는 취재가 중요했겠죠? 크고 작은 이야기를 끌어오기까지 취재를 하는 데 많은 일이 있었을 것 같아요. 동네에 떠돌았던 ‘저택에 귀신이 나온다더라’는 소문 같은 것은 이야기에 아주 몰입하게 만드는 내용이었어요. 

주로 기댄 건 뉴스라이브러리예요. 옛날 신문들 가운데 윤덕영과 그의 가족들, 저택 또는 친일파 등의 키워드로 찾아 읽었어요. 당시 신문 논조가 정말 자유로웠더라고요.(웃음) 윤덕영이 ‘능참봉(조선 시대 각 능(陵)의 일을 맡아 보던 벼슬 이름)’ 작위를 팔아먹다가 고소를 당해서 ‘시종원경’ 작위를 빼앗기고 크게 망신 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그에 대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얀 양복을 입고 고개 뻣뻣이 세우고 법정에 나왔다”라는 내용을 신문이 아주 시니컬한 말투 그대로, 요즘보다 훨씬 가리지 않고 적었더라고요. 저택에 대해 “저렇게 화려해도 사람들은 귀신이 붙었다고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내용도 다 신문에서 찾았어요. 당시 사람들이 갖는 저택에 대한 정서가 그랬구나,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가깝게 느끼지 않고 아주 재수없다고 생각했구나, 라는 걸 느낄수록 참 재미있었어요. 

이 소설은 ‘과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는데요. 우선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찍 죽고 만 아버지에 대한 해동의 감정을 담은 이 말, “좀더 약게 살 줄 몰랐던 그들의 실패와 요절은 해동에게 어느 정도 원망의 마음을 남겼다”(59쪽)라는 부분이 탁 걸리거든요.  

아버지가 했던 일, 그 결과 돌아가신 사실에 대해 해동이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건 고모의 “장한 애였다”라는 한 마디뿐이죠. 그것 외에 해동은 집도 없고, 부모도 없는 고아예요. 부모만 있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할 수밖에 없고요. 어째서 내 부모는 나를 낳아놓고 거두질 못했는가, 하는 대상 없는 원망을 할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많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어렵게 지낸다는 뉴스가 있잖아요. 긍지를 키울 수 있는 어떠한 감사나 존경의 표시도 없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많이 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동은 고모의 “장한 애였다”라는 말을 생명줄 삼아 차츰 약지 못했던 부모에 대한 원망을 극복하잖아요. 얼마나 목숨을 건 선택이었는가를 자신도 알게 되면서 말이에요. 주변의 인정이나 역사를 바꾸는 영향력 같은 문제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존엄을 걸고 한 일로써 부모의 선택에 서서히 존경심을 품게 되고, 결국 그러한 선택을 해동 자신이 이어 받거든요. 그 과정을 최대한 그리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을 갖기가 어려운 건 충분히 긍지를 가져야 할 상황임에도 번번이 그것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주변 상황 때문인 것 같아요. 고모의 아들인 해동의 고종사촌형도 해동의 아버지 일을 쉽게 비하해버리잖아요. 

자긍심은 혼자 힘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주변의 도움이 정말 필요하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표시해야 하는 사회가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해요. 그런 마음을 많이 잊고, 가볍게 넘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그 이유에서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의 뻔뻔스러움에 더 경악하게 되는 거죠. 

그렇죠, 아버지 윤덕영을 추사 김정희에 비견하고,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서 저택을 만든 것이라고 하는 식인데요. 우리가 적에 대해 너그러움을 가지기 힘든 이유는 그들이 야비하기 때문이잖아요. 해동이 어떤 포용의 마음을 가지려 해도 윤원섭이 하는 꼴을 보면 있던 자비심도 사라지는 거죠. 그 시대 사람들이 하기 힘든 생각이지만, 해동은 저택을 충분히 소중히 여기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데요. 결국 그 생각을 목소리로 내지 못하게 한 것은 윤원섭이에요. 윤원섭을 보면 도저히 저것이 아름답다고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지잖아요. 적들의 저 야비함, 천박함이 우리가 적에게 너그러울 수 없는 이유임을 윤원섭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또 우리가 적을 포용하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신축시켜야 하는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윤원섭으로 보여주려고 했어요. 

언니에게 맞았다든가 하는 윤원섭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여준 이유도 거기에 있을까요? 

어떤 악행을 한 인간에게도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범죄자 신창원이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누가 단 한 번이라도 “너 착한 놈인 거 안다”는 말을 해줬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 말을 듣고 정말 충격 받은 적이 있어요. 신창원 정도의 인생이라면 중고등학교 때 이미 유명한 비행청소년이었을 텐데 그 마음 속에 누가 나 착한 것을 알아봐줬으면 하는 욕망이 있었다는 것이 가슴 아프게 들렸어요. 그리고 그가 착했던 순간도 있었던 거겠죠. 누구도 한 면만 갖고 있지 않아요. 모든 인간은 다 역사가 있고 여러 감정과 생각의 복합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그렸던 거예요. 윤원섭 같은 사람은 일평생 얄밉기만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싫었고요. 절대로 고생과 고민이 없는 인생은 없잖아요. 그것이 우리가 놓치는 중요한 존중의 포인트라 생각했고요. 윤원섭 같은 얄팍한 자아에게도 측은지심의 포인트가 있다, 또 누구에게나 그 포인트는 있다는 거예요.

 


명예를 지키는 순간 가장 외로워진다

적산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작가님의 고민이 담긴 부분이 또 있어요. 나라 전체가 잘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올바른 사람들이 떳떳하게 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라는 해동의 물음이 그것이죠. 

생각했던 건, 사람은 명예를 지키는 순간 가장 외로워진다는 거였어요. 명예를 지켜야 하는 순간에는 정말 큰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은 그것을 바보짓이라고 비웃을 거예요. 아무것도 돌아오는 것이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해요. 사실 그것은 개인의 명예라기보다 세상의 명예거든요. 그러나 윤덕영, 윤원섭이라면 그런 선택을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어쩔 수 없다면서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런 인생이 되는 거죠. 결국 온 세상의 명예를 내가 짊어지게 되는, 나만 아는 순간의 외로움이 있는데 그 외로움을 해동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직장, 즉 월급으로. 해동 역시 차마 결단을 못 내리고 오랫동안 망설이잖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내려놓아요. 그럴 때 보통 사람이 얻게 되는 숭고함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이 그나마 명예롭고 조금 나은 곳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래서 결말 고민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해동이 불 타버린 저택을 보다가 “축복도 저주도 남기지 않고”(275쪽) 돌아서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데요.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이 저택이 1966년에 불이 나서 1973년까지 그냥 폐허로 내버려진 채로 있었거든요. 이 저택을 존치할 것인가, 없앨 것인가 하는 논란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있었을 거예요. 그 논란을 언급은 하고 싶은데 불이 난 후로도 소설을 이어간다는 것이 상당히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타이밍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불이 났을 때 해동이 무척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으로 넣게 된 거죠. 저택에서 일하는 ‘팔묵 영감’도 같잖아요. 저택을 욕은 하지만 실제로 큰 타격을 입었을 때는 인지상정으로 마음 아파 해요. 더구나 그 저택이 워낙 거대하고, 특이해서 눈에 띄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은 못했어도 설마 저게 그냥 없어지진 않겠지, 라고 생각은 했을 것 같거든요. 그것을 말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해동이 황망해하는 모습 정도로만 처리를 했어요. 

“인간은 추하지만 물건은 아름다운 것”(253쪽)이라는 문장이 떠오르네요. 작가님 개인의 생각은 어떤 건가요? 책에 나오지만 한쪽에서는 다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아름다운 것을 정말 없애야 할까 생각도 하는데요. 

저는 아름다운 것이 지금도 우리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요. 우리에게 이런 역사가 있었고, 이런 인물이 있었고, 그가 이런 것을 남겼다, 라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의 전부가 아닌가 싶어요. 그 저택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들 윤덕영이 숭상했던 친일의 정신을 우리가 배우진 않을 것 같거든요. 그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이에요. 그런 사람이 있었고, 그가 이것을 남겼다는 걸 보여주면 사람들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할 거예요. 저는 정직한 것이 한 사회의 힘이 아닌가 생각해요. 하나의 생각만을 남기고 이외의 생각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사회와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회, 둘 중 어느 사회가 더 건강하고 강한 사회일까요?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정확한, 사실에 기반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사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같아요. 

그나저나 해동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 한 명이 없는 외로운 인물이잖아요. 친구 한 명도 주지 않은 이유는 뭔가요?(웃음) 

해동은 외로운 사람이 맞아요. 간당간당 이어진 사람들만 있죠. 그 간당간당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웃음) 보통은 그것도 중요하냐고 반문할 관계가 해동에게는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요. 이를테면 고모가 그렇고요. 고모가 간당간당 사라질 무렵 차례를 이어받듯 진형이 나타나잖아요. 그들의 지지에 기대서 해동은 자기 정신을 수습하고 힘을 얻고 살아가요. 



한없이 외로운 인간인 해동

이 작품에서 독자들이 이 장면은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게 있나요? 작가님이 특별히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을 갖는 장면은 고모가 돌아가신 이후에 해동이 장래의 처가 식구들에게 섞여 들어가는 장면이에요. 그토록 외로운, 천애고아인 그가 대가족 안에 뚝 떨어져서 왁자지껄한 어떤 순간을 보내는 그 장면이 좋아요. 해동에게는 축제 같은 일이고, 꿈만 꿨지 처음 겪어보는 일이잖아요. 정말 한없이 외로운 인간인 해동을 위한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축제여서 그 부분이 참 마음에 들어요. 

책 보도자료의 첫 줄에 “작품에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작가”라고 소개되어 있잖아요. 작가님의 작품을 계속 따라 읽은 작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보고 ‘어? 그런가?’ 생각했어요.(웃음) 쓰면서 동어반복하는 것 같다, 맨날 똑같은 인물들이다, 라고 스스로 느낄 때가 많거든요. 그걸 벗고 싶은 욕망이 강하니까 어떻게든 변화하려고 많이 애쓰는 편이에요. 그래서 독자 분들 입장에서는 작품의 분위기가 확확 변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서는 감사한 이야기죠. 제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된 부분은 ‘믿는 것에 뒤통수 맞은 인간의 반응’이에요. 믿은 것이 배신한다는 중요한 컨셉을 한쪽에 늘 갖고 있고요. 자기가 믿어온 세계를 떠나 보내고, 새로운 것을 찾아 기준을 세워야 하는 인간의 고군분투가 제 거의 모든 작품에 담긴 인간상 같아요. 

최근작인 『영원한 유산』 『설이』만 두고 생각해봐도 말씀하신 내용이 읽히네요. 두 소설의 주인공 모두 뒤통수를 맞지만 나를 믿는 아주 작은, ‘간당간당’의 관계만 있어도 나는 회복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거죠? 

정확하게 짚어주셨어요. 중요한 줄 몰랐던 간당간당하는 지지에 기대서 사람은 큰 배신을 이겨내고 다시 나로 서게 되는 것 같아요. 『설이』 때는 이모였고, 『영원한 유산』에서는 고모죠.(웃음) 지지자들이 중년 여성으로 나타나는 건 그런 지지가 대저택처럼 눈에 확 띄고 누가 봐도 든든할 것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본인이나 주변 사람조차 있는 줄도 모르는, 중요한 줄도 모르는 그런 것이기 때문일 거예요. 너무나 일상적이고, 미미하고, 소박하고, 하잘것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인데요.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지 많이 생각해요. 



덧붙이자면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그런 고모와 이모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누군가에게 믿음을 보여주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역할인 것 같아요. 

『설이』나 『영원한 유산』 모두 주인공이 친구나 가족이 없죠. 그들에게 중요한 지지가 되는 것은 그냥 이웃이나 다름 없는 아주 느슨한 관계 안에서의 지지거든요. 사실 내 가족 안에서, 내 자식을 잘 키우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주 분투하고 있잖아요. 그건 힘과 에너지가 되게 많이 드는 일이고,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죠. 그러나 그것에 비하면 누군가에게 든든한 이웃, 믿음직한 아는 사람이 되어주는 것은 훨씬 에너지가 적게 들지만 효과는 굉장히 좋은 일이에요. 그 정도의 사람은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어요. 그것도 쉽게요.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야말로 정말 좋은 사회라고 생각해요.


 


*심윤경

1972년 서울 출생. 서울대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대학을 졸업 후 얼마간의 직장생활을 거쳤으며, 1998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02년 자전적 성장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제7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5년 『달의 제단』으로 제6회 무영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이현의 연애』 『서라벌 사람들』 『사랑이 달리다』 『사랑이 채우다』, 동화 『화해하기 보고서』 등을 펴냈다. 『설이』는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주인공 동구와 세상 아이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자 쓴 작가의 두 번째 성장소설이다. 



영원한 유산
영원한 유산
심윤경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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