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들 작가가 쓴 『의미 있는 의미 부여』의 그림에는 독특한 느낌이 있다. 수채물감처럼 터치감이 겹겹이 살아있는데 물의 투명함이 아니라 기름의 진함이 배어 있어, 그림에서 훨씬 온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색연필보다 훨씬 빈틈이 없고 색이 분명하다. 새롭게 접해본 그림의 결에 뭘로 그렸을까? 궁금했는데, 마카펜이라고 한다. 정들 작가는 마카펜의 매력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마카펜은 선이 굵고 거칠게 그려져요. 그런데 그런 선이 쌓이고 쌓여서 면이 되고, 한 폭의 그림이 되면 그 그림은 참 따뜻한 느낌을 줘요. 한 개의 선만 봤을 땐 몰랐던 매력이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되면 비로소 빛을 발하는 거죠.”
지난해 마카펜 그림 에세이 『의미 있는 의미 부여』를 출간한 일러스트레이터 정들 작가는 원래 방송작가였다고 한다. 책을 내기 위해 글 작업을 할 때, 삽화는 당연히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삽화에도 자신의 개성과 메시지를 담고 싶어 그림을 직접 그려야겠다고 결심하고 바로 마카펜를 구입해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과감한 시도였지만 완성도 있는 첫 책을 출간하고,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는 정들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그림 에세이 『의미 있는 의미 부여』를 출간하셨습니다. 첫 책으로 알고 있는데요, 책을 내야겠다라고 생각하시게 된 동기나 계기가 있으셨나요?
원래 방송작가로 활동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게 됐고, 자연스럽게 글쓰기를 멈추게 됐었죠.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나니 다시 글이 너무 쓰고 싶은 거예요. ‘아니, 내가 글 쓰기를 이렇게 좋아했었나?’ 싶을 정도로요. 그래서 무작정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꾸준히 써 내려간 글의 분량이 상당해지자 이 글들을 책으로 엮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이후로 본격적으로 출간 계획을 세우게 되었죠.
책에 수록된 글과 그림 작업은 원래 틈틈이 하셨나요? 아니면 책 출간을 결정하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하시게 되었는지요.
글은 틈틈이 썼어요. 물론 그때 쓴 글들은 ‘작업’이라고 하기엔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고 써 내려간 일기에 가까웠어요. 이후 책 출간을 결정한 뒤로는 썼던 글들을 다시 쓰거나 다듬고 수정했습니다. 그림 작업은 책 출간을 위한 글 작업이 완전히 끝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고요.
마카펜으로 작업을 하십니다. 마카펜의 매력을 알려주신다면요?
마카펜은 선이 굵고 거칠게 그려져요. 그런데 그런 선이 쌓이고 쌓여서 면이 되고, 한 폭의 그림이 되면 그 그림은 참 따뜻한 느낌을 줘요. 한 개의 선만 봤을 땐 몰랐던 매력이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되면 비로소 빛을 발하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도구적인 면에서 접근이 쉽습니다. 유화나 수채화는 물감, 붓, 팔레트, 캔버스 등 필요한 것이 많지만 마카펜 그림은 딱 두 개만 있으면 돼요. 마카와 종이. 그런 면에서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삼고 싶어 하는 분들께 저는 마카를 강력 추천합니다.
마카펜으로 그림 그리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하시게 되셨나요?
『의미 있는 의미 부여』를 준비하면서 그리기 시작했어요. 처음 글 작업만 할 땐 삽화는 당연히 다른 일러스트레이터 분께 맡기려고 했었죠. 그래서 그림이 들어갈 부분엔 대략 이런 그림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메모 정도만 해 두었어요. 그러다 문득 삽화에도 글처럼 내 개성, 내 메시지가 묻어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책이 온전히 저만의 색깔을 띈다면 참 좋겠다 싶었죠. 그림을 직접 그려야겠다는 다짐은, ‘무엇으로’ 그리느냐 하는 고민으로 이어졌어요. 그런데 디지털 그림 보단 종이에 그린 손 그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제가 워낙 아날로그 느낌이 나는 것들을 좋아하거든요. 그러던 중, 전부터 좋아했던 마카펜 그림들이 떠올랐고, 당장 마카펜 세트를 구입해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죠.
마카펜으로 그린 그림이 우리 인생을 닮은 것 같다고 책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분이 우리 인생과 닮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나무는 자랄수록 겹겹이 나이테가 늘잖아요. 사람도 똑같은 것 같아요. 세월의 흔적, 지난날의 추억, 새로운 다짐, 그런 것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맞물리고, 하나하나 쌓이고 쌓여가며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이 마카펜 그림과 닮았어요. 마카펜 그림은 슥슥 그은 수많은 선들이 쌓이고 쌓여 한 폭의 그림이 되거든요. 실제로 마카펜 그림을 자세히 보면 특유의 결과 선이 보여요. 사람도 겪어보면 볼수록 그 사람만의 결과 특징이 보이듯 말이죠.
소재를 찾을 때, 가장 먼저 주위를 둘러보는 편이에요. 어떤 사물 하나에 꽂히면 그것을 집중해서 관찰하고 그것의 특징을 파악해 의미를 부여하며 글감을 찾죠.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히 쓰는 볼펜 한 자루에도 그것만의 물성이 있고, 또 저마다의 사연이 있잖아요. 이 볼펜이 갖고 있는 특징, 이 펜으로 써 내려간 수많은 메모와 글들, 이 펜이 내게 주는 의미들… 그런 것들을 발견해보는 거죠. 대부분의 소재를 이런 식으로 찾아내다 보니 ‘의미 부여’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렸어요. 그런데 ‘의미 부여’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더라고요. 흔히들 말 하잖아요. “그런 거에 의미 부여 좀 하지 마.” 라고요. 하지만, 다분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에서도 특별함을 찾아낼 수 있는 긍정적인 의미 부여라면, 살아가는 데 제법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앞에 ‘의미 있는’ 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수록한 그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은 무엇인가요?
바다 그림이 세 개 있어요. 두 개는 깊은 바닷속을 묘사했고, 하나는 육지로 밀려오는 파도를 그렸죠. 그 그림들이 좋습니다. 마카펜 그림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거든요. 겹겹이 쌓은 선들이 만들어낸 한 폭의 그림. 거칠고 뭉툭한 선들이 모여 만들어낸 따뜻한 느낌이요.
원래 글을 꾸준히 써오셨는지요?
네. 버릇처럼 글을 썼어요. 일기도 꾸준히 쓰는 편이었고요. 스트레스가 쌓일 때도 글을 써요. 친한 친구가 알려준 방법인데요, 감정이 마구 휘몰아칠 때, 의식의 흐름대로, 손이 가는 대로 글을 쓰는 거죠. 컴퓨터 메모장을 켜놓고,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생각을 다 쏟아낸다는 느낌으로 앞뒤도 없이 마구 쓰는 거죠. 그렇게 모든 걸 글로 쏟아내고 나면 조금은 스트레스가 풀려요. 앗, 인터뷰를 하다 보니 이게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을 쓰다 보면 스트레스 받기도 하는데, 스트레스를 또 글로 풀다니. 저, 평생 글 쓸 운명인가 봐요.
글쓰기를 하신 후 찾아온 변화가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제 글이 삶에 지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길 바라며 책을 썼어요. 그런데 첫 책을 내고 깨달은 게 있어요. 누군가에게 전하고자 책에 쓴 모든 말들이 사실은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는 것을요. 내가 세상을 향해, 혹은 타인에게 간절히 하고 싶은 말이야말로 사실 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때문에 타인의 말을 잘 듣는 것만큼이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예전의 저는 그 점에 소홀했던 것 같아요. ‘먼저 내 마음을 돌보세요.’,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들 많이 하잖아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저도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돌보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하루에 한 가지 이상은 꼭 제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하려고 해요. '지금 내 기분이 어떻지? 왜 그렇지?’ 자주 생각해보기도 하고요, 제 자신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글을 쓰며 무언가를 쏟아낸 시간만큼 꼭 독서나 영화감상, 타인과의 대화 등으로 채우는 시간을 갖는다거나, 예쁜 미술도구를 제 자신에게 선물하기도 하고요. 소비 합리화는 아닙니다. (웃음)
스물여섯 살 때, 워킹홀리데이 때 독일에 가셨습니다. 워킹 홀리데이를 하는 나라로, 독일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대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해외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너무 운 좋게도 거기에 뽑혀서 생애 첫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됐어요. 당시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을 다녀왔거든요? 한달 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떠올리면 박물관, 관광명소들이 생각나더라고요. ‘와, 내가 에펠탑에 갔었다니!’하고 말이죠. 그런데 독일을 떠올렸을 땐 좀 달랐어요. 거리의 풍경, 카페에 앉아 구경했던 독일인들의 소소한 일상들, 분위기, 무뚝뚝하다고 들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친절했던 사람들… 그런 것들이 떠올랐어요. ‘삶’과 관련된 것들 말이죠. 그래서 언젠가 해외에 거주할 날이 온다면 꼭 독일에서 살아봐야겠다 생각했었어요. 그리고 막상 살아보니 역시 저와 잘 맞는 곳이더라고요. 시끄러운 곳보다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고, FM 기질이 다분한 저에게 딱 맞는 곳이었던 것 같아요.
정들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요?
자연을 좋아해요. 그래서 원래 성(姓)인 '정'은 그대로 두고, 뒤의 이름은 꼭 자연과 관련된 것이었으면 했어요. 그래서 하나하나 넣어봤죠. 그런데 정'바다'라고 하니 작가의 필명이 아니라 낚시왕의 필명 같았어요. 정'강'이라고 해보니 정강이가 떠오르고, 정'산'이라고 하니 마치 기업 회계팀에서 일해야 될 것 같은 거예요. 그러다 문득 너른 들판이 생각나서 ‘들’이라는 말을 넣어봤는데, 입에 너무 잘 붙더라고요. 정들. 어감도 좋고 제가 좋아하는 자연도 들어갔고. 딱 이거다 싶었어요.
<예스24 어린이 책선물 캠페인>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참여하셨습니다. 어떻게 참여하시게 되셨나요?
작년 가을, 예스24 뉴미디어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어린이 책선물 캠페인을 진행할 예정인데, 일러스트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어보시더라고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일단 캠페인의 취지가 너무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좋은 취지로 하는 일에, 제 나름의 좋은 뜻을 더하면 참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았어요. 그리고 실제로 저에겐 정말 뜻 깊은 작업이 되었고요. 너무나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예스24 어린이 책선물 캠페인> 그림 작업을 하시면서 신경 쓰신 부분이 있다면요?
사실, 모든 부분에 많은 신경을 썼어요. 마카펜 그림은 한 번 그리면 수정할 수가 없거든요. 디지털 그림처럼 특정 부분만 지우고 수정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죠. 점 하나라도 잘못 찍으면 그림을 새 종이에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만 해요. 그래서 채색에 심혈을 기울였어요. 선물의 집 내부 그림을 보면 소파 밑에 네이비 러그가 깔려 있어요. 그 러그 색만 해도 몇 시간을 고민했습니다. 천장, 옆면, 바닥까지 모두 그려놓고 러그만 채색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한번 잘못 칠하면 전부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이다보니 섣불리 채색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종이에 여러가지 색을 채색해서 가위로 잘라 그림에 대보며 수없이 고민했어요. 러그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을 그리거나 칠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색 하나를 입히는 것에도 정말 많이 고민했죠.
두 번째 책은 어떤 내용인가요?
다음 책도 그림 에세이입니다. <계절의 온도는 사람이 정한다>라는 가제를 달아 놓았어요. 주변 분들께 ‘그림이 참 따뜻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요, 마카펜 그림 자체가 주는 분위기도 한 몫 하지만, 아무래도 따스함을 표현하기 위해 그려 넣은 요소와 장치들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 요소와 장치라 함은, 바로 ‘사람, 삶’과 관련된 것들이에요. 예를 들어 겨울 풍경 그림을 보면, 눈 쌓인 언덕 위에 노랗게 불이 켜진 집 한 채와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가 그림에 온기를 더하죠. 꼭 붙어 함께 언덕을 오르는 두 사람, 그 옆을 총총 뛰어가는 한 마리 강아지는 왠지 모르게 미소를 짓게 만들고요. 추운 겨울 밤의 풍경에서도 따스함이 느껴지는 건, 그 안에 우리 삶과 관련된 무언가가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소소하게, ‘그저 살아가는 모습’만큼 온기를 뿜어내는 것이 과연 또 어디 있을까 싶어요. 다음 책엔 이렇듯 따스한 온기를 뿜어내는 ‘사람, 삶’과 관련된 이야기와 그림을 책으로 담아 볼 예정이에요.
*정들 기쁨, 슬픔, 행복, 죄책감···.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한 인간입니다. 떠오르는 것을 쓰고 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을 그립니다. |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