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가지 말고 잘 가” 하며 이별을 껴안던 시인은 이제 다정한 ‘안녕’을 건넨다. 바로 시 그림책 『우리는 안녕』을 출간한 박준 시인이다. 박준은 이번 그림책을 “폴짝폴짝 뛰면서 완성한 책”이라고 말했다. 1년간 서양화가 김한나 작가와 글과 그림을 주고받는 동안, 동화처럼 구체적이었던 글은 가벼워졌고, 그림도 다채롭게 변했다. 그렇게 완성된 강아지와 새의 이야기. 그들이 주고받는 만남과 이별의 ‘안녕’도 트램폴린을 뛰듯 밝고 따뜻하다. 한없이 어려운 만남과 이별도 결국 ‘안녕한 우리’로 이어진다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박준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통해, 섬세한 서정을 전해온 시인이다. 현재 매일 밤 자정 CBS 라디오 <시작하는 밤 박준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안녕』은 시인과 서양화가 김한나 그림작가가 함께 완성한 첫 그림책이다. 주인공 강아지 단비는 어느 날 날아든 새 한 마리에게 용기 내 “안녕?”하고 말한다. 그 후, 단비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 ‘안녕’의 의미를 알게 된다. ‘안녕’의 기쁨과 그리움, 슬픔을 다채롭게 담아낸 그림책이다.
시만큼 어렵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났어요
‘시인 박준’의 첫 시 그림책입니다. 어떤 계기로 그림책을 작업하게 되셨어요?
원래 그림책을 좋아했어요. 아내가 어린이책 편집자였는데, 평소에도 그림책을 많이 모으거든요. 저도 함께 읽으면서 늘 그림책을 한 권 쓰고 싶었는데, 너무 고민이 되더라고요. 이 분야도 굉장히 깊을 텐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망설이는 마음이 컸어요. 시를 쓴다고 다른 장르의 글쓰기를 함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었나요?
주변에 그림책을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조언을 구했어요. 어린이책 편집자이기도 한 유병록 시인에게 “선배, 나 그림책 쓰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하고 물어보니까 용기를 주더라고요. 좋은 그림책을 100권 정도 읽고, 그 분야를 존중하면 된다고. 쉽게 보지만 않으면 된다고.
그 말이 힘이 됐겠네요.
그림책도 시만큼 어렵고 깊은 세계라고 인정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시의 영역 안에서 슬럼프도 겪고 이리저리 뚫고 나가면서 몸과 마음을 다해 노력해왔잖아요. 시도 이렇게 어려운데, 당연히 그림책의 세계도 쉽지 않을 거예요. 그걸 인정하니 오히려 두려움이 좀 사라졌어요. 당연히 어려울 걸 알지만 해보자는 마음이 든 거죠.
실제로 그림책의 세계로 진입해보니 어땠나요?
진입했다고 인정해주시는 거예요?(웃음) 시와 그림책이 닮았다고 새삼 느꼈어요. 어렸을 때 최초의 독서가 기억나세요? 저는 부모님이 없는 돈을 털어서 월부로 사주셨던 아동문학 전집 시리즈인데요. 어느 날, 몇 권을 뽑아 보는데 글쓴이가 시인이예요. 나중에 신경림 시인을 만나서 “제 최초의 독서가 선생님 책입니다”라고 했더니, 놀라시면서 “어린 나이에 시집 『농무』를 읽었어?” 하시더라고요. “아닙니다. 계몽사에서 나온 어린이책을 읽었습니다.”라고 대답했죠. 실제로 많은 시인들이 아동문학을 창작했고, 반대로 아동문학가들이 시를 쓰기도 했어요.
그림책을 쓰면서 시인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참 낯선 환경을 무서워하는 아이였어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해서, 걱정하던 어머니가 저를 미술학원에 보내셨죠. 어린 마음에 너무 무서운데 학원에 안 가면 혼날까 봐 누나한테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었죠. 육교까지만 가 달라, 전봇대까지만 가 달라. 누나는 귀찮아하고 저는 엉엉 울고. 당시의 저는 모르는 사람들한테 ‘안녕’ 하고 말을 건네기가 너무 어려웠던 거예요. 책을 쓰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수없이 고치면서 자유로워졌어요
1년 동안 김한나 그림작가님과 협업하며 수없이 고쳤다고 들었어요.
과정이 참 재밌어요. 처음에는 제가 그림도 그렸어요. 하필 4B연필을 골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촌스럽네요.(웃음) 첫 원고는 동화에 가까울 정도로 구체적이었거든요. 배경에 빵집을 그려주면 충분할 것을, ‘건너편에 빵집이 있는데, 오전 아홉 시에 한번 오후 세 시에 한번 바게트가 나와’ 하고 구구절절 썼죠.
시와 달리 말이 많아지셨군요.(웃음)
맞아요. 시랑 다르니까 너무 신났던 거죠. 시는 ‘말’이랑 비슷해서 늘 더 쓰고 싶은데, 그렇다고 너무 떠들면 실없는 사람이 될까 봐 ‘그만 써야 해’ 하는 습관이 들었거든요. 그러다 그림책의 세계를 만나니 마음껏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무 좋은 거예요. 한편으로 내 뜻을 그림 작가님이나 독자가 다 알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그런데 작가님의 그림을 받아보고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걸 굳이 길게 쓰고 있었구나 싶었어요. 그림책은 그림으로 더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음 원고부터 글을 확 줄였어요.
갑자기 원고 스타일이 바뀌니 김한나 작가님 반응이 어땠나요?
처음에는 놀라시더니 더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서 보내왔어요. 저는 더 용기가 나서 더 자유롭게 쓰고요. 그때 깨달은 거죠. 그림과 글이 2인 3각 달리기하듯이 매번 발맞춰서 걸을 필요가 없구나. 그냥 손만 잡고 있어도 되는구나. 그 후로는 번갈아 가며 폴짝폴짝 뛰듯이 진행했어요. 그림작가님이 그림으로 점프하면, 저도 따라서 한 번 더 뛰고. 폴짝폴짝 작업이 이어졌어요.
그림책 주인공이 개예요. 시인님은 실제로 개 두 마리를 기르시고 있죠. 개를 좋아해서 어릴 때, 수의사를 꿈꾸시기도 했다고요.
이 책의 모델이 된 ‘단비’는 고향 파주에 사는 개예요. 제가 기르는 하비, 달비의 엄마죠. 개와 함께하는 삶은 정말 행복해요. 하루에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흔치 않은데, 사랑하는 개와 산책하는 일은 크게 애쓰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이죠. 결국 좋아하는 상대와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구나 싶어요.
만남과 이별의 ‘안녕’은 닮아 있다
이 책은 ‘안녕’에서 시작하고 끝나요. 누군가를 그리워하던 개 앞에 새가 나타나서 ‘안녕’ 하고 인사하면서 ‘안녕’의 다양한 모습이 펼쳐지죠.
‘안녕’은 두 가지 의미가 있죠. 만날 때와 이별할 때의 안녕. 저는 둘 다 어려운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안녕’ 하고 먼저 다가가는 게 힘들죠. 새로운 집단에 속할 때, 낯선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안녕’ 하고 싶은데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만남의 안녕도 힘든데, 헤어질 때의 안녕은 더 어렵더라고요. “안녕은 말하기 싫을 때에도 해야 하는 말이야”라고 적었듯이, 이별의 안녕도 너무 힘든 일이죠.
작가님은 만남과 이별의 ‘안녕’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첫인사의 안녕과 끝인사의 안녕이 닮아 있다”(산문 「두 얼굴」)고 쓰신 적이 있고요.
마치 3월과 2월 같습니다. 3월은 학기가 새로 시작하니까 많은 어린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잖아요. 그런데 사실 2월은 헤어짐의 달이에요. 3월과 2월이 붙어 있는 것처럼 사실 안녕과 안녕은 붙어 있는 거죠. 제가 혼자 하는 쓸데없는 일 중 하나가 버스 터미널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누군가를 보내고 앉아 있는 사람일까,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일까. 열심히 관찰해도 구분이 안 가요. 보내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이 사실은 같기 때문이죠. 알고 보면 만남과 이별이 같은 건데, 우리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게 아닐까 싶어요.
‘안녕’에 대한 여러 문장들이 나오죠. 특별히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었나요?
“안녕은 밥을 나누어 먹는 거야. 그러다 조금 바닥에 흘리고는 씨익 웃는 거야.” 음식을 흘리고 씩 웃는 행동들이 정말 친밀한 관계에서 하는 일이잖아요. 수많은 ‘안녕’들이 정말 친한 사이에 사소한 것들을 주고받으며 이루어지죠. 매일 밥을 먹고, 흘리기도 하면서요.
‘안녕’에는 그리움도 녹아 있어요.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는 아버지와 단비의 그리움에 대해 쓰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적 돌아가신 기억나지 않는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개 단비는 갑자기 떠나간 새를 그리워하죠.
단비는 제 시 「단비」에도 등장하는 개예요. 새벽마다 아버지가 단비를 데리고 논둑길로 나가서 함께 울고 온다고 하셨는데, 그게 너무 슬픈 거예요. 아버지는 얼굴도 보지 못한 엄마를 그리워하는 거고, 단비는 키우던 새끼들을 떠나보내서 우는 거고요. 한번도 보지 못한 대상을 그리워하는 것과 늘 곁에 있던 대상을 잃었을 때, 그리움의 크기는 뭐가 더 클까요? 멍청한 질문이죠. 그리움의 크기를 어떻게 잴 수 있을까요. 어쨌든 울음의 이유는 다르지만, 단비와 아버지가 같은 ‘안녕’을 만들어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떠오른 것 같아요.
어린이도 어른만큼 만남과 이별 앞에서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거예요. 어린이들이 어떻게 만남이나 이별을 겪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셨는지 궁금합니다.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첫 번째는,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는 누구에게든 자신감 있게 ‘안녕’해도 된다는 거예요. 어린이들에게는 세상에 처음 보는 것들이 가득하겠죠. 거기에 마음을 열어 놓고 ‘안녕’하고 말을 건네면 새로운 세계 역시 똑같이 ‘안녕’하며 맞아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두 번째는 정말 하기 싫은 순간에도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헤어지기 싫어서 눈물이 나더라도 손을 흔들어줘야, 다음 ‘안녕’이 있는 거니까요. 그런 과정이 있어야 다시 만나서 반갑게 ‘안녕’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매일 밤 자정 라디오 <시작하는 밤 박준입니다>를 진행하고 계세요. 라디오 대본을 쓰는 건 시와 어떻게 다른가요?
라디오는 물로 글씨 쓰는 기분이에요.(웃음) 시는 늘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서 무겁게 써야지 해왔거든요. 먹을 갈아서 붓으로 딱 한 점 찍는 것처럼요. 그런데 라디오는 그게 능사가 아닌 거예요. 귀로 듣는 글이니까 너무 가벼워도, 너무 무거워도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또렷하게 남지 않지만 아예 휘발되지는 않게, 물자국 정도만 남기는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 시 그림책은 과연 어떤 독자를 만나게 될까요?
그동안 제 책은 밤에 혼자 읽는 용도라고 생각했어요. 잠이 안 올 때, 문득 나는 이제 혼자구나 느끼는 순간, 곁에 있어주는 책이요. 제가 진행하는 심야 라디오도 기본적으로 그늘이 져 있죠. 누군가에게는 조금 어두운 그늘이 위로가 되는 거고요. 그런데 그림책은 빛으로 한발짝 나가는 장르예요. 아직 눈이 부셔서 어떤 독자들을 만날지는 저도 아직 상상이 안 되네요.(웃음)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늘 개와 함께 살고 있다. |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