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가 유행이지만, 소설가 윤고은의 매력을 4개의 알파벳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9개의 자아가 있다”고 고백하는 윤고은은 베테랑 라디오 디제이지만 빈틈이 많고, 미루기 대장이자 워커홀릭이며,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즐기면서도 일상의 지하철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관찰한다. ‘500개월이 조금 넘은 아이’처럼 즐겁게 1번부터 9번까지의 자아를 설명하다가도, 글 못 쓰는 자신을 자책하는 자아가 또 한가득 있다고 고백하는 소설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그를 만난다면 조용히 지나치자. 아마 3번 자아가 신나게 일상을 기록 중일 테니까.
소설가 윤고은은 기발한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현실의 틈을 새롭게 보게 하는 작가다.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 『밤의 여행자들』, 『해적판을 타고』가 있다. 『밤의 여행자들』은 2020년 미국, 영국에서 <The Disaster Tourist>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출간됐다. 『빈틈의 온기』는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집이다.
지하철에서 하루를 기록합니다
라디오 디제이와 소설 쓰기를 병행하니 하루가 바쁘겠어요. 출퇴근 시간은 왕복 4시간이나 된다고요.
방송국은 일산에 있고 저희 집은 정반대에 있거든요. 주4일은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가로지르고 있어요. 그 생활을 2년 동안 한 거죠. 지금은 자연스럽게 라디오를 중심으로 하루가 돌아가요. 주말에는 소설을 쓰고요.
18년간 소설을 써 오셨는데, 왜 이제야 에세이가 나왔나 싶었어요. 이렇게 재미있는데!
수다쟁이인 걸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럽네요. 에세이는 원래 좋아하고 꾸준히 써오긴 했지만 책으로 묶을 생각은 못 했거든요. 그런데 라디오 일을 맡게 되고 이동 시간이 길어지면서 출근길에 대해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소설로만 독자를 만났으니까 ‘생활인 윤고은’을 보여주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에세이를 쓰는 동안에는 쑥스러운 마음도 있었죠. 제 삶을 그대로 글에 담아내야 하니까요. 막상 책을 내고 나니까 오히려 신나요. 리뷰도 열심히 찾아보고요. 소설은 독자에게 직접 다가가기가 좀 어렵거든요. 독자만의 감상이 있는데 작가가 나서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근데 에세이는 오히려 독자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애써 참을 정도예요. 댓글도 달고 싶고, 좋아요도 누르고 싶고. 검열한 사람치고는 너무 적극적인가요?(웃음)
매일 낮 12시 <윤고은의 EBS 북카페>로 청취자를 만나잖아요. 생활이 많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가장 큰 변화는 에세이를 내게 됐다는 거예요. 라디오가 아니었으면, 제게 이런 일상의 리듬이 생기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소설 작업이 주기적인 출퇴근이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근데 라디오는 매일 청취자를 만나서 일상 이야기를 나누죠. 프로그램 이름도 ‘윤고은의 북카페’여서 정말 2시간 동안 카페 영업을 하는 기분이 들고요. 자연스럽게 사소한 일상을 누군가에게 말하게 됐고, 에세이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전까지 저는 일상의 에피소드도 소설로 가공하고 싶어 했는데, 이번엔 그대로 털어놓게 된 거죠.
그래서인지 출근길의 지하철이 에세이의 중요한 소재예요.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편안히 잘 수 있는지 연구도 하시더라고요.(웃음) 지하철에 대해 쓰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라디오에서 ‘윤고은의 출근길’ 코너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출근길에서 지하철 안에서 떠오른 생각을 한 편의 글로 완성했는데요. 지하철은 일상적인 공간이라 편안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는 공간이니까 알고 보면 글쓰기 소재가 무궁무진해요. 지하철의 리듬이 책 읽을 때도 좋고요. 열심히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면 축지법을 쓴 것처럼 목적지에 도착한 경험 다들 있지 않나요?
농담에서 소설이 시작된다
‘내 안에는 9개의 자아가 있다’고 고백했어요. 기록하는 1번 자아부터 이벤트를 좋아하는 9번 자아까지 정말 다채롭던데요. ‘생활인 윤고은’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어요.
정말 하나의 캐릭터로 설명할 수 없더라고요. 제 모습을 막연히 나열하다가 9번 자아까지 등장한 거고, 그 모두를 다 끌어안은 것이 저라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1번 자아는 좀 게으른 애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미루는 버릇이 있는데요. 마감을 미루면서 겨우 해내고 다음 마감을 또 하고 그러다 보니 남들은 저를 일 중독으로 봐요. 워커홀릭이야말로 저랑 가장 안 맞는 말인데!(웃음) 사소한 걸 실수하는 2번도 있고, 소설 소재를 기록하는 3번도 있죠. 새로운 걸 좋아하고 그때그때 전환이 빠른 사람이에요.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해낼 것 같은 작가님이 이렇게 실수투성이인 모습도 있어서 의외였어요. 치약과 의치부착재를 헷갈리고, 평소에는 단어를 헷갈리는 ‘말실수 전문’이라고요.
저 정말 상담을 받고 싶을 정도예요.(웃음) 마침 오늘도 에피소드 하나가 있는데요. 라디오 오프닝 멘트로 ‘마오리족’이 나왔는데 제가 그걸 ‘마오리죽’으로 읽으려고 한 거예요. 다행히 티는 안 났지만 ‘와, 나 잘못 읽을 뻔했네’ 하면서 속으로 놀랐죠. 이런 실수가 정말 많아서, 이 중에서도 경쟁이 치열해요. 재밌는 것만 에세이가 되죠.
이렇게 사소한 순간을 다 에세이에 녹여 내셨어요. “오류와 실수, 착오와 오작동이 내포한 유연성이 나를 설레게 하고 그 헛발질을 기록하게 한다”(245~246쪽)고요.
사실 저는 일기도 안 쓰는 사람이거든요. 대신 소설 소재를 위해서 메모를 많이 해요. 오늘 하루 있었던 실수를 적기도 하고, 친구와 이야기하다가도 “앗, 나 이거 써도 돼?” 하고 일단 적어두는 거죠. 이건 소설로 쓸 수 있겠다 하는 감이 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 조각이 모여서 실제로 소설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일상을 즐겁게 하는 것 같아요.
실수가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되는 걸 보니, 작은 실수는 괜찮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누구나 자주 반복하는 실수가 있잖아요. 우리는 사랑스러운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반복할 때 그걸 있는 그대로 봐주는데, 나 자신에게 똑같이 생각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거기에 나만의 이유를 붙여주기도 하고, 기록도 해보고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도 일부러 하려면 못 하는데, 타고난 재능이다 하면서요.(웃음) 저는 농담하는 게 좋아요. 그래서 소설도 자조적인 농담에서 출발할 때가 많아요.
농담에서 출발한 소설로 어떤 게 있나요?
단편소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은 북한 아파트를 분양받는 이야기인데요. 이 소설의 출발도 농담이었어요. 머리를 감다가 며칠 전에 나눈 대화가 떠오르는 거예요. 친구들과 모여서 집 걱정을 하다가 “서울 집값이 비싸서 이제는 위로 가야 돼! 개성 e편한세상 이런 거!”라고 농담을 했거든요. ‘아, 그러면 부루마블 게임하듯이 북한을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로 이어진 거죠.
소설의 상상력이 그렇게 시작된 거였군요. 머리를 감다가.(웃음)
제가 좋아하는 방식은 굉장히 기이한 소개팅을 시켜주듯이,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소재를 만나게 하는 거예요. 파격적인 데이트 어플 같은 거! 진지한 방식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경쾌한데 조금 씁쓸한 농담을 좋아하죠.
‘작가의 말’을 좋아하는 소설가
팬데믹 시대에 모두들 ‘재난’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요. 2013년에 출간된 『밤의 여행자들』이 ‘재난 여행’ 이야기잖아요. 작년에 번역되어 영미권에 소개되기도 했고요.
마침 『밤의 여행자들』 영문판 제목이 ‘재난 여행자’예요. 실제로 번역본 출간 당시 받은 질문이 이거였어요. ‘팬데믹 상황을 재난 여행 프로그램으로 만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설에 재난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가 나오니까요. 그 질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못하겠더라고요. 보통 재난 장소에 여행을 간다면, 내 삶이 안전하다는 전제하에 떠나는 거잖아요. 근데 현재 코로나19에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건 여행사에서도 못 팔 것 같은 상품인 거죠. 기분이 이상했어요. 2013년에는 재난 여행을 소재로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시키지 않은 택배를 받듯이 재난이 모두에게 찾아온 거니까요.
소설이 외국 독자에게 전해진 경험도 특별했을 것 같아요.
작가로서 막연한 꿈 중 하나였어요. 재밌었던 건 제 소설을 ‘페미니즘 에코 스릴러’라고 소개하더라고요. 물론 이런 요소가 없진 않지만, 저는 의식하고 쓴 게 아니거든요. 좋은 에코 스릴러에 대해서 글을 청탁 받고는 ‘아니, 난 에코 스릴러도 모르는데’ 하면서 썼죠. 지금 『밤의 여행자들』은 범죄 추리 문학에 주는 영국 골드 대거 상 최종심에 올라 있어요. 내가 쓴 작품에 이런 요소가 있었구나 하면서, 외부의 시선으로 제 문학세계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어요.
소설 끝에 붙은 ‘작가의 말’을 쓰는 걸 좋아하신다고요. 이전 ‘작가의 말’들을 읽어봤는데, 독자를 좋아하는 소설가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니까 제 말이 들어갈 여지가 없잖아요. 근데 ‘작가의 말’에서는 조명이 저한테 오니까 특별한 기분이 드는 거예요. 촛불이라도 켜두고 마치 의식처럼 그 시간을 잘 누리고 싶고요. 정신없이 이야기 한편을 겨우 마치고 출구를 찾아 나왔는데, 앉아도 되나 싶은 의자 하나가 있는 느낌. 거기 앉아서 이제 독자를 기다리는 거죠.
이제 에세이라는 의자에 앉아서 독자를 기다리고 계시죠. 윤고은의 일상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주었으면 하나요?
이 책은 제 소설이 탄생한 뒷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생활인으로서 겪는 좌충우돌 일상이기도 해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이 일상의 조각들을 마치 내 이야기처럼 공감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죠.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