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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미의 작업실 인터뷰] 판을 짜는 사람 – 이길보라 작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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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길보라 작가와 엄윤미 인터뷰어


“사회가 부여한 이름을 따르는 게 아니라 내가 붙인 내 이름을 내가 믿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요. 저는 ‘로드스쿨러’이고, ‘코다’ 이고, ‘영화작업자’ 이자 ‘글 쓰는 사람’ 이에요.”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274쪽)

“계속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여자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287쪽) 

“아티비스트 Artivist 는 예술가이자 활동가, 두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연대, 활동, 작업을 하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당신을 이어 말한다』, 239쪽) 


네 권의 책과 (『길은 학교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당신을 이어 말한다』) 책과 동명의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을 만든 이길보라 작가를 만났습니다. 사회 비평집 『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중심에 두고 만났지만, 그동안의 작업을 아우르는 인터뷰가 되었습니다. 각각의 작업이 분절된 것이 아니라 계속 정체성을 찾고 선언하며 성장해 온 여정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이길보라 라는 사람의 고유한 시선이 있습니다.



이길보라의 시선이라는 렌즈

『당신을 이어 말한다』는 첫 사회비평집이지만, 이전의 에세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와 톤이 크게 다르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전의 책에서도 개인적인 이야기와 사회적인 이야기를 항상 함께 제시해 오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두 책이 서로 비슷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책의 주제나 소재에 따라 조금 달라질 뿐, 모든 책이 저의 시각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사회에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이 책은 칼럼을 모은 책이다 보니 사회비평적인 이야기들이 조금 더 들어가 있고, 수어나 페미니즘,  장애학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것들의 방향이 달랐던 것 같아요. 

그동안 스스로에게 로드스쿨러, 코다, 영화 작업자, 글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왔고, 그 정체성이 이길보라라는 렌즈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출간된 네 번째 책, 『당신을 이어 말한다』 에서는 이에 더해 ‘아티비스트’ 라는 정체성을 소개하셨죠. 

‘아티비스트’ 라는 말을 발견하고 난 후에 안도감이 들었어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와 정체성이 있고, 그 정체성에 부합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는 건 안도감을 갖게 하는 일인 것 같아요. 

협업하는 프로듀서가 저에게 사회운동가, 활동가로서의 정체성과 작가-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다는 이야길 늘 했었어요. 내 영화와 글이 어느 쪽을 향해야 하는 건가, 둘 중 한쪽을 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한 적도 있었어요. 난 무얼 하는 사람이지 하고요. 지금은 양쪽을 모두 하면 된다고, 자연스럽게 영화 만들고 글 쓰고 이야기를 만들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어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이어가는 매체로 글과 영화를 사용하고 계시죠. 영상도 텍스트와 이야기가 기반이긴 하지만, 글과 영화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담아낼 때 서로 다른 역할을 할 것 같아요. 

맞아요. 영상도 텍스트가 기반이라고 생각해요. 기획안 쓰기, 시나리오 쓰기에서 시작하니까요. 하지만 영화와 책은 관객층도 독자층도 다르고, 할 수 있는 영역도 다른 것 같습니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예를 들면, 동명의 책과 영화가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달라요. 주인공이 농인인 콘텐츠를 만들었을 때, 영화로는 농인인 저희 부모님이 가진 시각적인 풍요로움을 이야기하기 위해 두 분의 풍부한 얼굴 표정을 한번에 보여줄 수 있어요. 책은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보는지, 나의 기억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사람들이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고요. 영화라는 장르가 가진 너무나 흥미로운 지점들, 또 책이라는 매체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두 매체를 통해 실험하고 있는 거지요. 두 매체를 다룰 수 있고 양편을 오가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에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글을 쓰다 번아웃이 오면 영화 작업으로 넘어가기도 해요. 그러다 다시 글을 쓰고요. 두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할 수 있다는 일은 굉장히 감사한 일입니다. 



영화에서 어머님 표정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렇게 해상도 높은 표정을 짓는 중년 여성을 주변에서 많이 볼 기회가 없으니까, 글로 읽었다면 영화로 보여주신 표정을 상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영화라는 매체는 언제 발견하셨나요? 

어릴 때부터 다큐멘터리를 보는 걸 좋아했어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부모님은 영화관에 가는 취향을 가진 분들이 아니니까, 저도 어릴 때 영화관에 간 적이 거의 없어요. TV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자랐는데, 고래와 상어가 나오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어릴 때부터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자연스럽게 앞으로 그것들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열 아홉 살에 처음 다큐 영화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만들어 보니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를 전공하게 되었고요. 픽션을 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저는 논픽션 장르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기 때문에 글과 영화 모두 논픽션 장르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영화 작업을 하고 계시거나 구상하고 계세요?

여성의 재생산권에 관련한 장편 영화를 준비하고 있어요. 잘 준비해 보려고 천천히 작업하고 있습니다.

가을에 관련 주제로 보안여관에서 전시를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전시도 영화 작업의 일부인가요? 

네덜란드 필름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이 있어요. 이전에는 작업을 시작해서 끝내고, 작품이 관객을 만나고 나면 작업이 끝나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과정으로 생각하면 작업이 굉장히 풍부해질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필름 아카데미 이전에도 피칭 과정에서 관객들을 만나 반응을 듣는 일이나 영화 GV, 관객과의 만남을 열심히 했어요.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작업의 일부로는 정의하지 못했는데, 만드는 과정으로 정의하게 된 거지요. 그렇다면 이 과정 자체를 어떻게 관객 분들과, 사회와 호흡하면서 가져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경험도 풍성해지고, 한편으론 영화를 더 많은 분들이 보시게 되는 계기도 되겠네요. 

그렇죠. 전시를 보시는 분들이 가져오시는 이야기들도 영화의 또 다른 씨앗이 될 거라 생각해요. 전시는 10월에 열릴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성장의 여정 

전작 에세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도 밑줄 그어 가며 재미있게 읽었어요. 무엇이 당연한 기준인가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얻어가는 과정이 흥미롭고, 공감도 많이 되었지요. 네덜란드에서의 경험은 이번 책에도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가치의 중심을 바꾸는 일을 이야기하는 작가님에게 다른 사회에서 살아보는 건 생각이 한결 자유로워지는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길 위를 여행하며 배우고 성장한 로드스쿨러지만, 한 도시에서 어느 기간 이상 일상을 살아보는 건 또 다른 경험을 주었을 것 같은데, 어떤 점이 가장 달랐나요? 

네덜란드는 유럽여행을 할 때도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니잖아요. 저도 네덜란드에 여행을 갔으면 제가 배운 것들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여행보다는 살아보시라고 적극 추천할 거예요.

여행으로 만나는 다름과 살아보면서 만나는 다름은 정말 큰 차이예요. 유학생활하면서 작은 것에 깜짝깜짝 놀라고 매일 울면서 지냈어요.. 지금 필름 아카데미는 1년 동안 재정비하며 프로그램을 바꿔서 신입생을 다시 모집하고 있습니다. 내부 구성원들의 커리큘럼에 대한 피드백이 많았고, 내부적으로도 의견에 균열이 생기고 한바탕 혼란이 있었지만 피드백을 적극 수용하면서 전체 프로그램을 바꿔버린 거예요. 유럽 친구들은 학교가 엉망진창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런 과정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유연함과 혁신 같은 것은 살아보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로드스쿨러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친구들이 모두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었는데 (웃음) 여행이 주는 배움도 있지 않나요? 

자기 위치를 바꾸는 것, 일상을 살아가는 흐름과 다른 흐름 속에 나를 물리적으로 위치시키는 것이 여행이고, 그래서 다르게 보기, 낯설게 보기가 여행을 하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장기적으로 지속시키는 일이 살아보기예요. 칸트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면서 사유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불가능한 사람이라 나를 다른 위치에 놓음으로써 낯설게 보기를 할 수 있었어요. 국내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한달 살기든, 다른 흐름 속에 나를 위치하게 하는 것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지가 어디냐 보다는 여행자라는 정체성이 주는 배움이군요.

네, 여행을 하면 카페에서도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되잖아요. 일상생활에선 그렇지 않을 텐데, 자신을 열려있는 모드로 만들면서 여러 가지 감각으로 주변의 흐름을 감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학교를 떠나 여행을 하면서, 공동체와 글방에서 함께 글을 쓰면서,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고 성장했고, 이후 예술학교에서 공부하시기도 했지요. 학교를 떠나 얻은 것들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이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학교를 떠나 아쉬운 것도 있을까요? 

최근에 계속 학교를 다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어요. 일간지 인터뷰를 본 어릴 때 친구들이 연락을 했거든요. 만약 학교에 계속 다녔다면 대학에서 사회학이나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결국 똑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제 삶이 크게 달라졌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영화를 찍는 대신 NGO 에서 일한다 거나, 직업은 달랐을지 몰라도 제가 작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바꾸고자 하는 사회상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직업의 이름은 달라도, 작가님이 하는 일을 나타내는 동사는 같았을 거란 의미겠네요.   

맞아요. 어린 시절에 장래희망이 뭐야? 라고 물을 때 직업에 대한 장래희망 대신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동사나 방향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다시 학교라는 기관에서 공부한 경험은 또 새로웠을 것 같습니다. 반드시 가야 하는 학교라기보다 ‘선택해서’ 간 학교 (한예종, 네덜란드 필름 아카데미) 였으니까요.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로는 선택한 대로 살았던 것 같아요. 대학원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간 게 아니라 이런 배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선택해서 간 것이고요. 저의 경력을 보신 어떤 분들은 시스템 밖에 있는 경험을 하다가 다시 시스템으로 들어온 경험을 했다고 보시고 어떻게 다르냐고 질문하시는데, 저는 다른가? 합니다. 저에겐 똑같거든요. 내가 필요한 배움을 그때 상황에 맞게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시스템 안인지 밖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나의 시간표를 짜고, 나의 시간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저는 아직 로드스쿨러라고 생각해요. 나이가 어떻든, 시스템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로드스쿨러라는 이름은 사회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명하는 것이니까요.



글방에서 만난 친구들, 글방을 여는 마음

이제 ‘글방을 운영하는 사람’ 이라는 정체성을 하나 더해야겠습니다. 책 말미에 소개하신 보라글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어떤 분들이 오시는지, 어떤 글을 함께 쓰시는지 궁금해요.

1기를 마무리하고 이제 2기를 한달 째 운영하고 있어요. 저를 포함해서 총 아홉 명이고요. 

‘머시기마을’ 이라는 곳이 있어요. 마을 사람들도 뭔지 모르는 마을이에요. 20대 후반 여성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모임인데, 제 영화 ‘기억의 전쟁’ 상영회를 자체적으로 조직해서 저를 초대해 줬어요. 가서 재밌게 놀았고, 이 친구들의 에너지가 너무 좋았어요. 계속 뭔가 하셔라, 제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이 분들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를 돌려 읽으면서 교환 일기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리뷰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모두가 볼 수 있는데, 6개월 동안 돌려가며, 택배를 서로 보내 가며 쓰고 읽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일들을 자기만의 속도로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다고 요청해서 만들어진 것이 보라글방입니다. 보라글방 feat. 머시기마을 인 셈이죠. 

(어딘글방의) 어딘이 저에게, 네가 언젠가 글방을 열게 되면 그건 사람들이 찾아와서 같이 하자고 제안할 때다, 그때가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할 때다 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어요. 그게 언제가 될까 생각하면서 내심 부담스러웠는데 머시기 마을 사람들이 저를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글을 쓰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쓸 수 있을까요?” 하고 질문하는 순간, 글방을 열겠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순간이 왔구나 생각했어요. 이 순간이 그 순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어말하기’ 의 순간이네요.

맞아요. 책의 마지막 챕터에 보라글방 이야기를 넣은 이유도 그것이었어요. 이어 말하는 사람들을 계속 만들어나가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엄청난 속도가 아니어도 내 방식대로, 내 속도대로 다른 판을 짜는 일을 계속 해야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보라글방 이야기로 마무리한 거였죠. 

‘어딘글방’ 이라는 글방의 존재를 이길보라 작가님과 이슬아 작가님 글에서 발견하고 아니 저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보라글방엔 어딘글방의 영향도 있을테고, ‘보라글방’ 이기때문에 다른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점이 다른가요? 

저의 위치가 다르고, 피드백의 방법이 다릅니다. 어딘글방은 하자센터의 창의적 글쓰기 수업이 전신이었어요. 이후 학생들이 계속 글을 쓰고 싶다고 어딘을 찾아가서 글방을 연 것이고, 그때 저는 청소년이었으니까 어딘은 선생님 같은 존재였지요. 그런데 저와 보라글방 사람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요. 제가 서른두 살이고 글방 사람들은 대부분 20대 중-후반이거든요. 선생님이라기보다는 먼저 글을 쓴 사람, 먼저 책을 내 본, 영화를 만들어 본 사람으로서, 가이드로서 글방을 함께 하고 있어요. 

제가 하는 일은 어떻게 하면 서로의 글을 사려 깊게 합평하고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날카롭게 피드백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는 일이에요.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에서 배운 피드백 방법, 다르게 사회를 바라보는 법을 적용하는 연습을 해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끌어가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비평을 연습하는 공간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고, 저도 글방을 통해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다정하고 날카롭게’ 피드백하는 훈련이 많이 되어 있지 않잖아요. 날선 공격을 스마트함의 표현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다정함 쪽으로 치우친 경우엔 날카로운 피드백을 불편해하거나 실례로 여기고요. 날카롭고 다정하게 비평하는 법을 연습하는 것은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보라글방의 목표라고 생각해요. 글을 잘 쓰는 것도 목표지만, 이 글방의 목표는 작가가 되는 게 아닙니다. 글방에서 쓰는 어떤 글은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글, 어떤 글은 사람들을 바깥으로 유인하는 글일 거고, 어떤 글은 행동하게 하는 글일 겁니다. 어떤 글은 책이 되겠지만, 책으로 출판되기엔 조금 부족하다 해도 사람들을 움직이는 글이라면 그 자체로 목표를 다하고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딘글방에서 ‘지금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글이 있다’ 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어요. 글이 어떤 공동체를 만드는데 기능할 수 있는지, 이 글을 통해 각자의 목표를 이뤄가고 있는지, 글쓰기와 합평, 피드백하는 일을 통해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지에 집중하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에 꼭 필요한 글을 쓰는 역할을 친구분들이 함께 하고 계시죠. 『당신을 이어 말한다』의 5부, ‘각자의 방식으로 모험하며 살아간다’ 에서 이랑, 이슬아, 이다울, 양다솔, 하미나.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이야기할 때 든든함, 자랑스러움, 신남 같은 기운이 전해졌어요. 책에 등장하는 또래 여성 창작자들은 이길보라 작가님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5부에 친구들 이야기를 꼭 넣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어요. ‘세대’ 라고 하면 너무 클 것 같고, 저희 친구들이 다른 방식으로 판을 짜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친구들의 이야기가 조금 더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90년대생, MZ세대로 주목 받으면서 안타까운 것이 언어나 판을 짜는 방식이 기존의 방식과 너무 달라서 기성 미디어가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였어요. 저와 제 친구들이 하는 작업과 이야기의 방식, 모이는 방식들이 기존 프레임에는 하나도 맞지 않아서 흘러 넘쳐버리는 거지요. 그래서 친구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소개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5부를 신나게 썼어요. 보라글방도 그런 마음으로 계속 언급하려 합니다.

머시기 마을 친구들 중 몇 명은 요즘 생태마을 디자인 교육에 참가하여 숲에서 4주간 살아보는 일을 하고 있어요. 생태마을을 고민하고 생태 전환, 기후 위기,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저는 이런 활동들이 너무 소중하고 이런 친구들의 이야기와 방식이 결국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설명하긴 정말 어려워서, 그 브릿지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생태를 전환하겠다고 숲에 들어가고 누군가는 국회에 들어가고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어야 세상이 변화할 거예요. 어떻게 나의 작업과 영화와 글과 말하기가 기여할 수 있을까, 나는 어느 쪽을 향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작가로서 많이 합니다.

동시대의 친구들이 같이 등장한 것이 큰 힘이 된 것 같아요. 기존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는 동료 그룹이 있다는 것이 든든할 것 같습니다. 

그래 보였으면 좋겠어요. 이슬아, 이다울 작가와 셋이 북 토크를 했는데 재밌었어요. 우리를 소개하고, 이쪽으로 모이라는 이야기를 한 자리였고, 그런 일들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이어 말하기를 하고 싶은 이유도 결국 판을 짜는 일 때문이에요.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혼자는 결코 무언가를 할 수 없잖아요. 혼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 말하고 판을 짜야 내가 살고 싶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판을 짠다는 표현을 많이 쓰시는데, 정확한 의미가 뭘까요. 같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나 시스템을 만드는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해요. 둘 다 필요한 일이고, 또 두 가지 일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요. 저는 제가 해온 일이 늘 판을 짜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학교를 그만둔 것도, 책을 쓴 것도, 영화를 만든 것도 모두요. 그런 세상을 꿈꾼다고 이어 말하고 싶은 사람 모여라, 하고 우리 편들을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판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가 최근의 저의 고민입니다.



이어서 말하기, 듣고 다시 말하기 

책을 읽는 독자들, 영화의 관객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것도 이야기를 지속해 가는 힘을 줄 것 같은데, 어떤 채널을 통해 피드백을 받고 계신가요? 가장 인상적인 피드백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피드백을 받습니다. 온라인으로도, 그리고 영화를 상영하면서는 GV 행사로 관객들을 만나고, 독자들을 만나는 행사에도 참여하고요.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은, 최근에 동해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녀왔어요. 독서동아리 학생들이 제 책 중 세 권 (『길은 학교다』『반짝이는 박수 소리』『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을 읽고 작가와의 만남을 준비해 주었는데, 학생들이 질문을 엄청 많이 준비해서 답하고 말하는 과정에만 세 시간이 들었어요. 세 시간 내내 긴장이 풀리지 않았고, 너무 아름다운 시간이었어요. 제가 2009년에 쓴 글이 계속해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경험이기도 했고요. 

학생들은 학교 밖 공간을 너무나 궁금해 했고, 학교를 뛰쳐나간 청소년이 자라서 영화 만들고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바라보는 경험이 큰 인풋이 되었을 거라 생각해요. 친구들이 한 질문에 바로 답을 하는 대신 질문을 뒤집어보는 질문을 다시 던지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처음엔 당황해 하다가, 질문이 재미있으니까 뒤집어 보는 연습을 같이 했지요. 질문에 대해 또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걸 상상해 보는 연습을 같이 한 흥미로운 시간이었어요. 동시에 미래세대라고 부르는 이 세대와 어떻게 같이 갈까, 뭘 더 할 수 있을까를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나도 충분히 어른이지 않나? 뭐가 어른인가? 질문하게 돼요. 더더욱 급진적으로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대화를 하는 사람 

이길보라는 감독, 작가라는 직업을 떼어 놓고도 다양한 단어로 다채롭게 설명할 수 있을 사람이었습니다. 최근 발견한 정체성인 아티비스트, 오늘의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판을 짜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좋은 대화를 하는 사람’ 이라는 특징을 더하고 싶습니다. 잘 듣고, 어렵고 모호한 개념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면 상대가 사용한 표현을 함께 사용하며 같은 이해를 만들어 가고, 호기심을 갖고 질문하는 이길보라 작가와 대화를 나누어 보니, 보라글방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합평과 피드백의 방식도 여기서 멀지 않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좋은 피드백을 주고 받는 방법을 찾아가는 일은 좋은 대화를 나누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풍부한 표정으로 이야기 나누는 농인들의 세계와 섬세한 음성 언어를 구사하는 청인들의 세계 사이에서 오랫동안 다리 역할을 해 온 경험, 글과 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쌓아온 시선이 빛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이겠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사려 깊고 날카롭게 피드백하며 다정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세상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를 풍부하게 나눌 수 있을까요.


*이길보라(작가, 영화감독)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 사람. 농인 부모 이상국과 길경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아시아 8개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밖 공동체에서 글쓰기, 여행, 영상 제작 등을 통해 자기만의 학습을 이어나갔다. ‘홈스쿨러’, ‘탈학교 청소년’ 같은 말이 거리에서 삶을 배우는 자신과 같은 청소년에게 맞지 않다고 판단해 ‘로드스쿨러’라는 말을 제안했고, 그 과정을 2008년 자신이 제작하고 연출한 첫 영화 〈로드스쿨러〉에 담았다. 지은 책으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길은 학교다』, 『기억의 전쟁』(공저), 『우리는 코다입니다』(공저) 등이 있다. 2021년 네덜란드 정부가 전 세계 여성 리더에게 수여하는 젠더 챔피언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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