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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 망가진 책을 사랑하는 수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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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수선가’라면, 책을 아주 깨끗이 볼 줄 알았다. 하지만 재영 작가는 그 누구보다 책을 험하게 보는 독자이자, 망가진 책을 사랑하는 수선가다. 책 주인의 독서 습관과 사연을 고스란히 담은 채 낡아온 책을 받아 들며, 그는 이것 또한 사랑의 여러 형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억을 한층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수선가의 역할이다. 그렇게 완성된 한 권의 책은 오랜 세월을 견딘 사랑의 흔적이 된다.



옷 수선처럼 친숙하도록

한국에서 ‘책 수선’은 아직 낯선 분야예요.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죠.(웃음) 책을 새로 사는 것보다 비싼 비용이 들 수도 있는데, 과연 맡기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했고요. 작업실을 열 때 사업자등록증을 만들러 세무서에 갔거든요. 직원분들이 책 수선이라는 직업을 처음 들으니까 어디에 분류할지 회의를 하시더라고요. 어떻게 이 일을 알려야 하나 고민이 됐죠.

예상과 달리 꾸준히 의뢰가 들어온다고 들었어요.

저도 놀랐어요. 이 분야가 있는 줄 몰라서 못 맡긴 것이지, 다들 추억의 책이나 고치고 싶은 책 한 권쯤은 있는 것 같아요. 

‘복원’이 아니라, ‘수선’이라는 말을 택한 이유도 궁금했거든요. ‘복원’이 원본 그대로 되돌리는 걸 말한다면, ‘수선’은 파손된 부분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좀 더 열린 개념이라고 하셨어요. 

보통 의뢰인분들이 책을 가져오면 “복원해주세요” 하시거든요. 그런데 이야기를 나눠 보면, 원하시는 게 ‘수선’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그 차이를 알려드리면서 어떤 방향이 나을지 상의를 하죠. ‘수선’이라는 말을 택한 건, 안 그래도 낯선 분야를 조금이라도 쉽게 전하고 싶어서였어요. 옷 수선을 맡기듯이, 책 수선도 생활 속에서 친숙하게 느꼈으면 해요.

책 수선가라면, 책을 아주 깨끗하게 볼 것 같았는데 정반대여서 의외였어요.

친구들이 놀랄 정도로 험하게 책을 보는 편이에요. 밑줄도 긋고 낙서도 하고요. 보통은 그러면 책을 막 다룬다고 하는데요. 이것 또한 책을 아끼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오히려 저는 망가진 책을 좋아해요. 서점에 가도 일부러 흠이 있는 책을 골라서 사 올 정도로요.

“나는 이 파손들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30쪽)고 쓰기도 했죠. 

‘파손됐다’는 표현에는 이미 부정적인 느낌이 있잖아요. 저는 긍정적으로 책이 변화해서 다른 무언가가 됐다고 말하고 싶어요. 파손 형태를 보면, 책 주인의 독서 습관이 드러나거든요. 책을 꾹꾹 펼쳐서 보는 분도 있고 접거나 낙서를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 다른 책이 되어가잖아요. 그런 다양한 형태를 관찰하는 게 즐거워요.

책 수선 분야에 뛰어든 계기도, 책이 망가진 모습에 매력을 느껴서였다고요.

맞아요. 책 수선 일을 하면 다양하게 망가진 형태를 원 없이 볼 수 있으니까요. 사실 이 일을 택한 것도 우연의 결과였는데요. 원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서 파인 아트와 디자인을 전공했거든요. 그러다 미국 유학을 갔는데, 지원한 학교가 북아트와 페이퍼 메이킹에 특화된 곳이었어요. 교수님이 책 수선가로 일하며 기술을 배우라고 하셔서 ‘책 보존 연구실’에서 일하게 됐는데, 책이 망가진 모습들이 너무 흥미롭더라고요. 오래된 종이는 손만 대면 부서질 정도로 형태가 달라지거든요. 종이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진 매체인데, 이렇게 한순간에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된다는 게 신기했죠.

“축적된 시간의 흔적에 매료”(122쪽)된다고 하신 것처럼, 낙서도 하고 손때도 묻히면서 유일무이한 책이 되는 것 같아요.

책 보존실에서 일할 때,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색색깔의 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은 책을 발견한 적이 있어요. 남들이 보면 책을 훼손한 것일 텐데, 이상하게 그게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제 상사가 그 책을 소장하기도 했어요. 틈날 때마다 책을 폐기하는 창고에 가서 망가진 책을 고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죠. 



한 권의 책을 다루는 일

책 보존실에서 처음 일하게 됐을 때, 풀질과 가위질부터 배우셨다고요. 

처음에는 자존심이 조금 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어요.(웃음) 보통 우리가 다루는 종이는 다 빳빳한 새것이지만, 보존실에 오는 책들은 정말 오래되고 약한 종이들이에요. 똑같이 가위질을 해도 결과물이 너무 달라지니까 필요한 힘도 도구도 다 신경 써야 하죠. 평생 해온 간단한 일도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거예요. 실제로 그 기간을 못 견디고 그만두는 사람도 많은데요. 제게는 제일 중요한 시기였던 것 같아요.

책 보존 연구실에서 일하다가, 개인 작업실을 여셨잖아요. 일의 성격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개인 작업실도 보존실 일이랑 비슷하겠지 생각했는데, 실제로 들어오는 책을 보니까 한 권 한 권 추억과 가치가 있는 거예요. 보존실에서는 도서관의 장서를 다루니까 개별 책을 감정적으로 이해해야 할 일도 없었고, 한 권에 집중할 수 있는 기술이나 예산도 제한적이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매 의뢰가 특별하다는 걸 예상하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스스로를 기술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구나. 책 한 권의 사연에 깊이 들어가야 하는 일이구나 싶었죠.

실제 작업 과정이 궁금했어요. 한 권의 책을 수선할 때, 49단계의 과정이 필요하다고요.

책마다 필요한 과정이 다 다른데요. 일단 의뢰가 들어오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봐요. 아무리 의뢰자분이 찢어진 부분을 수선해달라고 해도, 구조적인 문제가 있으면 그것부터 해결해야 하거든요. 

작업 전에, 의뢰자분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신다고요.

이 책이 의뢰자분에게 왜 중요한지, 왜 수선하고 싶은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선물용인지, 자주 펼쳐볼 용도인지, 소장용인지에 따라서 수선의 방향이 정해지고요. 만일 외관을 바꿔야 한다면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인지도 많이 물어보고요. 최근에는 이 분야가 조금씩 알려져서인지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많아졌어요. 소중한 무언가를 상대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감사하죠. 

아무리 길게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도,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결과물을 내놓는 건 어려운 일일 것 같아요.

굉장히 어렵죠. 그게 어떻게 보면 핵심이잖아요. 의뢰인이 빨간색이 좋다고 해도 제가 생각하는 빨강과 다를 수 있으니까요. 책은 한 권밖에 없고, 한번 수선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매번 긴장이 돼요. 그래서 최대한 샘플을 여러 개 보여드려요. 여러 가지 실물을 놓고 의뢰자가 선택하도록 하죠.

완성된 책을 의뢰인에게 보여줬을 때의 희열이 있을 것 같아요.

솔직히 그 순간은 너무 떨려서 즐길 새가 없어요.(웃음) 늘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걱정이 앞서죠. 수선이 끝난 후에야 메일을 통해서 의뢰자분들의 사연을 듣고 “아, 내가 이런 일을 해냈구나” 하면서 좋아해요. 이번 책을 쓰면서 제 일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내 일이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구나 새삼 느꼈어요.



그것 또한 ‘책의 인생’

책 작업 도중에 나오는 조각을 모으시고, 책 사이에 끼어 죽은 벌레도 함에 담아 보관하신다고요. 보통 쉽게 버려지는 것을 간직하시네요. 

망가진 책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증거의 한 조각으로 두려는 마음이 있고요. 또 하나는, 온전한 형태로 죽어있는 벌레가 불쌍해서예요. 곤충들은 종이가 따뜻하고 서식환경에 맞아서 들어간 것뿐인데 눌려 죽는 거잖아요.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함을 만들어서 넣어두게 됐어요. 

책의 역할을 열어두시는 것이 좋았어요. 어린 시절 추억의 동화책이나 인테리어 소품용 책도 나름의 ‘책의 인생’을 산다고 하셨죠. 

어릴 때, 책을 많이 읽는 어린이는 아니었거든요. 읽는 것보다는 동화책을 꺼내서 탑을 쌓고 놀고 그런 용도로 책과 가까워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갖고 놀던 책이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거든요. 제목과 표지만 기억하던 책을 다시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요. 흔히 책을 아낀다고 하면, 밑줄도 절대 안 긋고 깨끗이 읽는 것만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을 제한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책을 갖고 놀면서 친해졌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전집이 유행했을 때, 장식용으로 책장에 꽂아두는 것도 이해가 되네요.(웃음)

책의 역할도 계속 변화하고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장식품으로 쓰는 책도 좋아하거든요. 읽는 용도가 아니라고 해서, 책의 본질이 훼손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최근에 한 카페에서 손님 앞에서 책의 한 페이지를 찢어서 컵받침으로 주는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어요. 어떻게 책을 그렇게 쓸 수 있냐는 것부터, 어차피 그 사람 책인데 괜찮은 것 아니냐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요. 저는 반반이에요. 책을 만든 사람들을 떠올리면 예의가 아니지 싶다가도, 조금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것도 책을 활용하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싶거든요. 책이 너무 진지한 것이 될수록, 마음에서 멀어지기 쉬운 것 같아요. 저는 책을 다루는 사람이니까 열린 태도를 가지려고 해요. 

책 수선가로서 ‘이것 하나만은 꼭 해보고 싶다’ 하는 일이 있을까요?

책 수선가의 전문성을 살려서 다른 문화 영역과 협업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책 수선은 책 수선에서 시작해서 끝나는 경우가 많아, 작업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 혼자 하는 일이 아닌, 다른 예술 분야와 시너지 효과를 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재영

망가진 책을 수선하는 ‘재영 책수선’ 대표. 기술자이면서 동시에 관찰자이자 수집가다. 오늘도 연남동의 개인 작업실에서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한다.


▶ Twitter : @pencilpenbooks

▶ Instagram : @pencilpenbooks_jy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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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 책수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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