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유 빛 스웨터를 입은 아이와 쪽배처럼 봄길을 걷고 싶다. 함께 소네트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
스물두 살의 봄날, 이연진 저자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이를 키우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조차 못하던 시절이었다. 셰익스피어를 흠모하고 랭보의 시에 심취했던 사람. 책을 읽고, 미술관에 가고, 영화를 볼 때에야 생기가 돌던 그는 엄마가 되어 시 대신 밥을 짓는 삶을 살게 된다. 출산은 개인의 삶을 부지불식간에 흔들었지만, 그렇다고 껍데기뿐인 나로 살 수는 없었다.
그는 아이를 보며 영화 <아멜리에>를 떠올리고, 문득 ‘빨간 머리 앤’이라면 육아를 어떻게 해냈을까 궁금해하는 엄마다. 엄마가 된 지 10년째.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랭보의 시와 고흐의 그림과 베토벤의 연주는 결코 육아에 무용한 것이 아니었다. 포기하지 않고 가꿔온 나의 취향이 육아를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는지 깨달았다는 이연진 저자는 말한다. “여기 잘 구워진 따끈따끈한 일상 나왔어요. 이게 우리의 시예요”라고.
엄마가 된 지 10년, 이제야 보이는 것들
첫 책 『내향 육아』도 기존의 육아서와 결이 달랐는데, 『취향 육아』는 더욱 그랬어요. ‘육아’ 카테고리에 분류되어 있지만,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쓴 에세이에 가까워요.
엄마로 10년을 살았으니, 이제 한 번쯤 숨을 고를 시점이 된 것 같아요. 사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도 나의 일부이고, 삶의 한 자락인데 육아에 오롯이 빠져있을 때는 그걸 몰랐어요. 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이 너무 컸거든요. 그런데 돌아보니 결코 그렇지 않더라고요. 지난 시간들을 거슬러 오르며 그동안 느낀 생각, 경험들을 글로 엮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 책이 좋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의 성장을 지척에서 보는 경이로움, 육아의 행복이 구체적으로 담겨있었거든요.
한동안 ‘엄마에게도 삶이 있다. 엄마로서만 살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많아졌어요. 신선한 이야기였고, 그런 말을 통해 저도 힘을 얻을 때가 있었어요. 동시에 한편으로는 조금 외로웠죠. 저는 전업주부로 온전히 아이를 보는 삶을 살았으니까요. 개인의 삶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나는 엄마로도 잘 살고 싶은데, 엄마인 나의 삶도 아름다운데… 세상은 왜 이 삶을 헬육아라고 부를까?’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죠. 실제로 전업주부로 지내는 엄마들로부터 비슷한 토로를 들으며 힘이 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평범하고 작은 삶이지만 그 안에서도 얼마든지 반짝이는 게 있거든요.
그 반짝임에 빛을 더하는 게 취향이었던 거죠.
엄마가 되면 벼락처럼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져요. 포부나 꿈도 바뀌죠. 저는 아이를 낳고 결연해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 순간에 변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내가 가진 에너지를 온통 아이와 가정을 돌보는 데 쓰다 보니 점점 힘들어졌어요. 저희 아이는 기관을 거부해서 7살까지 가정보육을 했기 때문에 새로운 활동으로 자기 성장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죠. 지금은 ‘삶이라는 강물의 중간쯤 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앞으로도 계속 흘러갈 테고, 이만큼 흘러왔다고 해서 예전의 내가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알죠. 무언가는 단절이 되고, 무언가는 여전히 남은 채 내 삶을 이루어갈 거예요. 저는 이걸 ‘취향’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아니었던 시절의 나’와 ‘엄마인 나’ 사이에서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최소한의 개연성이요.
“깎여짐은 괴로웠지만 둥글어짐은 편안했다. 가열차게 투덕대던 ‘이전의 나로 남고 싶은 나’와 ‘주부이자 엄마인 나’가 그럭저럭 화해한 것도 같았다(83쪽)”는 문장에 공감했어요. 출산을 하면 저절로 엄마가 되는 줄 알았는데, 엄마의 정체성을 갖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20대의 저는 하이힐을 신고, 시집을 들고, 향수를 뿌리고, 립스틱을 바르는 사람이었어요(웃음). 의식적으로 만들어 온 나의 모습, 말하자면 페르소나를 끊어내는 게 정말 힘들었죠. 온종일 추레한 옷을 입은 채 지친 얼굴을 하고, 밥 한 끼 차리는 것도 허둥지둥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연이어 좌절을 했죠. 잠시 쉬어가야 할 시기에 웅크리지 않고, 나를 억지로 드러내려고 했던 게 결국 상처였고, 더 많은 에너지를 앗아갔던 것 같아요. 나만 알던 세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단단한 그 세계에 금이 가는 순간은 정말 아파요. 그런데 실금 같은 틈새로 ‘아이’라는 빛이 들어오면 프리즘처럼 정말 아름다운 색채가 펼쳐지더라고요. 지난 10년은 이걸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육아도 아름다울 수 있어요
육아를 시작하고 생긴 취향도 있을 것 같아요. 아이 덕분에 새롭게 좋아진 것들이 있을까요?
저희 아이는 과학을 정말 좋아해요. 반면 저는 과학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죠. 아이 덕분에 ‘뉴턴의 법칙’ 같은 걸 다시 보게 되었는데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더라고요. 또 자연에 감응하게 되었어요. 계절의 오고 감을 아이의 감각으로 함께 겪다 보니 모든 풍경이 다르게 보여요. 사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기보다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아이와 함께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덕분에 취향이 더욱 공고해지는 느낌이에요. 육아를 하며 어떤 취향은 흐려졌지만, 더욱 또렷하게 좋아지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요?
저는 10대 때부터 랭보를 좋아했어요. 저의 평생을 함께한 작가라고 해도 무방하죠. 랭보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어요. 스무 살에 시 쓰기를 멈춘 시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저와 같은 삶에 대해서는 시로 남기지 않았죠. 그럼에도 여전히 묘하게 위안을 받아요. 특히 부모님에 대해 쓴 구절을 볼 때 그렇죠. 저는 랭보의 삶을 보며 상처받고 함께 아파했던 사람인데요. 아이를 키우다 보니 랭보의 삶도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쩌면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오랜 취향의 이면을 다시 보게 되는 거죠.
아이와 지내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루의 루틴이 있나요?
책에 썼듯이 오후 4시에 아이와 티타임을 꼭 가져요. 테이블에 둘러앉아 간단한 간식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요. 오늘도 아이가 “엄마 티타임 하기 전에는 꼭 와야 돼”라고 말했을 정도로 우리 두 사람 모두가 기다리고 좋아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뭘 하든 좋은 기분이 먼저. 숙련은 그 다음이라 정했다(27쪽)”는 문장은 초보 엄마들이 반드시 새겨야 할 구절이었어요.
아이가 서너 살쯤 되었을 무렵에 절실히 느꼈어요. 그때가 엄마의 파이팅이 넘칠 시기거든요. ‘나도 육아서에 나오는 엄마들처럼 해보리라!’는 의지가 충만해서 엄마표 놀이를 해주겠다고 밤새 준비하고 아침에 못 일어나곤 하잖아요(웃음). 그러다 보면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하나’ 싶은 생각이 들고, 아이가 놀이에 호응해주지 않으면 신세한탄이 나와요. 그럼 하루를 망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패턴을 아예 버렸어요. 무엇이든 조금 덜 해도 되니까 우리 둘의 기분이 좋은 상태로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죠.
작가님에게 가장 힘이 되었던 글은 무엇인가요?
‘팬이에요’라는 제목의 글이요. 저에게는 취향이 너무 소중했어요. 꿈의 일부이기도 했고요.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고, 전업작가가 되고 싶었던 시절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취향은 곧 나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그 세계가 와해되는 일이 생긴 거예요. 아이 하나가 태어났을 뿐인데, 내 삶에 일어난 어마어마한 균열에서 오는 좌절감이 정말 컸어요. 그동안 이 감정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치열했던 것 같은데요. 신기하게도 어느새 아이와 나 사이에 교집합이 생기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세계가 열리더라고요. 아이는 너무 예쁘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영영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분들이 읽고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어요.
별만 바라보다가, 발아래 들꽃을 발견한 기분
“내 살림, 내 물건을 장만하는 일은 결국 아이 삶에 배경을 놓아주는 일”이라고요. 작가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기억에 남는 부모님의 물건이 있나요?
부모님이 골동품 마니아셨어요. 좋게 말하면 골동품이고, 나쁘게 말하면 구닥다리인 물건이 집에 많았죠. 어릴 때는 쓸모가 없는 물건들을 왜 모으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나이가 드니 저도 오래된 것들이 좋아져요. 또 부모님이 등산을 좋아하셔서 저를 끌고 다니셨거든요. 도감을 가지고 다니면서 “이건 무슨 꽃이고, 이건 무슨 새야”하며 알려주곤 하셨는데 어릴 때는 전혀 궁금하지 않고 집에서 쉬고만 싶었거든요(웃음). 그런데 어느새 제가 숲 속에 들어와 살고 있고 자연을 떠난 삶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물론 부모님께서 취향을 강요하거나, 설명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저 삶에서 보여주신 모습들이 제 안에 스며든 것 같아요.
“부모의 사소한 취향이 아이 삶의 밑그림이 된다(8쪽)”는 거죠.
부모님의 삶은 곧 나와 함께 공유했던 삶이기도 하잖아요. 누구나 삶의 도입부는 부모가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시작해요. 내가 삶의 주연이라면, 무대의 배경을 부모가 놓아주는 셈이죠. 실제로 유명한 예술가들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이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요. 예를 들면 <절규>를 그린 화가 ‘뭉크’는 아빠가 의사여서 어릴 때부터 죽음을 많이 보고 자랐어요.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빠가 아이를 병원에서 키우다시피 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찌 보면 그에게는 아픔과 죽음이 삶의 기조였던 거죠. 이게 작품에서도 묻어 나오는 거예요. 물론 어린 시절의 어떤 요소가 한 사람의 전부가 될 순 없고 개인의 노력에 의해 삶은 변할 수 있지만, 분명 부모의 취향과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든 아이에게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책을 읽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아이를 향한 엄마의 다정한 태도였어요. 아이에게 불쑥 화내곤 했던 시간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저희 집 앞에 조그만 마당이 있는데 며칠 전부터 잔디가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날씨가 이렇게 춥고, 며칠 전에는 눈까지 내렸는데 말이에요.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햇살이에요. 대기는 여전히 차가운데, 해가 조금 길어졌고 햇살이 봄처럼 따뜻해졌죠. 잔디가 그걸 알아채는 거예요. 이 광경을 보면서 생명을 살리고 꽃을 피워내는 건 결국 ‘온기’구나 싶었어요. 때로는 엄마가 화를 내고 쌀쌀맞을 수도 있죠. 맑은 하늘에서도 갑자기 눈이 내리곤 하잖아요. 그런데 내 마음의 바탕이 따뜻하다면, 화가 나더라도 숨을 한번 참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준다면 아이는 그 온기를 크게 느낄 거예요.
인스타그램 ‘그림에다(@grime.da)’ 작가의 계정에서 『취향 육아』 출간 기념으로 잊고 있던 나의 취향에 대해 댓글을 다는 이벤트를 했죠. 취향을 잊은 엄마들의 수많은 사연을 보며 울컥했어요.
저는 답변이 정말 다양해서 놀랐어요. 밴드 보컬이었던 분, 스쿠버다이빙을 하시는 분 등 상상도 못했던 일을 했던 분들이 엄마로 살고 계시더라고요. 어떤 분께서는 ‘이런 질문을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해주셔서 마음이 찡했는데요. 육아를 하는 시기는 그동안의 내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기에 무척 좋은 시간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 진심을 다하시되, 나의 정체성을 지탱해주는 것들은 꼭 간직하며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이 책을 집 한편에 두었다가 가끔 들춰보며 위안을 얻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반짝이는 취향을 이야기하던 작가가 책의 마지막에서는 취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해요. 어떤 의미인가요?
줄곧 칭송받는 예술가를 동경했어요. 그러다보니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놓치고 살았는데 아이가 그걸 알려줬어요. 저는 사람이 태어나서 말하고 혼자 숟가락질을 하기까지 그토록 긴 시간이 걸리는 줄 몰랐어요. ‘나는 게 아니라 걷는 게 기적이구나’라는 깨달음이 매일 있었죠. 이러한 일상을 살면서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던 나의 취향, 위대한 작가들이 아니어도 내 삶은 충분히 괜찮고, 아름답다는 걸 느꼈어요. 밤하늘의 별만 바라보고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발아래 들꽃을 발견한 기분이라고 할까요.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이 소소한 행복을 결코 몰랐을 거예요. 아이라는 작품이 너무 아름답고, 아이가 열어주는 세계가 너무 좋아서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연진 흘러가 버리는 모든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마음을 아껴 기록합니다. 손 흔들며 학교 가는 아이 뒷모습을 오래 바라봅니다. 프랑스어·영어 문학과 교육을 전공했으며, 짧지 않은 시간 좋은 분들로부터 미술사학을 배웠습니다. 심미적 취향 생활자, 다정하고 느리게 살아가는 엄마로, 숲 곁에서 생활하며 에세이를 기고합니다. 내향인의 책육아를 담은 『내향 육아』를 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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