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삶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곽미성 작가는 십대 후반에 불현듯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태어난 환경은 선택할 수 없었지만 남은 삶은 뜻대로 살아보겠다는 의지였다. 낯선 나라에 정착해 20년 넘게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는 언젠가부터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자주 매료되었다고 한다. 곽미성 작가의 세번째 책 『다른 삶』은 ‘이대로 삶을 지속할 수 없다’는 확신을 외면하지 않은 용기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의 조건을 바꾸겠다는 결심
3년 반만의 귀국이시라고요. 오랜만에 찾은 한국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요?
아무래도 코로나로 인한 변화가 가장 인상적으로 남을 것 같아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전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거든요. 마치 물류창고에서 어딘가로 배송되듯이 방역복을 입은 직원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정말 많은 분들이 밤낮없이 고생하시는구나’ 생각했어요. 또 제 조카가 2018년에 태어났거든요. 3년 반만에 처음 봤는데, 벌써 다섯살이라는 거예요. 프랑스였다면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이제 세 살이 갓 넘었을 텐데(웃음). 다시 한번 한국식 나이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였어요.
이번 책에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 나와 타인’의 이야기가 담겼어요.
오래 전부터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저 또한 인생의 조건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프랑스 유학을 떠나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 두려움을 떨치고 저질러야 성장한다고 믿게 되었거든요. 앞으로도 삶의 전환점이 되는 결심이 또 있었으면 좋겠고요.
저는 익숙한 환경을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제가 유학을 결심한 스무 살 무렵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게 많지 않고, 크게 잃을 것도 없는 나이이기 때문에 실행이 어렵지 않을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그렇지 않잖아요. 저는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그런지 익숙한 환경을 버리고 새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부럽고 존경스러워요.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인생의 조건을 바꾸겠다는 결심이 어떻게 프랑스 유학으로 이어졌나요?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서 방황하던 시기였어요. 영화를 공부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우연히 미술사 책을 읽고 미술사 공부에 빠져들었던 시기이기도 했죠. 서양미술사 책에 나오는 작품들을 직접 보고 싶어서 프랑스 여행을 갔다가 퐁피두 센터 안에 있는 도서관을 들르게 되었는데, 거기서 충격을 받았어요.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영화 서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결심했어요. 영화든 미술사든 공부를 하려면 프랑스에 와야겠다고요. 그날부터 모든 여행 계획을 접고, 파리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을 수소문했어요. 유학 생활과 영화학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유학 준비를 해서 5개월 후에 떠났죠.
작가후기에 이렇게 쓰셨어요. “3년이 넘는 시간동안 매일 같이 생각했다. 내가 이 책을 과연 쓸 수 있을까, 하고.(258쪽)” 책을 완성하기까지 고민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제가 프랑스로 날아와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삶을 시작했던 사연, 그리고 그 이후의 인생에 대해 쓰는 내내 ‘이게 사람들이 읽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글의 진실성도 계속 의심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글쓰기의 의미에 회의가 생기더라고요. 이 과정이 오래 이어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제가 쓴 글을 보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몇 달씩 글을 외면한 채 지내기도 했죠. 이번 책은 전작과 달리 제가 살아온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뤄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된 원동력은요?
이사를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면서 제가 그동안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13년 만의 이사를 계기로 저를 돌아볼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내려놓으며 편안해졌어요. 글은 쓰는 사람의 상태를 너무나 투명하게 반영해요. 그 사실이 자주 두렵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안고
이사한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오랫동안 햇빛이 잘 드는 큰 창과 커다란 테이블이 놓인 거실을 꿈꿨는데, 새 집에서 그런 공간을 갖게 됐어요. 거실에서는 매 시간마다 반짝이는 에펠탑을 볼 수 있죠. 그보다 더 마음에 드는 공간은 서재예요. 저는 보통 새벽에 글을 쓰는데, 책상 너머 창이 정확히 동쪽이라서 해가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서재만큼은 최대한 내밀하고 창의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 신경을 썼어요. 안에 들어서기만 해도 집 밖에서 쌓인 소소한 스트레스와 잡념을 잊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죠.
파리의 부동산 시장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우여곡절 끝에 집을 매매하게 된 스토리가 책에 담겼는데, 집을 소유한 이후의 마음은 어떤가요?
단순히 ‘소유’에서 오는 만족감은 예상보다 크지 않았어요. 그보다 당분간은 집을 사느냐, 마느냐에 대해 남편과 백분토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해졌죠(웃음). 둘이 함께 어떤 큰 일을 한 가지 해냈다는 뿌듯함도 있고요.
“20년을 이방인으로 살다 보면, 이방인이 정체성이 된다(139쪽)”고요. 이방인의 정체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저에게 이방인은 낯선 존재, 본래 그곳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의미예요. 스무 살 이후부터 늘 ‘먼 곳에서 온 다른 존재’로 여겨지며 살다보니 이제 저를 다르게 보는 시선에 익숙하고 때로는 편안하기까지 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파리에서 새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차이나타운의 아파트를 고민하기도 했는데요. 그때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나 홀로 동양인’으로 존재하는 게 더 익숙한 저의 마음을 확인하고 당황하기도 했죠. 저는 ‘다른 사람’으로 여겨지는 일이 쓸쓸하고 외롭다고 하면서도 매번 이방인이 되는 상황을 선택하고 있더라고요.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낯선 존재가 될 때 느낄 수 있는 해방감과 자유를 놓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한편 아시아 여성으로 차별받는 일에는 참지 않는 모습에 뭉클했어요. “나만의 일로 여기고 조용히 넘어가는 건 일종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외국생활의 해를 거듭할수록 묵직하게 마음을 누른다(69쪽)”고요. 일종의 사명감일까요?
파리에 살다 보면 프랑스어를 못하는 한국인들을 만나는 일이 많아요. 거리에서 관광객을 마주치기도 하고, 아직 프랑스어에 능숙하지 못한 유학생이나 주재원들도 많죠. 그런 분들을 돕고 때로는 지켜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사명감이 들어요(웃음). 저는 원래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닌데,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그동안 동양에서 온 이방인으로 살며 겪은 억울한 경험이 많기 때문인가 봐요.
작은 선택들이 만든 ‘다른 삶’
오랜 기간 영화감독을 꿈꾸셨다고요. 낯선 나라로 불쑥 유학을 떠났을 정도로 영화가 좋았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결국 ‘다른 삶’에 대한 관심이었던 것 같아요. 어두운 공간에서 스크린에 빛이 영사될 때 그 흡입력이 엄청났어요. 두세 시간 동안은 영화에 몰입해 타인의 삶을 함께 살아보고, 고민하는 경험이 너무 매력적이었죠. 내가 처한 현실은 비루하고 생활은 단순하게 흘러가지만 영화를 통해 세상의 다양한 삶을 만날 수 있는 게 좋았어요. 그렇게 내 삶도 더 멀리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되고요.
“진짜 버티기는 생계의 문제다. 생계가 문제가 되지 않으면, 진짜 버티기가 아니다(176쪽)”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어요. 현실적인 이유로 꿈을 포기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으세요?
지금도 영화하는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할 때 가장 즐거워요. 그들의 삶이 제일 부럽고요.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제가 영화를 계속했다면 그들처럼 의연하게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사람마다 각자 타고난 그릇과 재능이 있는데, 저에게는 현대 사회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언젠가 기회를 만들어 볼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때가 있고, 영화를 만드는 일에 나이 제한은 없으니까요.
작가님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영화’가 지금은 ‘글’로 치환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2013년 1월, 파리로 가는 밤 비행기 안에서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써보자’는 생각을 하셨다고요.
영화를 접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3년쯤 됐을 무렵이었어요. 영화를 만들고 시나리오를 쓰는 일을 하며 10년여를 보내다가, 저의 생각과 개성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 오니 지쳤던 것 같아요. 이대로 지속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들더라고요. 이전부터 글을 써왔지만 보통 시나리오나 생각을 길게 정리하는 수준이었거든요. 문득 ‘영화를 위한 글을 쓸 수 없다면 책을 위한 글을 써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가 되는 건 평생 한 번도 꿈꿔보지 않은 일이라 막막했는데요. 당시에 쓴 일기를 보니 ‘너무 늦은 나이지만, 그래도 시작해 보자’ 같은 말들이 써있더라고요. 그때 겨우 서른 세 살 즈음이었는데 말이에요(웃음). 그 작은 결심이 여태껏 이어져 다른 삶이 만들어졌어요. 지금은 글쓰기가 제 삶을 지탱하는 힘이에요.
책을 쓰고 난 뒤 비로소 깨달은 생각이 있나요?
원고를 완성할 무렵에 불현듯 깨달았어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해 새로 시작하는 삶은 ‘이전과 다른 삶’이기도 하지만, ‘다수의 삶’과도 다르기 쉽다는 걸요. 그러니 보편적이지 않은 삶이란 누구에게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이건 누구든 사회의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는 삶의 모양도 그만큼 다양해질 수 있어요. 현재의 상태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그분들께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곽미성 파리 1대학과 7대학에서 영화학 학사, 석사, 박사준비과정(DEA)을 마쳤다. 몇 편의 영화작업 후 우리나라 방송사의 파리지사에서 7년간 근무했다. 지은 책으로 『그녀들의, 프랑스식, 연애』, 옮긴 책으로 『파리지엔은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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