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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자기라는 존재를 느낄 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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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부터 일산에 살고 있는 은희경 작가. 오랫동안 신도시에서 살고 있는 까닭일까. 유독 신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았다. 올해 펴낸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이하 『단 하나의 눈송이』)의 주요 배경도 신도시, 또는 낯선 이국이다. 새 작품을 쓸 때마다 장소를 옮겨 가며, 펜을 드는 작가는 『단 하나의 눈송이』를 강원도 원주 토지문학관, 제주, 뉴욕, 처음 가본 카페에서 썼다. 표제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는 2008년 겨울, 토지문학관에서 쓴 작품이다. 은희경 작가가 장소를 선택하는 기준은 ‘장소 자체에 큰 성격이 없는 곳’이다. 온전히 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에서 작가는 새로운 글감을 떠올린다.

한 번에 외우긴 참 힘든 제목,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는 일본 시인 사이토 마리코의 작품 「눈송이」 에서 따왔다. 비슷하지만 명백히 단 하나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눈송이. 사람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소설집에 실린 6개의 단편은 연작 형태를 띤다. 표제작의 주인공 안나는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의 소년의 엄마, 「프랑스어 초급과정」 의 주인공이 품고 있던 태아는 「스페인 도둑」 에서 아들 ‘완’으로 등장한다. 장편으로 써도 됐을 법한 이야기, 작가는 쉽사리 빠져 나오지 못한 인물에 대해 생각을 거듭했다. 퍼즐을 맞추기라도 하듯, 모든 작품을 읽고 나면 하나의 풍경처럼 보인다. 작가의 의도대로 읽힌 셈이다.

은희경 작가가 주로 출몰하는 요지, 홍대의 한 카페에서 작가를 마주했다. 작품이 나오면 더 바빠지는 것이 스타 작가의 일상. 인터뷰, 저자와의 만남 등 여러 행사로 쉴 틈이 없는 요즘이지만, 행복한 일과다. 2012년 펴낸 장편 『태연한 인생』이후 2년만의 신작이니, 은희경을 기다린 독자에게도 반가울 따름이다. 은희경에게 찾아온 봄은 또 어떤 풍경을 만들어낼까. 4월에는 소백산 천문대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은희경이 독자에게 꺼내 놓은 말, 듣다 보니 잉여의 감정들이 마음을 후볐다.
풍경은 늘 그렇게 있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조금은 다를 것이다. 결국 시간이 개입된다는 뜻이겠지. 풍경을 보기 위해 내가 간다. 대체로 헤맸다. 익숙한 시간은 온 적이 없다. 늘 배워왔으나 숙련이 되지 않는 성격을 가진 탓이고 가까운 사람들이 자주 낯설어지는 까닭이다. 왜 그럴까. 시간이 작동되는 거겠지. 내 탓도 네 탓도 아니다. 내가 어떻게 그곳에 닿느냐에 따라 풍경이 달라진다고 여겼을 때는 그랬다는 말이다. 지금 이 풍경 앞에서 생각한다. 내가 풍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실려갔다. 떠밀려간 것도 아니고 스침과 흩어짐이 나를 거기로 데려갔다. 이런 생각을 하던 시간들이 이 책 속 이야기가 되었다. 쓸 수 있다, 고마운 일이다. _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작가의 말



독립적이지만 하나의 풍경이 되는 소설집

한 때, 일산의 어느 카페에 가면 은희경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웃음). 카페에 갈 때는 여유로울 때가 아니라, 글 쓸 게 있을 때 가요. 한 카페에서 몇 개를 쓰고 나면, 다른 생각이 안 나죠. 예전에 기운이 있을 때는 지방도 많이 돌아다녔는데, 요즘에는 그것도 힘들어서. 남들처럼 카페에서 한 번 써봐야겠다 생각하고, 찾아 다녔어요.

유명 작가가 출몰하면, 카페의 단골도 늘 것 같은데요.

한 군데를 오랫동안 가진 않아요. 단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에요. 나를 의식하는 느낌이 들면, 불편하잖아요. 아, 그리고 카페는 1카페, 1작가가 원칙이에요. 잘 안 겹쳐요.

『새의 선물』은 절에서 쓴 작품으로 알고 있어요. 이번 신작 『단 하나의 눈송이』는 어디에서 쓴 작품일까, 궁금했어요.

강원도 원주에 있는 토지문학관에서 썼어요. 다른 작품은 제주도의 아는 선배 집을 빌려서 쓰고, 또 작년 여름 뉴욕에서 쓴 작품도 있어요. 낯선 공간에 가면, 글 쓰는 데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그렇지만 다음 작품에는 영향을 미치죠. 『새의 선물』을 쓴 절이 『그녀의 세 번째 남자』 의 배경이 된 것처럼요. 처음에 작품에 들어가면 잘 안 써지니까 ‘아는 것부터 써야지’ 생각해요. 그래서 전에 경험하고 본 것들이 많이 등장하죠.

사이토 마리코의 작품 「눈송이」 에서 이번 소설집 제목을 따왔어요. 제목이 너무 길어, 반대가 있지는 않았나요?

무슨 뜻인지 한 번에 와 닿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너무 길어서 책 제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는 반응도 있었고. 그렇지만 제 마음에는 딱 들었어요. 나중에는 독특하고 좋다는 의견도 있어 결정한 제목이에요. 봄에 나오는 책이지만, 이야기 자체가 화사한 느낌은 아니라서요.

6개 작품 속에서 중복된 등장인물이 있어요. 인물의 성장을 보여주기보다는 다른 정체성으로 표현된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표제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를 처음으로 썼는데, 이 인물을 계속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물에서 빠져 나오는 게 힘들었거든요. 하지만 다른 두 번째 작품을 썼죠. 그런데 정서가 이어져 있더라고요. 인물을 중심으로 연작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때부터는 의도적으로 디테일을 맞추고, 결국에는 관계가 드러나게 썼죠. 장편으로 엮어도 됐지만, 따로따로 읽어도 상관 없게 써보고 싶었어요. 각기 독립적이지만 전체가 하나의 풍경이 되는 것. 이 소설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연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집 제목이 각기 다른 6개 작품을 설명해주는 셈이네요.

그렇죠. 단독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비슷하게 보이는 눈송이와 같은.

1998년작 『아내의 상자』도 신도시가 배경이었죠. 이번 소설집 역시 주요한 배경이 신도시에요. 「프랑스어 초급과정」 은 낯선 신도시에서 신혼을 시작한 여성의 이야기이고, 「스페인 도둑」 의 소영은 신도시와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에요. 신도시라는 배경이 작가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이전 작품에 등장한 도시들도 거의 신도시가 주였어요. 이번 소설집에는 작품을 모두 붙여 놓으니까 유독 드러나는 것 같아요. 「프랑스어 초급과정」 에서 신도시가 왜 생겨나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를 설명했잖아요. 제가 실제로 신도시에 살면서 느꼈던 이식의 느낌, 편리한 것을 위해 효율성을 따지고, 뿌리를 내리지 않고 금방금방 옮겨 다니는 신도시의 모습이 소설의 볼모의 느낌으로 나오는 게 있어요.

20여 년 신도시에 살게 되면 고향으로 느껴질 법도 한데, 한 해가 지나기 무섭게 모습이 바뀌니 살고 있어도 영 낯선 느낌이에요.

신도시라는 게 오래된 동네처럼, 시간을 두고 하나씩 생겨난 게 아니잖아요. 자연발생적으로 필요에 따라 생긴 게 아니라 조성된 공간이라서, 이곳은 영원히 신도시일 수밖에 없어요. 낡긴 하겠지만 고향이 될 수는 없죠. 1년 사이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생긴 거니까요. 오랜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의 고향이 될 수 있는 시간인데, 그렇지 못한 이유를 작품에 담아보고 싶었어요.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을 읽으며, 작가가 다녀온 도시일까? 궁금했어요. 묘사가 너무 생생해서 마치 그 곳에 가 있는 착각이 들었어요.

2002년부터 2년간 살았던 미국 시애틀의 한 동네를 배경으로 썼어요. 시애틀을 두고 ‘에버그린 시티’라고 말하잖아요. 녹지가 많고 정말 아름다운 곳인데, 2년을 살다 한국에 오니 확 대비가 되더라고요. 제가 한국에 왔을 당시, 일산에 ‘라페스타’라는 상업 공간이 생겼거든요. 일제히 한 골목에서 연기를 피우며 고기를 굽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 진짜 사람들이 못할 짓이 없구나’ 싶었어요. 자기 식으로 산다는 거에 대해서 생각이 없구나, 그런 생각요. 물론 저도 라페스타를 즐겨 가고 글도 쓰고 밥도 먹어요. 하지만 ‘내 고향이다, 정든 거리’라는 그런 느낌은 없어요. 저 역시 편의에 의해서 그 곳 사람이 된 거니까요. ‘고향 상실이다’ 이런 걸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조건이 태생 자체가 조성된 공간이라는 것, 이런 사실을 우리가 의식하고 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했죠.




포기하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선택하는 것

등장인물들이 모두 고독해요. 쓸쓸하죠. 타인과의 이질감도 많이 느끼고. 하지만 이들이 불행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오진 않았어요.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요.

서른 다섯에 소설가가 됐을 때, 이런 말을 했어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은 어떤 틀에 맞추려고 애를 쓴 인생이었는데, 이 틀이 내 것인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누군지 알자’라는 생각으로 소설을 썼다”고. 지금은 내가 누군지 알기 때문에 고독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이번 소설집을 보고, 따뜻해졌다고 말하는데, 갑자기 따뜻해졌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예전의 인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방어하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 버리니까요. 작품 속 인물들은 언제나 시류에 적응을 못하는 주류가 아닌 사람들이었어요. 제 안에 그런 인물들이 많으니까요.

비주류의 정서가 많다는 뜻인가요?

음. ‘이 정도면 내가 그동안 해온 일이니까 할 수 있겠다’가 아니고, 항상 어려워요. ‘이 정도 배짱은 가질 수 있어’라고 생각하다가도, 남과 다르게 행동해야 할 때 불안감이 있고 항상 낯설어 하는 정서가 있어요. 그런데 낯설고 불안하면 어디를 가지 말고 피해야 하는데, 저는 또 늘 낯선 사람이 되길 바라요. 예전의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나를 알지만, 나를 좋아할 수 없는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낯선 것들을 감당하는 것 같아요. 고독과 함께.

여행을 자주 떠나는 것도 낯선 감정을 누리기 위해서일까요?

그럴 수 있죠. 새로운 것을 자꾸 찾으니까요. 환경을 바꿔서 내가 뭐가 되겠다는 건 아니고, 일단 내가 아는 상태를 찾는 거에요. 어떻게 보면 저는 틀에 갇힌 사람이에요. 30대 중반까지 그렇게 살아왔죠. 소설가가 되면 인생이 달라질 줄 알았고, 내가 좀 자유롭게 생각하고 틀에서 벗어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결국 나는 틀에 박힌 소설가인가?’, ‘대상만 바뀌었을 뿐인지, 아직도 정답을 맞추려고 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내가 정말 규정된 인간이구나 싶을 때, 익숙한 공간이라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여행도 많이 하고 다른 장소에서 3개월간 살아보기도 하고 그러죠. 편안한 사람들 속에 있으면 정말 좋은데, 자꾸 갇히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새로운 걸 찾는다기보다는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스페인 도둑」 에서 소영은 신도시와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신, 많은 걸 쉽게 바꿨어요. 작가님에게도 그런 게 있을까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 또는 그렇지 못한 것들.

저는 이사도 못 가지만, 오래된 것도 못 바꿔요(웃음). 그래서 여행을 자주 가죠. 다른 건 몰라도, 어디를 가자고 하면 굉장히 쉽게 받아들여요. 왜 이렇게 나가는 걸 좋아할까? 생각해보면,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지만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유난히 내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주변을 바꾸지 못하니까, 오히려 다른 식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아닐까 싶어요. 소영도 마찬가지에요.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걸 ‘포기’하는 게 아니라, 다른 걸 바꾸기로 ‘선택’하는 삶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뭔가 잘 안 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럴 때, 포기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걸 선택한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소년을 위로해줘』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됐을 때, ‘이렇게 밖에 안 되는구나’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이혼하고 아들이랑 사는 것처럼 ‘인생 규모를 단출하게 만들어서 새로운 사이즈로 살아봐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 이걸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세상이 말하는 너무나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성공의 기준을 내 식대로 바꿔가며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이야기를 다시 꺼낼게요.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기도 한데요. 주인공의 엄마는 낯선 이국땅에서 생긴 취미가 개러지 세일을 다니는 일이었어요. 사람들이 버리는 중고제품을 사들이는데, 좋은 추억보다는 슬픈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눈여겨보죠. 아들은 엄마를 두고 ‘마치 불행을 수집하는 사람 같았다’고 말했어요. 뭔가 안쓰러운 감정이 들다가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시애틀에서 지내면서 저도 실제 개러지 세일을 많이 다녔어요. 다른 사람들의 삶의 스타일을 엿보는 게 흥미로웠어요. 물건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지만 실제 생활하고 있는 집을 구경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죠. 그 곳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보면, 진짜 물건이 필요해서 오는 사람들도 있고 그냥 구경거리로 오는 사람들, 골동품을 건질까? 하는 기대로 오는 사람들 등 정말 다양했어요. 그런 걸 보는 게 재밌어서 일요일마다 구경하러 다녔죠.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의 엄마는 아들과 함께 다녔지만 저는 남편이랑요. 책 속에 등장하는 식탁은 지금 일산 집에 있어요.

수집을 즐겨 하나요?

그렇진 않아요. 뭔가 의도적으로 하면 의미를 두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우연히 되는 것에 오히려 의미를 두는 편이에요.

뜨개질 이야기도 하고 싶어요.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에서 주인공이 뜨개질을 배우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어요. ‘결혼을 유지하는 건 목도리를 이어 뜨는 일 아닐까’ 라는 글귀도 기억에 남고, ‘작가님도 실제로 뜨개질을 배웠겠구나’ 하는 상상도 했어요.

재작년 겨울에 배웠어요. 갑자기 저한테 따듯한 기운이 들었는지 모과차도 담그고, 목도리도 뜨고 다정한 짓을 좀 했어요(웃음). 「프랑스어 초급과정」 의 시간 배경이 제가 과천에서 신혼을 시작했을 때인데, 그 때 처음으로 뜨개질을 배웠어요. 한참을 지나 다시 뜨개질을 하면서, 그래도 조금은 기억이 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더라고요. 소설 속 주인공처럼 야단 맞으면서 배웠어요. 처음부터 뜨개질을 소설로 쓸 생각은 없었는데, 뜨다 보니 ‘이게 무척 간단할 것 같은데, 선택할 것도 많고 책임질 것도 많고 성격도 다 드러나는구나’ 싶었어요.

힘을 빼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소설을 쓸 때도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목도리를 뜨면서 남편한테 이런 말을 했어요. “사람이 뜨개질을 하다가 실수를 하면 실을 풀어야 하잖아. 그런데 여기서 푸는 사람이 있고, 끝까지 풀지 않고 이어가는 사람이 있어”라고. 그랬더니 남편이 “이거 소설 하나 나오겠네” 그러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소설은 뭔가 의도하고 취재를 해서 쓰면 처음 생각한 그대로는 나올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써야지’ 생각하고 거기에서만 뱅뱅 돌면 재미 없어요. 의도에서 조금 벗어나도 정확히 쓰면, 그 다음 단계는 저절로 나타나요. ‘이 소설 제대로 썼다’ 느낌이 올 때는 내가 의도했던 것보다 반 발자국 앞으로 나간 세계죠.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슬럼프

소설가들은 첫 문장을 쓸 때가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수백 번을 고치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쓰면 그 이후로는 쑥쑥 풀린다고 하던데요. 작가님도 마찬가지인가요?

소설가로 데뷔하고 장편을 발표하고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주기 시작할 때, 누군가 저에게 슬럼프에 대한 질문을 했어요. 아직 겪어보지 않았고 모르겠다고 대답을 했죠. 내가 갖고 있는 문장을 잃어 버릴 일이 없고, 당시 내가 갖고 있는 문제나 질문 같은 걸 소설로 쓰니, 쓰고 싶은 건 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때는 ‘뭘 못 쓰길래 슬럼프가 있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쓰다 보니, ‘이렇게 써야겠다’ 하는 힘을 빼는 게 어려웠어요. 힘을 못 빼겠더라고요. 첫 단계에서 어려운 건, 나의 틀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못 벗어나면 슬럼프인 거죠.

올해로 등단 20주년을 맞았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틀에서 벗어난 것 같나요?

익숙해지는 일이 아니라서요. 새 작품을 쓸 때마다 슬럼프에요. 저만의 습관인지 모르겠는데,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꾸 질문하고 좁히는 과정에서 많이 헤매요. 너무 많은 게 닥쳐온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 많고, 힘을 주고 있다는 거겠지요.

이번 소설집에서 그래도 수월히 풀린 작품은 없었나요?

어렵게 나온 소설은 없었어요. 작품으로 들어가지 않은 부분, 없어진 부분을 썼다가 버리는 과정이 힘들었죠. 그런 부분을 다 쓴 다음에야 쉬운 부분이 나와요.

은희경 소설의 특징이라고 하면, 디테일의 힘도 빼놓을 수 없어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면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아서, 디테일이 있는 부분은 다른 사람의 것을 못 가져와요. 전체적인 에피소드, 사건들은 제 것이 아니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풍경, 사물, 음식 등은 모두 제 경험이죠. 시애틀에 가서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의 엄마처럼 고독하진 않았지만 개러지 세일을 다녔고,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의 주인공과는 다르지만 뜨개질을 배운 것처럼요.

작품의 균형감각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너무 드러내서도, 너무 보여주지 않아도 안 되는 소설의 긴장감 같은 것들은.

첫 문장을 수없이 많이 써보고, 뭔가 나온 순간부터는 크게 궁리를 안 해요. 내가 잘 아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친구한테 들려준다고 생각해요. 친구가 애인이 생기면 궁금하잖아요. ‘네 남자친구 이야기 좀 해봐’라고 했을 때, 생김새나 직업 그런 걸 먼저 말하지 않고 어떤 사건을 말하다가 툭 나오잖아요. 그런 호흡으로 쓰려고 해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누군가에게 들려준다는 느낌으로.

올해 등단 20주년을 맞았어요. 촌스러운 질문이지만, 20년 동안 소설을 쓰는 삶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요.

등단 10년이 됐을 때는 미국에 2년 동안 갔다가 한국에 돌아온 시기였거든요. 그 때는 굉장히 불안했어요. 속도가 느린 조용한 소도시에 있다가, 너무나 빨리 변한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죠. ‘내가 10년 동안 글을 썼는데 해놓은 게 뭐가 있지?’ 그런 불안감, 무기력한 기분이 있었어요. 지금은 몇 주 전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으로 알았어요. 내가 소설가가 된지 20년이 됐다는 사실을. ‘20년을 썼으니 앞으로는 얼마나 쓰게 될까?’ 이런 시간적인 개념은 별로 없어요. 후배 작가, 선배 작가라는 개념보다는 그냥 동시대의 작가 중에 한 사람이고, 동시대에서 관심 있는 질문에 대해 소설을 쓴다는 사실, 그게 저라고 생각해요.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 질문들은 무엇인가요?

아무도 잘못이 없는데, 서로 다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고독할까? 서로의 고독에 대해 왜 해줄 게 없을까? 충분히 이해하고 생각하는데, 왜 저 부분은 이해하지 못할까? 저 사람은 자기가 이런 사람인 줄 알고 행동하는데, 우리는 모두 눈치를 채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를까? 그런 문제가 늘 머릿속에 있어요. 살아오는 시간 속에서 닥쳐오는 질문들이 있죠. 그렇다고 이걸 당장 쓰겠다는 건 아니에요. 소설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을 때, 내가 평소에 느낀 것들 중에 강렬하게 오는 게 있거든요. 그런 걸 영감이라고 하는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한 게 오는 법은 없거든요.

영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작가들의 숙제겠지요.

소설을 쓰지 않을 때는 뭐가 소설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되도록 그냥 열어놓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려고 해요. 소설이라는 게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건데, 익숙한 방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죠.

소설집을 펴내셨으니, 다음 순서는 장편일까요?

청탁을 받아서 쓰고 있는 단편이 있어요. 단편을 몇 편 쓰고 나서, 내년부터는 장편을 새로 쓰려고 해요. 오래 전부터 쓰고 싶은 소재가 있어요. 30년 전에 여자 기숙사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30년 동안 인생이 어떻게 변해가는지에 대해 쓰려고 해요. 제가 기숙사 생활을 했거든요. 디테일은 저에게 있으니까, 이제 시작만 남았죠.

『단 하나의 눈송이』를 이미 읽은 독자, 이제 읽을 독자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인데요. 다른 방식의 삶을 생각해봤으면 해요. 우리 사회는 너무 모든 게 정해져 있잖아요. 이 길로 가면 성공, 저 길로 가면 실패. 기준이 너무 명확한데, 사람들은 모두 같은 존재일 수가 없거든요. 사람은 자기라는 존재를 느낄 때,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자기라는 존재에 대한 실감이 자기를 기쁘게 해요. 그러려면 자기를 알아야 하는데,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기준에 너무 맞춰가니까 실패자가 생겨요. 기준에 맞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텐데 말이죠. 이 소설도 마찬가지에요. 지금까지 생각한 것과는 다를 수 있어요. 저 사람이 불행해 보이지만 실은 저 사람이 울지 않고 다른 사람이 울고 있을 수 있어요. 고독해 보이는 저 사람이 실제로 강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요. 흔히 결정된 일로 보는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보게 하고 싶어요. 탄력과 유연성이라고 할까요. 우리에게 강요하는 경직된 시스템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태연한 인생』에서 이런 글귀가 나오지요. “멘토 같은 건 만들지 마. 한 두가지 맞는 말은 어지간하면 다 해. 계속해서 맞는 말을 하는 인간이란 성립되기 어렵고, 그러니까 남을 다 믿지 말고 자기가 혼자 생각하라구.”

그동안 멘토라는 말이 붙은 강연은 절대 안 했어요. 멘토가 한가지 방식은 보여줄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맞는 말일 수는 없잖아요.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선택의 폭이 넓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회의 시스템은 더 견고해져서 루저를 만들어내는데 너무 적합한 사회가 됐어요. 경직된 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해요. 저도 소설을 쓸 때, 처음 쓰려고 한 소설이 아닐 때가 많아요. 처음 원했던 것을 못했다는 거에 대해서는 실패지만, 이게 훨씬 더 좋을 때가 많아요. 뚫고 나가면 더 좋은 다른 풍경이 보이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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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은희경 저 | 문학동네
1995년 데뷔, 등단 20년차인 작가에게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이하 『눈송이』)는 그의 다섯번째 소설집이자, 열두 권째 작품집이다. 연재를 하고 계절마다 단편을 쓰고, 그것들을 모으고 정리해 책을 내는 시간들을 생각하면, 작가는 그동안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작품을 쓰고 책을 묶었다. 20년, 작가의 첫 책 『새의 선물』 에 열광했던 이들의 딸들이 자라 다시 그의 책을 집어드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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