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이 영화 <만신>을 만들었다. 이달 5일에 개정 출간된 『만신 김금화』. 전작 <파란만장><청출어람> 등에서 한국전통문화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드러냈던 박찬경 감독은 4년 전 무렵, 김금화의 자서전을 읽고 마음이 흔들렸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이 태어난 여자아이의 삶이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절판된 김금화의 첫 저서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를 비롯해 『김금화의 무가집』까지 완독한 후, 박찬경 감독은 <만신>의 영화화를 결심했다. 12세 때 무병을 앓고 17세 때 내림굿을 받아 지금은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된 ‘만신 김금화’. 박찬경 감독은 그를 매일같이 찾아가 영화화 허락을 받았다.
영화 <만신>은 신기를 타고난 소녀가 모진 세월을 거쳐 최고의 만신이 된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들여다보는 판타지 다큐 드라마다. 세계가 먼저 인정한 굿의 천재, 만신 김금화의 드라마틱한 삶을 한판 굿처럼 펼쳐 보인다. 김금화 역은 배우 김새론, 류현경, 문소리가 맡았고, 생존해 있는 김금화 선생이 등장해 영화는 실사와 다큐멘터리를 오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설치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찬경 감독의 작품답게 전통민화를 차용한 설화 애니메이션, 판타지의 특수효과, 경계를 넘나드는 혼재된 장르가 관객들의 눈길을 끈다.<만신>은 개봉 19일만에 누적관객 3만 명을 넘어서며, 올해 개봉한 국내 다양성영화 중 관객수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분단, 새마을운동 등 한국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투영된 김금화의 삶은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씻김굿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만신’은 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만신 김금화』에서, 열일곱 살 무렵의 선생이 처음 대동굿의 주무를 맡았을 때 묘사를 보면, 정말 한 편의 아름다운 영상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이 장면이 완벽한 클라이맥스라면, 그 전에는 놀라운 반전의 드라마가 있다. 그것이 걸립에 관한 회상이다. 따돌림 당하고, 구박 당하던 한 가난뱅이 소녀 앞에서, 이제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다. 극심한 고통은 남의 고통을 보듬고 씻어줄 수 있는 무당의 자격증이다. 그보다 따기 어려운 자격증은 아마 내가 알기론 없다. (『만신 김금화』 p.334)
영화 봐도 좋지만 책은 꼭 읽었으면
작은 극장에서 <만신>을 봤다. 평일 저녁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80% 정도 자리가 찼더라. 관객들의 몰입도가 대단했다.
개봉한 지 조금 지났지만, 입소문이 좀 난 것 같더라. 개인적으로 장편영화로는 첫 극장 개봉작이라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스태프들의 열정이 컸다. 김금화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김새론이 쇠걸립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처럼 나도 스태프들의 노동을 걸립했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은 작품이다.
다양성영화로는 꽤 흥행하고 있다. 관객들과 함께하는 GV 행사를 많이 가졌는데, 반응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질문들이 예상을 뛰어넘는다고.
“왜 무속을 다루냐”라는 질문이 가장 많았다. 한 작품이 아니고 두세 번씩 다뤘으니. 작가에게 무속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재밌는 건, 내가 목사나 신부 같은 삶을 다뤘으면 이런 질문을 안 했을 거란 사실이다. 질문 속에 이미 무속은 양지의 문화가 아니라는 개념이 들어있다. 며칠 전에는 김금화 선생의 제자 두 분과 함께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다. 진짜 만신이 등장한 GV였는데, “죽으면 어디로 가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걸 주로 질문하더라.
김금화의 자서전을 읽고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 무엇이 끌렸나?
헌책방에서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를 읽고, 도서관에서 『김금화의 무가집』를 빌려 봤다. 한 사람의 자서전이지만 한국 현대사가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 끌렸다. 이야기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김금화 선생의 육필 원고 스무 권을 기본으로 쓴 책이라, 너무나 생생하고 절절했다. 넘세가 어릴 때 쇠걸립을 하는 장면에서 가장 감동했다. 그 장면 때문에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요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영화랑 책이랑 비교하면서 보라고. 영화를 안 보더라도 책은 꼭 보라고. 책에서 주는 감동이 정말 크다.
쇠걸립은 내림굿을 받기 위해 신애기가 마을을 돌며 못 쓰는 쇠를 모으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류현경, 문소리, 김금화 선생까지 쇠걸립을 하는 넘세(김새론)에게 쇠붙이를 준다. 류현경은 총, 문소리는 카메라를 줬다. 의미 있는 물건으로 보였다.
김금화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류현경은 전쟁 시기에 거의 총을 맞을 뻔한 상황을 겪는다. 김금화 선생이 실제로 DMZ에서 굿도 하고,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활동들을 많이 하고 있다. 비극적인 사건을 평화의 모티프로 전환시키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 무속에 깃든 ‘화를 복으로 갚는다’는 용서의 윤리를 드러낸다. 문소리에게 카메라를 준 건,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여배우이기도 하고, 카메라는 김금화 선생에게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TV에도 많이 출연했고 방송을 중요하게 여겼다.
영화가 예상보다 다큐멘터리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내레이션, 자료화면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 건데, 실제 영화 분량은 실사와 다큐가 반반이다. 드라마는 시간이 빨리 가는 느낌이 들어서 일거다. 처음에는 오히려 드라마가 더 적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찍어 놓고 보니, 많아졌다.
4년 전, 김금화 선생에게 영화 제작 허락을 받으러 갔을 때, 선생의 반응은 어땠나. 워낙 유명한 분이라 그간의 제안도 많았을 텐데.
하도 많아서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겠지’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일을 자꾸 벌이고 찾아가니까, 신뢰를 한 것 같다. 예전에는 거절하거나, 두고 보거나 하신 것 같다. 김금화 선생의 다른 인터뷰를 보니까 “박찬경 감독은 다른 사람하고 달랐다”며 “시골사람이라서 좋았다”고 하셨다. 나는 사실 완전 서울촌놈인데 말이다. 수염을 안 깎고 자주 찾아 봬서 그런가 보다(웃음).
영화를 찍기 위해 굿에 대해 공부도 많이 했을 텐데, 실제로 접한 굿은 어땠나.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일단 굿은 준비과정이 엄청나다. 제사상을 차리는 일에서부터 소품을 만드는 일까지. 일상적인 일인데도 거의 매일 같이 쉬지 않는다. 그러면서 틈틈이 산에 다니면서 기도도 해야 하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점쟁이의 삶이 아니다. 만신들의 특징은 공감이 정말 빠르다. 대상이 뭘 원하는지, 어떤 한풀이를 원하는지 금세 파악한다. 우리가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상담을 받고, 성당의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지만 모든 걸 이야기하지는 않지 않나. 그런데 굿을 할 때는 무당을 전적으로 의지한다. 감추고 싶은 이야기도 모두 꺼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건 어떤 치유, 정화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굿 문화 이상의 문화는 없는 것 같다.
영화의 첫 장면이 김금화 선생이 <만신>을 위해 고사를 지내는 장면이다.
영화 촬영 현장이라는 것이 위험한 촬영도 많고 사고도 많다. 선생님이 흔쾌히 들어주셨다. 나로서는 안전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에 영화의 성공, 흥행보다는 안전을 좀 빌어달라고 부탁 드렸다. 무당들도 굿을 할 때, 안전을 기원하는 굿을 가장 많이 한다.
류현경의 신내림, 문소리의 굿 연기도 <만신>에서 빠질 수 없는 명장면이다. 김금화 선생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배우의 개성을 살린 연기였다. 감독으로서 주문은 없었나?
김금화 선생과 똑같이 연기를 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했다. 살고 있는 시대부터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비슷하게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보기에 좋았을까? 똑같이 따라 했으면 TV 속 재연 연기가 됐을 거다. 모르고 보는 것도 아니고, 톤이 다르다고 감정이입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류현경은 표정, 대사보다 몸 연기가 중요했다. 가느다란 몸에서 갑자기 힘이 나오는 것 같은. 문소리에게는 김금화 선생의 굿 영상을 보여주면서 연습하라고 했는데, 그걸 문소리화 시키더라. 문소리도 나오고 김금화도 나와야 재밌지 않겠냐며. 선생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김새론 양까지, 정말 최적의 배우들을 만났다. 감독으로서 행운이었다.
실험적인 장르 도전하며 영화감독 준비
설치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감독의 작품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미술적인 부분이 유독 도드라지더라. 특히 전통민화를 차용한 설화 애니메이션이 눈에 띄었다. 자동차 앞에 엠블럼처럼 괴목을 단 것도 인상 깊었고.
<만신>미술감독이 굿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양반이다. 부탁하지 않을 일까지 찾아서, 정말 재밌게 즐기면서 일을 했다. 황해도 무속이 가지고 있는 시각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무속화나 민화를 많이 끌어 들였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비주얼한 쪽으로 많이 신경을 쓰는 성향이라, 영향도 조금 있었을 거다.
대학에서는 서양학, 석사는 사진학을 전공하고 미디어 아티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른 나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나이 오십 줄에 극장 데뷔하려니 쑥스러운 마음이 없지는 않다. 영화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다. 포기를 한 건, 형이 데뷔하는 걸 보고 ‘저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 박찬욱 감독이 데뷔할 90년대 초는 정말 힘들었다. 충무로 고집, 스태프들 신경전도 다 이겨내야 하고. 대학원에 갈 때 영화를 전공하려다, 형이 현장에서 일하는 걸 보고 포기했다(웃음). 하지만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다. 영상에 관심이 많으니까 미술가로 활동하다가 영화로 접근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시작한 지는 5,6년 전이다. 단편도 해보고 16mm 영화도 했다. 실험적인 장르를 도전하면서 조금씩 준비를 해온 것 같다.
박찬경 감독에게 늘 따라붙는 것이 ‘박찬욱 감독의 동생’이라는 타이틀이다. 그동안 'PARKing CHANce'라는 이름으로 스마트폰 단편영화 <파란만장>을 비롯해 <오달슬로우> <청출어람> <V> 등의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을 나를 ‘박찬욱 작품의 미술감독 출신’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더라(웃음). 형의 촬영 현장을 보고 영화 일을 포기했지만, 영화를 시작하게 한 영향도 있었을 거다. <만신>은 중간중간 형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거나 상의를 했다. 보이지 않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만신>의 영화평으로 “박찬경은 박찬욱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웃음). 오동진 선배랑은 오래 전부터 친분이 두텁다. 격려 차원에서 해준 말일 거다. 난 3억짜리 영화를 찍는 이제 입봉을 한 감독이고, 형은 100억 이상의 제작비 영화를 찍는 20년 이상 감독을 한 사람이다. 같은 선상에서 보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본다.
박찬욱 감독의 작품 중에서는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
<올드보이>, <박쥐>를 재밌게 봤다. <박쥐>는 옛날 영화 같은 클래식한 느낌이 있어서 좋았다. 한국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아시아 고딕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박쥐>가 딱 그런 영화였다. 송강호의 연기, 김옥빈이 날아다니는 장면도 환상적이었다.
영화를 볼 때, 스토리보다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보는 것 같다.
말하고 보니 그렇다. 영화를 볼 때 스토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의 안 한다. 화면, 이미지로 이해하는 편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건 어떻게 된 거지?”하고 의문을 갖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는 영화를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고 있구나’ 싶을 때가 있다. 아내가 <CSI 과학수사대> 같은 장르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스토리를 다 꾀고 있다. 나는 그런 극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웃음).
살아 있는 ‘바리데기’ 이야기
다시<만신>으로 돌아가보자. ‘만신’은 감독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감독은 만신과 같지 않지만, 만신은 모든 연출을 다 하니까 감독이기도 제작자이기도 투자자이기도 하다. 만신은 모든 현장을 감독한다. 소품을 배치하고, 악기 연주는 언제 시작하고, 옷은 무슨 천을 써서 만드는지 세세한 모든 걸 챙겨야 한다. 굉장히 민감하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현장에서 엄청 잡는다.
영화 <만신>이 박찬경 감독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일단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많이 성장했다. 실제로 큰 무당들을 여러 번 만나고, 다양한 굿들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은 것 자체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영화든 문학이든,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국가에서 무속 박물관을 하나 만들고, 아카이브도 하고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굿에 있어서 무당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관객 없는 굿은 무의미하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보다 더 많은 관객들과의 교감이 중요하다.
한국사에서 무당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 사람들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무당을 찾고 회복을 기원한다. 사람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무당이다. 영화도 굿과 다르지 않다. 혼자 만드는 장르가 아니다. 미술 작품은 혼자서 방에서 작업할 수 있지만,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물며 봐주는 관객도 필수 요소다. 영화를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대중과 소통하고 싶어서이듯이, 굿도 마찬가지다.
<만신>은 어떤 사람들이 보면 좋을 작품인가.
종교인들이 많이 보면 재밌을 것 같다.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종교인들은 성스러움을 존중하고, 다른 세상에 대한 관심도 많은 사람들이다. <만신>이 무속에 대한 이야기지만, 어떻게 보면 한 여성의 역사와 무속인의 역사가 겹쳐 있다. 처음 영화가 시작될 때, “여자가 여자를 낳았다”는 표현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바리데기’와도 같다. 일곱 번째 딸이 어떻게 아버지를 구원하고 죽은 사람들을 저승으로 이끌게 되는지. 살아 있는 ‘바리데기’ 이야기다. 여성들이 봐도 흥미로운 영화다.
다음 작품은 공포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꼭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이 조금 달라지고 있다. 다만 미스터리, 공포 장르에 관심이 많다.
영화감독으로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들을 살펴보면, 주로 어두운 정서들이 느껴진다. 무속신앙,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 남북 관계, 냉전 등. 이 같은 관심사의 물줄기는 어디에서 온 걸까.
글쎄, 아마도 내가 둘째라서 그런 게 아닐까. 형은 집안의 기둥이고 장남이라는 부담이 있었겠지만, 나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잘 놀러 다니고 술도 많이 마시고. 그런데 예술가로 산다는 건 되게 힘든 일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버티기가 정말 힘들다. 그래서 40대가 되면 작가들이 반 이상 줄어든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30대 후반까지는 어떻게든 견뎠는데 그 이후로 넘어가면 살 수가 없다. 상업적인 작품을 하지 않으면서 작가로 살아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더 많이 보게 되고, ‘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 어디에서 온 걸까?’ 하는 물음이 생긴다. 그럴수록 좀 더 깊이 있는 측면을 보려고 노력하고. 전 세계에서 한국처럼 네온 십자가가 많은 나라가 없다. 이건 너무나 독특한 현상인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런 고민들을 많이 한다.
오는 9월 열리는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의 예술감독 직을 맡았다.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현재 주목하고 있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아시아고딕, 귀신, 간첩, 할머니와 같은 것이다. 책에도 썼지만. 이것들은 한국의 전형적인 타자들이다. 굉장히 매력을 느끼고 공경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시하거나 덮어놓는 대상이다.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다. 미술 작품을 만들 때는 주로 냉전, 남북 관계에 대한 포커스를 갖고 작업했다. 우리 사회가 발전했다고 말하지만, 전 세계 유일하게 20세기를 살고 있는 분단 국가다. 언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굿은 사후에 올 일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을 그 자리에서 후련하게 해준다. 이 후련한 잔치를 통해서 미워하던 관계도 풀리고, 죄의식도 치유하는 것이라고 선생은 항상 강조한다. 극장도 텔레비전도 노래방도 없는 어촌에서, 미녀 무당이 울긋불긋한 무복을 걸치고 칼을 휘두르고 작두 위에 올라 신령의 말을 전할 때, 어느 누가 그 앞에서 마음이 녹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본다면, 과거 김금화 만신의 대동굿이나 배연신굿은, 현대의 영화가 하고 있는 역할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강렬한 집단 카타르시스를 통해 공동체의 문화적인 통합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만신 김금화』 p.333)
- 만신 김금화김금화 저 | 궁리
『만신 김금화』는 2007년 출간되었던 『비단꽃 넘세』를 개정증보하여 새롭게 펴낸 것이다. 사진들을 새롭게 골라 배치하고, 김금화 만신을 곁에서 지켜봐온 민속학자 황루시 교수와 이 자서전을 읽고 영화 〈만신〉을 찍은 박찬경 감독의 글을 실었다. 특히 박찬경 감독은 평소 무속에 다양한 관심이 많던 차에 김금화 만신의 자서전을 읽고 영화 제작 제안을 했는데, 그의 인생이 파란만장할 뿐만 아니라, 현대사를 관통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무당의 삶으로 보는 한국사’라는 앵글로 이야기를 만들면 문화적 의미와 흥미를 동시에 표현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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