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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가혹하게 흐르는 시간이 쌓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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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처럼 시작한 이야기였다. 전남의 한 사립대학을 졸업한 '진만'과 '정용', 두 청년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보고 싶었다. 소설을 연재한 지 2년쯤 지났을 무렵, 코로나19라는 사회적 재난이 닥쳤다. 두 청년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소설가 이기호의 신작 『눈감지 마라』 속 인물들의 하루는 사는 것보다 견디는 것에 더 가깝다. 분량은 짧고, 문체는 유쾌하지만 소설을 읽고 난 마음이 한없이 무거운 이유는 여기에 해결되지 못한 청년들의 시간이 쌓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던 소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올해 8월까지 안식년이었어요. 지난 1년간 육아를 전담했죠.(웃음) 2학기 개강을 하면서 학교에 복귀했어요. 안식년 이전에는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업을 했는데, 다시 대면 수업을 하니 신기하더라고요. 신입생은 물론이고 2~3학년 학생들도 실물은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학교에 다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데다가 책이 나와서 심란하기도 했어요.

책이 나와서 기쁘신 게 아니고요? 

이상하게 이번 소설은 출간 후 마음이 심란해요. 5년 동안 연재한 소설이었잖아요. 오래 끌어안고 있던 주인공들을 이제 정말 떠나보내는 것 같아서 그런가 봐요. 짠한 마음이 계속 들어서 여전히 감정을 추스르고 있어요. 

경향신문에 연재한 <이기호의 미니픽션>이 책으로 묶였어요. 지방대를 갓 졸업한 '진만'와 '정용'두 청년의 이야기죠. 

연재를 청탁 받은 시기가 2017년이었어요. 그쯤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리면서 제자들과 그 이야기를 자주 나눴거든요. 모두 흥분 상태였죠. 본인들이 사회의 변혁 한 가운데에 있고, 주체적으로 거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던 것 같아요. 이 시기만 지나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기대도 분명이 있었을 테고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친구들이 광주 시내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갔다가 술에 취해서 기숙사로 걸어오는데, 학교 인근 산고개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길래 쭈그려 앉아서 불렀대요. 그런데 그게 멧돼지였던 거죠(웃음). 부리나케 도망친 뒤에 저에게 전화를 했더라고요. 이런 에피소드가 참 많았어요.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1화 「어둠 뒤를 조심하라」가 실화였네요(웃음). 멧돼지를 봤다고 전화할 수 있는 교수님이라니, 제자들과 격의 없이 지내시나 봐요. 

글 쓰고 토론하는 사이니까요. 문학을 하면 나이가 상관없어요. 다 답답하고 한심하거든요.(웃음) 학생과 교수이기 이전에 문학하는 동료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죠. 그렇다고 "나는 제자들이랑 잘 지내요"라고 당당히 말하기는 조심스러워요. 그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잖아요. 



작가의 말에서 처음에는 '농담을 건네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원래 경향신문에서 칼럼을 청탁했는데, 칼럼은 아무리 조심해서 써도 훈계하는 듯한 어조가 나올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게 싫어서 짧은 소설을 쓰겠다고 했어요. 이 시대, 지방에서 사는 청년들이 차츰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연재 1년동안은 정말 그랬어요. 가벼운 유머를 쓴다는 마음이었고, 성장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러다 코로나19가 닥치면서, 이 친구들의 상황이 자꾸 안 좋게 흘러가는 것을 목도하게 됐어요. 단순히 농담과 유머로 쓸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는 걸 쓰면서 알게 된 거예요. 

소설을 연재하는 동안 크게 체감한 사회의 변화는 무엇인가요? 

수도권과 지방의 차이가 확연히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지방은 중앙의 식민지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가 결정되고, 이 계급은 영영 뛰어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래도 기성세대는 지방 안에서 기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박탈감이 크지 않은 편인데요. 이제 막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청년들에게는 아주 가혹하게 작용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기업에서 취직하거나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 않으면 실패한 삶으로 여겨지는 거죠. 어린 나이에 인생이 결정되고 패자부활전조차 없는 듯한 느낌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자주 말해요. 문학은 그렇지 않다고요. 

문학에는 희망이 있다는 말씀이시죠. 

문학은 스펙이나 출신을 안 따지잖아요. 작품이 좋으면 그 사람이 제일이라고 하니까요. 문학이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고 말하죠.

 


지방 청년 르포를 쓴다고 생각했다

진만과 정용은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요. 편의점, 출장뷔페, 배달, 택배 상하차 등 종류도 다양하죠. 그러던 중 진만이 취업에 성공하지만, 회사의 노동착취로 한 달 만에 퇴사를 하게 됩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많았어요. 이 소설은 그 친구들이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게 아니었다면 지방에 사는 20대 청년의 삶을 이렇게 디테일하게 담지 못했을 거예요. 저는 소설이자 르포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소설 후반부로 흘러가며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들은 제자들에게 자주 들었고,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도 했죠. 어떤 청년들은 정말로 이런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다큐라고 생각하며 글을 썼어요. 그래서 책을 출간한 마음이 더 어지러운 것 같아요. 소설의 인물이라는 탈을 쓰고 있만, 진만이와 정용이가 현실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아니까요. 

소설을 연재한 지난 5년간 자주 하셨던 생각이 있을까요? 

'우리 세대는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지?'라는 생각이요. 저는 제가 젊은 줄 알았어요. 나이는 먹었지만, 젊은 친구들의 사고방식과 큰 차이 없는 감수성을 지녔다고 믿었죠. 그런데 소설을 쓰다 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내가 욕하고 원망했던 기성세대의 질서 안으로 쉽게 편입되어 버렸더라고요. 지금의 경제 주체인 40~50대도 청년일 때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시대의 욕망이 많았거든요. 그걸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그대로 모방하고 내면화한 지점이 많은 것 같아요. 기성세대로서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감정이 많이 들어요.

소설을 읽으며 진만과 정용이 더 안쓰럽게 느껴진 건, 기댈 수 있는 어른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어요. 

일부러 그렇게 쓴 면이 있어요. 정용이와 진만이의 부모들도 기댈 수 있거나 삶을 모방할 수 있을 만한 대상은 아니죠. 이 친구들이 더 힘든 건 그래서예요. 제가 20대 때는 닮고 싶은 전범이 될 만한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건 작가일수도, 철학가일수도, 종교지도자일 수도 있었죠.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나"라는 질문을 해보면 답을 하기가 막막해요. 우리 세대가 아주 엉망이라는 증거죠.



작가의 말에서 지방에서 태어났고, 성장하고, 살아가는 게 "내 감수성의 원천"이라고 하셨어요. 그거 하나에 의지해 글을 쓰고 있다고요. 

글을 쓰기 전에는 지방 출신이라는 게 부끄러웠어요. 그런데 글을 쓰면서 내가 만들어낸 인물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가 모두 지방에서 왔다는 걸 깨달았죠. 제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주된 정서는 부끄러움, 자괴감 같은 것들이에요. 제 감수성의 원천은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지방에 살면서 이웃과 많은 걸 공유하며 성장했고, 타인과 밀접하게 관계맺는 게 당연한 분위기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예민하게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있죠. 

최근 짧은 소설이 독자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죠. 짧은 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스쳐가는 순간들을 짧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잡아 두고, 독자와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아요. 무엇보다 좋은 건 짧은 소설이 독자에게 글을 쓸 용기를 준다는 거예요. '이 정도면 나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거죠. 저는 독자들을 만나면 자주 이야기해요. 스쳐가는 어떤 하루를 짧은 소설로 포착해 보시라고요. 제가 소설을 쓸 때의 목표는 하나예요. '독자와 함께 쓰자.' 글을 쓰는 것만큼 적극적인 독서는 없거든요.

진만이와 정용이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눈감지 마라'라는 제목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요. 청년들에게는 사는 게 팍팍해도 자기의 삶과 타인에 대해 눈 감지 말라는 뜻이자, 죽지 말라는 당부였고요. 기성세대에게는 우리가 겪어온 것과 다른 차원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저는 진만이와 정용이 같은 처지의 친구들은 안 읽었으면 좋겠어요. 소설에서 희망을 보여주지 못했으니까요. 그 친구들이 읽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슬프고, 마음이 좋지 않아요. 오히려 기성세대들이 많이 읽고, 이 문제에 눈 감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기호

1972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공모에 단편 「버니」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짧은 소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 『차남들의 세계사』, 『목양면 방화사건 전말기』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승옥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학생들과 함께 소설을 공부하고 있다.




눈감지 마라
눈감지 마라
이기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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