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 『여덟 단어』 등 박웅현 작가의 책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문장과 순간』을 보고 낯선 느낌을 받을 것이다. 텍스트가 긴 전작들과 달리, 이번 책은 그의 손글씨가 다수의 페이지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건져 올린 좋은 문장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대로이지만, 문장에 대한 설명은 한 편의 시처럼 압축했다. 긴 글을 읽는 데 부담을 느끼는 이들을 좋은 책으로 안내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시도다. 박웅현 작가는 "소모적인 콘텐츠를 보며 흘려보내는 시간을 좋은 것으로 채우기 시작하는 순간, 삶이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책 속 한 문장이, 한 편의 시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넘어졌다가도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다. 오늘을 견디고 버틸 힘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_『문장과 순간』 9쪽
책 읽기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시, 책은 도끼다』가 출간되고 <채널예스>와 나눈 인터뷰에서 "다음 책을 쓴다면, 지금까지 쓴 생각의 변주가 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정말 그런 책이 나왔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했나요?(웃음) 사실 『문장과 순간』은 SNS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서 쓴 책이에요. 요즘은 틱톡, 유튜브 쇼츠 등 숏폼 콘텐츠를 주로 소비하는 시대잖아요. 책을 좋아하지 않거나, 긴 글을 읽는 게 어색한 젊은 독자들에게 좋은 문장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컸죠. 그래서 문장을 선정하는 데 고심했어요. 숏폼 콘텐츠에서 소비되는 문장들은 다소 평범하고 가볍잖아요. 그런 문장을 주로 섭취하는 분들께 '앙드레 지드', '페르난두 페소아',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이 쓴 좋은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존에 펴내신 책들과 결이 다릅니다. 첫 장을 펼쳐보고 놀랐어요. 전작들에 비해 글이 짧아서요.
독서를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해왔어요. 그러려면 책이 좀 가벼워질 수밖에 없었죠. 전작들이 계속 무거웠으니, 한 번쯤 힘을 빼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직접적인 도화선은 코로나였습니다. 재택근무로 사무실이 텅 비었고, 수영장이 문을 닫았어요. 20년 넘게 새벽 수영을 해왔는데 그걸 못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수영 대신 동네 뒷산을 올랐습니다. 매일 해 뜨는 모습을 보고 새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충만해지더라고요. 문득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책을 써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몇 년간 행복을 느낀 순간에 떠올랐던 문장을 하나씩 돌아보며 정리하기 시작했죠.
텍스트가 빠진 자리에 손글씨가 채워졌습니다.
그것도 SNS에 익숙한 사람들을 생각한 겁니다. 요즘은 카페에 가도 커피의 맛보다 인테리어가 중요하잖아요.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주말 오후 카페에 가서 가볍게 읽을 만한 분량의 글이되, 좋은 문장을 만나면 SNS에 찍어서 올리고 싶은 이미지를 구현하고 싶었어요.
숏폼 콘텐츠가 주로 소비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도 있으세요?
변하는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다만, 숏폼 콘텐츠에만 몰두하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인생은 길다는 겁니다. 숏폼 콘텐츠는 파편화된 정보만 담고 있어요. 이게 순간의 위로가 될 순 있지만, 삶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죠. 긴 인생을 생각하면 종합적인 콘텐츠를 내 안으로 가져와야 해요. 꼭 책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좋은 영화든, 여행이든 총체적인 정보를 몸 속으로 가져오는 게 중요해요.
프롤로그의 제목이 떠오르네요. 「몸으로 읽는다」
몸으로 읽어야 진짜 책을 읽은 겁니다. 이외에는 지식 자랑일 뿐이죠.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제대로 못 사는 사람이 있고,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지만 훌륭한 사람이 있잖아요. 우리의 목표는 책을 많이 읽는 게 아니라 훌륭한 삶을 사는 거죠. 그러려면 읽은 것으로 그치서는 안 돼요. 읽고 깨달은 걸 삶에서 행해야 합니다.
삶의 핵심은 느낌에 있다
첫 장을 펼치면 보이는 '의식을 누르고, 느낌을 올린다'는 문장이 강렬합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수많은 책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순간을 살아라', '현실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그게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내 삶 속으로 가져오려는 노력을 계속 하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싶은 문장이 떠올랐어요. '의식을 내리고, 느낌을 올린다'라는 문장이었죠. 현재를 살지 못하는 이유가 의식에 있었거든요. 몸은 산 속에 있는데, 머리로는 어제 일을 후회하고 내일 일을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현재를 사는 게 아니죠.
삶의 핵심은 느낌에 있습니다. 의식이 올라오면 느낌을 다 놓쳐요. 커피를 마실 땐 커피의 맛과 향에 온전히 집중하고, 산책을 할 때는 새소리를 듣고 숲의 향기를 맡아야 하죠. 그러니까 삶이란 의식을 누르고 느낌을 올리는 수행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예요. 그 문장이 툭 떠오른 순간, 기분이 너무 좋아서 수첩에 적었는데 그게 첫 장을 여는 시작이 되었죠.
결국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책의 제목처럼 ‘문장에서 순간으로 나아가는 삶’을 제안하고 싶었어요.
의식을 누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요. 작가님도 매일 그런 노력을 하세요?
그럼요. 끊임없이 노력하는 거죠. 지금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도 의식은 계속 올라와요. 재미있는 건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의식을 누르는 실력이 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계속 해보세요.(웃음)
일종의 명상이네요.
맞습니다. 명상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해요. 머리를 비우고 들숨과 날숨에 주목하라고요. 이게 말로는 쉬운 것 같지만 정말 어려워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별별 생각이 다 나거든요. 의식을 누르는 게 그렇게 힘드니까 들숨과 날숨에 주목해보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명상에서 배운 노하우를 하나 알려드릴게요. 눈 앞의 사물을 나와 대화하는 친구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 사물이 나를 보고있다'고 생각하면 현재를 살기가 좀 더 쉽거든요. 물질이 앞에 있을 땐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내일 일을 걱정할 수 있지만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여기'에 집중할 수 있죠.
저는 이 책이 젊은 세대를 향한 편지 같다고 생각했어요. '포기라는 단어는 젊음과 어울리지 않는다. 젊음과 어울리는 단어는 생명력이다.' 같은 문장에서 청년을 북돋우려는 마음이 느껴졌거든요.
젊은 세대를 보면 미안하고 안타까워요. 경제 성장이 멈추기 시작한 시점에 태어난 세대잖아요. 20대의 박웅현과 비슷하거나, 좀 더 나은 능력을 가진 젊은이들이 지금은 나만한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살아가요. 그러니 계속 포기라는 단어가 나오죠.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기회는 반드시 올테니, 내면을 충실하게 채우며 시간을 보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는 요즘의 청년들을 겨울 나무에 비유합니다. 예를 들어 1년간 취업 준비를 한 사람이 있어요. 바깥에서 보면 그는 여전히 취준생이죠. 하지만 그 사람은 1년 전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일 거예요. 겨울을 나는 나무처럼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그 시간동안 어떤 노력을 하면 좋을까요?
삶을 '좋은 경험'으로 채우는 게 관건이에요. 좋은 콘텐츠를 보고, 좋은 인연을 만나고, 좋은 여행을 떠나고요. 그런 노력을 하다 보면 언젠가 읽은 책, 본 영화 등을 가지고 면접장에서 좋은 점수를 딸 수도 있을지 모르죠. 여행에서 만난 사람으로부터 뜻밖의 기회를 얻을 수도 있고요. 어디서 무엇이 시작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좋은 것들로 나를 채워가다 보면 새로운 삶이 열린다는 거예요. 여기서 방점은 '좋은'에 찍혀 있죠.
세대 갈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기성세대와 MZ세대의 갈등은 양상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SNS가 생기면서 퍼스널 미디어의 시대가 됐어요. 이제 공중파 방송처럼 모든 세대가 다같이 볼 수 있는 막강한 미디어폼은 사라졌습니다. 다들 각자의 미디어 폼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어요.
또 하나는 시대정신이 변했기 때문이에요. 지금의 기성세대는 2차산업혁명 시대를 산 사람들입니다. 그 시대의 키워드는 '포디즘', '테일러리즘'이었어요. 지금은 4차산업혁명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키워드는 '애자일'이죠. 포디즘과 테일러리즘이 시스템이라면 애자일은 임기응변이에요. 정반대에 있는 개념이죠. 그러다 보니 세대간의 간극이 더 생기는 거예요. 시스템의 시대에서는 효율, 명령, 추진력 등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살면 안 되거든요. MZ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장해 왔는데 회사에서 효율과 조직력을 강요하면 따르기가 어렵죠.
후배들이 찾아와서 고민 상담을 할 때 본질적으로 해주는 말씀이 있으세요?
조언하지 않아요. 들으려고 노력하죠. '듣기'가 중요한 키워드예요. 사람들이 하는 말 속에는 이미 자기 판단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어떤 후배가 이직에 대한 고민을 털어놔요. 그 친구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이직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는지, 현재 다니는 회사에 남기로 했는지가 보여요. 그걸 듣고 캐치해서 공감하고, 지지해주면 "제 마음을 어떻게 아셨어요?"라면서 표정이 밝아지죠.(웃음) 그외에는 앞서 말했듯 내면을 좋은 것으로 채우라는 말을 합니다. 숏폼 콘텐츠나 SNS에 허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좋은 것을 소비하려는 노력이 결국 너의 경쟁력이 될 거라고요.
SNS를 안 하시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 건가요?
오래 전에 트위터에 가입했는데 15명 팔로잉하고 그만뒀어요.(웃음) 특별한 이유는 없고요. 부지런하지 않아서 그래요. 다행스러운 건 후배들이 SNS를 많이 하니까, 일할 땐 그들의 의견을 묻고 따르면 되죠.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이건 좀 촌스럽다, 이건 문법에 맞지 않아"라며 내 주장을 펼치다가도 후배가 "요즘 밈이에요"라고 하면 "그래? 잘못했어"하고 받아 적어요.(웃음)
감동받았다면 모두 위대한 것
반칠환 시인, 곽재구 시인의 문장을 소개하며 '질투하기도 지친다'고 하셨어요. 주로 어떤 문장을 볼 때 질투가 나세요?
내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걸 보고 쓴 문장이 좋으면 질투가 안 나요. 그런데 매일 보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걸 새롭게 바라보는 문장이 좋으면 질투가 나죠.(웃음) 페르난두 페소아의 「샐러드」 같은 시를 볼 때요.
책에서 그 문장을 인용하며 "샐러드를 경건하게 먹어야겠다"고 하셨죠.(웃음)
도종환 시인의 「시래기」도 그래요. 저는 한 번도 시래기에 주목한 적이 없거든요. 위대한 장면도 감동받지 못하면 사소한 것이고, 사소한 장면도 감동을 받았으면 위대한 겁니다. 이제 시래기는 저에게 더 이상 사소한 존재가 아니에요. 읽고 감동을 받았으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술 마시면서 「시래기」에 감동한 이야기만 실컷 하고, 지금 먹고 있는 시금치는 또 그렇게 보지 못하잖아요.(웃음)
저에게는 '낙엽'이 그런 존재가 됐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김사인 시인의 시 「조용한 일」을 읽은 덕분에요.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 고맙다 /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라고 했죠. 김사인 시인님 책 너무 좋아요. 그 구절이 감동적이었다면 책 『시를 어루만지다』를 한번 읽어보세요.
순간의 감동을 포착하는 예민함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누군가가 감동받은 것들을 체화하는 것 같아요. 내가 놓친 걸 잡아내는 다른 사람의 문장을 통해서요. 그러니까, 몸으로 읽는 거죠.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천 개의 물방울 / 비가 괜히 온 게 아니었다(고은 「순간의 꽃」 중)' 같은 구절을 몸으로 읽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비 오는 날의 풍경이 달리 보이거든요. 이런 순간이 계속 쌓이는 거죠.
은퇴 후, 여가 시간이 많아지면 독파하고 싶은 책이 있으세요?
도장 깨기 하고 싶어요.(웃음) 최근에 깨진 도장이 '제임스 조이스'의 책들이에요. 다들 왜 그렇게 좋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차분히 읽어보니 열리더라고요. 이외에도 아주 많잖아요. 『돈키호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오디세이아』 같은 책이요. 음악도 마찬가지죠.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은 아직도 왜 좋은지 잘 모르겠거든요. 내가 몸으로 읽거나 느끼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좋다고 얘기하는 것들을 몸으로 알고 싶어요. 그 짜릿함이 엄청나잖아요. 저는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이 삶에서 제일 큰 즐거움인 것 같아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문장 하나하나를 천천히 운문을 읽듯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이 책은 짧은 분량이지만, 여기 실린 문장은 결코 가볍지 않거든요. 읽고 휘발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는 문장을 실었으니 부디 천천히, 곱씹으면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박웅현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대학원에서는 텔레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제일기획에서 광고 일을 시작해 지금은 TBWA KOREA에서 크리에이티브 대표CCO로 일하고 있다. 마음과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문학적인 감수성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바탕으로 하는 많은 광고를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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