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작업실 절대주의자' 김호연이 전업작가의 꿈을 품고 처음 계약한 작업실은 동인천의 낡은 빌라였다. 시나리오 회의가 자주 열리는 강남을 오가기 편하면서,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동인천의 20년된 빨간 벽돌 빌라가 남았다. 이곳에 숨어들어 2년간 글을 썼지만 그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패잔병처럼' 그곳을 나와야 했다.
그로부터 15년 뒤, 김호연은 『불편한 편의점』의 성공으로 인천을 다시 찾는다. 수없는 부침에도 개의치 않고 22년간 꾸준히 글을 써온 김호연은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마음과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김호연의 작업실』은 그 마음과 환경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걷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듯 쓰지 않으면 글은 나오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단호하다. 글이 안 써지는 건 계속 쓰지 않아서라고. _128쪽
장편 소설가는 육체노동자
지난 한 해동안 무척 바쁘셨죠. 올해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1~2월까지는 이 책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고요. 이제 새로운 소설 집필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초고를 쓰려면 고도의 집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지방에 작업실을 하나 구했어요. 어느 지역인지는 비밀입니다. 다음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요.
지방에 작업실을 구한 건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기 위함인가요?
그렇죠. 일단 가족으로부터 고립돼야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웃음) 저는 초고를 쓰는 동안 만큼은 철저히 혼자 있어야 해요. 아마 초고가 완성될 때까지 2~3군데의 작업실을 돌면서 지방에 몇 개월 머물게 될 것 같아요.
곧 작업실에 가져갈 짐을 꾸리실 텐데요. 글을 쓰러 갈 때 꼭 챙기는 의외의 물건이 있으세요?
아직도 아이팟(iPod)을 써요. 산책하거나 글을 쓸 때 꼭 아이팟으로 노래를 듣죠. 그 안에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다 들어있거든요. 물론 유튜브나 음원 사이트에서도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작업할 땐 아이팟이 꼭 있어야 해요. 또 경추 베개와 노트북 받침대요. 목 디스크 때문에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일을 못합니다.(웃음)
글을 쓰지 않는 날에도 1일1식을 하세요? '1일 1식이 글쓰기와 삶의 루틴이 된 지 오래'라고요.
지금은 한끼 반 정도는 챙겨 먹고 있어요. 밥을 잘 안 먹으니 머리카락이 너무 빠지고(웃음) 몸이 1일1식에 적응돼서 한 끼만 먹는데도 살이 안 빠지더라고요. 이번 작업 때는 식사의 패턴을 좀 더 건강하게 바꿔볼 생각이에요. 그동안 제 글쓰기의 보상 체계는 '술'이었어요. 원고를 다 쓰고 나면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그러면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더라고요.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술을 끊고 다이어트부터 해야 해요. 작업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소설을 쓰기 위해 다이어트부터 한다니 재미있어요.(웃음) 운동선수 같은 다짐이네요.
저는 작품을 쓸 때와 쓰지 않을 때의 몸무게가 10kg 가량 차이나는 것 같아요. 오랫동안 글을 써오면서 내 체중과 근골격의 치수가 어느 정도일 때 가장 작업을 잘할 수 있는지 기억하고 있죠. 작가는 격투기 선수와 비슷한 것 같아요. 격투기 선수들도 경기가 잡히면 몇 개월 전부터 자기 체급에 맞게 몸을 만들고 링 위에 오르잖아요. 작가도 마찬가지죠. 장편 소설가는 육체노동자입니다. 몸 관리가 필수예요.
다리를 다치면 글을 못 쓸 거예요
지난 2021년에도 글쓰는 일에 관한 책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를 펴내신 적이 있죠. 그 책이 작업에 관한 날것의 이야기 였다면 『김호연의 작업실』은 정리된 작업서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2021년 『불편한 편의점』을 출간한 이후, 강연을 많이 다녔는데요. "문장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좋은 작법서를 추천해 주세요"와 같은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그때마다 속시원한 답변을 드리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늘 있었죠. 그렇다면 책으로 한번 써보자 싶었어요. 지난 10년간 6편의 소설, 수많은 시나리오를 썼고, 소설 편집자 생활도 했으니 글 쓰는 노하우나 스토리텔링 기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책은 오로지 독자들을 위해 썼어요. 어려운 작법서 말고, 글을 쓰고 싶은 분들이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실용적인 책을 만들고자 했죠.
소설 쓰기의 작업 패턴으로 4가지를 말씀하셨어요. '루틴', '작업실', '산책', '독서'입니다. 그중 산책이 가장 눈에 띄었는데요. '산책은 글쓰기의 필살기(41쪽)'라는 문장 때문이에요.
저는 팔을 다쳐도 글을 쓸 수 있어요. 하지만 다리를 다치면 글을 못 씁니다. 산책을 하기 어려우니까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 작업할 시퀀스를 생각하고, 그걸 화두로 무엇을 쓸 지 고민하면서 한 시간 가량 산책을 하고 작업실에 갑니다. 그래서 서울에 작업실이 있을 땐 40~50분 거리를 걸어서 출근했어요. 사실 책상 앞에 앉아서 글자를 타이핑하는 순간은 집필의 극히 일부일 뿐이에요. 그 외의 시간은 대부분 작품을 어떻게 쓸지 생각하는 데 쓰죠. 저는 그 생각이 잘 활성화되는 순간이 산책을 할 때에요. 물론 사람마다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는 루틴은 각기 다를 텐데요. 글을 쓰려면 그게 무엇인지 꼭 찾아야 해요.
작가님은 한글 파일을 만드는 것부터 '작품의 시작'이라 생각하신다고요. '나는 이를 0페이지를 쓴다고 한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첫 문장도 쓴다. 그러면 벌써 1페이지를 시작한 것이다(105쪽)'라고 했어요.
글쓰기는 계속 미루고만 싶잖아요.(웃음) 그러니까 파일만 만들어 놔도 이미 소설 쓰기를 시작한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안간힘이 글을 쓰게 만듭니다. 아무리 내로라하는 작가라고 해도 일필휘지로 매일 A4용지 열 장씩 글을 써내려 가지는 못할 거예요. 물론, 시나 단편은 하루만에 좋은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장편은 마라톤입니다. 의젓하게 써내려 가는 힘이 필요하죠. 그러려면 자신을 북돋아야 해요. 장편은 일희일비하면 결코 쓸 수 없는 장르거든요.
글을 읽고 의견을 주는 '모니터 요원'의 중요성도 강조하셨죠. "나의 습작기엔 친구와 동료가 모니터 요원이 되어 주었다"고 했는데, 지금의 모니터 요원은 아내 분이신가요?
맞아요. 아내와 담당 편집자가 가장 먼저 제 소설을 봐줍니다. 지금은 이 두 사람이면 충분해요. 저도 습작 시절에는 좋은 모니터 요원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어요. 객관적인 시각에서 상식적으로 글을 봐줄 수 있어야 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부정적인 의견도 배려 있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니까요.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주는 과정은 꼭 필요합니다. 결국 글은 읽히기 위해 쓰는 거니까요. 물론 모니터 요원의 모든 의견을 수용할 필요는 없어요. 그중 어떤 의견을 반영해 글을 업그레이드 할 지 고민하는 것도 작가가 꼭 해야 할 훈련이에요.
소설 쓰기의 지난한 과정 중, 가장 재미있는 순간이 언제인가요?
작품을 구상할 때죠. 이야기를 결합하고, 캐릭터를 만들어서 초기 시퀀스를 쓸 때까지가 제일 재밌어요. 그 외의 과정은 전부 다 힘들고요.(웃음)
그중에서도 특히 힘든 과정이 있다면요?
저는 초고를 완성하는 게 제일 고되게 느껴져요. 또 책이 출간되기 전, 마지막 교정을 볼 때도 힘들더라고요. 세상에 완벽한 작품은 없잖아요. 그쯤 되면 내 작품에서 포기해야 하는 부분을 어느 정도 내려 놔야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선택과 집중을 하는 순간이 힘들죠. 완성된 소설을 수정하고, 교정을 보면서 이미 20번 이상 읽은 글을 또 봐야 한다는 것도 지루한 일이고요. 그래도 재밌어요. 모든 작가는 자기가 쓴 글의 팬이거든요.(웃음) 기본적으로 내가 내 글을 좋아하지 않으면, 작가를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요. 수없이 자기 글을 다시 읽고, 고치는 과정을 지나야 책이 나오니까요.
불편한 편의점, 마치 생명체 같다
인터뷰를 오기 전 『불편한 편의점』의 판권을 봤는데 101쇄더라고요. 이만한 성공을 예상하셨어요? 이 작품을 쓸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해요.
성공은커녕 완성하는 게 목표였어요. 네 번째 소설 『파우스터』가 잘 안되면서 소설을 쓸 동력이 없어졌거든요. 같이 책을 내자는 출판사가 없었기 때문에 『불편한 편의점』은 제 소설 중 유일하게 계약을 안 한 채로 쓴 책이에요. 그러니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어요. 함께할 출판사를 찾지 못하면 브런치에 연재할 생각으로 무작정 썼는데, 첫 소설 『망원동 브라더스』를 낸 나무옆의자 출판사에서 출간을 해보자고 말씀하셨죠. 출판사 대표님이랑은 『망원동 브라더스』의 반만 팔자고 얘기했었어요.(웃음)
베스트셀러 작가님들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책이 혼자서 독자를 만나고 다니는 게 기특하다."
정말 그래요. 『불편한 편의점』이 나왔을 때 저는 담양에 있는 문학관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서울에 있는 아내가 "책이 나왔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하고 말았죠. 당시 저는 유명한 작가가 아니었잖아요. 새 책이 나왔다고 <채널예스>에서 인터뷰 요청이 올 리도 없고,(웃음) 강연이나 북토크가 잡히지도 않을 테니 크게 신경쓰지 않았어요. 오직 다음 작품을 쓰는 데만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조금씩 판매량이 늘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더라고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도 규명하지 못했습니다.(웃음)
이게 독자의 입소문이 가진 힘인가 봐요.
맞아요. 『불편한 편의점』의 성공은 아마 출판계에서도 이유를 찾기 어려울 거예요. 나무옆의자 출판사는 지금도 직원이 5명뿐인 작은 출판사예요. 게다가 저는 무명 작가였잖아요. 오롯이 독자가 이뤄낸 결과인 거죠. 그래서 더 신기하고 감사해요. 이제 『불편한 편의점』은 저에게 더이상 소설이 아니라 생명체처럼 느껴집니다. 종종 책을 우러러보며 이야기하죠. "당신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라고요.(웃음)
그동안 강연을 많이 하셨잖아요. 상대적으로 글을 쓸 시간이 부족해져서 아쉽지는 않나요?
실제로 작년에 강행군을 하느라 작업을 거의 못했어요. 35개 지자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고, 지난해에는 연말까지 강연 일정이 꽉 차 있었거든요. 물론 힘들었지만 이 정도 사랑을 받았으면 당연히 직접 독자들을 만나서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학생들을 위한 자리는 거절할 수가 없었죠. 물론 작년 하반기 내내 글을 못 썼으니 작가로서 아쉬운 마음이 들긴 해요. 그래서 올해는 최대한 집필에 몰두할 계획이에요.
'2023 러브썸 페스티벌'의 테마가 『불편한 편의점』으로 선정되었어요. 그 소식을 듣고 어떠셨어요?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얼떨떨했어요. 제 소설을 테마로 페스티벌이 개최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죠. 아직도 믿기지가 않고요. 4월 22일이 돼야 실감이 날 것 같아요.(웃음) 사실 벌써부터 떨립니다. 이제 웬만한 북토크는 떨지 않고 잘하는데, 러브썸 패스티벌은 묘하게 긴장이 되네요.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잘 준비해보겠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달라진 게 있냐는 질문을 자주 받으시죠? 그에 대한 답이 책 속에 있었어요. '작가의 삶은 달라질 것이 없다. 변함없이 계속 쓸 따름이다.(164쪽)'
계속 소설을 쓸 동력이 생겼다는 것, 저를 찾아주는 곳이 많아졌다는 것 외에는 달라진 점이 없어요. 마냥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요. 저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달라진 것에 대한 부담도 있거든요. 다만 더 이상 책이 나올 거라는 확신 없이 작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정말 행복합니다. 내 글을 읽어줄 독자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로 글을 쓸 때가 제일 힘들거든요. 물론 책임감이 그만큼 커졌지만, 이런 스트레스조차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은 작가를 꿈꾸거나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읽으실 텐데요. 그분들께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인생을 살다 보면 그 순간에는 실패처럼 보이는 일도 지나고 나면 행운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죠.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실패인 듯한 경험이 사실은 큰 자양분이에요. 저도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동인천에 첫 작업실을 계약했을 때, 2년 안에 소설가로 데뷔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러지 못해서 당시에는 실패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불편한 편의점』이 인천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덕분에 얼마 전 인천에서 북콘서트를 했습니다. 이렇다할 작품 없이 동인천 작업실을 떠날 땐 상상도 못했던 일이에요. 그러니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겠다', '몇 년 안에 소설가로 데뷔하겠다'는 마음은 지양하세요. 그저 계속 쓰는 게 중요합니다. 글쓰기에는 패배가 없어요. 이기거나 배우거나 둘 중 하나죠.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군요.
제가 시나리오 작가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셈을 하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까지 21년이 걸렸어요. 전업 작가가 되기로 마음 먹은 날로부터는 14년이 지났죠. 글쓰기는 길게 봐야 합니다. 저는 빨리 성공하는 게 작가 생활에 오히려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첫 작품에 대박이 나면, 그 다음 작품을 잘 쓸 수 있을까요? 부담감 때문에 글을 쓰기가 힘들고, 제대로 된 훈련을 하기도 어려워요. 이미 프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는데 그때부터 글쓰기 훈련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하지만 오랫동안 담금질한 사람이라면 작품이 갑자기 성공을 해도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있죠. 공모전에 떨어지고, 열의를 다해 준비한 책이 독자의 호응을 받지 못해도 그건 하나의 단계일 뿐이에요. 작가는 평생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요.
*김호연 영화·만화·소설을 넘나들며 온갖 이야기를 써나가는 전천후 스토리텔러. 1974년 서울생. 고려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첫 직장인 영화사에서 공동 작업한 시나리오 「이중간첩」이 영화화되며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두 번째 직장인 출판사에서 만화 기획자로 일하며 쓴 「실험인간지대」가 제1회 부천만화스토리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만화 스토리 작가가 되었다. 같은 출판사 소설 편집자로 남의 소설을 만지다가 급기야 전업 작가로 나섰다. 이후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를 실천하던 중 장편 소설 『망원동 브라더스』로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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