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렷한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나'에게 한 소설가가 찾아온다. 어느 날 홀연히 사망하여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베스트셀러 작가 K. 그는 자신이 쓴 원고를 모두 줄 테니,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살아갈 것을 제안한다. 한순간에 거대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인물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간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인물들을 탐구해온 천희란 작가의 질문이 이번 『K의 장례』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아주 오래 품은 이야기
『K의 장례』는 오래전 떠올린 제목과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소설이라고요.
'유령 작가'는 데뷔 전부터 글쓰기가 막막할 때 자주 떠올린 소재예요. 이렇게 무능력한 나를 대신해 글을 써줄 사람이 나타나면 어떨까? 그런데 갑자기 유령 작가가 사라진다면? 그렇게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지만, 한동안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았어요. 남겨진 인간의 내면을 분열적으로 그리려고 시도해봐도 절망과 좌절의 언어로만 달려가게 되더라고요. 수없이 실패의 과정을 거쳤지만, 이상하게 이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었어요.
소설을 쓸 때는 "언제나 처음의 계획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이번 작품도 그랬나요?
최초의 구상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소설이 됐어요. 작가로서 문학장 내 권력을 고민하던 시기를 거쳤는데요. 문득 이 이야기가 '역사의 영향력'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인물이 한 명 더 필요하겠다. 노작가의 영향력이 필요한 인물과, 반대로 그 영향력을 완전히 거부하는 인물. 상반된 영향력에 놓인 그들은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가는가. 그게 소설의 방향이 됐죠.
소설가 K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K는 어둠 속에 사는 흡혈귀 같기도 한 남성 소설가입니다.
K라는 인물이 구체적인 남성 인물이 아닌, 문학사나 대문자 역사를 상징하는 알레고리처럼 느껴졌으면 했어요. 가장 많이 떠올린 이미지는 독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감독의 영화 <노스페라투>의 흡혈귀였어요. '흡혈귀' 하면 굉장히 매력적이고 성적으로 유혹적인 모습을 떠올리지만, 예전 영화에서는 공포스럽긴 하지만 추하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재현돼요. 오히려 염병과 같은 느낌이죠. 소설 속 K 역시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영향력으로 타인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전염병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영화에서 노스페라투는 주인공의 아내를 탐하기 위해서 도시로 내려왔다가 도리어 그 여성에 의해서 파멸을 맞이해요. 『K의 장례』에서도 여성 인물에 의해 K가 지닌 영향력과 권위가 전복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K의 영향력 아래 놓인 두 여성 인물이 등장합니다. '나'는 K가 준 '전희정'이라는 필명을 받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삶을 살게 돼요. 한편 K의 딸인 강재인은 그의 권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승미'라는 이름의 작가로 살아갑니다. 마치 거울상처럼 정반대인데요.
인물의 개성보다는 인물 간에 힘이 작용하는 방식을 먼저 고려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편이에요.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다 보면 전형적인 인물이나 서사에서 출발하더라도, 익숙한 역할이 비틀리는 과정에서 그 인물이 세계와 부딪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생각지 못했던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K의 장례』는 희정이 K라는 인물의 힘과 관계하는 방식을 비틀어보려 했고, 동전의 앞뒷면 같은 두 인물의 서사로 이어졌어요.
딸 승미의 눈으로 본 아버지 K는 여러 면을 갖고 있습니다. 문학적 성취를 지닌 소설가인 동시에, 현실 감각이 희박하고 이기적인 예술가의 전형인데요.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이후, 남성 작가의 글을 예전처럼 읽을 수 없게 된 현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남성 예술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 두려운 일이 되었잖아요. 과거에는 이것이야말로 '문학'이라고 믿은 것이 한순간에 무너진 거죠.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을 페미니즘 때문에 더 이상 다룰 수 없다는 푸념도 들리고요. 저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는 그 작품을 반드시 강의해야만 하는가, 다른 하나는 비판 지점과 문학적 성취를 분리한다면 그 작품을 가르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권위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 고민들이 『K의 장례』를 쓰는 데에도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결국 어떻게 읽는가가 중요해지겠네요.
여성 서사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작품을 읽는 방식이 여성 서사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저는 여성 서사의 개념이 늘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해요. 무엇이든 여성의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면,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이 가능하겠죠. 여성의 정체성에 특정한 여성성만이 포함되는 것도 아닐 거고요. 한 여성 안에도 너무나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걸 잊지 않는 게 소설을 쓰는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분열은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제목이 'K의 죽음'이 아닌 'K의 장례'예요. 죽음 자체가 아닌, 남은 자들의 몫이 중요하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장례는 죽은 자와 결별하는 과정이잖아요. 소설 속 K의 죽음은 종결이 아닌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어요.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거고요. 결국 이 이야기에서 최종적으로는 K가 지워졌으면 했어요. 이미 권위를 가진 인물에게 더 많은 목소리를 주고 싶지 않더라고요. 훨씬 중요한 건, 여성 인물들이 그 사건을 나름으로 소화해나가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소설이 끝날 때쯤에는 K라는 존재가 아니라, 두 인물이 어떻게 그의 영향력을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해져요.
작가님의 다른 소설집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에 실린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에서 중요한 주제는 '생물학적 어머니와 딸의 관계'였습니다. 이번 소설에서는 그 '영향'이 남성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질문을 받고 저도 차이를 고민해봤어요. 모녀 관계에서는 늘 모성애라는 신화가 작동하고 있어서, 그 틀에 맞지 않는 여성들은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성이 직접 모성 신화를 깨뜨리는 것이 중요했죠. 반대로 이번 『K의 장례』에서는 대문자 역사로서의 아버지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권위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면, 여성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와 대결하는가가 제게 중요한 문제였어요. 남성의 이름이 오래 살아남고 기억될 때, 여성인 나는 어떻게 이 역사를 뚫고 나가야 하나. 제게는 이 소설이 그 답을 찾는 과정이었어요.
여성에게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할 것 같아요.
보통 문학에서 권위의 교체는 '아버지 죽이기'를 통해 이루어지잖아요. 저는 그것이 오히려 아버지의 권위를 강화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를 상징으로 둘수록, 그 죽음이 아버지를 절대적인 권위로서 남게 하는 거죠. 제 소설 속 인물의 선택은 달랐으면 했어요. 딸 승미에게 아버지인 소설가K는 전면적인 대결 상대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영향력이에요. 여기에 대해 승미는 영향력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못본 척 스쳐 지나가는 태도를 취해요. 그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승미는 어른들이 원치 않는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서재를 박탈당합니다. 작가님의 자전적 경험이기도 하다고요.
맞아요. 어렸을 때부터 집에 책이 굉장히 많았는데 닥치는 대로 읽다 보니 어른들의 책장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는다'는 자부심으로 학교에도 책을 들고 갔죠. 선생님이 부적절한 책이라고 판단하셨는지 "아이가 정서에 안 좋은 책을 읽는 것 같다"고 집에 전화를 하신 거예요. 그날부터 어른들이 읽는 책에 손을 대지 못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책읽기에 흥미를 잃게 됐죠.
그럼, 언제부터 책을 다시 읽게 된 건가요?(웃음) 박민정 소설가의 '발문'에서 작가님의 글쓰기와 독서 취향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 당시 문예 창작과에서는 여성이 쓴 작품을 열렬히 좋아해도, 좋다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고요.
한동안 책을 많이 읽지 않다가 문학 공부를 하게 되면서 다양한 작품을 읽게 됐어요. 2000년대 초반 문예 창작과는 여학생의 수가 많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남성 중심적인 곳이었어요. 수업 시간에 여성 시인의 작품은 고작 한 회 정도 '여성 문학'이라는 카테고리로 수업을 하는 식이었죠. 개인적으로는 아니 에르노, 실비아 플라스, 엘프리데 옐리네크, 비르지니 데팡트 등 강렬하고 전복적인 여성 작가의 작품을 열렬히 탐독했지만, 이 작가들을 좋아한다고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했어요. 모임에 가서 좋다고 하면 "나쁘지는 않은데 한계가 있지"라는 평가가 돌아오는 거예요. '이건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여자의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을 주입 받은 거죠. 한동안 여성으로서의 문제의식과 문학은 별개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작가님의 소설에서 '여성'이 중요해진 계기가 있었나요?
데뷔 이후, 오랫동안 여성작가로서의 나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어요. '내 소설에 분열적인 내면이 중요한 테마인데 이것이 여성으로서의 나와 어떻게 연결될까. 현대 사회에서는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으니, 이 분열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이해해 보자.'
지금은 분열을 적극적인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싶어요. 보통 분열을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지만, 분열은 내 안에 어떤 타자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K의 장례』를 쓰면서도,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인물이 지금까지 나를 규정해온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밝혀나가면서 분열을 마주하는 모습을 자주 떠올렸던 것 같아요.
K의 영향력을 느낄수록 강해지는 건 인물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입니다. 결국 이 소설이 '자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유인데요.
절대적인 자유는 불가능한 것 같아요. 다만, 자유의 불가능성을 깨닫고 매순간 나를 속박하는 것을 깨뜨려 나가는 경험만 있을 뿐이죠. 어쩌면 이 소설은 외부에서 주어진 이름을 벗어던지는 것, 본래의 이름을 찾는 것으로 자유를 획득하고자 했던 인물들의 실패담인지도 모르겠어요. 본래의 나란 외부의 힘으로도 자신의 힘으로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확정될 수도 없고, 항시적으로 일관될 수도 없다는 사실은 분명 고통스러워요. 그렇지만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 그 분열은 나를 규정해온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나에게 타자가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니까요.
결국, 『K의 장례』를 쓰는 내내 중요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의 문제였던 것같아요. 우리는 현실에서 너무 많은 취향과 정보, 복잡한 정치적 선택들 앞에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의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으로 있기 어렵잖아요. 외부 세계가 불러일으키는 혼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정체성을 정의한다는 것이 역으로는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최근 진지하게 하고 있어요.
*천희란 소설가. 소설집 『영의 기원』,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경장편 소설 『자동 피아노』를 썼다. 2017년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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