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시인은 그림책을 염두에 두고 시를 지었고, 서수연 작가는 그 시를 매일 읽으며 2년간 그림을 그렸다. 그림책 『백 살이 되면』의 모든 장면이 유독 아름다운 이유다. 책에는 백 년 동안 평온한 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가 등장한다. "잘 쉬었어? 오늘은 기분이 어때?"라는 물음에 말갛게 웃는 아이. 그림책을 다 읽고 나면 그 평화로운 미소가 마음에 오래 머문다.
그림을 만나 시가 넓어지는 느낌
두 분은 이번 그림책 작업으로 처음 인연을 맺으신 거죠? 첫 만남의 순간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황인찬 : 책이 출간되고 나서 실제로 처음 만났어요. 그날 그림책 300권에 사인을 하느라 정신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이에요.
서수연 :저는 황인찬 시인님의 팬이거든요. 처음 만나는 날, 보자마자 뒷걸음질 쳤죠. '와, 인스타그램에서만 보던 사람이 여기에 있다니(웃음)!'
그림책 작업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황인찬 : 대학원에서 김서정 선생님의 아동 문학 수업을 들으며 쓴 시예요. 그림책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학기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제 시를 출판사에 보여줘도 괜찮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그림책이 출간될 거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승낙하는 출판사가 없을 줄 알았거든요.(웃음) 운이 좋게도 저의 텍스트를 좋게 봐 준 편집자님들이 있었고, 덕분에 지난해 펴낸 첫 그림책 『내가 예쁘다고?』에 이어서 『백 살이 되면』까지 책으로 출간되었네요. 시인으로서 너무 기쁘고 감사한 일이죠.
서수연 : 저는 편집자님의 연락을 받고 작업에 참여하게 됐어요. 제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메시지가 왔는데 사계절출판사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평소에 시를 워낙 좋아했고, 그림책 작업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기에 바로 수락했는데, 막상 시를 보고 나니 망설여지더라고요.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지 두려웠거든요. 고민 끝에 편집자님께 "저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작가가 있다"면서 다른 분을 추천했을 정도로 저에게는 어렵고 막막한 작업이었어요.
작가님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봤어요. '시는 너무 아름다운데, 나는 너무 하찮고'라고 쓰셨죠.(웃음) 그 기분이었군요.
서수연 : 맞아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괜히 하겠다고 해서 일을 망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럼에도 약속을 했으니 어떻게든 해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단순히 시를 그림이 설명하는 방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시와 적절히 어울리면서도 그림이 전달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죠. 시를 그대로 표현한 그림이 실린다면 그림책이 아니라 시화집이 될 뿐이니까요.
황인찬 : 돌이켜보면 작가님보다 제 시를 더 잘 표현해줄 분은 없었을 것 같아요. 서수연 작가님의 그림을 보면서 시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저는 첫 시안을 받았을 때부터 너무 좋았어요.
막막했던 작업의 돌파구가 되었던 게 무엇인가요?
서수연 : 시를 벽에 붙여 놓고 매일 읽었어요. 이 시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다 보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황인찬 : 정말 매일 읽으셨어요?
서수연 :그럼요! 시인님이 꿈에 나올 정도였어요. 하루는 편집자님까지 꿈에 나와서 수정 사항을 말씀해주셨는데, 그걸 적은 종이가 안 보이는 거예요. "나 어떡하지. 큰일났다"라면서 엉엉 울다가 깬 적도 있죠. 다른 작업을 하거나, 쉴 때도 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이렇게 내내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걸 붙잡아서 한 장면씩 그리곤 했어요.
아득히 멀지만 끝은 아닌, 고요한 휴식
시 「백 살이 되면」을 처음 읽었을 때는 '죽음'에 대한 정서가 먼저 떠올랐는데요. 그림책을 여러 번 읽다 보니 '이렇게 백 년 동안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황인찬 : 아주 커다란 휴식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커다란 휴식이란 결국 죽음이기도 하니까, '죽음과 같은 쉼'이 중요한 이미지였던 건 분명하죠. 그러면서도 이야기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지를 고민했어요. 기본적으로는 휴식에 대해 말했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느끼는 피로감이나 우울감 등의 정서도 함께 들어있을 거예요.
'100살'이라는 단어가 주는 임팩트가 있어요.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한 번쯤 바라게 되는 숫자죠.
황인찬 : '아주 캄캄한 잠 속에 빠져들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과 '백 살이 되어 있는 상태면 좋겠다'고 말하는 건 굉장히 다르잖아요. 그런데 저에게 후자는 아득하게 멀긴 하지만, 결코 끝은 아닌 느낌이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긴 인생이 한 번 끝나고, 삶의 중요한 마지막에 다다른 순간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영원한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니죠. 또, 요즘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잖아요. 순식간에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과 이게 우리를 그만큼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수연 작가님은 시를 어떻게 읽으셨어요? 첫 번째 시안과 최종 버전인 현재의 그림이 완전히 달라진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서수연 : 맞아요. 이 책에 실린 그림이 세 번째 버전인데요. 조금씩 장면을 수정해서 발전해나간 그림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 이야기를 그렸어요. 첫 번째 버전은 물고기가 죽고, 그 장면을 어린이가 확인하면서 시작되는 환상에 대한 그림이었어요. 이 시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죽음이 떠올랐거든요. 그런데 편집부에서 이 시는 휴식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피드백을 주셨고, 여러 차례 다시 읽으면서 제가 시를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죠.
황인찬 :저는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첫 번째 시안의 스토리가 정말 매력적이고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림이 아름다웠던 건 물론이고요. 저는 죽은 물고기가 하늘의 비로 확장되어 나아갔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그걸로 꼭 새로운 그림책을 하나 출간하셨으면 좋겠어요. 그 그림을 직접 보면, 어떤 작가라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서수연 : 정말요? 시 한 편 써주실래요? 시인님이 써주신다고 하면 열심히 할 수 있어요!(일동 웃음)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 무엇인가요?
황인찬 : 아이가 오리배와 함께 수영을 하며 나아가는 장면이요. 밝고 아름다운 그림인데, 절반은 어둡고 절반은 환한 느낌이에요. 어두운 숲에서 밝은 물로 나아가는 모습이 좋더라고요. 이 그림책은 죽음에서 시작해서 휴식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이자, 방에서 시작해서 하늘 위 혹은 물속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아이가 침대 위에서 숲으로, 물로 나아가며 그동안 차올랐던 이야기들이 터지는 순간을 그렸다고 생각했어요. 이를테면 시에서도 심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텍스트가 더 확장되거든요. 이 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도약이자, 아름다운 순간인 거죠.
서수연 : 저도 그 장면을 제일 좋아해요. 한 번에 그린 그림이죠. 정말 쉽게 그렸는데, 마음에 들더라고요. 다 완성하고 그림을 봤는데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그 자체로 너무 좋았어요.
가장 표현하기 어려웠던 그림도 있나요?
서수연 : 특정한 장면이 아니라, 빛을 그리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저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아서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기본적인 테크닉에 약해요. 빛과 그림자, 양감, 원근감 같은 것들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죠. 그런데 이 책은 주인공이 점점 더 편안한 빛으로 나아가는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환한 빛을 어떻게 그릴지가 제일 풀리지 않는 고민이었어요.
그림책이 작가에게 주는 기쁨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건 작가 개인의 영역이지만 그림책은 철저한 협업으로 완성되는 장르예요. 이 작업이 두 분께 어떤 의미였을지 궁금해요.
황인찬 : 시에서는 행과 연이 정말 중요해요. 행은 시의 최소 의미 단위이기 때문에 행이 어떻게 나뉘느냐에 따라 시의 의미가 달라지죠. 연이 바뀌면 의미의 분절이 일어나고요. 그런데 그림책에서는 연이 바뀌는 정도를 넘어서 페이지가 바뀌고, 다른 그림이 등장하잖아요. 이 전환이 굉장히 커서 의미의 간격이 넓어진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간격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배치해서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는 게 중요했죠. 때로는 글보다 이미지가 더 앞으로 나와야 하는 순간도 있는데, 그때 글과 그림을 어떻게 잘 어우러지도록 해야 할지도 깊이 생각해야 했고요. 이건 시를 쓸 때와 달리 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편집부, 그리고 서수연 작가님과 협의하는 시간이 꼭 필요했어요. 시와 다른 호흡을 맞춰가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서수연 : 사실 일러스트 작업은 저에게 그냥 '일'이에요. 청탁하는 분께서 원하시는 그림을 직접 그릴 수 없으니, 저에게 의뢰하면 그걸 그대로 그려드리는 작업이죠. 하지만 그림책은 그렇게 단순히 표현할 수가 없어요. 어떤 아름다움을 향해서 함께 걸어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너무 좋았어요.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어도 이걸 온전히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곁에 있는 것 같았거든요. 이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잘 들려주기 위해서 나와 똑같이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큰 힘이었어요.
시가 그림책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인찬 : 처음에는 시 한 편으로 책 한 권의 값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정말 컸어요. 시집 한 권에 대략 50편의 시가 들어가고 만 원 남짓을 받는데, 그림책은 만 원이 훌쩍 넘으면서 시 한 편을 싣잖아요. '그래도 되나? 이걸 독자들이 살까?'라는 생각을 했죠. 이를테면 시 한 편으로 책의 무게감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이었어요. 그런데 서수연 작가님의 그림이 들어가면서 시가 더 넓어지고, 의미가 확장되는 걸 보고 즐거움과 놀라움을 느꼈죠. 이 가격에,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소장할 수 있다는 건 복지예요.(웃음) 지금은 그림에 비해 그림책 값이 너무 저렴하다고 생각해요.
서수연 작가님은 2016년부터 퇴근 후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퇴근드로잉' 작업을 하고 계시죠. 이 프로젝트는 2050년까지 계속될 예정이라고요. 연도를 정한 이유가 있나요?
서수연 : 그때쯤 제가 70세가 되거든요. 퇴근드로잉은 일이 끝난 후에 그림을 그리는 프로젝트니까, 적어도 70살까지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정했는데 후회하고 있어요.(웃음) 아마 저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겠죠?
『백 살이 되면』은 서수연 작가님의 첫 그림책이자 황인찬 시인님의 두 번째 그림책이에요. 앞으로도 두 분의 그림책을 계속 볼 수 있을까요?
서수연 : 계속 하고 싶어요. 이번 작업이 제 삶을 너무 행복하게 만들어줬거든요.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게 사람들에게 엄청난 행복감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림책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도 아름다웠고요.
황인찬 : 저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림책 작업을 계속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그림책을 만드는 자체도 즐겁지만, 동시에 시인으로서 얻게 되는 기쁨이 분명히 있거든요. 제 시가 그림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시와 문학에 대한 생각이 새로워지기도 하고, 넓어지기도 해요.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일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도 있고요. 이런 기쁨을 또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죠.
100살은 너무 먼 미래니까 '100일의 휴가'가 주어졌다고 가정해 볼게요. 무엇을 하면서 쉬고 싶으세요?
서수연 : 혼자 갇혀서 그림 그리고 싶어요. 어떤 전시회에 갔을 때 '앙리 마티스'가 작업실에 수도승처럼 갇혀서 그림을 그렸다는 문구를 보자마자 눈물이 터진 적이 있거든요. 상상만 해도 너무 부럽더라고요.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넓고, 빛이 많이 들어오는 공간에서 100일간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림만 그려보는 게 소원이에요.
황인찬 :저는 시 절대 안 쓸 거예요.(웃음) 지금도 매일 마감에 허덕이는데 휴가를 그렇게 보낼 수 없죠. 저는 100일의 절반쯤은 집에 있는 식물들을 들여다보면서 지낼 것 같아요. 식물에 물 주고, 분갈이하고, 가만히 쳐다보면서요. 그렇게 아무 것도 안하면서 식물이 생장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고 싶고, 그 외에는 운동하고, 많이 자면서 나머지 시간을 보낼 것 같아요... 그렇게 길게 쉰 적이 없어서 사실 상상이 잘 안 가는데요. 한 70일쯤 쉬고 나면 뭐가 쓰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무 것도 안 쓸 겁니다.(웃음)
*황인찬 (시인) 1988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시를 이용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자주 고민한다. 시를 통해 타인과 깊게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매일 시를 쓰고 읽는다. *서수연 (그림 작가) 2011년부터 남편과 카페를 운영하며 책, 잡지, 광고 등의 분야에서 프리랜서로 일러스트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2016년부터 현재까지 '퇴근드로잉'이라는 개인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다. '퇴근드로잉'은 카페 일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돌아가는 길에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그린 그림들로 시작되었다. 일과 상관없이 그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는 이 드로잉은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 캄캄한 거실에서 비밀처럼 그린 그림들로 이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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