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화폐, 민주주의를 종횡무진 탐구하며 앎을 추구해온 고병권이 11번째 책을 냈다. 책 제목인 『철학자와 하녀』에서 보듯 이번 책의 소재는 철학이다. 원래 KB레인보우 인문학에 ‘시민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글로, 철학자나 철학 개념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다뤘다.
<교수신문> 2월자 칼럼에서 권경우 평론가는 그를 일컬어 ‘거리의 철학자’라고 칭했다. 실제로 고병권은 다양한 장소에서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장애인, 해고노동자, 밀양송전탑 현장 활동가 등과 만나고 대화하고 사유한 결과물은 『살아가겠다』로 나왔다. 『철학자와 하녀』역시 ‘현장’, ‘거리’를 강조한다. 철학은 관념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지금 시대, 이곳과 끊임없이 맞닥뜨려야 한다는 게 고병권의 신념이다.
서로 조롱하고 적대하면서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불행하다면, 역설적이게도 각자의 구원은 서로에게서 오는 게 아닐까. 삶의 절실함과 대면하면서 철학자는 새로 철학을 배우고, 앎의 각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삶을 새로 살지 않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위대한 탈레스를 재치 있게 조롱했던 총명한 하녀가 어느 밤 다락방 창문을 열고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7쪽)
철학은 내가 어디까지 나로 멀어질 수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앎
책 제목이 『철학자와 하녀』다. 지금 여기의 철학자는 누구인가?
일단 내가 철학과를 나온 게 아니라 조심스럽다. 도대체 철학자가 누구냐, 철학자가 뭐 하는 사람이냐를 스스로 물어본다. 철학 학위를 가진 사람, 철학책을 쓰는 사람?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니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플라톤부터 대부분의 철학자는 철학을 전공하진 않았다. 대학의 특정 학과가 분류한 지식이 철학이라면, 철학이 삶에 필요할까?
철학은 뜻 자체로는 앎을 향한 사랑, 앎과 우정을 맺는 것이다. 앎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정보와 지식을 축적하는 것. 칸트가 이런 말을 했다, 헤겔이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정보 차원의 앎이다. 나머지 하나는 다른 차원이다. 깨우침. 깨달음, 일깨움이라 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정보를 보더라도 다르게 보는 것. 예를 들어, 어제는 무심히 본 뉴스인데 오늘 보니까 못 견디겠다는 식으로 기존의 자기가 깨지는 것이다. 첫 번째 차원은 어떤 학문이나 다 해당된다. 철학이 첫 번째 앎이라면 거기에 관해서 나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두 번째 차원인 일깨움, 다르게 보는 경험이 철학이라면 철학은 내가 어디까지 나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앎이다. 나를 일컬어 철학자, 인문학자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철학자, 인문학자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는다. 집에 걸려 있는 옷이 이 옷밖에 없으니 안 맞아도 입는다. 기왕 입을 거라면 낯설게 입어보고 싶었다.
지금 여기의 하녀는?
하녀는 넓은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다. 돈이 없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자유가 없는, 도덕적인 명예를 박탈당한, 추방된 존재들을 넓은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라 칭했다. 이런 사람들과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지금 삶과 다른 걸 꿈꾸는 열망이 있으나 앎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조심할 건, 철학자가 앎을 갖고 있고 이 앎을 가난한 사람에게 건넨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하녀에게는 하녀의 진리가 있고, 철학자에게는 철학자의 진리가 있다. 저마다 부족한 점, 바꿔야 할 점이 있다. 특히 하녀는 공허한 이야기를 경고하는 사람이다. 하녀와 마주침에서 철학자가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첫 번째 영역의 앎, 즉 지식의 축적이라는 면에서는 대학이 떠오른다. 하지만 ‘일깨움’이라는 두 번째 앎의 영역을 대학이 이끌어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수유너머R도 그렇고 오래 전부터 제도권 밖에서 연구를 계속해오고 있지 않나.
대학이라고 해도 좋고, 학계라고 해도 좋고, 지식인라 해도 좋다. 거기서 생산되는 앎의 생산 방식, 소통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질문이라면, 답은 이렇다. 내가 좋아하거나 지지했으면 그쪽으로 갔겠지. 물론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잘 모른다.
제도 바깥에서 공부하게 된 이유는, 대학에 맞서 싸우겠다는 거창한 게 아니라 소박하게 삶의 출구를 찾기 위해서다. 자유보다 소중한 게 출구다. 계속 공부는 하고 싶고, 돈은 없다. 대학 교수가 되면 좋겠지만, 내가 고를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학이 앎을 생산하는 데 좋은 자리라는 확신이 안 섰다. 그런 가운데서 살 길을 찾았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료와 밥 같이 먹고 공부한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다.
대학은 지식을 축적하는 데 월등히 유리하다. 대학은 어마어마한 자료를 갖고 있다. 우리는 논문 하나 받으려 해도 ID가 없다. 두 번째 차원인 일깨움에서는 우리가 유리하다. 대학에는 비슷한 종류의 사람, 비슷한 문화, 특정한 아비투스를 공유하는 사람이 모여 있다. 그곳에서 깨지는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 대학이 세속의 먼지와 소음으로부터 떨어지면서, 지식을 축적하는 데는 유리한 조건을 구성했는지 모르지만 일깨움이라는 차원에서는 스스로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고 봉쇄한 측면이 있다.
대학에서 많은 논문이 나오지만 세상에 별 일이 안 일어난다. 대학, 연구하는 사람에게도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학이 우리 사회에 유익한가 아닌가를 떠나서 대학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공부하기 좋은 곳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보지 않으면 연구자에게도 안 좋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시장터로 나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두 가지가 적절하게 필요하다. 대학은 위기다. 돈이 안 들어와서 위기가 아니라, 두 번째 앎의 차원에서 위기다.
지식의 습득만을 보장해주고 인식 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그런 지식욕이란 무슨 필요가 있을까. (133쪽)
인문학의 한계, 무력함을 생각해야
강신주를 대중철학자로, 고병권을 거리철학자로 비유한 칼럼이 있었다.
과장이다. 나도 길거리에 있지 않다. 여기(수유너머R)에 있다. 『살아가겠다』는 책을 내면서 그런 호칭이 생긴 것 같은데. 강신주 선생님에게 팬도 많지만 안티 팬도 많은 듯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와 강신주 선생님이 공부하는 내용이 얼마나 다를까 싶다. 얼마나 다르게 쓸 수 있을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인문학에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인문학이 학과가 없어지는 등 안에서는 죽고 밖에서는 뜬다. 인문학이나 철학이 전문 분야로 고립되어 가는 것도 좋아 보이진 않는다. 다만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인문학이라는 담론이 대개 가족주의, 단란한 가정을 상정한다. 중산층 위주다. 인문학이 원래 그런지, 아니면 우리 인문학의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인문학은 해석학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관이 나온다. 프로이트 이야기를 하면, 소녀를 진단해서 신경증이라고 진단하고 정신분석으로 치유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가자마자 6개월만에 죽었다. 알고 보니 실제 종양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해석학 때문에 앓는 병도 있지만, 실제로 종양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는 해석학적 처방이 아니라 생리적 처치를 받아야 한다.
자신의 한계, 유약함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으면 인문학은 쓸데 없는 학문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력함, 한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문학은 원자폭탄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 철학, 종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
1980년대가 사회과학의 시대고, 1990년대 넘어오면서 인문학이 각광 받는 것 같다. 원래 전공이 사회학인데, 점점 인문학자로 자리매김하는 느낌이 든다. 시대적 변화에 적응한 것일까?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사회과학이냐 인문학이냐 이런 걸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최근에 나온 『살아가겠다』, 『언더그라운드 니체』그리고 『철학자와 하녀』까지 해서 인문학스러운 책이 나왔지만 『점거 새로운 거버먼트』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는 사회학적 성격이 강하다. 사회과학이 인기 없어진 건 사실인 듯하다. 그럼에도 『세상물정의 사회학』같은 책이 인기를 끌기도 하고, 이렇듯 사회학에도 또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1980년대가 사회과학의 시대라고 했지만 동시에 문학의 시대이기도 했다. 굉장히 많은 사람이 철학 공부를 하기도 했고.
나 개인으로 보면 화학에서 사회학으로 이동했고, 사회학에서는 철학에서 다루는 니체를 읽었다. 화폐로 논문을 쓰기도 했고, 니체로 쓰기도 했다. 궁금한 걸 따라서 일관되게 왔다. 화학에서 사회학으로 왔던 친구가 있었는데 원래 화학과로 돌아갔다. 니체 공부했던 사람 중에서도 몇몇은 그만 뒀다. 끊어진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었다. 분과학문 체계에 갇히면 궁금한 것이 끊어진다. 모든 질문에 분과학문마다 저마다 답이 있겠지만 대화할 수 있다.
딱 잘라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인문학, 사회과학 이렇게 두 부류의 책을 냈는데 독자 반응은 어떤가.
분야에 상관 없이 앞에는 잘 팔리고 최근에 낸 책일수록 잘 안 팔린다. (웃음)
이번 책에서 니체를 언급하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다루기도 했다. ‘가치의 전도’일 텐데. 우리사회에서 전도된 가치는 무엇인가.
어느 시대나 모든 사유의 과제는 가치 전도다. 우리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을 것이다. 이걸 시험해 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름이 있다는 건 가치체계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새로운 사회, 삶을 살고 싶다면 가치 체계를 전도하는 것과 관계 있다. 우리 사회에 뭐가 제일 중요한지를 물어보면, 모르겠다.
니체는 ‘모든 것의 가치전환’이라는 표현을 종종 썼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반대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지혜로운 자는 저렴한 비용으로도 잘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비싸게 치는 것을 그는 별로 높이 보지 않고, 그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소홀히 하니,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도 귀중한 것들 것 쉽게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102-103쪽)
수유너머가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칼럼에서도 썼지만, 수유너머가 10년을 넘게 버텼다. 어떻게 오랜 시간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아까 말했듯, 삶의 출구였다. 각자 직업이 있고 수유너머가 하는 활동 중 하나였다면 오래 못 갔겠지. 안 할 수가 없었다. 안 하면 살 길이 없기에. 갈 데가 없고 살아갈 수 없고 훌륭한 동료를 만날 수 없었다. 별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가 좌절이고 또 하나는 포기조차 사치스럽다는 뜻이다. 수유너머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많았다. 이곳이 출구였던 사람이 대다수였다. 대학개혁, 인문학의 전파, 이런 대의를 위해서였다면 아마 3년 안에 다 박살 났을 것이다. 여기가 자기구원하는 곳이고, 자기구원의 방식을 사회와 연결하며 출구로 삼았기에 오래 가지 않았을까. 2009년에 없어졌지만 다시 비슷한 걸 만들었다.
수유너머N과 수유너머R은 어떻게 다른가?
가장 큰 차이는 스타일이다. 사상이 다르면 함께 살 수 있다. 사상은 전향하면 되니까. 레프트가 뉴 라이트가 될 수 있다. 물론 사상 전향도 비전향 장기수에서 보듯 어렵긴 하다. 그렇지만 진짜 바꾸기 어려운 게 스타일이다. 새벽형은 올빼미형과 살 수 없다. 밥 같이 먹고, 공부 열심히 하는 건 비슷하지만 스타일은 저마다 다르다. 흥미로운 건 N은 밤에 사람이 많고, R은 낮에 많다. 상대적으로 N은 좀 더 학문적 활동에 관심이 많고 R은 여기 근처에 살면서 아기도 같이 키우고, 이게 스타일 차이다. 약간 방점이 다르다. N과 R은 친하다.
세월호를 대하는 우리의 윤리적 자세
세월호를 둘러싸고 의제가 많다. 신자유주의, 종교 부패, 국가의 무능 등 시간이 흐르면서 의제도 바뀌고 새로 등장하는 이슈도 있다. 어떻게 보나.
솔직히 잘 모른다. 다만 이 사건에 대한 윤리적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우리가 감당 못할 사건을 겪으면 강력한 고통, 불쾌를 겪는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이 감정의 원인을 빨리 찾으려 한다. 선장, 해경, 그리고 대통령까지 갈 수 있다. 하지만 빨리 가면 안 된다. 겪어내야 한다. 더 끄집어 내야 한다. 빨리 찾아내서 덮으면 못 볼지도 모른다. 세월호 사건은 워낙 예외적이지만, 예외적 사건 속에서 우리 사회를 다 본 거다. 예외가 아니라 정상을 봤다. 예외적 시공간 속에서는 일상의 연속성이 깨지는 순간 얼마나 깊이, 멀리 갈 수 있느냐에 따라 사회가 이동할 수 있다. 문제를 극소화해서는 안 된다.
『살아가겠다』를 쓰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삶의 영역, 생명의 영역이 위태로워졌다는 걸 느꼈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구호가 ‘해고는 살인이다’, ‘여기 살고 싶다’ 등으로. 평화, 생태, 생명을 강조하는 구호가 많아졌다. 이 시기에 촛불집회에도 여학생이 많이 등장한다. 생명 영역이 위험에 빠져 있으니까. 생명이 원래 여성 영역이다. 외주화, 상품화해선 안 될 영역이 팔려가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위험해졌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다만 자칫하면 이런 사건으로 911을 겪은 미국이 재난부터 테러까지 대처하기 위해 비대한 감시 기구를 만들었듯, 우리도 그렇게 될까 봐 걱정스럽다. 이 문제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진 않았다.
서구사회에서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담론이 있지 않았나.
울리히 벡이 단순하게 말하진 않았겠지만 위험사회 담론의 문제는 안전에 구원이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안전이 대안은 아니다. 안전을 강조하면서 이제 테러와 자연재해를 구별할 수 없게 돼버렸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재난과 테러가 정치화된다. 불안을 매개로 해서 권력이 어마어마하게 커질 수도 있다.
곧 지방선거다. 민주주의를 고민한 지식인으로서 한 마디 부탁한다.
우리나라나 세계적으로 봐도 생활 이슈, 정당 정책을 제대로 반영하는 선거는 없었다. 지금 구조는 인기 투표다. 이런 구조에서 인기 투표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건 허망한 이야기다. 시선을 역으로 돌렸으면 좋겠다. 누가 뽑히느냐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떤 거번먼트냐가 중요하다. 거번먼트가 삶의 한 영역일 뿐인데 지금은 너무 중요해졌다. 사람 한 명을 잘못 뽑으면 사회가 아작 난다. 이상이겠지만 정치인이 크게 뭔가를 할 수 없는 사회가 좋다. 제도를 어떻게 바꾸고 어떤 세력이 권력을 차지할지도 좁은 의미의 정치이지만 우리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꾸릴 것인가가 정치다.
솔직히 세월호 사건 없었으면 안전 이슈도 없었을 것이다. 민주당이 집권했으면 잘했을까? 아니다. 이런 사건을 겪을 때 멘탈리티, 기본 심성이 시프트 한다. 그래서 이런 사건은 소중하다. 그런데 패러다임 시프트에 관심이 없다. 이 영역에 관심이 중요하다. 비전을 정책과 제도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정치가다. 변화를 이끌어내고 어떻게 실행하는 건 시민이다. 이것을 개념으로 풀어쓴 사람이 철학자다. 각각의 사건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정치가가 제일 중요하진 않다. 시민도, 철학자도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할 수 있는 체제
많은 책을 냈다. 주제도 다르고 글쓰기 스타일도 다르다. 어떤 스타일의 글, 주제를 좋아하나.
지금까지 낸 책이 11권이더라. 『언더그라운드 니체』는 굳이 말하자면 학술적이다.『살아가겠다』는 약간 사회학적이다. 『철학자와 하녀』는 좁은 의미에서 대중적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쓰면서 진짜 중요한 게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학술진흥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은 연구 글인데, 결론을 쓸 때 결론에 반대하는 게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학술글 포맷이 답답하고 반민주적이라 갑갑하더라. 결론을 바꾸기 시작했다. 여러 스타일을 시도했다. 민주주의는 사상의 문제이기 이전의 스타일의 문제다. 여러 다른 스타일이 함께 있을 수 있다. 스타일에 다수와 소수가 없다. 모두 소중하다. 카프카의 단편처럼 짧은 이야기도 써 보고, 선문답 형태로도 써 보고, 아이를 위한 동화로도 써 봤다. 학술 서적인데도 없는 책도 인용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현행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니까. 노인, 아이, 동물을 등장시켰다. 민주주의는 남녀노소, 인종을 넘어서야 하기에.
정해진 스타일은 없는데 앞으로도 내 스타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부러워하는 스타일은 루쉰의 짧은 산문. 그게 안 될 것 같다. 글을 그렇게 쓰려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흉내낼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참고로 원래 스타일이란 말이 라틴어로 단검에서 유래했다. 펜이 칼보다 강한 게 아니라 원래 펜이 칼이다. 루쉰의 글이 그렇다. 루신의 문장에 맞으면 아플 것 같다. 니체와 루쉰이 통하는 점이다. 피로 쓴 걸 먹으로 가릴 수 없다는 공통점이 그것. 지식과 깨우진 진리는 차이가 난다. 그런 면에서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성냥개비 같은 사상가가 된다. 누가 머리를 그어주지 않으면 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최신 사상, 최신 사상가를 좇으려는 노력이 고병권의 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듯하다.
요즘은 오히려 오래 전으로 떠났다. 18세기, 19세기로. 최신 사상가가 틀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에게 소중한 문제의식이 있다. 동시대인이고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 게다가 요즘은 한국에도 오고 이메일로 대화할 수 있다. 동시대인과 대화하는 건 소중하다. 확실히 해둘 사실에는, 사상에는 국경이 없고 세상에 좋은 말은 부족하지 않다는 점. 체험되지 않은 사상은 훌륭한 말로 시작해서 훌륭한 말로 끝난다. 피와 살이 안 된다.
니체, 화폐, 민주주의 등 관심사가 많은데 최근에는 어디에 관심이 있나.
마르크스다. 계급, 이데올로기, 역사, 비판 등 마르크스로부터 온 단어가 많다. 이 단어에 익숙하지만 그것을 두들겨 보고 싶었다.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를 내가 제대로 이해했느냐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개념을 비틀어 보고 싶다. 역사보다는 비역사, 가치보다는 무가치에 관심이 있다. 그러면서 프로이트로부터 많이 얻고 있고 최근에 칸트가 좋아졌다. 작업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좀 오래 걸릴 듯하다. 그 동안은 사회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려고 한다. 지금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모호하다. 생각의 싹 같은 게 핀 것 같은데 죽을지 살지 잡초인지 뭔지 모르겠다.
- 철학자와 하녀고병권 저 | 메디치미디어
철학은 ‘새로움’의 공부다. 자기계발과 위로의 인문학이 체제에 편입하기 위한 공부라면, 철학은 나의 생각을 점거했던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부수는 공부다. 준비가 필요 없는, 당장 시작하는 공부다. “공부를 위한 공부는 필요하지 않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은 36꼭지 글을 통해서, 철학으로 개인과 사회의 삶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지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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