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산은 산이 아닐 수 있고 물도 물이 아닐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불교도 불교가 아닐 수 있다. 이는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인데, 종교 가르침이 변하지 않는 진리 같지만 모든 게 그러하듯 시간이 닿으면 변하기 마련. 종교 가르침도 같다. 기독교는 가톨릭, 개신교, 그리스정교로 갈리고 유교도 시기에 따라 성리학, 양명학, 고증학 등 주류는 변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도 그렇다. 부처님 사후, 다양한 부파불교를 거쳐 크게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로 갈렸다. 한국은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으로 전래한 대승불교를 받아들였다. 『반야심경』, 『금강경』등은 대표적인 대승경전이다. 대승불교는 유식학과 공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중국에서는 화두와 선수행을 강조하는 선불교가 발전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불교를 공부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이러한 가르침도 함께 배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스님이 있다. 바로 범일 스님이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부처님 가르침으로 충분하지 않으냐는 의구심. 불교에는 다양한 경전이 있고, 그 경전들은 성립 시기가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 『아함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산스크리트어가 중국으로 건너가 한자로 번역된 게 『아함경』이고 팔리어본은 『니까야』다. 범일 스님이 정리한 『수트라』는 『아함경』과 『니까야』만 참고해서 불교의 가르침을 정리한 책이다.
『수트라』는 불교 입문서이자 완성본
한국불교에서 많이 읽는 경전은 대승불교 경전이다. 나도 처음에 출가해서는 절에서 읽는 경전을 따라 공부했다. 의문이 들더라. 과연 부처님이 직접 설한 내용인가, 하는 의문. 경전을 비교하면 내용이 일관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말한 게 아닌 느낌이다. 그러던 중에 부처님이 설한 내용을 기록한 초기 경전인 『아함경』을 알게 됐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가마인데, 중국사람이 아함으로 음역했다. 추측건대, 아감으로 번역했는데 소리가 바뀌면서 지금은 아함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부처님이 설한 내용이 산스크리트어만이 아니라 팔리어로도 기록됐다. 팔리어본은 스리랑카로 전래했다. 이게 『니까야』다. 『니까야』는 중국이나 한국에 전래된 적이 없고 최근에야 한국에 소개됐다. 마침 『아함경』을 공부할 때 각묵스님 대림스님이 한글로 풀이해서 『니까야』도 출판되기 시작했다. 두 개를 비교하면서 공부했다. 『니까야』와 『아함경』이 같은 건지 다른 건지를 일본 불교학계에서 먼저 연구했고, 거의 일치한다고 판단했다. 물론 일부는 대응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같은 내용을 다른 언어와 다른 길로 전래했다고 본다.
『수트라』는 『아함경』에 기반을 둬서 이해하는 불교 교리 입문서로 보면 되나.
불교 입문서라기보다는 불교 완성본이다. 다른 불교책을 보완하려고 쓴 게 아니다. 출가하고 불교 공부하면서 갑갑했던 게, 여러 가지를 공부해도 일관된 게 없더라. 나중에 『아함경』이 부처님이 직접 가르친 내용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건 배제하고 『니까야』와 『아함경』만 교재로 삼았다. 이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 있는지를 뽑아서, 연결하고, 일목요연하게 엮어서 배열했다. 다른 불교 책과 다른 점이라 하면, 석가모니 가르침에만 한정했다. 불교에는 석가모니 가르침 외에도 많은 가르침이 있다. 하지만 『수트라』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경전마다 일관되지 않은 이유가 뭔가?
아무 의미 없이 넣지는 않았겠지만 역사적으로 필요에 따라 추가한 것이 시간이 쌓이다 보니 일관성이 없어진다. 그 역사가 흐르고 나면 사정이 달라져야 하는데, 우리는 과거 2,500년 가르침을 전부 배우려고 한다. 나는 역사적으로 추가된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고, 석가모니에만 관심이 있다.
한국에서는『반야심경』, 『금강경』등 대승경전 많이 배우지 않나. 대승경전과 『아함경』이 많이 다른가?
초기 부처님이 설한 내용과 대승경전이 다르다. 아주 사소한 예를 들어보겠다. 『금강경』에서는 뗏목을 비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이 있고,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라고 한다. 여기서 뗏목은 비법(非法)이다. 정법도 버려야 하거늘 비법이야 말해서 뭣하리, 라고 표현한다. 반면, 『금강경』보다 오래된 『니까야』는 이렇다. 일반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할 때 사견에서 정견으로 건너간다고 표현한다. 저편에 도달해서도 사견을 유지하면 뗏목을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과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정견을 버리라는 말은 없다.
또 하나 예를 더 들겠다. 선불교에서 많이 쓰고, 지금도 한국에서 쓰는 ‘줄탁동시’라는 표현이 있다. 병아리가 알 속에서 깨고 나올 때, 안에서는 병아리가 쪼고 밖에서 닭도 쪼아야만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온다고 해석한다. 거의 화두처럼 쓰인다. 병아리는 중생, 닭은 선지식이다. 선지식이 “탁!” 하고 깨는 건데, 선지식에서 '할'을 하고 주장자로 탁 치는 행동이 많이 발전한다. 이 구절과도 관련이 있다. 『니까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해서 공부해나가면 닭이 부리로 알을 쪼개지 않아도 저절로 때가 되면 알에서 새끼가 부화하듯 깨우친다고 나온다. 의도적으로 변형된 거지. 이런 식으로 미묘하게 다르다.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면 논란이 되겠지만 이런 식으로 변형된 예를 찾으면 둘 사이의 차이가 명료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일본 불교학에서는 대승비불설(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다)도 있었지 않나.
일본에서 『니까야』가 전래될 때, 학계에서 논란이 있었다. 『아함경』이 불설이라면 대승경전은 비불설이라는 뜻인데, 그 논란이 어떻게 정리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충분히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 『수트라』를 독자가 읽으면, 대승불교 운동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대승불교가 재가자 중심으로 인도에서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일으킨 운동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 부흥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모른다. 그 당시의 고대 인도 사회와 종교 구조를 이해하면 대승불교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왜 부처님 가르침이 대승경전에서 조금씩 변형이 되었을까? 내가 쓴 책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유식학도 마찬가지인가.
나는 유식을 안 좋게 본다. 부처님 가르침이 전해져 오다 부파불교에서는 지수화풍에 관한 논의를 많이 한다. 지수화풍이 공(空)하다고 해서 공관학파가 이들을 흡수하고, 공 자리에 식(識)이 들어가면서 유식학이 나온다. 지수화풍공식, 이게 육대다. 유식학 다음에는 밀교이고. 유식학파는 원래있던 6식에 제7식과 제8식을 만든다. 부처님이 안이비설신의를 발견했는데, 2개를 추가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부처님 말씀은 잘못됐다, 부족하다는 의미다. 부처님 가르침을 훼손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들이 어떻게 훌륭한 사람일까?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용수보살이니 세친보살이니 해서 높게 본다. 내가 보기엔 부처님 가르침을 엎은 사람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여섯 개를 이해 못해서 추가로 만들었다. 육식은 내입처, 외입처, 그러니까 인과 연으로 해서 과가 나온 식이 6개다.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이렇게 대응한다. 7식과 8식은 어떻게 설명하나? 7내입처와 7외입처가 없는데, 어떻게 7식이 생기나? 8식도 마찬가지다.
바르게 이해할 수는 있어도 쉽게 공부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남방불교가 좀 더 부처님 가르침에 가깝나.
남방불교도 많이 변형됐다. 어떤 불교가 더 가까운가 아닌가는 의미가 없다. 이미 변형이 됐다. 다만 복원할 수 없다면 끝났겠지만, 복원했다. 『니까야』와 『아함경』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기독교 성경은 불교 경전보다 정리가 잘 된 것 같은데, 불교 경전 정리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기독교는 신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종교다. 신의 가르침에 손대면 죽는다. 누군가에 의해 신의 가르침이라고 정형화하면, 변형하고 고치려고 하면 죽임을 당한다. 결정되면 손댈 수 없다. 그 뒤로 쭉 내려오는 거지. 거기에 손대면 신성모독이니까. 여기에 재해석을 하면 이단이 된다. 이단 전후 종교는 서로 전쟁한다. 구약성서를 재해석해서 신약성서가 나왔고 이게 예수님이다. 500년 뒤에 재해석해서 마호메트가 등장하고 코란이 나온다. 문선명 목사가 동양사상을 넣어서 통일교를 만드는 식이다. 재해석을 한 사람은 메시아가 되거나 죽임을 당하든지 둘 중 하나다.
불교는 좀 다른 종교다. 가르침을 누구든지 재해석을 할 수 있다. 다양성이 더 많다. 부처님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왜 안 했느냐? 양이 너무 많다. 『아함경』만 해도 구전하려면 수백 명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구전전승해서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을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이 완간했다. 읽어보라. 중간쯤 오면, 이전 내용을 다 잊어버린다. 그렇게 많다. 어떻게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 있겠나. 게다가 예수님은 30대에 돌아가셨지만, 부처님은 80대까지 많이 말씀하셨다. 못해왔지만, 지금은 인쇄술이 발전해서 경전을 인쇄해 한꺼번에 볼 수 있고, 색인도 잘 만들어놨다. 컴퓨터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십이연기, 팔정도, 사성제, 삼법인 등 불교 교리를 보면 외울 게 많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불교 공부를 쉽게 할 방법이 있을까?
쉽게 공부하는 방법은 없다. 다만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은 있다. 바르게 이해하면 가르침이 이어진다. 굳이 숫자로 외울 필요가 없다. 따로 12개, 4개, 8개를 외워야 하니 어렵다. 연기든 사성제든 어떤 가르침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하지는 않고, 뭘 시작하든 다 이어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연기법이 어렵던데.
사람들이 연기법, 인연법, 인과법을 혼동한다.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걸 잘 분별해서 이해하면 연기법도 쉽다. 물을 불로 가열해서 수증기가 나오면, 이게 연기법이다. 수증기는 과, 물은 연. 불은 인이다. 모든 현상과 모든 변화를 인, 연, 과로 해석할 수 있다. 연은 인이 작동해야 과로 바뀐다. 중생은 연, 부처가 과라면, 중생이 그냥 부처가 안 된다. 인이 있어야 한다. 이 인이 뭐냐. 수행이지. 그런데 인이 다양한 경우, 연과 과로 설명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예를 들어 어제의 내가 있고, 오늘의 내가 있다. 어제의 내가 연이고 오늘의 내가 과라면, 인은 뭘까? 하루 동안 무수히 많은 걸 했다. 먹고, 보고, 말하고, 행동해서 오늘로 바뀌었다. 이때 인은 엄청나게 많다. 그러니 인을 모두 다 서술할 수는 없다.
박사 논문으로 불교와 현대물리학을 비교하기도 했다. 불교가 과학적인 종교다, 이런 논의도 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논문 쓸 당시에는 기독교와 과학은 역사적으로 충돌이 좀 있었는데 여기에 비해 불교는 과학자와 충돌 일으킨 적이 없으니 혹시 불교가 과학적인 종교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논문에는 불교의 세계관과 서양의 자연관을 비교했는데, 일단 불교가 자연을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둔 종교가 아니고 수행 부분도 논문에서 빠졌다. 논문을 쓴 당시에 시도는 좋았지만 불교에서 보면 불교의 외곽만 쓰다듬은 거지.
범일 스님은 연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물리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물리천문학과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중 한국으로 돌아와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출가했다. 양산 통도사에서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한 뒤, 서울불교전문강당을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선학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지리산 인근의 토굴에 머물고 있다.
변하지 않는 진리를 얻기 위해 출가
물리학 공부하다 불교 입문한 계기는.
사람들은 출가하면 사업이나 연애에 실패하거나 삶에 회의를 느껴서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물리학 공부할 때도, 교수님이 취직하기 좋은 실험 물리학을 하라고 권했다. 그런 게 하기 싫었다. 이론을 공부하고 싶었다. 직장 구하려고, 교수 되려고 공부한 게 아니었으니까.
어릴 때부터 사람이 손에 닿는 것은 다 변하더라. 시간만 주면 다 없어진다. 아무리 인간이 견고하고 완벽하게 만들어도, 사람 손으로 만든 건 없어진다. 그렇다면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게 뭘까 고민했다. 지구도 변할 수 있다. 천체를 보기 시작했다. 다른 건 다 변해도 변화하는 걸 둘러싼 우주는 가장 마지막에 변하지 않겠나 싶었다. 우주를 알고 싶어 공부했다. 공부하다 보니, 아무리 알고 싶어도 한계가 있다. 원리적 한계, 라고 표현하는데 머리가 나빠서도 아니고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자연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에 의해, 어떤 한계 이상은 절대로 알 수 없다. 똑똑한 사람이 수억 년 연구해도 모른다. 물질의 근원을 공부하는 입자물리학에도 그런 한계가 있다.
한계를 벗어날 방법을 찾다 정신적인 세계를 접했다. 졸업할 때 물질적인 진리 이외에도 정신적 진리라는 게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우주와 자연과학이 재미없어졌다. 비물질적, 정신적 세계를 알기 위해 출가했다.
출가 뒤 정신적 진리를 구하는 과정은 어땠나.
한국불교를 잘 몰랐다. 출가하면, 숲 속에 들어가 이슬 먹고 사는 줄 알았다. 와서 보니 혼란스럽더라. 대학은 시스템이 있다. 물리학 같은 경우는 연구하고 노력하면 그 시스템에 따라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를 따고, 연구를 더 하고 싶으면 연구하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한국불교도 이런 체계가 있을 줄 알았다. 3년, 10년, 이런 식으로 하면 내가 원하는 걸 모두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출가를 안 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출가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서로가 싸운다. 출가하고 나서 1994년 조계사 사태가 생겼다. 그 현장에 있었다. 계속 중으로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렸는데 결국 내 힘으로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동국대에 들어갔다. 12년 공부해서 졸업했다. 졸업하고 나와서 지리산 토굴로 들어갔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겠다, 이런 마음이었다. 다른 데 의지하지 않고 『니까야』와 『아함경』만으로 찾고 있다.
많은 산 중에 지리산을 택한 이유는?
지리산과 인연이 많고, 현실적으로는 땅값이 제일 싸다. 서울 근처 땅은 비싸다. 지리산 중에서도 쌍계사 있는 남쪽은 비싸고, 북쪽이 싸다. 그래서 지리산 북쪽으로 들어갔다. (웃음)
법명이 범일인데, 어떤 의미인가?
범천의 태양. 신라 시대 범일국사라고 있다. 신라의 왕자로서 강원도 강릉의 굴산사지가 범일국사와 관련 있는데, 지금도 강원도 사람들은 대관령 산신제보다 범일스님 제를 먼저 지낼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그분을 보고 이름을 딴 건 아닌데, 우연히 나중에 확인해 보니 같더라.
불교에서는 참된 나를 진아(眞我)라고 하고, 참된 나를 모르기에 탐욕이 발생한다고 보지 않나. 21세기 문제가 참된 나를 모르고 살아서인 듯한데.
『니까야』를 공부하면서 깜짝 놀랐다. 대승불교에서는 진아, 불성, 견성성불이라고 말하면서, 내 안에 뭔가 찾아야 하는 게 있다고 가르치지만 이게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걸 주장하는 사람은 4가지 사견 중 하나로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지금 이 시대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게 번져 있다. 『니까야』와 『아함경』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안 본다. 이런 게 황당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현대의 문제는 과거의 문제, 미래의 문제와 똑같다. 인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같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문제를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해결하려면, 인간이 아니어야 한다. 인간을 벗어나야 한다. 인간에서 인간으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책에 있다. 영화 <혹성탈출>이 있는데, 『수트라』는 인간탈출 가이드다. (웃음)
수트라비구 범일 저 | 김영사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으면서 성장한 저자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찾아 자연과 우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어릴 때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만큼 대학에서 공부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미국 대학원으로 유학하여 이론천체물리학(우주론)을 전공하였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자연과 우주의 진리에 대한 원리적 한계를 이해하였고 비물질적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영원불멸한 진리를 찾아 물질과학의 우주론에서 정신과학의 불교로 탐구방향을 전환하여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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