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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소설 잘 쓰려면 엄마가 놀랄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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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소설가 김영하가 귀국했다. 미국 뉴욕으로 떠난 지 4년 만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굵직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용산 참사,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 4대강 사업에 이르기까지. 당시 “망명 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해외에 머물면서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를 송출해 나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끝이라고 생각”하던 작가는,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다양한 매체에 산문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한 데 엮어 산문집 『보다』를 출간했다. 


“해외에 머물면서 한국 사회를 바라볼 때, 사건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볼 수 있다는 건 장점이었어요. 하지만 사건의 의미라는 건 사건 자체로만 이루어지지 않잖아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사회적 정서가 모여서 완성되는 건데, 밖에 있으면 그걸 잘 느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사람들과 좀 멀어진 느낌이 들었고요.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와  그 안의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요. 글은 가장 좋은 생각의 도구잖아요.”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보다』


김영하 작가 특유의 예리한 시선에 포획되어 『보다』라는 투명한 유리수조 안에 담겨진 우리 사회의 모습은 분명 익숙한 것들이다. 사람들의 시선과 손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스마트폰,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화되는 노동 계층, 귀성 차량뿐만 아니라 택배 기사들까지 전쟁터로 몰아넣는 명절의 풍경… 한 가지 낯선 것이 있다면 그것들을 바라보는 김영하의 시선이다. 


그는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텍스트들을 넘나들며 솜씨 좋게 그것들을 봉합해낸다. 그리고 자신만이 들려줄 수 있는 ‘신선한’ 해석을 완성시킨다. 그 사이사이에 녹아들어 있는 김영하 스타일의 위트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소설에서는 만나볼 수 없었던 작가 개인의 기억과 감성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도 산문집 『보다』만이 가진 매력이다. 


김영하-작가-(5).jpg

 

 

소설과 산문, 요리에 비유하자면 쓰는 칼이 다른 것



귀국한 후 “내가 사는 사회 안으로 탐침을 깊숙이 찔러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저 같은 작가는 그냥 집에서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그런 생각들을 신나게 쓰고 사는 게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사회 문제 같은 건 신경 안 쓰고요. 그런데 뭔가 무척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에요. 2012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느낌이에요. 정확히 무너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게 항로가 바뀌었다고 할까요? 한국이라는 배가 있다면 어딘가로 잘 가고 있다고 모두가 믿었던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른 데로 가고 있는 걸 발견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에요.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거에 너무 무지했던 것 같고요. 그래서 공부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보고 썼던 거죠. 자기 공부의 일환이기도 해요. 


소설로 쓰게 되는 소재와 산문으로 쓰게 되는 소재는 어떻게 다른가요?


산문을 쓰든, 소설을 쓰든, 강연을 하든, 그 모두가 사실은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해요. 단지 소설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가정을 하는 거죠. 제가 1인칭의 살인자 소설을 썼다고 해서 ‘김영하가 살인자인가?’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잖아요(웃음). 그런데 산문은 그런 보호막이나 장막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소설은 훨씬 더 분방하게 여러 가지 얘기들을 할 수 있지만 산문을 쓸 때는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지는 면이 있죠. 


소설과 산문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소설은 딱히 이렇다 할 할 말이 없어도 괜찮아요. 무언가 말하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건 아니잖아요. 소설은 흥미로운 정신의 미로 같은 걸 설계해서 독자들이 스스로 탐험할 수 있도록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일종의 정신적 테마파크를 건설하는 거죠. 그와 달리 산문에는 반드시 명확한 메시지가 있어야 돼요. 하나의 주제가 있어야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감정적이라기보다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산문에는 남다른 생각이 담겨 있어야 돼요. 남과 똑같은 생각을 풀어내기 위해서 쓸 필요는 없잖아요. 


산문을 쓰는 방식은 어떤 건가요? 


늘 그런 생각을 해요. 이 얘기를 누군가 전에 했는가, 그리고 했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했는가, 이 얘기를 지금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게 돼요. 소설은 그런 질문을 던지지는 않아요. 그냥 흥미롭고 굉장히 다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거니까요. 그런 점에서 산문과는 가는 길이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죠. 


소설보다는 산문을 쓰는 일이 더 수월하지 않으세요? 


요리에 비유하자면 쓰는 칼이 다른 거죠. 고기를 자를 때보다 적은 힘이 들어간다고 해서 생선을 손질하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더 섬세한 칼이 필요하듯, 칼의 종류와 칼을 쓰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고 할까요? 


『보다』안에 담긴 작업은 우리 사회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작가님께서 이해한 바로는 지금 이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느낀 변화라면, 예전보다 사회가 가진 희망의 총량이 많이 사라진 느낌이에요. 이제는 희망을 품는 것은 고사하고 다들 자기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자리라도 지키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고요.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지침이 조금 더 야만 쪽으로 기운 것 같아요. 약자를 존중하고 사회적 계약을 준수하는 것이 문명이라면 그 반대쪽으로 많이 움직인 것 같은 거죠. 


작가님에게 지난 2년 시간은 어떤 감정들로 기억될까요? 


글쎄요... 조금 안타까움? 그리고 조금 막막하고요. 개인적으로 제가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제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잘 살아야 되잖아요. 어제도 사인회를 했는데, 젊은 독자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몇 년 째 취업 준비를 하는 이들이 제 독자라는 걸 알게 돼요. 저는 그들이 자기의 존엄성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스펙 쌓기도 바쁘고, 그 와중에 돈도 벌어야 되고, 그런데 왜 소설 같은 걸 읽을까요? 크게 도움도 안 되잖아요. 그런데도 힘들게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책을 보려고 노력하고, 제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듣기도 한단 말이죠. 그건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인간다움, 존엄을 지키기 위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더 존중되고 지켜졌으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까, 안타깝죠.


『보다』에는 작가님이 대학 시절에 만난 총각 점쟁이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앞으로 말과 글로 먹고 살게 될 거라는 예언을 했다고요. 


그때는 여러 가지 얘기를 들으면서 그 중 자기 마음에 드는 걸 쭉 가져가는 거죠. 제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예로 들었던 영화 <관상> 같은 경우를 보면, 수양대군 같은 사람은 자기가 왕이 될 거라는 암시를 찾았었겠죠. 결국 자기실현적 암시들이 필요한 거예요. 저는 옛날부터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다만 그게 어떤 글일지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아, 그 길로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운이 좋아서 등단도 빨리 한 편이고 취업 면접 같은 걸 본 적도 없어요. 이력서를 내 본 적도 없고요. 그냥 그렇게 살다 작가가 됐어요. 그럴 때 그런 말이 도움은 됐겠죠.


등단과 취업 사이에서 갈등하지는 않으셨나요?


작가로 살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왠지 직장인으로 살게 될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건 확실히 알았어요. 그래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 습작할 때 이대 앞에 가서 귀를 뚫었어요. 친구들이 말하길 귀를 뚫으면 취직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이후에도 10년 정도 귀걸이를 하고 다녔어요. 예전 제 소개 글에 보면 문학상 시상식장에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때가 귀 뚫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냥 귀걸이가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였죠.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는 굉장히 불안해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지금 작가님에게 필요한 자기실현적 암시는 무엇인가요?


요새 제가 계속 거듭하여 생각하는 것은 ‘계속 건강하게 작품을 쓰는 작가로 오래 가고 싶다, 오래 갈 것이다’ 라는 거예요. 출판의 미래도 어둡고, 독서 인구도 점점 줄어들지도 모르고, 그런 상황에서 어려움이 있겠죠. 그런데 그냥 ‘앞으로도 다른 데 한 눈 팔지 않고 계속해서 작가로 살아갈 거야’ 하고 생각하죠. 


김영하-작가-(4).jpg


예술가는 자기에게 맞도록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다


“세상에 맞춰 자신을 바꿀 것이냐, 세상을 자기에게 바꿀 것이냐. 아마도 모든 예술가의 고민일 것이다”라고 적으셨습니다. 어느 편에 속하시나요?


다른 직업은 잘 모르겠지만, 예술가는 어느 정도 자기에게 맞도록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무엇이 예술이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계속 바뀌잖아요. 고정되어 있는 기준에 맞춰서 그 안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건 예술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자기 예술에 대해서 확신이 있는 예술가라면, 그런데 그것이 기존 예술계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당한다면, 새롭게 자기의 영역을 선포하고 거기에서 왕이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보다』에서 공개하신 「비상구」의 탄생 비화가 떠오릅니다. 그 무렵 한국문학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발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데, 같은 고민 끝에 발표하신 또 다른 작품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이 있죠. 거의 대부분 다 그래요. 「피뢰침」도 그렇죠. ‘벼락 맞으러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를 써볼까’라고 했을 때 제 아내가 웃었어요. 농담인 줄 안 거죠. 말하자면 그런 건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만화에나 나오는 얘기 같잖아요. 실제로 처음에는 제 소설들이 문학적이라기보다 만화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전개도 빠르고 기괴한 사건들이 일어나니까요. 가족들 간의 중첩된 문제나 진지한 고민을 끌어안은 운동권이 등장하는 우리 근대 문학과는 너무 달랐던 거죠. 「흡혈귀」 같은 경우도 당시에는 굉장히 낯선 소재였죠. 그때도 ‘이런 걸 발표하면 어떻게 될까’ 싶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런 고민을 했던 작품들이 늘 괜찮았어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빛의 제국』『검은 꽃』도 그랬죠.『살인자의 기억법』도 마찬가지였어요. ‘독자들이 대부분 젊은 여성들인데 70대 노인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읽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죠. 게다가 치매라고 하니까 이야기가 잘 이어지지도 않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사람들이 비웃거나 ‘안 될 거야’라고 이야기하면 투지를 느껴요. 늘 그런 걸 쓰고 싶어요.


반발심이 생기는 걸까요?


그렇다기보다는 본성인 거죠. 저는 문학이라는 것이 써도 되는 것만 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써서는 안 될 것 같은 것을 써오면서 확장되어 온 게 문학의 역사잖아요. 옛날에는 아주 고상한 얘기만 쓰는 게 문학이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작가로 활동하면서 영역을 넓혀온 거잖아요. 어떤 작가들은 자기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어가서 계속해서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하는 반면, 저는 탐험가에 가까운 작가예요. 아직까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것을 쓰고 싶어요. ‘왜 그건 문학이 될 수 없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해요. ‘왜 그런 얘기를 쓰면 안 된단 말인가’ 싶은 거죠.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문학으로 만들 수 없는 이야기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문학이고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라는 평가는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팔리는 이야기와 잘 팔리지 않는 이야기’라는 잣대로 작품을 판단하니까요.

 

장편의 경우에는 한 작품을 쓰는 데 보통 1년~3년, 길게는 5년도 걸리잖아요. 그렇게 고생을 해서 썼는데 완전히 안 팔린다고 하면 힘이 빠지는 일이기는 해요.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는 이왕이면 독자들한테도 사랑받을 수 있는 걸 쓰라는 건데, 그렇게만 쓸 수는 없는 거죠. 왜냐하면 소설은 쓰는 동안 작가 스스로 납득이 잘 되지 않으면 힘이 떨어져요. 내가 이걸 왜 써야 되는지, 이걸 쓰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끝없이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냥 많이 팔기 위해서만 쓰겠다고 한다면, 저는 잘 못 견딜 것 같아요. 의미도 없고요. 그렇다면 다른 일을 하는 게 낫죠. 책으로 거부巨富를 쌓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예전의 「비상구」처럼 지금도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는 작품들이 있나요?

많아요.


그 작품들은 어떤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단순히 ‘쎈 이야기’여서 그런 건 아니고요. 잘 쓰지 못한 소설들인 거죠. 사람들이 읽으면 안 돼요, 그런 건(웃음).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는 그 이야기를 다룰 만한 능력이 없는 거죠. 좋은 이야깃감과 나쁜 이야깃감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단지 작가가 그걸 다룰 역량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차이인 거죠. 그런데 때가 되면 그게 빛을 발할 때가 있어요. 『살인자의 기억법』 같은 이야기기도 사실 10년 전에 생각해놨던 거거든요. 그런데 마땅한 문체와 인물을 얻기까지, 그리고 그걸 제가 다룰 수 있는 능력이 될 때까지 10년이 걸린 거예요. 가끔씩 서랍 속에 있는 작품들을 꺼내어 보기도 하는데 ‘혹시 다시 써볼 수는 없을까, 다르게 고칠 수는 없을까’ 생각해 봐요.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넣어놓죠. 그렇게 서랍 속에 넣어둔 작품이 발표한 작품의 2배 정도는 될 거예요.


「비상구」는 신촌 거리의 삐끼들을 보고 돌아온 밤 멈출 수 없이 써내려간 작품이었다고 하셨어요. 소설을 쓰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건 무엇이었나요?


당시에는 어렸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건데요(웃음). 세상을 놀래키고 싶은 욕심 같은 게 있었어요. 쓰지 말라고 하는 걸 쓰고 싶은 욕구라고 할까요. 이건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더 잘 써지는 거예요. 가끔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저한테 물어봐요. 소설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냐고요. 그럼 제가 이렇게 충고합니다. 서랍에 넣어두었을 때 ‘엄마가 꺼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소설을 쓰라고요. 엄마가 보면 ‘얘가 미쳤구나’ 하면서 뒤집어질 것 같은 소설이요. 그런 글을 상상만 해도 잘 써져요(웃음). 그게 아니라 엄마나 선생님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소설이라면 저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그건 진짜 마음이 아니에요. 소설이라는 것은 가상의 세계를 만드는 거잖아요. 가상의 세계를 만드는 이유는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 과정을 통해서 직설적으로는 말할 수 없었던 굉장히 깊은 게 나와야 돼요. 그러니까 어머니나 선생님에게 보여줬을 때 칭찬받을 것 같은 글은 문제가 있는 거죠. 자기 안에 진짜 충동으로 쓴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기준에 맞춰 쓴 거니까요. 반면에 ‘엄마가 이걸 보면 뒤집어질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쓰면 솔직한 얘기, 보지 말았으면 하는 얘기를 쓰게 돼요. 「비상구」를 쓸 때도 아마 그런 마음으로 썼을 거예요. 내 안에 있는 폭력성, 이상한 상상력, 이런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에 쾌감이 있는 거죠. 


신촌의 삐끼들과 비슷해 보이는 작가님 안의 어떤 것을 표출하고 싶으셨던 걸까요?


남자들 마음속에는 어느 정도 건달이 있잖아요(웃음). 10대 남자애들 봐요. 다들 건달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면이 있잖아요. 


‘엄마를 놀래킬 만한 작품을 쓰고 싶다’고 생각할 때 작가님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어떤 건가요?


약간 흥분 상태가 되겠죠(웃음).


그럴 땐 어떻게 하세요?


글을 쓰는 거죠. 감정이 살아있을 때 써야 돼요.


『보다』안에서 ‘연극적 자아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독자들이 바라보는 작가님은 어떤 모습일 거라고 예상하시나요?


글쎄요. 독자들은 저를 ‘이상한 생각을 하는 아저씨’로 생각하겠죠?(웃음) 남다른 이상한 생각을 하는 아저씨, 그걸 또 꽤 설득력 있게 남에게 말을 하는 사람. 어릴 때부터 저는 그런 인물이었어요. 남다른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고 그 얘기를 사람들한테 하곤 했어요. 그래서 ‘쟤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잘 알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예전에는 작가로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에 조금 차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요새는 크게 차이가 안 나요. 약간 농담 좋아하고, 그러면서 또 굉장히 기괴한 상상들을 좋아하고, 그리고 남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런 사람이 저죠. 



김영하-작가-(1).jpg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한국사회의 큰 갈등 중 하나


이번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일이 있었나요?


진짜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세대 갈등에 대한 이야기인 거죠. 저는 그것이 한국사회의 굉장히 큰 갈등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상 부를 독점하다시피 한 50대 60대와 그들에게 월세를 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20대 30대의 갈등, 그런 세대 갈등이 결국은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로 상징될 수 있잖아요. 많은 걸 가진 아버지와 그 아버지에게 도전하고자 하지만 힘과 용기가 부족한 아들, 그들 사이의 문제들은 계속 격화될 거라고 생각해요. 최근에도 대학에서 기숙사를 건립하려고 하니까 주민들이 반발하고 나섰잖아요. 원룸 월세 떨어진다고, 주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며 대학을 찾아가 항의를 하고요. 사실 그 문제는 본격적인 세대 갈등의 신호탄 같은 거예요. 젊은 세대는 좀 더 싸고 질 좋은 주거가 필요하고, 땅과 부를 가지고 있는 노년층은 계속해서 자기의 안정적인 지대를 추구하는 거죠. 앞으로 이런 식의 갈등이 첨예화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나쁜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어떤가요. 아이를 자신을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고, 그럴수록 부모는 사랑을 주지 않음으로써 관계 상위를 차지하는 현상을 지적하기도 하셨죠.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요.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도 그런 거예요. 예를 들면 그런 게 있더라고요, 압박면접이라고 하나요? 그 무슨 사디스트적인 행동인지 모르겠어요. 취업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거잖아요. 그건 정확하게 나쁜 부모가 하는 행동이거든요. ‘너는 모자라다, 너는 왜 이렇게 부족해’ 이런 얘기를 하면서 모욕을 주고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모습이 똑같아요. 그런데도 (지원자는) 웃어야 되잖아요.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되고, 자기는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해야 되고요. 심지어 실수로라도 실수로라도 반항하지 않도록 지배적인 논리로 자기를 설득하잖아요. ‘경쟁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자가 선이야’ 이런 걸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이건 나쁜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아이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요.


한 인터뷰에서 ‘젊은 시대조차 희망 없이 사는 시대는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가님께서 성장하셨던 60년대~80년대의 젊은이들은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의 세대는 왜 그렇지 못할까요?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는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이 1년에 10% 정도 나왔어요. 지금과 비교하면, 3년 동안 성장할 것을 한 해에 이룬 거죠. 그리고 교육의 기회가 넓어지면서 우리 세대 대부분은 부모 세대보다 더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확신이 있었어요. 우리는 부모세대보다 더 부유할 것이고, 더 문화적으로 풍요로울 것이고,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었죠.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그런데 요즘에는 자신의 부모보다 더 잘 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부모님이 가진 것만큼이라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지금의 부모 세대는 대부분 대학을 나왔고, 30대 즈음에는 아파트와 자동차를 샀고, 다 풍요를 누렸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 단계에 도달하기 굉장히 어렵죠. 취업을 하기도 어렵고, 취업을 한다 해도 돈을 모으기도 어렵고, 집을 사기도 어렵고요. 그런 게 우리 세대와는 다른 점이죠. 이건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가 예전에 갖고 있었던 경제적인 활력은 사라져가고 있잖아요. 나라가 전체적으로 활력이 있을 때는 인구가 늘어날 때인데, 앞으로 그럴 것 같지도 않고요. 또 우리만 갖고 있는 굉장히 특별한 무엇도 이제는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희망이 없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보다』의 뒤를 이어 『읽다』 와 『말하다』가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두 권의 책에서 다루게 될 주제와 이야기 방식은 『보다』와 많이 달라질까요? 


그렇죠. 산문이라는 것 말고는 별로 공유되는 게 없을 거예요. 『말하다』는 제가 강연, 인터뷰, 대담에서 했던 말들을 중심으로 주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저의 견해나 생각들을 대화처럼 풀어서 싣게 될 거예요. 당연히 『보다』와는 문체가 다르겠죠. 『읽다』는 제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책 읽는 시간』에서 짧게 소개됐던 독서에 대한 저의 여러 가지 생각 ‘이런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와 같은 생각들이 담긴 독서에 관한 산문들이 주를 이루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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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김영하 저 | 문학동네
예술과 인간, 거시적/미시적 사회 문제를 주제로 한 스물여섯 개의 글을 개성적인 일러스트와 함께 묶은 이 산문집에서, 독자들은 인간 내면과 사회 구조 안팎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김영하의 문제적 시선과 지성적인 필치를 만날 수 있다. 예측 가능한 일상생활부터 심화되는 자본주의 시대의 시간과 책의 미래까지, 이 산문집에는 소설가의 눈에 포착된 한 시대의 풍경이 다각도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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