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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소재원 위안부와 한센병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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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 소재원. 그래서 그는 ‘참 고마운 소설가’다. 영화 <소원>의 원작이 된 소설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를 통해 아동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고 ‘13세 미만 아동?장애인 대상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 폐지운동’에 앞장서 개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당시 피해 가족과 맺은 인연을 계기로 아동 성범죄 근절 운동에 나선 작가는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뿐만 아니라 『아버지 당신을…』의 수익금 일부를 어린이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그는 아동성범죄 지킴이로 활동하는 한편, 중증장애인재활시설 ‘한사랑마을’과 한센인 정착촌 ‘금오농장’을 찾아 봉사활동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첫 작품 『나는 텐프로였다』를 시작으로 『아비』『밤의 대한민국』『아버지 당신을…』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언제나 누군가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그들은 때로 화류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때로는 한센병 환자였으며, 또 때로는 치매를 앓고 있는 늙은 아버지였다. 주목받기보다는 어딘가 변두리를 맴돌고 있는 사람들, 환희보다는 고단함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로 걸어 들어가는 작가를 보고 많은 이들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라고 말했고, 그 행보의 원인을 작가의 지난날에서 찾으려고 했다. 지체 장애를 갖고 계신 아버지, 아버지와의 이혼 후 만날 수 없었던 어머니, 20대 초반에 찾아온 원인 불명의 시각장애… 그 모든 아픔들이 자신을 관통해갔음을 작가는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덤덤했다. 그리고 의연하게 희망을 말했다. 다른 이의 아픔에 눈감지 않고 공감하는 것도, 그 아픔 속에 자리한 희망을 발견하는 것도, 그 시간이 작가에게 남긴 선물이었다.


이제 그가 또 다른 아픔을 말한다. 이번에도 그 아픔의 다른 이름은 희망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이전보다 더욱 넓어졌다. 일제강점기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그날』의 두 주인공 오순덕과 서수철은 서로에게 순정을 주겠노라 약속한 정인이었다. 그러나 어린 연인들도 시대의 비극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젊은 청년들은 전선으로, 꽃다운 처녀들은 위안소로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기약 없는 이별을 한 지도 7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열다섯 소녀의 순결은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고, 열여덟 소년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천형과도 같은 병을 얻었다. 그들의 순정은 이어질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을 지탱해 준 단 하나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무거운 질문을 안은 채 소재원 작가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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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지금까지 발표된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작품


2년 6개월 만에 발표하시는 작품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방황을 많이 했어요. 독자들은 항상 전작보다 나은 작품을 원하는데 ‘과연 내가 이전의 작품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있었어요. 그리고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가 출간된 이후로 모든 작품의 영화화가 결정됐거든요. 현재는『터널』이 영화로 제작 중이고요. 그렇다 보니 새 작품도  영화화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죠. 그런 강박증 때문에 한 곳에서 잠을 잘 수 없어서 여러 곳을 옮겨 다녀야 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여행을 떠났는데 우연히 소록도와 ‘나눔의 집’을 가게 되면서 이번 작품을 집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등단하신 후 6년 동안 열 작품을 발표하셨습니다. 워낙 왕성하게 활동해 오셨기 때문에, 작가로서 가진 모든 것이 소진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불안이 늘 따라다녔죠. 더 이상 소재를 찾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순간은 분명히 올 텐데, 그 한계가 서른두 살이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두려웠어요. 그런데 『그날』을 쓰면서 깨달았어요. 스스로가 한계를 정해놓고 방황을 시작한 것 같더라고요. 그 벽을 무너뜨리면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눈 뜨게 됐죠. 지금은 작품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작품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즐기자’라는 생각이 더 커요. 


『그날』에 대해 “현재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작가의 철학과 내 고집을 담아낸 책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독자들이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공감하는 글이 가장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내 생각을 담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글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이번 글을 쓸 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그게 첫 번째 원칙이었어요. 열다섯 살 청소년이든 마흔 살 아저씨든 누구나 공감하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복잡한 문장으로 저의 개성을 살리기보다는 간단하고 편한 문장으로 써보자고 생각했어요. 스토리 라인도 사실에 충실하려고 했고요. 상상력을 두 번째로 미뤄두기로 했어요. 작가로서는 위험한 도전이기도 하죠. 상상력이 뒷받침하지 않는 글은 지루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상상력을 최소화하는 대신 그 안에서 극대화시키자고 생각했어요. 그 결과로 누구나 읽으면 받아들일 수 있고, 주입이 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글을 썼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쓴 글과는 판이하게 다른데, 만족스러워요. 


지금까지의 작품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나는 텐프로였다』『아비』『밤의 대한민국』『형제』『소원』까지는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썼어요. 『아버지 당신을…』부터 는 문체가 달라졌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작가라는 오만함이 약간 깃들었던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제 작품 중에서 『아버지 당신을…』을 최고로 꼽고 작가적인 것들이 성숙했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제가 볼 때는 작가의 때에 찌들었던 것 같아요. 『그날』은 모든 걸 탈피하고 새로운 문장을 만드는 데 도전해 보자고 생각하고 썼어요. 이게 진짜 저의 색인 것 같아요. 


『그날』의 이야기를 구상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 모든 소설의 모티프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찾아낸 거예요. 강박증에 시달리면서 여행을 다닐 때도 봉사활동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요. 그 전부터 익산의 ‘금오농장’에서 한센병 어르신들을 돕고 있었고 ‘나눔의 집’도 가끔 들르곤 했었어요. ‘한사랑마을’에서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는데 그곳에 가는 길에 ‘나눔의 집’이 있거든요. ‘한사랑마을’에 갈 때면 항상 ‘나눔의 집’에 들렀다 가곤 했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소재를 찾게 된 거예요.


『그날』의 두 주인공은 각각 한센병과 위안부라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잖아요. 서로 다른 역사적 사건을 연결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공통된 시간의 공통된 아픔이니까 인연의 고리를 만드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첫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3~4년 전쯤 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나눔의 집’ 밖의 어르신들과 만나게 됐어요. 그 분들은 수요 집회도 하지 않으시고, 본인의 과거에 대해서 숨기고 사시는 분들이셨죠. 


올해 초에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서 청원 운동을 진행하기도 하셨죠. ‘위안부’ ‘정신대’ 라는 말 대신 ‘꽃송이’라는 이름으로 할머니들을 불러드리자고요.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역사적인 사실이 흐려진다’고 얘기하면서 반대하더라고요. 정작 당사자들은 원하고 있는 일인데 말이죠. 역사적인 사실로 인해서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는 건 아닌지, 그게 너무 잔인한 일은 아닌지 묻고 싶었어요. 해외에서는 ‘위안부’ ‘정신대’라고 부를 수 있겠죠. 그렇지만 왜 우리 안방에서조차 할머니들은 위안부라고 부르냐는 거예요. 나에게 새엄마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고 해도 우리 집에서만큼은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마찬가지로 우리 집안에서만이라도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라는 의미로  ‘꽃송이’라는 예쁜 단어로 불러주는 게 어떻겠냐는 거죠. 위안부 사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던 분들이 반대를 하시는데, 아동 성범죄 공소시효를 폐지시킬 때도 그랬어요. 변호사라는 전문 지식인들이 하는 말은 ‘법의 형평성에 어긋난다, 그러면 모든 공소시효를 폐지시켜야 하는데 너무 무식한 소리다’ 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폐지를 이끌어냈잖아요. 그때도 제가 했던 말은 얕은 지식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거였어요. 『그날』을 계기로 ‘위안부’ 대신 ‘꽃송이’라는 명칭으로 변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센병 환자분들과는 사회봉사를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각장애가 처음 찾아왔을 때 방황을 하면서 폭행상해 전과를 갖게 됐어요. 내가 누구보다 월등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힘을 기르고 사람들을 때렸었거든요. 그때 판사님께서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를 선고하시면서 사회봉사 명령을 내리셨어요. 가장 힘든 곳으로 봉사활동을 보내준다고 하셨는데 가 보니까 한센병 어르신들이 사는 마을이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인연을 이어오게 됐죠. 당시의 경험이 제 삶을 정말 많이 바꿔 놨어요. 사회봉사로 인해서 저보다 더 장애가 깊은 사람들이 웃으며 살 수 있는 것도 느꼈고, 그대 크게 다가온 모든 것들이 저를 소설가로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만약 판사님께서 저한테 사회봉사 명령을 내리지 않고 그분들에게 봉사를 하러 가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 교도소에 있을 것 같아요. 그만큼 저한테는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고 아직까지 그 경험을 잊지 않기 위해서 계속 봉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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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 한 번쯤은 써야하는 이야기였다


처음 『그날』을 쓰기로 결심하셨을 때,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요?


한센병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한센병은 세 번 죽는다고 해요. 강제 낙태를 당하고, 시신 해부를 당하고, 죽으면 화장된 뒤에 아무렇게나 뿌려지죠. 살아있는 동안은 일제의 만행으로 노동을 착취당했어요. 그런 일들은 전혀 모르면서,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그래서 이건 내가 알려야겠다고 생각했고요. 물론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 소록도의 이야기를 담기는 했지만 오래 전에 쓰여진 작품이고,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책으로 다시 한 번 다가가서 실태를 정확하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신들의 천국』이 사회적 내부의 구조를 조명했다면 저는 일제 시대에 억압을 당했던 여성의 시선을 통해서, 그리고 권력 투쟁이 아닌 거기에서 밀려나 있는 순수한 분들을 위해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권력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해방 이후에 소록도의 시설을 두고 한센병 환자들 중 일부가 권력을 잡기 위해 싸웠던 일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1/10, 1/100도 안 돼요. 나머지는 모두 희생당했던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부분만 부각시켜서 이야기하는 건 친일의 잔재가 있기 때문이에요. 일제 시대에 소록도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죽어갔어요. 하루에 시신이 백 구~이백 구가 나올 정도로요. 위안부 할머니들도 그랬지만, 한센병 환자들도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거예요. 해방 이후에도 학대를 당했고요. 저는 그 사실을 알리고 싶었어요.


『그날』의 이야기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 나가셨나요? 


처음과 끝 부분만 정해놓은 상태에서 써나갔어요. 70년 만에 해후하는 두 노인, 사이가 안 좋은 기자 둘, 과거와 현재의 서로간의 사랑, 역사적 사실들. 그것만 결정했고 나머지 부분은 있는 그대로를 취재해서 써내려가면서 스토리라인을 잡았어요. 지금까지의 모든 작품들이 처음과 끝만 써놓고 중간은 텅 비워놓고 쓴 거예요. 그때그때의 감정들과 사실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쓰면서 진행한 거예요. 중간에 공백을 두는 이유는 제가 독자의 시선으로 읽어가면서 쓴다는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결말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으셨어요?


없었어요. 결말을 수정할 정도로 확고하지 않다면 글을 쓰기가 싫거든요. 


『그날』속 등장인물의 실제 모델이 된 분들도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실제 인물들의 이름에서 가져온 거예요. 강학순은 김학순 할머니, 하춘희는 배춘희 할머니께 미리 허락을 받고 지은 이름이에요. 서수철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저와 인연이 있는 한센병을 앓고 계신 분이신데,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아버지 당신을…』에도 등장하시죠. 『그날』에서 하춘희가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사실은 그 말이 김학순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이었어요. 배춘희 할머니께서는 『그날』을 집필하는 도중에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그날』안에 할머니의 이야기가 남겨졌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집필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크셨겠어요. 


이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마음이 아팠죠. 출판이 늦어진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저는 ‘나눔의 집’에서 이 책의 출간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작품을 폐기처분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래서 출판사와 계약을 할 때도 ‘나눔의 집’의 허락을 먼저 받겠다고 얘기했어요. 위안부라는 사실은 기록이에요. 창작이 아니란 말이에요. 있었던 사실이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우리가 살아계신 분들께 허락을 받아야죠. 작품 속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나쁜 일이라고 생각해요. 


실제 있었던 사건들이 작품 속의 일화로 삽입되기도 한 건가요?


어르신들이 실제로 당하셨던 모든 일들을 조합해서 하나의 인물을 탄생시킨 거예요.


필하시는 동안 잠시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멈추지는 않았어요. 힘들어도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썼어요. 보통 한 작품을 쓰는 데 3개월 정도 걸리는데, 이번 작품은 7개월 정도 걸렸어요. 쓰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힘들어서 오랜 시간이 걸렸죠. 


힘들어도 쓸 수 있었던 건 사명감 때문이었을까요?


작가로서의 양심, 그리고 작가로서 한 번쯤은 써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예요. 누구나 작가로서 한 번쯤은 쓰고 싶은 소설이 있어요. 그게 저에게는 아버지 이야기였고,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사실적 기록들이었어요. 저는 『요코 이야기』를 읽고 화가 너무 많이 났거든요. 작가가 일본에 대한 일방적인 시선으로만 그렸잖아요.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렇게 그렸던 소설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그렇다면 내가 생각한 주관적인 사실만 가지고 쓰겠다고 생각했죠. 그들은 역사적 기록을 빼고 허구로 그렸지만 저는 역사적인 기록만 가지고 쓰겠다고요. 내 나라 한국의 입장에서 기록을 해서 『요코 이야기』가 얼마나 잘못된 소설인지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것이 사명감과 의무가 되어서 괴로워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부분을 쓸 때 가장 괴로우셨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힘들게 썼어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을 쓸 때는 굉장히 행복했고요.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부각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너무 행복했어요. 정말 힘들었던 건 집필 기간 중에 『제국의 위안부』논란이 생겼을 때였어요. 저도 그 책을 읽었지만 그건 중립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자가 학자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사실들이 너무 많았어요. 과연 역사적 사실들을 다 알고 있기는 한지, 위안부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서 취재한 적은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어요. 저자를 직접 만났다는 위안부 할머니를 저는 만나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이건 독자에 대한 사기죠. 그리고 그 사람은 교수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라고 생각됐어요. 일본에 대한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깊게 파고든 책도 아니었고요. 거기에 너무나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취재를 하고 썼더라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꽃송이’라는 이름 선물하고 싶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소설을 쓸 때 가장 고민되는 건 사실과 허구의 경계일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글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누구에게라도 상처를 주는 글은 정말 나쁜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작가적인 오만으로 누군가의 생각을 지배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 세 가지를 항상 생각하죠. 그리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을 때는 배려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요. 독자에 대한 배려, 실제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배려, 전체 대중에 대한 배려. 그러면 아름다운 글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려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날』을 쓰시는 동안에는 위안부 할머니와 한센병을 앓고 계신 할아버지께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많이 염려하셨겠습니다. 


단어 하나도 굉장히 민감하게 선택했어요. 매춘부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걸까, 일제 치하의 폭행 장면을 이렇게 그려도 되는 걸까, 며칠씩 고민을 했죠. 그런데 쓸 수밖에 없었고 그걸 인정해 주시니까 고마운 거예요. 그렇지 않았으면 작품을 폐기처분했겠죠. 


‘나눔의 집’ 할머님들은 『그날』을 모두 읽으셨나요? 


안신권 소장님께서 다 읽어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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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들의 반응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어요. 제가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거든요. 제가 부탁드리는 것처럼 할머니들께서 느끼시면 안 될 것 같아서 직접 전달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책을 서경덕 교수님한테만 전해줬어요. 작가가 저라는 이야기도 하지 말고 ‘이런 글이 있는데 출판이 가능할까요?’하고 여쭤봐 달라고만 말씀드렸어요. ‘나눔의 집’에 후원금을 기부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기사화가 되어버리면 글로만 평가받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나중에 허락을 받고 나서야 인세를 기부하겠다고 밝혔죠.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물론이고 피해 입으신 모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부분이 있는지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싶었어요. 그래서 작가 이름이나 소개 없이 소설 원본만 전해드렸고요. 


당시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알릴 필요도 있지만, 그 순간을 다시 형상화함으로써 또 한 번 아픔을 드릴 수도 있기에 고민이 깊으셨을 것 같습니다. 


피해자분들의 생각이 모두 같은 건 아니에요. 과거의 이야기를 숨기고 가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다 모여야 우리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 모든 분들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나눔의 집’의 안신권 소장님이 추천사를 써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서경덕 교수님께 소설을 전해드릴 때도 ‘단 한 명의 반대라도 있으면 폐기처분하겠다’고 했었어요. 누구에게든 상처 주는 소설은 쓰기 싫었거든요.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인 분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나는 작가가 아니다, 이 작품을 폐기처분할 의향도 있으니까 그냥 보여드려라, 단 한 분의 반대라도 있다면 출판을 접자’ 고 말했어요. 저에게 있어서 배려가 없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종이뭉치일 뿐이에요.


그만큼 사실 검증에도 심혈을 기울이셨을 텐데요. 자료를 조사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으셨나요?


자료 조사에 대한 부분은 오히려 편했던 것 같아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작품을 8년 이상 준비한 거나 마찬가지죠. 봉사활동을 통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던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픽션을 가미해서 쓰기만 하면 됐어요. 『그날』의 내용처럼 소록도의 수호 원장이 죽기는 했지만, 소설과는 다른 인물이 죽인 거였죠. 그런 부분은 픽션이 가미된 거예요.  


『나는 텐프로였다』『희망의 날개를 찾아서』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영화로 제작될 예정인가요?


이미 계약을 마친 상황이에요. 출간 전부터 제작 의사를 밝힌 영화사가 있었거든요. 기부를 약속하면 영화 판권을 주겠다고 했었는데 그렇게 하면 영화사가 수익이 나지 않잖아요. 그래서 『터널』의 판권을 더 저렴한 가격에 넘겨주기로 했어요. 대신 영화 <그날>로 인한 수익은 기부하라고 이야기했죠. 

 

쉽지만은 않은 결정인데요


누군가를 돕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글은 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역사적 사실을 썼음에도 역사적 사실의 주인공들을 외면하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공인 양 생각하는 것도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으로 인한 수익은 기부하도록 계약을 한 거예요.


‘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로 평가받는 작가님에게 소설의 의미는 남다를 것 같습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 그만큼 돌려줘야 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해요. 독자가 있기 때문에 작가가 밥을 먹고 또 다른 작품을 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그 독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이 무얼까를 생각해 보면 기부인 것 같아요. 누군가를 돕는 일이요. 그것이 제 작품의 완성도를 더 높여준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독자들이 마련해준 돈으로 기부를 한다면 책을 사서 읽은 분들은 기쁨이 배가 되잖아요. 결국 기부가 독자들이 제 작품에서 얻은 즐거움을 배로 만들어주는 건데, 그걸 외면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런 인식 때문에 작품의 영역을 제한될까봐 걱정될 때는 없으세요?


저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야기보다 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라는 이야기가 더 듣기 좋아요. 장르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를 써왔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버지 당신을…』『밤의 대한민국『나는 텐프로였다』도 그렇고요. 장르에 연연하지 않아요. 다만 저는 ‘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라는 수식어를 너무 지키고 싶을 뿐이고, 그걸 잘 지키기 위해서 다른 장르에 도전하지 못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다른 장르에 도전하면서 독자들의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해주면 되는 거니까요


『그날』에는 두 주인공이 변함없이 품고 있는 ‘순정’에 대한 비유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작가님께서 알고 계신 ‘순정’은 어떤 것인가요?


저는 아버지에게서 순정을 배웠어요. 저희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나신 후 지금까지, 20년 넘게 혼자 저희를 키우셨는데요. 결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여러 번 있으셨는데 하지 않으셨어요. 어머니와 이혼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내가 예쁜 집을 지을 건데, 언젠가 네가 돌아오고 싶은데 차마 미안해서 못 돌아올 것 같으면 먼발치에서 그 집을 바라봐라’라고요. 그리고 ‘대문이 만들어져 있다면 내 모든 감정들이 닫힌 거고, 대문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면 아직 널 기다리는 거니까 언제든지 들어와라’ 라고 하셨대요. 제가 작가가 된 후에 어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어머니는 이미 다른 분과 재혼하신 후였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대문을 만들자고 말씀드렸죠. 그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순정이라는 말을 아니? 우리 때는 순정이 있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대문을 만들지 못하겠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이 저에게 많은 걸 느끼게 했어요. 이번 작품을 쓸 때 그런 감정들을 많이 이입시키고 싶었고요.


작가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부분이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불편할 때는 없어요. 저에게 아버지는 신앙과 같은 존재예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 아버지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제 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분이라는 걸 자랑하고 싶고, 제가 아버지를 이렇게 사랑한다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거든요. 


『그날』을 계기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기를 바라시나요?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를 계기로 아동 공소시효 폐지를 했듯이 이번에는 『그날』이 계기가 되어서 할머니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선물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이번 작품을 쓸 때 처음 가졌던 목적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꽃송이’ 할머니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그에 맞는 법 개정을 독자들과 함께 이뤄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바람은 이 이야기를 읽고 우리가 새롭게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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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소재원 저 | 마레
이 책은 일제 말,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한반도를 자신들의 침략야욕을 뒷받침하기 위한 병참기지와 전시동원을 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일제는 침략 야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일제는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이란 명목 하에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다. 이를 위해 한반도와 만주를 전쟁물자 공급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어 공산품과 식량 대부분을 전쟁터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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