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작가의 첫 소설 『왕경』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오래된 미래다. 이미 한 차례 통일을 이룬 바 있는 ‘오래 전 이곳에서의’ 시간을 되짚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기 직전, 수도 왕경(경주의 옛말)에서 펼쳐졌던 긴박하고도 결정적인 순간들을 재현해 낸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이 이야기의 중심에도 ‘사람’이 있다. 바로 삼국의 청춘들이다. 동일한 민족적 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통일의 모습을 그리는 세 사람은 운명적으로 왕경에서 조우한다. 고구려의 귀족으로 신라 정찰대에 붙들려 노비가 된 ‘진수’는 신라 화랑 ‘김유’에게 귀속되고, 비밀스러운 사연을 간직한 채 왕경으로 온 백제 소녀 ‘정’과 만나게 된다. 신라와 당의 연합이라는 거대한 바람 앞에 선 그들의 운명은 한 줄기 빛처럼 격렬하게 흔들린다.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인가. 신념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세 사람의 마음이 어지러이 엉켜든다.
『왕경』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 그 시작점을 되짚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삼국통일을 중요한 기점으로 본 작가는 사건 속으로 깊숙이 뛰어들었고,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위해 2년 동안 치밀한 조사를 거쳤다. 서당에서 동양 고전을 공부하면서 국내외 문헌을 200여 권이나 탐독하고 당시 고구려의 영토였던 중국 집안과 백두산, 당 제국의 중심지였던 장안(지금의 서안)을 답사하는가 하면,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에 이르기도 했다. 그 결과 생생하게 되살아난 당시의 풍경과 생활상은 『왕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이처럼 빈틈없는 사료 위에 세워진 탄탄한 이야기는, 지난 20년간 신문기자로 재직했던 작가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1990년에 조선일보에 입사한 이후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생생한 증언을 들려주었던 그녀는, 조선일보의 첫 정치부 여기자가 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사건의 핵심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 사실을 좇는 그 작업은 『왕경』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물론 『왕경』에 담긴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구성뿐만이 아니다. 문학적 상상력과 갈등이 탄탄한 구조 속에서 생동한다. 대학 시절부터 소설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혔다는 작가는 기자로 살아가면서도 습작을 멈춘 적이 없었다. 문화부 기자로 재직 시절, 그녀의 습작을 본 박경리 선생은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결국 『왕경』은 사실과 허구,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작가의 지난 시간 속에서 탄생한 셈이다.
손정미 작가가 주목한 것은 당시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체로 올라설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한반도의 방패 역할을 했던 고구려, 유려한 문화와 활발한 무역으로 세를 키워나갔던 백제를 제치고 가장 소국이었던 신라가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질문의 끝에서 작가는 ‘공동체의 목표와 자신의 욕망을 조화시킨 사람들’ ‘신라 화랑이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힘’을 발견했고, 그 연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단군 조선에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해법을 들려주기 위함 이 발견한 그 해법을 들려주기 위해 『왕경』을 집필했다. 삼국통일 이전의 한반도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지금 이곳에는 또 한 번의 민족 분단과 대치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통일과 민족의 정체성, 신라 화랑의 저력과 단군 조선 사이에는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손정미 작가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신라의 화랑도는 신을 지키던 신군(神軍)이었다
삼국통일을 우리의 정체성이 시작된 기점으로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단군의 맥을 이어온 민족이라는 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생각들이잖아요. 굉장히 모호하고 희미한 의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계속 이어져 오는 것은 끈질긴 생명력과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단군에 대해서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그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삼국에 주목하게 됐죠. 단군 이후의 사상이나 전통이 삼국에 의해서 나름의 변형을 겪어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당시와 지금의 상황은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뿌리는 같다는 걸 알고 있지만 상황에 의해서 총칼을 겨누고 있잖아요. 그 상황을 신라가 통일을 함으로써 수렴한 거라고 생각돼요. 신라는 단군 시대부터 이어왔던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를 제대로 발현시켜서 통일을 이룬 세력이라고 보고요.
당시와 지금의 상황과 유사하다면 해법 역시 다르지 않겠군요.
삼국통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교훈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고구려는 중국이 두려워할 만큼 가장 강대한 국가였는데 연개소문이라고 권력을 넘겨주는 과정에서 욕심을 버리지 못했죠. 그래서 2세인 삼형제가 자중지란을 일으켰고요. 반면에 신라는 소국이었지만 탄탄히 실력을 쌓아왔었고 김춘추라고 하는 전략적인 위정자가 있었어요. 영적인 에너지를 결집시킬 수 있었던 화랑도라는 무사 집단이 있었고 그곳에 상징적 영웅인 김유신이 있었고요. 그 모든 것이 잘 어우러져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우리는 영적인 에너지가 많은 민족이거든요. 그걸 스스로가 자각해서 자긍심을 갖고, 힘을 키워서 대비해 나가면서, 그에 걸맞은 비전과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위정자가 있다면, 훨씬 더 지혜롭고 완결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민족이 지키고 있는 영적인 에너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왕경』을 준비하면서 그 사실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화랑도를 용맹한 무사 집단 정도로만 알고 있잖아요. 저 역시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과연 삼국통일이 무사적인 기술력만 뛰어나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인가’라는 거죠. 그래서 역사적 자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화랑도와 단군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화랑도는 단군 시대부터 이어져 왔던 신단을 둘러싸고 신을 보호하던 신군들이었거든요. 신을 지킨다는 것이 무적인 용맹함과 함께 영적인 힘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다가 신라 화랑도에서 꽃을 피운 거죠. 고구려에도 조의선인이라는 신군 집단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되었고, 제도화되면서 본래의 힘과 정신이 흐려졌어요. 그런데 신라의 화랑도는 제대로 중흥을 맞은 거죠. 그래서 통일 시기에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었던 거예요.
『왕경』은 역사소설이면서도 어렵지 않아서 좋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작품을 읽으면서 역사의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서 좋았다는 독자들도 많고요.
독자 분들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제가 진짜 원했던 반응이고,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정말 보람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몰랐던 역사와 훌륭한 면들이 정말 많거든요. 저 자신도 너무 몰랐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까 ‘이걸 공유하고 싶다. 너무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게 전달하면서 각인시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우리에게 단군은 굉장히 공허하게 소비되어 왔던 이름 같아요.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야, 단군의 후손이야, 라고 이야기하지만 너무 멀고 공허한 구호처럼 느껴졌었다는 거죠. 그런데 『왕경』을 준비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확신을 하게 됐어요.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제대로 전달하고 싶다고 생각했고요. 『왕경』에서 도입처럼 보여드렸다면 다음 작품에서는 더 깊이 보여드리고 싶어요.
이번 작품을 위해서 2년 동안 자료를 조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야기의 70%를 ‘팩트’로 채울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싶은데요.
세 명의 주인공과 묘사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팩트인 셈이에요. 읽고 난 뒤에 공허한 역사소설을 쓰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려면 제대로 된 팩트를 전달하면서 공감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화랑도의 검법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사료에 근거해서 쓴 거예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참고했는데요. 조선시대에 왕명에 의해서 우리 무술을 집대성한 책이에요. 그리고 당시에 목재로 쓰인 나무, 중요하게 취급된 보석류, 그런 부분들도 모두 조사했죠. 제대로 재현해보고 싶었어요.
박경리 선생께 습작을 보여드렸더니…
오랫동안 신문 기자로 재직하셨던 경험이『왕경』에 미친 영향이라면 무엇일까요?
20년 동안 끊임없이 글을 써왔던 게 초석이 됐던 것 같아요. 기자로 살면서 정확하게 취재하고 편향되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되어있기도 했고요. 역사소설은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이 필요하니까, 그런 부분에서 많은 도움이 됐죠. 특히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국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거시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고요. 사람들이 얼마나 권력을 갈구하는지, 권력을 가지면 어떻게 변화되는지도 볼 수 있었죠.
당시에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계셨나요?
기자들은 특종 경쟁을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획을 해야 되거든요. 그럴 때마다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우리가 지향하는 건 무엇인지 항상 염두 해 두었었죠. 그 고민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더 진지해진 것 같아요. 그 질문에서 시작해야 저와 제 소설이 중심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소설가를 꿈꾸던 대학생이었는데 졸업 후에는 신문 기자가 되셨어요.
그때는 막연하게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소설가는 경험이 많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문기자가 되면 간접경험이나마 풍부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기자 생활이 너무 바빠서 완결된 소설은 쓸 수 없었지만 습작은 계속했어요.
그때 쓰신 습작 중 한 편을 박경리 선생께서 보신 거군요.
제가 문학담당 기자로 『토지』를 취재하러 갔을 때였어요. 선생님께서 저를 잘 봐주신 덕분에 인터뷰가 끝난 후에 댁에서 잘 수 있었는데요. 물론 여자라서 가능했겠지만, 당시 출입 기자로서는 거의 유일하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그렇게 몇 차례 찾아뵈면서 선생님과 가까워졌어요. 사실 작가가 되고 싶은데 용기를 내지 못한다고 고민도 털어놓았고요. 그 후에 용기를 내서 습작을 보여드렸는데 며칠 후에 전화를 주셨어요. “보통 소설을 쓴다고 해서 작품을 들고 오면 대화가 너무 어색하고 마치 나무에 옷을 입혀놓은 것처럼 딱딱한데, 너는 그렇지는 않더라. 아마 습작을 계속 해온 것 같다. 소설을 써도 될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선생님께서 정말 대쪽 같은 분이셔서 빈말로 덕담하실 분은 아니시니까 용기를 얻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자 생활을 했어요. 기자로 사는 삶이 재미있기도 했고, 과연 내가 소설을 잘 쓸 수 있을까 확신하기 어려웠거든요.
박경리 선생께서는 작가님의 어떤 부분을 높이 평가하셨던 걸까요?
모르겠어요. 저를 보면 조금 짠하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선생님도 기자 생활을 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더 이해를 해주셨을 수도 있죠.
사랑받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왕경』의 세 주인공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 앞에서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물을 설정할 때 각 국가의 특성을 반영했어요. 화랑인 ‘김유’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면서 대의를 위해서 희생하는 인물이라면, 고구려 출신인 ‘진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흔들리기도 하고 또 도망치고 싶어 하기도 하는 인물이죠. ‘정’은 백제의 유려한 문화와 진취적인 면을 보여주고요.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희생당하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 고뇌하기도 하셨을 것 같습니다.
개개인의 삶은 소중하고 다시 얻을 수 없는 거잖아요. 모든 순간이 중요하고 그것이 모여서 이루어진 인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있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양보하고 희생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왕경』의 주인공들은 모두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아마도 작가님의 모습이 투영된 것 아닐까요?
『왕경』을 준비하면서 제가 읽고 싶은 책을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서당에서 동양 고전을 공부한 순간들도 좋았고요. 무엇보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들고 올 때 가장 기뻤어요. 한껏 들떠 있었는데, 그런 시간들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왕경』에서도 세 인물을 통해서 당시의 희열감, 그리고 책 속에 펼쳐지는 무궁무진한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최근에 인상 깊게 읽으신 책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유동식 연세대 신학과 교수님이 쓰신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서울대 국문학과의 신범순 교수님의 『노래의 상상계』도 무척 흥미로웠어요. 『노래의 상상계』는 주요 시인들의 사상을 해석한 책인데, 너무 재미있어서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을 정도예요.
첫 소설 『왕경』을 출간하신 후에 “평생 쓸 소설 10편 중 한 편을 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9편의 작품을 통해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당분간은 역사 소설을 쓸 것 같고요. 미술과 건축을 다루는 소설도 써 볼 생각이에요.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학성 있는 작가로 인정받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저는 재미있고 사랑받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어요. 그렇다고 소비 지향적인 작품을 쓰고 싶은 건 아니고요. 한 구절이라도 독자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면 행복한 작가가 아닐까 싶어요.
『왕경』과 만나게 될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왕경』으로 하여금 독자들에게 ‘우리 역사를 더 알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해드릴 수 있다면 참 행복할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은 삼국통일을 앞둔 시기의 역사적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여드리려고 노력한 만큼, 독자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통일을 앞두고 있으니까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 가면서 읽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슬기롭고 완결성 있는 통일을 이루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왕경손정미 저 | 샘터
삼국 중 가장 소국이었던 신라가 어떻게 중국과 겨뤘던 고구려나 백제를 이기고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고자 했다. 그 결과 공동체의 목표,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구성원들이 각자의 이기심을 누르고 공동체의 목표와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이 작가가 찾은 답이었다. 더불어 우리가 뿌리로 생각하는 단군 조선이란 무엇이며, 신라 화랑의 영적 무사적 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 소설은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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