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씨어터 신보가 나온다는 소식에 잠을 못 이루던 소년들이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참을성이 없던 A는 시내 대형 레코드점으로 뛰었고 조금은 느긋했던 B는 동네 레코드점에 예약을 걸어놓고 기다렸다. 1990년대만 해도 동네 곳곳에 레코드샵이 있었다. 이제는 30~40대가 되어버린 메탈키드에게 그때는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이다.
배순탁 작가가 쓴 『청춘을 달리다』는 1990년대를 회고한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로 유명한 그인지라, 자칫 이번 책이 팝에 관한 이야기라고 예측할 수도 있다. 아니다. 이 책은 1990년대 가요를 다룬다. 신해철, 이승환, 자우림, 서태지, 윤종신 등 15팀을 소개하며 해당 뮤지션에 얽힌 배순탁의 사적인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스스로 유리멘탈이라며 뮤지션과 술자리는 꺼린다는 배순탁. 혹시 인터뷰에서도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한다면 어떨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말도 잘 할 거라는 예상이 종종 빗나가기도 하지만, 배순탁은 아니었다. 그는 능변가였다. 사실, 그는 이미 방송에서 유려한 언변을 펼치고 있다.
팝 프로그램 작가가 가요를 다룬 이유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로 유명합니다. 아무래도 팝을 다뤘을 듯한데, 책에서 이야기되는 소재는 가요입니다.
팝이 아니라 가요를 먼저 들었거든요. 1998년까지는 가요를 마니악하게 들었습니다. 책이 다룬 시기와 거의 일치하죠. 1998년까지만 들었던 이유는, 그때 군대에 갔거든요. 또 마침 HOT가 나오고 가요 대신 팝 음악을 들었어요. 지금은 HOT 음악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아니었거든요. 물론 이 시기에 머라이어캐리, 펄잼, 너바나도 좋아했지만 가요를 주로 들었으니 팝이 아니라 가요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또 다른 이유는, 가요를 이야기해야 이 바닥 안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팝 프로그램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팝은 대한민국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가요가 팝화된 음악이라고는 해도, 정서적 친밀감으로 보면 다르거든요. 그래서 가요를 썼습니다.
첫 장이 고 신해철입니다.
돌아가시기 전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대타 DJ를 맡으셨죠. 작가에게는 대타 DJ가 부담입니다. 무엇보다 콘솔을 직접 만져야 하는데, 그 분은 워낙 총명하고 콘솔은 장난감처럼 만질 수 있었죠. 그래서 저도 아무런 부담 없이 재밌게 10일 동안 같이 지냈어요. 그때 느낀 점을 장 마지막에 꼭 쓰고 싶었습니다. 대중이 갖는 이미지와 실제 사이의 간극이 신해철만큼 큰 사람도 없을 거예요. 대중은 그를 마왕, 교주로 기억하지만 그는 그냥 좋은 사람이에요.
제게 신해철은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하게 했던 뮤지션입니다. ‘50년 후의 내 모습’ 같은 곡이 그랬죠. 물론 이전에 이런 음악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제가 처음으로 들은 음악은 신해철 곡이었어요. 솔로도 그랬고 넥스트 앨범도 마찬가지예요. 특히 넥스트 1, 2집을 정말 좋아해서 어마어마하게 들었어요. 윤상 편에 등장하는 제 친구들 모두가 신해철을 좋아했어요. 신해철로 친해졌고, 지금까지도 계속 만나는 친구죠.
제목인 ‘청춘을 달리다’에서 ‘말 달리자’도 연상되는데요. 제목에 얽힌 사연이 있나요.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말 달리자’뿐만 아니라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도 연상되는 제목인데요. 출판사에서 몇 가지를 줬는데, 이게 제일 나을 것 같아서 지었어요. 차우진 음악평론가의 『청춘의 사운드』라는 책이 있어요. 차우진 씨에게 전화해서 단어가 하나 겹치는데 절대 오해하지 말라고 전화는 했네요. 저는 평범한 제목이라 생각했는데 독자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예스24 오늘의 책에도 올랐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죠. 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심각하게 있는데요. 그냥 고맙고 놀랍습니다. 가수가 뮤직뱅크 1위 할 때 기분이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이 책의 장점 중 하나가 전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저자 개인의 이야기를 많이 썼다는 점일 텐데요. 소개하는 음반이 명반이고, 그 명반에 얽힌 사적인 이야기가 있잖아요. 연애, 군대, 대학생활 등등. 하지만 명반이긴 해도 사연이 얽히지 않은 음악도 있지 않나요.
그래서 김동률 앨범은 빠졌어요. 전람회 1집인 「기억의 습작」 은 LP로도 갖고 있고 정말 좋아합니다. 신해철이 프로듀싱하고 목소리까지 나오죠. 2집은 더 좋아했습니다. 특히 ‘이방인’이라는 노래. 그런데 별 이유가 없는데도 김동률의 솔로 뒤로는 못 챙겼어요. 그러다 보니 제 삶과 연관도 없고요. 어쩔 수 없이 김동률은 포기했죠.
1990년대 곡으로 여러 곡을 추천하셨는데요. 계속 들어도 좋은 노래를 꼽아 주신다면.
윤상의 ‘가려진 시간 사이로’, 신해철의 ‘껍질의 파괴’,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 ‘난 알아요’ 이 정도겠네요.
‘이통사의 하위 카테고리’쯤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음악무용의 시대에, 「Fall to Fly 前」은 장인적인 고집으로 충만하다(p. 159)고 쓰셨습니다. 현재 한국의 음악 시장을 어떤가요.
‘이통사의 하위 카테고리’라는 표현은 제가 아니라 이승환 씨가 방송에서 했어요. 저도 인상 깊게 들었어요. 지금은 창작자에게 돈이 안 돌아가는 시대입니다. 그건 인디 뮤지션도 그렇고 SM 소속 뮤지션도 마찬가지죠. 바꾸면 되잖아요. 하지만 안 바꾸는 이유가 첫째는 거대 기획사가 가진 파이는 어차피 크니까요. 둘째는 그들이 돈 버는 게 음원 수익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광고, 해외공연 수익이 더 많죠. 그래서 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고요. 외국도 비슷해요. 음원 수익보다 방송, 광고, 공연 수익이 더 중요한 시대죠.
문제는 음악에 투자한 게 회수 안 된다는 사실이죠. 이승환은 음악에 몇억씩 투자하는 사람인데, 본전도 못 건지는 불공정한 제도에요. 불공정하다는 걸 많은 사람이 인지하지 않고 있고요. 이런 제도가 계속되는 한 음악의 질은 하락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의 음악 듣는 감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죠. 이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어요. 음악의 본질은 가사가 아니라 사운드인데, 사운드를 대하는 사람들 생각이 예전보다 소홀해진 것 같아요.
음악평론이란 객관을 가장한 주관으로 하는 설득
나에게는, 음악에 대한 글을 통해서 객관과 보편을 말하려는 욕심이 없다. 솔직히 음악을 논하는 행위에 있어서 그런 것들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요즘 들어 유난히 객관이라는 것의 허무함을 사무치게 절감한다. (중략) 객관을 가장한 주관을 설득하고 있을 뿐이다. -『청춘을 달리다』 p. 129
음악평론의 곤혹스러움을 표현하셨는데요. 이 책에서는 장르, 표현 기법 등 전문적인 용어는 최대한 빼고 쓰려고 한 느낌이 들어요.
읽기 쉽게 쓰려고 했죠. 그게 목표였으니까요. 제일 난감한 게 음악평론입니다. 문학평론은 텍스트와 비평하는 도구가 모두 글이죠. 도구가 같아요. 큰 장점입니다. 영화는 보인다는 장점이 있고요. 음악은? 악보를 펼쳐놓고 봐도 소용이 없어요. ‘이 곡은 C장조로 시작해서 이 대목에서 변환이 일어난다’고 쓰면 누가 읽어요. 생래적인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결국 음악평론은 객관을 가장한 주관일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배순탁의 평론이란?
특정한 경험을 통해서 취향이 생깁니다. 그 취향을 잘 닦고 숙성하면 안목이 형성되겠죠. 깊은 안목을 지닌 평론가가 최종 목표입니다. 제가 경험한 건 부분일 수밖에 없어요. 평론가에게는 부분으로 전체를 미루어 짐작하는 능력이 필수죠. 이를 위해서는 설득력이 있어야 하고요. 좋은 안목을 기르려고 아직도 노력 중입니다.
책 속에 밀란 쿤데라, 발터 벤자민, 신형철이 자주 등장합니다.
신형철, 벤자민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신형철에게 바치는 오마주입니다. 소설 대신 평론집을 많이 읽어요. 어릴 때부터 그랬고요.『몰락의 에티카』를 읽고 비틀스의 「Sgt Pepper's Lonley Hearts Club Band」 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런 글을 쓰지, 하는 심정이었죠. 지금도 『정확한 사랑의 실험』, 『느낌의 공동체』는 계속해서 읽어요. 한때 프랑스 철학이 패션이었던 적이 있죠.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 저도 패션으로 받아들였죠. 이해 못 하면서도 읽었어요. 푸코는 그나마 쉽고 데리다는 읽다 욕할 정도로 어려웠지만요. 실용적인 글읽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쁘니까 책 읽는 데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주로 좋은 평론을 읽으려 합니다.
좋아하는 뮤지션으로 꼽은 드림씨어터(Dream Theater)는 평론가에게 특히 인기 많은 듯합니다.
평론가가 좋아하는 뮤지션이 있죠.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도 대중들은 거의 몰라요. 평론가나 알지. 다른 고등학생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시작은 메탈이었어요. 한국 뮤지션은 넥스트, 외국은 메탈리카와 드림씨어터. 메탈리카는 1980년대 전성기라 책에서는 뺐어요. 1990년대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무조건 드림씨어터입니다. 연주력이 너무 완벽해서 흠이라고 할 정도로 연주가 좋고 곡도 잘 써요. 멜로디도 선명하고요. 지금도 듣고 앞으로도 들을 텐데 올해 내한은 못 갔네요. 원래 기타리스트를 꿈꿨는데, 못다 이룬 게 드림씨어터에 있어요. 대리만족을 느끼죠.
목차를 보면 A사이드와 B사이드로 나뉘어 있는데요. 보통 테이프를 보면 A사이드에 좋은 곡이 많고 B사이드는 채워 넣는다는 느낌도 들잖아요.
별다른 의도는 없어요. 첫 번째가 신해철이 된 건 의도적이지만 나머지는 시간순이에요.
드래곤볼 7개 모아도 20대로 안 돌아가
그럼에도 공교롭게도 B사이드에 군대 이야기가 있네요.
군대는 암흑시절이었죠. 인제군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맞고 때리고 이런 건 없었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어요. 그렇지만 군대라는 조직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폭력적 면이 많은 곳이잖아요. 저는 남자가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미국 남자는 대부분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나오잖아요.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곳이지, 군대가 한 사람의 인격을 성숙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지금처럼 아픈 세상을 만든 건 이십대가 아닌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그런 세계가 반강제적으로 주어진 마당에 당사자들을 향해 참고 견뎌라?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청춘을 달리다』 p. 108
보통 청춘은 어렴풋하면서 아련하게, 아름답게 그려지기 마련인데요. 이 책에서 그리는 주 감성은 씁쓸함 같습니다.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말도 안 되게 신자유주의 비판도 썼어요. 지금 20대는 취업, 생존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에요. 이 와중에 청춘에게 희망 전도사, 희망 세일즈맨 되는 건 거대한 위선이죠. 그런데도 내일이 나아질 거라고 말하는 책이 많이 팔리는 데 절망했어요. 그런 책을 읽어봤자 도움되는 건 하나도 없거든요. 지금 청춘은 미래를 몰라서가 아니라 미래가 뻔히 보여서 화가 나고 불안해하잖아요. 그 앞에서 당신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한 교수가 이렇게 이야기했죠. 그래서, 이런 세상을 만든 게 내 책임이냐고. 비슷한 시기에 배철수 선배는 이런 세상을 만든 건 내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적어도 회피하려는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겠습니다. 실제로 배철수 선생님은 어떤 어른인가요.
배철수 선배는 정말로 존경할 만한 어른입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꼰대가 될 수밖에 없거든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에요. 20대 때는 윗세대 욕하고 30대는 중간에 껴서 어물쩍거리고 40대는 20대 욕하는 게 무한반복됩니다. 이게 세대론이에요. 나이가 들면 누구나 고집불통, 꼰대가 됩니다. 다만, 강약은 있어요. 누가 더 꼰대이고 덜 꼰대가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배철수 선배는 제가 본 분 중에서 가장 꼰대스럽지 않은 어른이에요. 젊은 사고를 갖고 여전히 젊은이가 즐기는 문화를 함께 공유하려고 노력해요. 라디오 DJ를 하려면 필수거든요. 50~60대만이 아니라 10~20대도 라디오를 들으니까요.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DJ가 모르면 방송이 안 되죠.
청춘을 달렸습니다. 달리고 난 심정은 어떤가요.
달릴 때도 있고 좌절할 때도 있고 길 때도 있었지만 제일 중요한 정서는 이거예요. 미련을 남기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드래곤볼 7개를 주면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해도 저는 안 돌아가요. 밤새 술 마셔도 생생했던 젊은 시절이나, 기본적으로는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어요. 그래서 20대에게 거짓부렁이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 힘들었어요. 지금 청춘은 더 힘들 거예요. 힘내라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안 날 게 뻔하거든요. 절망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 다음에 조심스럽게 희망을 논할 수 있겠지만 무조건 힘내, 잘 될 거야, 이런 말은 못하겠네요.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미완인 20대라는 이유인가요.
정신적인 고통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기본적인 의식주입니다. 의식주가 부족한 데서 오는 고통은 자존감을 해칠 수 있어요. 저는 그런 시절을 미화하고 싶지 않아요. ‘너희는 그 시절을 아니?’ 꼰대질할 생각은 없어요. 있는 그대로 봐야죠.
못다 한 꿈인 기타리스트에 다시 도전할 생각은 없나요.
언제든 다시 치고 싶지만 이미 알았어요. 제 신념인데, 예술과 스포츠는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바로 관둬야 해요. 아니면 거지꼴을 면하지 못합니다. 예술과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어야 할 수 있어요. 재능이 먼저이고 피나는 노력은 그 이후입니다. 저는 축구도 해 봤고 기타도 쳐 봤지만 냉정하게 보면 스스로가 알아요. 그런 면에서는 포기가 빨랐어요.
청춘을 달리다배순탁 저 | 북라이프
감성이 가장 충만했던 그 시절,‘운 좋게’도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에게 ‘청춘’이라는 단어는 조금 특별했다. “나에게 있어 청춘이란, 낭만적인 동시에 비참함을 어떻게든 견뎌야 했던, 흑역사의 한 페이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낭만보다는 비참과 좌절을 겪어내면서, 나는 어른이 되는 법을 조금은 배울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바로 음악이다. 음악이 없었다면 글쎄, 나는 아마도 정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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