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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엄마 강현정이 거창고에 매료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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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고등학교 강당 뒤편, 소박한 액자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힌 직업선택 십계가 걸려있다.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은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이곳에 위치한 거창고등학교는 입시철이면 높은 명문대 진학률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거창고에 들어가기 위해 강남에서도 올 정도다. 많은 학부모들이 거창고의 교육에 어떤 비법이 있는지 궁금해 한다. 그런데 거창고의 직업선택 십계를 보면 의아할 따름이다. 생각했던 내용과 많이 다르지 않나. 학부모 입장에서만 아니라 일반인의 눈에도 위의 내용에는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 저 내용과 딱 반대로 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먼저 당장 자녀에게 내용대로 교육해도 괜찮을지가 고민스럽다. 

 

거창고의 직업선택 십계가 말하고 있는 열 가지 이야기는 결국 한 방향을 가리킨다. ‘힘든 선택을 하라.’저자 강현정은 3년 간 거창고 졸업생들과 선생님들을 만났다. 혼나기도 하고 눈물도 흘렸다. 무척 괴롭기도 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지금, 그녀는 해답이 아니라‘묵직한 질문을 얻은’ 이 상태가 행복하다. 사춘기 자녀들과의 관계가 편안해졌고,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공부를 잘하는 것,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는 것, 세속적인 성공을 하는 것, 기존에 생각했던 ‘성공’과 ‘성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신념에 따라 강직한 걸음을 걷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뿌리인 거창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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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성공보다 더 중요한 가치

 

책을 쓰시면서 얼마간 변화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부모의 변화를 자녀들이 느끼던가요? 자녀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3년 간 부모가 달라지니 아이도 드라마틱하게 변했다는 대답을 원하실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뭐가 얼마나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구체적으로는, 저희 큰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예전에는 학원 끝나고 데리러 가면 뒷좌석에 탔는데요, 요즘은 반갑게 뛰어와서 옆자리에 앉아요. 그런 식의 관계 변화가 생긴 거죠. 보통은 아이의 인성이 좋아지니 성적도 엄청 좋아지더라 이런 얘기를 원하시겠지만(웃음). 아이 스스로 생각하고 내가 잘해보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의 변화가 생긴 건 맞아요. 애써 대화를 하자, 이런 게 아니라도 그냥 같이 있으면 좋고, 별나게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어도 같이 있는 게 불편하지 않은 것이 달라진 점이죠.

 

전에는 가정의 관계가 전부 냉각 됐었어요. 남편은 성적에 관해 대놓고 저한테 뭐라고는 못해도 불만이 가득한 상태로 있었거든요. 그런 공기가 아이들도 알아차릴 만큼 됐으니까요. 아빠가 현관 문 여는 소리가 나면 아이들이 바싹 일어나서 자리에 가고 그랬어요. 서로를 의식해야 될 만큼 굉장히 불편한 관계였죠. 지금은 저희 부부도 자녀의 모습에 대해 너무 남의 시선 의식하려고 하지 않고요. 자녀들도 우리 엄마아빠는 그래도 참 괜찮은 분들이셔, 나를 이만큼 이해해주려고 하셔, 공감하려고 노력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진심이 통하니까 서로 오버하지 않아도 되고요. 편안한 관계로의 변화가 제일 큰 변화죠.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게 제일 만족스럽고요.

 

3년의 과정 동안 제가 서서히 변했거든요. 아이보다 제가 변한 게 더 커요. 그걸 아이들이 봐왔기 때문에 제가 이제 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 공부가 중요해,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면 아이들이 저를 비웃을 것 같아요. 저도 체면이 있지 그렇게까지 돌아가진 않을 것 같아요(웃음).

 

‘평범한’ 엄마의 고민이 솔직하게 담겨 있습니다. 인터뷰이의 평범한 모습도 인상적이고요. 그런 면에서 이 작업의 진실성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감사해요. 얼마 전 아이 친구들 엄마 모임에 다녀왔는데 다 책을 읽어봤더라고요. 내용 자체가 세상의 주류 가치에 편승하지 말자는 내용이잖아요. 이 엄마들 그룹이 다 욕심쟁이들이거든요(웃음). 그래서 동의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느낀 게 너무 많았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어떤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책을 읽는데 ‘정말 내가 뭐가 잘못됐는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읽는데 눈물이 나더라.’ 하고요. 그러면 됐다고 생각했어요. 글을 잘 쓰고, 좋은 평가를 받고 이런 것은 원하지도 않았어요. 다만 독자들,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부모 세대의 독자들이 읽으면서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제가 바라던 거였어요. 그래서 그런 반응이 왔을 때 감사하다고 느꼈죠.

 

책에는 거창고 졸업하신 분들을 여섯 분만 소개했는데 서른 분 이상 만났어요. 이야기를 많이 뺐어요. 어쩌면 그것도 욕심을 포기한 부분 중 하나예요. 전체적인 구성이나 구색을 맞추는 차원에서, 직업 십계명이니까 최소한 열 명은 채우고 싶은 것도 출판사 마음이었고요. 또 1장, 3장 모두 여덟 개의 부로 나뉘어져 있고 2장만 여섯 개예요. 두 개 더 채우면 좋잖아요(웃음). 끝내 버린 이유들이 있어요. 깨달은 것은 굉장히 많지만 보호해드리고 싶은 부분도 있었고요. 더 재미있게 하려면 첨가할 수 있는 양념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것도 사생활을 생각해서 뺐어요. 아주 드라이하게 여섯 분만 들어간 거예요. 타협하지 않고 썼다는 것이 저한테는 제일 큰 만족이에요. ‘더 좋아보이게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텐데 포기한 거 잘했다.’ 그런 만족이 있거든요. 아마 직업십계명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나 스스로에게 정직했구나, 나를 배반하지 않았구나 하는 스스로에 대한 작은 만족 말이에요. 이런 행복이 사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 직업십계명이 한 얘기인 것 같아요.

 

거창고 출신 졸업자분들의 반응이 제일 궁금하고 조심스러웠거든요. 제가 거창고 출신도 아니면서 이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분들이 SNS로 찾아와서 남겨주시기도 하고 문자도 주시고 하셨어요. 울면서 읽었다는 얘기 하실 때 제일 감사하고 다행스러웠죠. 다행이다, 내가 많이 오버하지 않은 덕에 차라리 실수는 하지 않았구나, 하는 마음이었어요.

 

신념을 지키는 것, 순간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유혹이 왔을 때 자기 합리화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첫 발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책은 출판사에서 직업선택십계명이라는 거창고의 교육 철학을 주제로 취재 해달라고 제의를 받은 것이었고, 제 얘기가 들어갈 계획이 전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전성은 선생님께 처음 원고를 써서 드렸을 때는 별로라고 하시더라고요. 인터뷰 기사 쓰듯이 썼고, 저의 언어로 나오지 않았던 거죠. 사실 졸업생들 만나면서 저도 많이 힘들었어요. 상처를 준 시누이도 있었고요. 전성은 선생님의 가르침도 감 잡기까지 일 년 반 이상 걸렸어요. 그러니 전성은 선생님이 시어머니라면 졸업생들은 시누이 같은 느낌이었죠(웃음). 그렇게 2년이 흐르고 선생님이 왜 연락 없었냐 하시는데 ‘선생님 못하겠어요.’하면서 힘들다고 펑펑 울었어요. 내 코가 석 잔데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글을 또 쓰냐는 생각이 들면서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걸 보신 선생님이 이제 쓸 때가 됐다고 생각하신 것 같더라고요.

 

선생님은 너의 얘기로 나오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쓰다 보니 너무 나는 잘못한 엄마다, 식의 고백이 되는 거예요. 독자들이 이런 사사로운 것에는 관심이 없을 텐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싶어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이게 맞다 하셔요. 직업 십계명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나오는 반응이 자기 고백과 자기 성찰이다, 그게 없는 사람이 이걸 이해했다고 볼 수 없는 거다, 나는 독자들이 너처럼 그렇게 자기반성을 하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형태로 나오게 됐어요.

 

평범한 사람들의 변화가 더 중요

 

그것을 전성은 선생님은“평범한 일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위대함이 진정한 위대성(7쪽)”이라고 하셨어요.

 

그렇죠. 우리나라 교육이 잘못됐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잖아요. 우리 세대는 공부 잘하고 명문대 나오면 좋은 직장 들어가서 먹고 살기 편안한 삶이 보장이 됐어요. 그런데 요즘은 아무리 명문대 나와도 취업이 너무 어렵고, 청년들이 너무 아파하잖아요. 세대가 원래 그런 거려니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해요. 상황을 알면서도 부모들은 착각을 해요. 남은 좀 힘들겠지만 우리는 치고 나가자, 이런 욕심들을 다 갖고 있어요. 저는 어떤 대단히 뛰어난 교육감이나 교육부장관이 나와서 입시 정책을 확 바꾼다고 우리가 행복해지진 않을 것 같아요. 개인들의 탐욕이 계속 있는 한 절대로, 아무리 좋은 제도가 나와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어요. 작년 경기도 교육청에서 등교 시간을 아홉 시로 늦추자고 얘기가 나왔을 때 어떤 전단지가 돈 줄 아세요? 학원가에서 아침에 매일 한 시간 씩 들을 수 있는 수업이 나왔다고 돌았던 거예요. 아이들의 수면권 같은 건 전혀 생각 안하고 그 시간 아까우니까 그렇게 하겠다는 거죠.

 

평범한 사람들의 변화 없이는 아무리 좋은 정책이 나와도 그걸 넘어서는 또 다른 변칙이 자꾸 나올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결국 교육 정책을 탓하기 전에 내 삶을 돌아보는 게 먼저가 아닌가 생각해요.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의 변화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전성은 선생님이 제일 잘하시는 말씀이 “너나 잘하세요.”거든요(웃음). 부모들이 잘해야, 부모들이 바뀌면 아이들도 달라진다, 이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안정된 직장’을 선택한다는 것은 ‘불안한 사회’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이 불안하기 때문이잖아요. 이런 상황에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등의 계명은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이대로 자녀에게 교육하기가 불안하진 않을까요?

 

얼마 전 EBS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됐어요. 공부는 지능이 아니라 마음이다, 부모가 불안해할수록 아이 성적은 더 멀어진다,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요. 그건 100% 경험적으로도 맞는 얘기인 것 같아요. 부모가 현실에 대한 걱정을 당겨 하면서 불안해하고 아이들을 푸시한다고 성적이 오르지 않아요. 마음이 변해야죠. 부모가 걱정하면 할수록 아이는 걱정을 부모한테 싹 밀어버리고 안 해요. 자기의 삶을 자기가 걱정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아무 변화가 없어요. 성장하지 않은 채로 몸만 커져가는 거죠. 요즘 부모님들이 아이들한테 제일 우려하는 것도 그거잖아요.

 

얼핏 보면 직업 선택 십계명의 방향이 나만 이 사회에서 도태되게 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사람의 내면을 성숙시키는 길이더라고요. 처음에 생각하면 이건 말도 안 돼,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가령 월급을 백만 원 주는 직장이 있고 오백만 원 주는 직장이 있다면 당연히 오백만 원 주는 곳으로 갈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곳은 오백만 원을 주는 사람을 위해 싫어도 해야 하고 아닌데 싶어도 해야 해요. 노예가 되는 거죠. 자기를 배반하면서 일을 하고 천만 원 주겠다는 제안을 받으면 또 그리로 가겠죠. 원래 추구하던 것, 하고 싶었던 것, 의미 있는 것은 점점 멀어지고요. 세월이 흘러 ‘저 길은 한 때 꿈이었지.’하겠죠. 반면 백만 원밖에 안 주지만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곳은 자유로움이 분명 있거든요. 거기서 나의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이쪽 발걸음으로 가다보면 자신에게 최대한 정직한 걸음을 걷게 되더라고요. 조건에 역행하는 사람에게 오는 자유로움이 분명히 있어요. 그걸 졸업생들을 만나면서 느꼈어요.

 

책에 나오는 장대영 교수가 그런 얘기를 했는데요, 나는 처음부터 공부를 잘하거나 대한민국에서 대단히 잘나가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고, 어차피 돈이 많은 걸 보고 선택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배반할 일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자기 길을 가는 거예요. 타고 나기를 소신이 있는 사람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그냥 그 길을 가다보니 저절로 소신 있는 사람이 됐더라고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평범한 사람들이 한 발을 먼저 딛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일찍부터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랄 수 있었던 거창고 학생들이 부럽네요.

 

맞아요. 시쳇말로 ‘개념이 없다’고 하잖아요? 사실 저도 이 사회가 나한테 부여해준 틀 안에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열심히 해서 경쟁에서 앞서가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게 성공인 줄 알고 살아왔거든요. 그 체제에 순응하는 모범생으로 살아왔어요. 그러다보니 내가 외면하고 살았던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어느 순간엔가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들고 내가 그 때 외면했던 게 앙금으로 남아있었어요. 마흔이 넘으면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찜찜한 상태로, 내가 뭔가 잘못하고 사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말이에요. 그 와중에 거창고를 알고 이분들을 만나고 나니까 나도 고등학교 때 여기 나왔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진짜 부러웠어요.

 

전성은 선생님 외에 거창고 출신의 여러 사람을 만나셨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요?

 

다 기억에 남아요. 어느 한 분을 댈 수 가 없어요. 한 분 한 분이 다 보석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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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수록하지 못해서 아쉬운 분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잠깐씩 언급된 분 중에 표정숙 선생님이라고 있어요. 평교사만 하시다 현재는 은퇴하고 덕유산에 집 짓고 사시는 분인데요. 그분과 어제까지도 문자를 주고받았어요. 선생님이 책을 아껴서 읽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계속 눈물이 난다고 하시면서요. 어떻게, 어디서 그런 사랑이 계속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좋다고 얘기하세요. 자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놓을 수 있는 분이시더라고요. 그분도 딱히 뭘 이루었다고 할 만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정도의 업적은 없지만 자꾸 가슴에 남아요.

 

어떤 분은 대구에서 과외선생님을 하세요. 대구가 또 대치동 못지않은 곳인데요, 그런 잘나가는 곳에서도 데려가고 싶어 할 만큼 잘 가르치는 과외선생님이에요. 그런데 아주 가난한 동네에서 조금만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세요. 거창고 졸업생들은 사교육 업체에서는 절대 일하지 않을 것 같고 다 NGO활동 할 것 같잖아요? 절대 안 그렇고요, 다만 각자 주어진 상황에서 그 자리를 빛내고 있어요. 거창고 출신 과외선생님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거죠. 자기의 달란트를 주어진 자리에서 배반하지 않고 정직하게, 너무 나대지도 않고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살아가시는 분들, 그런 분들이 생각나요. 어느 한 분만 거론할 수 없이 모두다 정말 귀했어요.

 

사랑이 강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기울이는 피눈물 나는 노력이 강한 것이다. 사랑이 위대한 게 아니라 사랑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바치는 희생이 위대한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약하고 상처받기 쉽고 깨지기 쉬운 유리잔이다. 큰 사랑, 강한 사랑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잔이다. (39쪽)

 

신념과 가족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종진 선생님의 사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실적인 고민이기도 해요. 안과 밖, 현실과 신념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했어요. 나도 모르게 가슴에 스며든 거예요. 아주 사소한 일상들도 자잘한 선택의 순간들이 이어지는 거잖아요. 선택의 순간에 어느 쪽으로 갈까 할 때 약간 손해 보는 것 같은 길로 가요. 이렇게 배웠으니 해야지 하고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거지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잘 모르겠어요.

 

이종진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사실 아들이 공부를 되게 잘해요. 공부를 잘하면 욕심을 더 내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종진 선생님은 이건 내가 배운 대로 사는 게 아닌데, 하는 얘기를 항상 하시는 거죠. 그분도 아내를 이기진 못하잖아요. 고민만 하고 계신 거예요. 그렇지만 고민도 대단한 거죠. 조금 더 하면 우리 아들 더 좋은 대학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흔히 하니까요. 이종진 선생님은 나를 죽이는 선택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내와의 갈등에서 비록 자식과 관련된 부분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따라가지만 그래도 주어진 범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하고 떼어 놓는 것 말이에요. 다른 활동가처럼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나가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참여하는 것, 그게 나를 버리는 시간, 죽이는 시간이라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작은 발걸음이 사실 정말 중요한 거잖아요. 하루에 한 시간 독서하기처럼 일주일에 한 번은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남을 위한 일을 해야지, 하고 떼어놓는 거죠.

 

미성년자는 스스로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리라는 시선에 반발하는 청소년 운동도 있습니다. 이는 청소년 인권과도 연결되어 있는 문제인 것 같아요. ‘자율성’을 강조하는 거창고의 사례가 많은 것을 시사해요.

 

아이들은 경험이 부족하니까 미숙한 결정을 할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잖아요. 거창고가 그런 점에서 대단한 것 같아요. 거창고는 매년 봄 소풍을 지리산으로 1박 2일 간다고 해요. 전통처럼 됐더라고요. 그런데 학교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아침에 모여 체조하고 그런 게 아니고 그냥 풀어놓는대요. 사실 학교로서는 굉장히 간 큰 짓이죠. 그러다가 애들이 잘못될 수도 있는 거고, 예상치도 못한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에게 자율권을 주면 신기하게도 그때야말로 스스로를 지켜내는 도덕적 성장이 더 큰 폭으로 이뤄진다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나는 과연 내 자식을 저렇게 믿어줄 수 있나.’ 생각하면 자신 없거든요. 민주적인 부모인 척은 굉장히 잘하는데 그러면서 실눈 뜨고 감시하거든요. 아이들은 그걸 귀신같이 잘 알아챈다고 하더라고요. 믿어준다는 건, 아이가 거짓말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자고 속아 넘어가는 게 아니고, 아이에게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을 믿어준다는 거죠. 신의 형상을 말이에요. 거창고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하나님’이라고 하고요. 모두 성경 말씀에 빗대서 해요. 쉽지 않은 와중에도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책에 자전거 얘기 나오잖아요. 처음에 원고가 들어갔을 때 편집자분도 ‘자전거 부분은 동의할 수 없어요. 얼마나 위험한데요.’ 이랬었거든요. 하지만 금지하는 게 답은 아닌 것 같아요. 허락해주는 대신 발생할 위험성을 충분히 얘기해주고, 헬멧은 꼭 써야한다, 이런 몇 가지 약속을 지키게 하면서 한 단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 같더라고요. 자전거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이 키우면서 그것보다 훨씬 더 허용하기 어려운 일들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그때마다 안 된다고 하면 아이의 성장이 결국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부모는 리더(leader)가 아니라 헬퍼(helper)다, 라고 하신 거군요?

 

그렇죠. 아이가 뭔가 제안해서 치고 나가려고 할 때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하자고 도와주는, 서포트 해주는 역할을 해야 된다는 거죠.

 

“자식을 잘 키우려고 하지 마라. 너나 잘 살아라. 아이들을 망치고 싶은가? 부부 싸움을 해라. 아이들을 더 망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서로를 비하하라. 무조건 아이에 대해서는 욕심을 버려라. 부모는 그저 이 아이를 열심히 도와주라고 위탁받은 존재에 불과하다.” (147쪽)

 

전성은 선생님의 “자식을 잘 키우려고 하지 마라. 너나 잘 살아라.”(147쪽)라는 말에 많은 분들이 뜨끔하실 것 같아요. 자식에게 완벽한 부모가 되려는 것이 오히려 독이라는 걸까요?

 

거창도 모두 농사만 지으시는 건 아니잖아요. 병원, 약국 하시는 분들도 있고 많이 배우신 분들도 당연히 있어요. 재미있는 게요, 보면 그런 분들일수록 아이들을 더 잘 못 키운대요. 완벽한 조건을 갖춘 부모일수록 말이에요. 오히려 농사짓고 ‘우리 아이가 거창고 들어갔어요, 너무 영광이에요.’ 하면서 동네잔치 열고 이런 집 있잖아요? 그런 집 부모님은 아이를 나중에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물어보면 그저 모른다고 할 정도예요. 그런데 그런 분들의 자녀들이 훨씬 더 잘 성장한다는 걸 매해 경험하신대요. 거창고에도 강남에서 사교육으로 무장된 아이들이 꽤 많이 진학을 하는데, 처음에는 강남 출신들이 상위권에 포진 됐다가 6개월 정도 지나면 서서히 내려간다는 거예요. 결국 자율이 있느냐 없느냐의 결과인 거지 강남에 있던 아이가 학원 끊고 가니까 못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공부는 지능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거죠. 존재만으로 귀하게 생각하는 게 믿음이라고요. 매일 칭찬해주라고 한다고 해서 못했는데도 잘했다고 기술적으로 칭찬하는 경우는 오히려 아이가 교만에 빠질 수도 있고 나태해질 수도 있어요. 표정숙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는 빛과 소금으로 이미 태어난 존재들이다.’라는 그런 마음, 너무나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믿음이라는 거예요. 부모님이 알아서 미리 로드맵 짜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아이가 자기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거든요. 다 해주니까요. 그런 방식의 부모 역할은 좋지 않은 거죠. 결과도 빤하고요. 자신의 경험을 아이보다 우위에 두는 부모가 그런 거예요. 잘 배운 부모들, 똑똑한 부모들의 딜레마가 있어요. 제 주변에 똑똑한 엄마들일수록 오히려 허당이더라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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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f-believing people

 

“최소한 우리 시대의 고민은 알아야 한다”(40쪽)고 하셨습니다. 저자 분이 요즘 생각하는 ‘시대의 고민’은 무엇인가요?

 

고민은 너무 많죠. 해결하지 못하고 뒤에서 꿍얼꿍얼 그래서 그렇지(웃음). 경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일까, 고민하죠.

 

말씀하신대로 이 시대의 사회문제 대부분은 ‘경쟁’이 기저에 있습니다. 거창고 ‘직업선택의 십계’가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거창고는 경쟁에서 이기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는 곳으로 가라는 거잖아요. 강함이 약함을 누르는 게 아니라 약함이 강함을 이길 수 있다는 게 거창고등학교 직업 십계명이거든요. 네가 희생하라고, 네가 썩어질 밀알이 되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 당연히 경쟁이라는 건 아무 의미가 없겠죠. 많아지면 정말 좋겠지만 인간의 탐욕 때문에 결국 ‘너희들은 다 지켜, 나는 이 기회에 치고 올라갈 거야.’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겠죠.

 

전성은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 부모는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그러세요. 정답을 가지고 있는 듯 확신하는 사람은 다 가짜라고요. Half-believing people 얘기 나오는 것 보면요. 반신반의 하면서, 이종진 선생님처럼 고민하면서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결국은 이 시대의 변화를 불러오는 사람들이지 ‘확실해, 틀림없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100% 사이비다, 이렇게 얘기하세요. ‘너 자신 있어? 직업십계명처럼 살 수 있어? 경쟁에서 나는 안 한다고 할 자신 있어?’라고 물었을 때 ‘물론!’ 이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사실 제일 배반할 가능성이 많다는 거죠(웃음).

 

"확실한 해답을 얻었다기보다는 묵직한 숙제를 하나 얻은 느낌이다."(219쪽) 라고 하셨는데 독자 입장에서도 그럴 것 같아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질문을 얻었으면 성공한 거죠. 웃기네, 하고 끝났다면 그분은 이런 인생관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 자기에게 유익이 있는 선택을 추구하다가도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반문을 한 번 씩 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된 거죠.

 

‘직업십계명’ 3년 체험한 지금, 제일 처음에 받았던 질문, "아이가 어떻게 자라길 바라세요?"에 대한 답이 달라졌을까요?   

 

아이가 어떻게 자라길 바라는지... 이럴 때 답이 확 나와야 멋있는데(웃음). 잘 모르겠어요.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가치 있는 선에서, 욕심대로 살지 않고 의미 있는 일을 향해서 살아갔으면 하는 게 제일 큰 바람이고요. 책 마지막에 저희 엄마 얘기를 실은 이유는, 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내 엄마의 가르침이 좋은 줄 몰랐어요. 오히려 답답하다고 많이 느꼈었거든요. 그런데 돌아가신 후 엄마로 인해 깨달은 게 굉장히 많아요. 그러니 아이가 어떻게 자라길 바라느냐는 질문이 별로 의미가 없어요. 다만 아이들이 훗날 우리 엄마가 이런 걸 가르쳤었지, 삶으로 나에게 이런 걸 보여주셨지, 하고 느껴지는 게 있으면 그걸로 만족인 것 같아요. 무엇을 하고 살든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아이들이 컸을 때 우리 엄마하면 떠오르는 엄마의 잔상이 있잖아요. 내가 지금 나의 엄마에 대해서 느끼는 그런 것처럼 아이들도 그런 걸 느낄 수 있으면 해요. 저는 그걸 제일 바라요.

 

자녀 교육에 있어 늘 불안한 동지, 우리 시대 부모들에게 응원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이런 묵직한 질문을 받아놓고 약발이 사흘도 안 가요(웃음). 변화를 다짐해도 집에 가서 아이 얼굴 보는 순간, 너희 진짜 오늘 학교 가서 뭐 한 거야? 그렇게 되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건 개념도 있고 공부도 잘했으면 좋겠다는 두 가지 욕심이 다 있는 거잖아요. 공부 잘하고 개념도 있어서 누구보다 완벽한 경쟁력으로 무장하고 싶은 한 차원 높은 고도의 욕심인 거죠. 사회 구조가 이 모양, 이 꼴인데 나 혼자 잘 되는 건 말도 안 돼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개인의 성공만을 향해 달려가는 가치관이 아니라 말이죠. 자기계발서들 있잖아요. 네 1%의 가치를 찾아 상상력을 어쩌고 이런 거요. 그렇게 내 속에 있는 것을 다 소진하고, 나를 소모시킬 생각만 하지 말고, 잔잔하고 소소하지만 성공이 아닌 ‘행복’을 생각하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인 거예요.

 

전에 『타이거 마더』저자 에이미 추아가 일간지 인터뷰한 걸 봤어요. 성공의 정의를 보다 넓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마찬가지예요. 무엇에 성공했느냐를 생각해야죠. 사회에서 굵직하게 자리 잡는데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너의 행복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느냐 라고 물었을 때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게 성공인 거죠. 13기 동문 선배 아저씨들 모였을 때, 거창고 출신들이 이것 때문에 발목 단단히 잡혀서 돈도 많이 못 벌고 어디 가서 척하니 술도 못 산다고, 아부 떨지 못해서 직장에서 승진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투덜대요.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이만하면 만족해.’ 이렇게 얘기하고요. 그런 게 행복이 아닐까요? 그런 만족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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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강현정,전성은 공저 | 메디치미디어
저자 강현정은 휴먼 다큐멘터리를 쓰듯 직업십계명을 3년간 취재했다. 전성은(전 거창고 교장)의 구술이 길잡이가 되었다. 강현정은 거창고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거창고 졸업생들을 찾아 인터뷰했고, 일본까지 건너가기도 했다. 그녀는 이 책을 마무리한 뒤, “거창고를 명예졸업한 기분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가치관이 변했고 이를 통해 “사춘기 아이의 인성과 성적이 향상되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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