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빨간 머리 앤』의 등장인물 마릴라 아주머니는, 소풍이며 새로 만날 친구며 무엇에든 애정을 쏟는 앤을 보며 한숨을 내쉽니다. 앞으로 살면서 실망할 일이 많을까 봐 걱정이라면서요. (중략)"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어른이 될수록, 실망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에 애초에 기대를 버리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분 매초를 황홀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잊고 살았던 게 아닐까요? (233쪽)
갖은 걱정과 고민에 고개를 푹 숙이고 걷다가 쏟아지는 햇살, 청명한 하늘, 산들바람, 명랑한 새 소리를 듣고 크게 위로받은 적이 있다. 시멘트 틈을 뚫고 올라온 민들레꽃이나 빨갛게 익은 단풍잎을 보면 기특하고 고마웠다. 새 봄을 맞이하는 공간에서 마치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을 즐기는 상춘객이 그토록 많은 것을 떠올리면 사람에게 필요한 정서랄까 위로가 되는 환기의 존재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한다. 기운을 북돋고, 등을 토닥이고, 다정한 눈인사를 건넨다. 그 모든 순간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낸 명화들 역시 오랜 시간 살아남아 우리에게 말을 건다. 바로 『그림의 힘』이다.
차(CHA)의과학대학교 미술치료대학원 원장이자 미술치료계의 권위자로 잘 알려진 저자 김선현 교수는 그간의 임상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가장 효과가 좋았던 명화 89장을 선정하여 소개한다. 삶에 있어 가장 주요한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일, 사람 관계, 돈, 시간, 나 자신의 다섯 영역을 제시하고, 여기에 도움을 주는 작품들을 배치해 마음을 위로한다. 그림은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완화시키기도 하고, 편안한 관계를 설정하도록 마음을 보듬기도 하며, 울고 싶을 때는 울어도 좋다고 말을 걸기도 한다.
"그림이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중간에 넣어서 감정 조절을 해주는 거죠. 이 그림들을 보면서 감동 받고, 울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하고, 공감하는 거예요."
반드시 어떤 그림을 어떤 상황에서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림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 당신의 마음을 위로하는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붉은 색감이 주는 에너지, 분홍이 주는 행복감과 짙은 푸른색이 주는 씩씩한 젊음, 노란의 편안함처럼 다양한 감정의 변화가 그림을 통해 가능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 조절을 잘 하는 능력
명화 89장을 선정하셨어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특별히 권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신가요?
이 책은 미술치료와 상관없이 아주 평범한 사람들, 어린 아이들부터 시작해 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볼 수 있게 구성된 책이에요. 특별한 질환이 있어서 보는 것도 있겠지만 그 외에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 스트레스나 여러 가지 정서적 변화들을 그림을 통해서 살펴보고 치유하는 방법으로 구성되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책을 '미술치료'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보고 마음이 치유되니까 일종의 미술치료라고도 볼 수는 있겠죠.
프레데릭 레이턴 <타오르는 6월>
유명한 명화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으니 그 자체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한 그림이 있어요.(웃음) 오렌지색 쉬폰 스카프 입고 낮잠 자는(프레데릭 레이턴 <타오르는 6월>, 240쪽) 그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들거든요. 그런데 야하다고...(웃음)
이 책을 자기계발서로 기획했던 이유가 있어요. 자기 관리 능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 조절을 잘 하는 능력이거든요. 현대인들이 가장 못하는 감정 조절 중 하나가 스트레스 중에서도 특히 분노조절이고요. 어떤 부분에서 자신의 분노가 계속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잖아요. 자신의 예민한 부분인데요. 이것만 건드리면 분노가 터지는 부분이 누구에게나 있을 거예요. 트라우마죠. 이런 것들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그간 쌓아왔던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어요. 감정 조절을 잘할 때 성숙한 인물로 성장해가는 과정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그것들을 그냥 표현하고, 그냥 감정 조절 한다는 건 쉽지 않은 부분이에요. 여기에 그림이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넣어 조절을 해주는 거죠. 이 그림을 보면서 감동 받고, 울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하고, 공감하는 거죠. '맞아, 나도 이래, 어떻게 내 마음을 알지?' 그러면서요. 어떤 휴식을 통해서 자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자기계발서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미술 작품으로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말씀이군요.
또 좋은 건 자기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에요. 감정에 빠져서 일상에 방해가 되고 여러 가지 문제가 될 경우에 그림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요. 직접 참여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것 역시 일종의 부담이거든요.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고, 평가하고, 조절할 수 있는 하나의 중간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책을 쓰시면서 가장 좋았던 그림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마커스 스톤의 <훔친 키스>라는 그림(151쪽)을 정말 좋아해서 굉장히 감탄을 했는데요. 여자는 잠이 들었어요. 지쳤는데요. 청바지나 반바지가 아니라 정장, 그것도 최고의 흰 색 드레스를 입은 것으로 봐서는 자신의 업무나 집무 등이 있는 상태에서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온 것 같아요. 남자를 만나러 왔는데 너무 곤한 거예요. 옆에는 신이 바라보고 있죠. 신이 주는 평온함, 안정감도 있어요. 뒤늦게 남자가 와서 여자의 자는 모습을 계속 봤을 거고, 키스를 했을 거예요. 이런 쉼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요즘 많은 사람들의 연애가 오래 가지 못하고 쉽게 깨지는 이유가 그 때문이에요. 한 사람이 뛰고 있을 때 한 사람은 받아줘야 하는데 같이 뛰고 같이 스트레스 받고 같이 싸우게 되거든요. 서로에게 요구를 하고요. 성경에서도 결혼은 서로 돕는, 헬퍼Helper라는 개념으로 말하거든요. 지금은 일방적으로 나의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으로 되니까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거죠. 함부로 때리는 거고, 함부로 욕을 하는 거고요. 저는 이 그림에서 자연의 안정됨과 쉼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아요.
마커스 스톤, <훔친 키스>
책의 구성을 다섯 가지 주제로 분류해서 소개하셨어요.
우리가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부분이 일이라든가 사람관계, 시간, 돈 이런 것들이에요. 그런데다가 돈 부분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구성이 되어서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림은 긍정적으로 자기를 해소하는 방법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처럼 '과잉'으로 치료효과를 얻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동종요법'이라고도 하셨는데요. 꼭 반대의 정서를 담은 그림만 치료효과가 있는 건 아닌가봅니다.
동종요법은 증상을 억누르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증상을 건드려서 표현하는 게 좋다는 차원에서 진행하는 거예요. 물론 좋은 방향으로 표현해야 하죠. 계속해서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더하면 안 되겠죠. 울고 싶은 때 뺨을 딱 때리는 것처럼 나쁜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미술이라는 건 긍정적으로 자기를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거든요. 울고 싶은데 그림을 보니까 너무 울음이 나는 거죠.
최근에 카라 꽃을 짊어진 여인(디에고 리베라, <꽃 노점상>, 216쪽)을 보고 많이 울었다고 얘기하시는 분이 계셨어요. 카라라는 꽃은 항상 모든 것의 중심 역할을 하거든요. 안개꽃처럼 보조가 아니라 한 송이만으로도 신부의 부케가 되고요. 당당하고 아름다운, 어찌 보면 최고의 꽃이에요. 꽃과 여인은 보통 같은 감성을 갖는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 그림에서 여인은 여왕인 꽃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어요. 꽃이 짐이에요. 그런데 이 짐이 너무 많아요. 뒤에 누군가 받쳐주는 모습에 위로는 받지만 무게감이 느껴지고요. 얼마나 힘들어요. 내가 어떤 일을 할 때는 물론 좋아서 시작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관계, 돈 문제, 시간, 몸의 피곤함,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짊어지고 움직여야만 하잖아요? 그런 삶의 무게라는 게 표현됨과 동시에 꽃의 화사한 색이 참 좋다고 여성분들이 많이 얘기 하세요.
디에고 리베라, <꽃 노점상>
또 들려주실만한 사례가 있나요?
워킹맘이었는데 아이를 출산하고 복직한 분이었어요. 일을 하고 집에 왔을 때 무척 피곤하잖아요. 그래서인지 여성이 잠을 자고 있는 그림이라든가 키스해주는 모습이라든가 홀로 떨어져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 혼자만의 힐링을 할 수 있는 그림들에서 위로가 많이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한 그림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는 치유의 효과가 있는가 하면 사람의 상태나 경험에 따라 그림의 효과가 다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것 같아요. '주변 사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다'(108쪽)'에 대해서 어제 또 어떤 분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폴레옹이 나쁜 놈인 줄 알았다는 거죠. 정복자의 투지, 에너지가 나쁘다고만 생각했고 조세핀과의 관계만 피상적으로 생각했는데 책 내용을 보니 사람을 달리 볼 수 있구나, 여러 가지 면을 볼 수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여성분이었는데, 자신에게 독한 상사가 있는데 결혼도 안 하고, 매일 일을 많이 시키고, 상대를 이해 못한다는 거죠. 그런데 나폴레옹 얘기를 들으면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최선을 다한 나폴레옹의 달콤함에 자기도 사람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림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그림을 통해 보이는 이면의 것들을 이야기하고 달리 보는 시각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그림을 보기도 하지만 스토리텔링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나온 명화에 관한 책들을 보면 그림에 관한 역사적 상황, 미술사적 접근을 주로 했어요. 조금 더 접근한다면 작가의 생애 정도까지만 접근을 했는데요. 저는 임상 기관에 오래 있다 보니까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와서 이 그림을 보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치료를 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위로의 부분을 살펴봤던 것 같아요. 그 부분이 독자 분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에 자기 이야기를 덧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참 신기해요. 이 그림(로렌스 알마 타데마 <더 묻지 마세요>, 144쪽) 정말 좋지 않아요? 요즘은 사실 사랑 표현이 노골적이잖아요. 이 그림은 일단 배경이 시원하고요. 복장도 너무나 편안해요. 당시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표현이 손 등에 키스 정도였다고 해요. 이런 키스에 정중함과 내 것을 지키려는 마음과 어떤 애잔함이 다 들어 있잖아요. 온 몸에 퍼지는 전율이 느껴져요. 또 여자의 낯은 발그레 해요. 이런 모든 게 녹아나는 응집된 사랑을 보여주는데요. 이 그림을 보고 굉장히 설렌다는 얘기를 많이 하세요. 남성분들도 좋아하시고요. 이런 표현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사랑의 개념을 느끼는 것 같아요.
로렌스 알마 타데마 <더 묻지 마세요>
충분히 컬러를 즐겨라
'색'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노란색은 희망을, 녹색은 평화로움을 준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색이 주는 치료 효과가 분명히 있는 것이겠죠? 미술치료의 매력은 뭘까요?
일상에서 색이 없이는 살 수 없죠. 너무 색이 많다보니까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있는데요. 색은 꼭 이게 어울리니까 이게 필요하다는 목적에 의한 사용도 가능하지만, 나에게 맞는 컬러나 나를 편안하게 하는 컬러는 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초록색을 보면 편안해지고요. 불안할 때 '바다를 보고 싶어'라고 하는 것은 파란 바다, 파란 하늘, 바다의 자유로운 형태를 보고 싶어 하는 걸 텐데요. 명화뿐 아니라 컬러는 우리 일상에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책 표지인 클림트 작품을 많이 좋아하는 이유는 일단 색의 대비가 많잖아요. 노랑, 빨강, 초록 이렇게요. 빨강의 보색이 초록인데 그러면서도 자연의 색이 정말 잘 어울리기 때문에 이 에너지를 적절하게 받는 것 같아요. 돈을 주제로 소개한 그림들에는 어두운 색을 담은 것들도 많이 나오고요, 죽음에 관한 그림에는 형태도 그렇지만 색도 칙칙하고 어둡고 답답한 이런 것으로 감정을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색에 관한 일화도 있나요?
노인 분이었는데요. 치매 초기셨는데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 싶다는 거예요. 왜냐고 물었더니 그걸 바르면 남편이 '쥐 잡아 먹은 것 같다'며 하지 말라는 제약이 많았다고요. 빨간색 코트도 입고 싶지만 입지 못하는 거예요. 그날 숙제가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 사진 찍기, 빨간 옷 입기였어요. 색이 주는 에너지가 있는 거예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친정어머니가 어느 날 빨간 코트를 입고 오셨어요. 제가 너무 놀라서 이게 뭐냐고, 다른 색도 있는데 이런 색을 입었다고 막 뭐라고 했어요. 그 뒤로 저희 어머님이 제 앞에서는 입지 않으셨어요. 나중에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어요. 갱년기 여성이 에너지가 떨어질 때 내가 원하는 색깔을 통해서 힘을 얻는데 왜 그렇게 반대를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 참 죄송해요. 에너지가 떨어졌을 때는 빨간색 구두도 신어보고, 빨간색 꽃도 보고, 액세서리도 하고, 때로는 네일아트도 하면서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충분히 컬러를 즐기는 게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다른 분야와의 연계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음악을 추천해 주시기도 하셨고요, 심리학자의 말도 인용하셨잖아요. 사람에 대한 관심이 높으신 것 같습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을 안 갖고 살 수도 있어요. 무시하고, 신경 안 쓰고, 도인처럼 살 수 있죠. 그런 사람을 우린 건드리지 않아요. 그런대로 인정하지만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던지고 싶진 않아요. 그 사람 독설이 맞고 나에게 자극은 되지만 그 사람에게 가진 않죠. 그냥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요. 그런 것처럼 사람을 떠나서 살 수 없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정말 많아야 하는데요. 그러다보니까 상처를 많이 받아요. 너무 날카로워서요.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길인 것 같아요. 내가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에게도 치료적 접근을 하실 때가 있으신가요?
저도 많이 그런 편이죠.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정말 삶이 자유로웠어요. 치료 일을 하고 언론에도 조금 알려지게 되니까 나를 다스리는 것, 특히 스트레스 관리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요. 사람 관계에 있어서도 물론 잘 지내기는 하지만 상처도 많이 받아요. 아직까지는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지만 많이 노출되면 더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들긴 해요.
저는 아이를 키우니까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하고, 학교를 보내고 그런 상황이잖아요. 때문에 아침에 눈을 떠서 숨을 고르지 않으면 하루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를 하고, 창문을 확 열면서 숨을 크게 쉬어서 일상으로 들어가는 거죠. 어떻게 보면 일종의 환기인데요. 그림만 보고 환기하는 게 아니라 일상에 접목시키는 거예요.
자신과 만나는 시간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말씀처럼 일종의 장치는 꼭 필요한 것 같아요. 나를 북돋을 수 있는 장치요. 선생님의 '환기'가 좋은 방법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라는 게 굉장히 중요해서요. 영적인 관리, 이런 것들이 참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시간도 중요하고요.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필요한 거죠. 현실과 만나는 시간 전에 차분하게 자신을 만나고 자신을 점검하는 데 그림들이 사색의 시간을 마련해줄 수 있고 그런 부분을 떠오르게 하는 점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림이 정말 신기한 게, 그린 사람의 심리가 보는 사람에게 '전이'된다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걸까요?
그것이 명화인 것 같아요. 명화의 힘이죠. 미국에서 한 20년 살다 온 어떤 분이 하신 얘기였는데요. 그곳에 있을 때 좋아서 들었던 음악이 한국에 와서 보니 다 히트작이 되어있다는 거예요. 어느 곳에 있든 좋은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구나, 생각했어요. 시, 음악, 그림 같은 것들은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있든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명작, 명화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는 클림트를 본 적도 없고 이 화가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시기에 살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도 그림을 통해서 감정을 느껴요. 이중섭의 그림(<해와 아이들>, 96쪽)은 색을 봐도 와 닿지만 특히 사건들이 와 닿죠. 아내와 아이를 너무 보고 싶어서 그리워하며 그렸던 이야기를 들으면 더 나의 감정도 증폭되는 거죠. 그림을 통해서 나의 과거에 들어가고, 나의 현재를 짚어보고, 나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갖고 재점검 할 수 있는 게 그림의 힘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누구나 공감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부분 서양화를 소개하셨는데요, 동양화와 서양화의 치료효과 차이가 있나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미술 교육을 받을 때 대부분 고흐 같은 서양화가를 많이 보잖아요. 그쪽에 많이 노출되다 보니까 서양화에 좀 더 익숙한 것 같아요. 서양 작품의 표현을 더 재미있어 하는 것 같고요. 서양 작품은 비교적 과감하고, 표현력이 확 보이잖아요. 반면 동양화, 특히 한국화는 대부분 자연을 그리고 그림 방식도 수묵화가 많으니까 어색함이 좀 있더라고요. 하지만 노인 분들의 경우 동양화를 좋아하시는 부분도 있어요. 먹의 느낌을 좋아하고 은은한 매화라든가 이런 그림을 좋아하시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 익숙하지 않아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스 많이 받는 직장인들은 자연을 보면서 쉬고 싶어, 자연에 하나가 되고 싶어,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연에 동화되고 싶어, 이런 심리가 있잖아요. 동양화에는 세상과의 단절이나 자연과의 합일 같은 정서가 있으니까 그럴 때 차이가 있을 수 있겠죠. 서양 사람들의 시각은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을 대상으로 보는 면이 크니까 아무래도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뇌의 변화가 나타나
진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사람이 없는 풍경만 봐도 해소가 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보고 있는 것만으로 뇌에 자극을 줄 수 있는 건가요?
책 표지에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림 자체만으로도 치유의 효과를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림만으로도 내 몸과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자극 효과를 느낄 수 있어요. 시각적 자극을 통해 몸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사실 뇌가 움직이는 거거든요. 내가 편안하면 뇌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편안함을 느끼고 안식을 취하고요, 내가 긴장하면 몸도 긴장하지만 뇌는 상당히 긴장하게 되는 거죠. 그림이 좋은 게, 시각적인 효과를 통해서 몸이 반응하고 뇌가 전체적으로 반응하게 한다는 거예요. 좋은 그림을 본다는 자체에서 뇌의 변화가 당연히 나타나요.
모든 감각 중에서 시각이 70%에서 80%까지 차지해요.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하잖아요. 맛이 어떻든 간에 보는 것 자체에서 식욕을 느끼는 것처럼 그림 보는 것 자체로 뇌가 반응을 한다는 거죠. 본다는 건 굉장히 중요해요. 좋은 그림 많이 보는 것, 좋은 느낌을 많이 갖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왕실 식기는 대부분 흰 색에 파란 무늬가 들어가 있잖아요. 파란 무늬는 차분하게 하고 식욕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어요. 반면에 패스트푸드점 보면 빨간색으로 자극을 줘요. 빨리 먹고 싶게 해요. 빨간색은요, 조금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굉장히 많이 지난 것처럼 느끼게 해요. 빨리 먹고 일어나도록 하는 효과가 있는 거예요. 실험 결과가 나왔어요. 똑같은 시간인데 빨간색 방에 비해 파란색 방에서는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느끼지 않는 거죠. 그래서 황실 식기들의 파란색 무늬가 우아하고 천천히 먹을 수 있게 하는 효과를 주는 거예요.
아이들을 대상으로도 실험하셨잖아요?
똑같은 방에 똑같은 조건을 두고 실험을 했는데, 빨간 방에 간 아이들은 책은 쳐다보지도 않고 단체로 뛰고 놀아요. 나중에는 싸우기까지 하고요.(웃음) 빨간 방에 있던 아이들에게 '이 방은 어떤 방이야?'하고 물었더니, '노는 방이요, 더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파란 방에 간 아이들은 차분히 옹기종기 앉아서 놀더라고요. 한 명은 심지어 잠을 자고요. 몇 명이 이야기를 나누더니 책을 읽어요. 그 아이들에게도 물었더니 '책 보는 방이요, 시원해요'라고 해요. 색에 대해 잘 알고 적절하게 배치해주는 것도 필요한 부분입니다.
세월호 사건의 학생들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동안 제가 미술치료를 하면서 많은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왔는데요. 연평도 포격사건도 있었고, 구제역 살처분에 동원되었던 군인들, 학교 폭력, 성폭력, 치매 환자들 등 여러 사건에 관련해서 심리 지원을 하다가 세월호 사건 학생들도 만나게 됐어요. 벌써 1주기가 다가오고 있죠. 세월호 사건에 대해 주목해 볼 만한 것이, 집단 무의식이 아주 발달한 곳이 한국이라, 이 사건이 전 국민적 슬픔으로 자리하게 됐다는 점이에요. 한국의 장례문화는 다른 나라와 달라요. 누가 죽었다고 하면 다 함께 밤을 새고, 다 함께 해요. 공감해주고, 같이 움직여주고요. 누가 이사 왔다, 아이를 낳았다, 하면 모두에게 떡을 돌리잖아요. 이렇듯 집단으로 움직이는 게 강해요. 세월호 사건이 9.11이나 쓰나미 같은 엄청나게 큰 사건들에 비하면 큰 사건이 아닐 수도 있는데 전 국민이 아파했던 이유 중 하나가 '내 자식'이라는 거였어요. 저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고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마치 내 자식 같았어요. 교복 입은 걸 보면 눈물이 나고 아이의 존재만으로 안심이 됐었어요. 단원고 주변 지역의 세탁소 아저씨도 슬퍼하고, 분식점 아저씨도 슬퍼하고, 자식의 실종을 경험한 다른 사람도 슬퍼해요. 모두에게 전이가 된 거죠. 자기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 국민이 아무것도 못하고 TV만 봐도 슬퍼했던 사건이었죠.
저는 당시에 생존자들, 단원고 1학년과 3학년 학생들을 만났어요. 2차 트라우마도 무척 중요하거든요. 유가족들 중에서도 특히 언니오빠들, 청소년들이 이런 아픔을 겪으면 굉장히 힘들어져요. 그래서 형제자매들을 만났고요. 유가족들과도 계속 미술치료를 하면서 아픔을 표현하게 하고, 아픔을 같이 한 그런 기회였어요. 조만간 UN초청 강의가 있는데요, 이때 동양과 서양의 다른 점, 세월호 사건을 통해 트라우마와 정신 건강에 대해 되짚어 볼 예정이에요. 특히 이런 사건을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 지켜봐야 할 게 회복이거든요. 회복 후 성장하는 것, 회복탄력성에 대해서 발표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 그 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뭐였나요?
너무 큰 사건을 겪었고, 혼자서도 많이 울었고, 위로도 많이 받았지만 결국 이들이 극복하고, 회복하는 게 필요하겠죠. 사회 안전망이나 응급의료 시스템, 재난 컨트롤 타워 이런 것들도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아픔을 잘 극복해서 남은 삶을 잘 이끌도록 도와야 할 것 같아요. 사람들은 쉽게 얘기하잖아요. '그만 좀 해라, 또 왜 그러느냐'고요. 그렇지만 남은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평생 가요. 특히 부모는 자식의 아픔을 끝까지 마음에 가두고 있어요. 예전이 만났던 어떤 분이 아이를 잃어버렸대요. 자기 약을 사러 갔다가 아이가 없어졌는데, 70살이 넘도록 그 조그만 약국 앞을 떠나지 못하는 거예요. 아이가 다시 약국에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 부모는 정말 죽을 때까지 아이를 잊지 못할 거예요. 너무 눈물이 나더라고요. 사회는 그만하라고 하지만 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 없을 거예요. 굉장한 슬픔이거든요. 그들의 아픔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며칠 뒤에 팽목항에 다시 갈 텐데요, 어떤 이념을 다 떠나서 같은 자식을 둔 부모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비난하고 이런 건, 아닌 것 같아요.
회복탄력성을 말씀하셨는데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잖아요. 회복이 늦는 사람이 있다 해도 끝까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중요한 말씀인데요. 우리는 모든 걸 빨리빨리 접근하니까 '그만 좀 해'라는 말을 하잖아요. 그렇지만 남들보다 예민한 사람이 있어요. 슬픔을 더 오래 간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일괄적으로 접근하면 안 돼요. 이제는 국가에서도 같이 해줘야 하고요. 사회적인 안전망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회가 지켜줘야 한다는 거죠. 또 하나는 '너 이상한 거 아니야'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예요. 성폭행 피해자들의 특징이 내가 잘못해서 그래, 내가 그 사람을 안 만났으면, 내가 어떻게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는 건데요. '아니야,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 잘못을 한 건 그 사람이고 그 상황이었던 거야.' 라고 말해주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세월호 사건에서도, 아이가 수학여행 가지 않겠다는 걸 이모가 수학여행비를 지불해 준 경우가 있었어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런데 그 이모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왜 그 돈을 대줬던가.' 하고요. 이모 잘못이 아니에요. 조카 수학여행 가라고 돈을 대준 게 왜 이모 잘못이에요? 우리는 본질을 정확히 짚지 않으면 안 돼요. 사고를 당한 거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네 잘못이 아니야' 라는 말을 계속해줘야 해요. '너는 회복할 수 있어, 도와줄게, 같이 할게, 아픔을 이해해, 같이 아프자.' 이렇게 해주셔야 돼요. 절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비난하면 안 돼요. 물론 내 의견을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플 때 소금을 뿌리면 안 된다는 거죠. 상처가 아물기 전에 나의 언행을 통해서 상처를 빨리 수술하라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 마음의 상처는 굉장히 오래 남아요. 이게 뇌에도 영향을 끼쳐서 우리 뇌의 감정을 자극하는 '해마'라는 부위가 쪼글쪼글 해져요. 감각하고, 인지하고, 즐거워하는 일상의 기능들을 못해요. 해마가 움직이지 못해서 옆에서 그 사람을 건드려도 반응이 둔한 거예요. 실제 몸이 반응을 하는 거죠. 정신과 감정을 관장하는 뇌의 부분을 건드려요. 이럴 때 뇌의 활성화를 돕는 데 그림이 작용을 한다는 거죠.
두 번째 책을 언급하셨어요.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주제에 관한 더 다양한 그림을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꼭 다루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요?
스트레스 중에서도 이 스트레스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스트레스가 있어요. 바로 '입시 스트레스'예요. 시험, 면접처럼 아주 단적이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스트레스요. 이런 구체적인 '시험'이라는 것을 주제를 다루어보고 싶어요. 그림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꼭 건너야 하는 강을 자연스럽고 즐겁게 건너도록 도와줄 수 있었으면 해요. 사실 그 과정을 건너야 성장하는 것 아니겠어요? 가능해요. 수험생에게 맞는 음식에 대해서도 나오잖아요. 소화흡수를 돕고, 뇌 기능을 활성화하고요. 수험생에게 맞는 음식, 음악, 자연이 있는 것처럼 입시생들에게 긴장 완화를 주고, 약간의 집중력도 줄 수 있는 그림들을 선별해서 보여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그림을 통해 성적을 올릴 순 없어요. 책을 다 읽는 학생도 별로 없어요.(웃음) 그렇지만 곁에 두고 가까이 보면서 편안하게 느끼면 좋겠어요. 심리학적인 것도 들어갈 텐데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하는 내용으로 그림을 다룰까 하고요. 이것들을 통해 나의 간절함이 어떻게 성취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 알게 되셨으면 해요.
그림의 힘 : 최상의 리듬을 찾는 내 안의 새로운 변화김선현 저 | 8.0(에이트 포인트)
『그림의 힘』은 즐겁게 그림을 감상하며 누구나 그 힘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책에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 영역 - 일, 사람 관계, 돈, 시간, 나 자신 - 을 향상시키는 그림들이 실려 있다. 이 부문 최고 권위자이자 세계미술치료학회장이기도 한 저자는, 이 그림들을 보고 느끼다보면 일의 만족을 높이고, 사람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을 덜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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