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소설이 그렇지만 정아은 소설가의 작품은 특히 현실에 바탕을 둔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첫 작품 『모던 하트』는 헤드헌터로 활동하는 한 여성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을 그렸다. 실제 헤드헌터로 일한 소설가의 경혐이 녹아든 만큼 촘촘한 표현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정아은 작가는 그 작품으로 현대 여성의 일과 사랑 그리고 관계를 적당히 경쾌하면서도 적당히 진지하게 탐색해냈다.
『잠실동 사람들』 역시 지극히 현실적인 작품이다. 잠실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을 내세워 대한민국 현실을 밀도 있게 구성해냈다. 작품을 관통하는 두 가지 큰 축은 집과 교육이다. 집은 다른 말로 하면 부동산일 텐데, 부동산과 교육은 대한민국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제목의 ‘사람들’처럼 이 소설에는 정말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학부모, 어린이, 학교 선생님, 과외 교사, 어학원 상담원, 파견 도우미 등등 주연이라 할 수 있는 사람만 열 손가락을 넘긴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전혀 산만하지 않다. 등장인물 모두가 잠실이라는 공간사와 교육이라는 두 가지 끈에 매달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잠실은 서울 그 자체
2013년 『모던 하트』로 한겨레문학상을 받고『잠실동 사람들』은 두 번째 작품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상 받기 전에는 소설 쓴다고 당당하게 이야기 못하고, 주위 사람에게 미안해하며 책 보곤 했어요. 상을 받고 나서는 책 보고 글 쓰는 게 ‘일’이 되니 정말 좋더라고요. 음지에서 기생하다 양지로 나온 기분? 등단까지 6년 정도 걸렸어요. 그때 쌓였던 열등감이나 질투심으로 남의 작품을 봐도 제대로 못 봤는데, 이제는 그 작품과 순수하게 마주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 같아요. 그동안 실컷 읽고 실컷 썼죠.
요즘 소설이 청년 백수, 비정규직 등 비주류 이야기를 많이 다루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서 작가님의 작품에는 완벽한 주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주류에 근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첫 번째 작품에도, 두 번째 작품에도 중산층 이상의 삶이 주로 묘사가 되었는데요. 이렇게 쓰시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루저를 다룬 소설이 많죠. 그렇지 않은 문학이 없어서 내가 써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작가는 경험한 걸 많이 쓰게 되죠. 제가 헤드헌터의 삶을 경험했잖아요. 헤드헌터 자체가 주류는 아니지만, 헤드헌터가 쫓아다니는 사람은 주류 혹은 주류에 가까운 사람이 많았어요. 헤드헌터를 고용해서 직업을 찾을 정도면 고위직이 많거든요. 서민의 삶처럼 주류의 삶에도 애환이 있어요. 위선과 모순도 있지만 아름다운 점도 있고요. 그런 걸 찾아서 썼죠.
잠실이라는 공간은 첫 번째 작품에도 등장했고 『잠실동 사람들』에서는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옵니다. 잠실은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첫번째로 잠실은 제가 6년 동안 거주한 곳이고요. 두 번째로 잠실은 소설로 나타내기에 재미있는 색이 많은 곳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잠실은 두 번 상전벽해를 겪습니다. 원래는 두 개의 섬이었던 지역을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강남 개발하면서 육지로 만들고 5층짜리 주공 아파트를 지어요. 2000년대 들어서는 기존의 아파트를 싹 밀어버리고 고층아파트를 세웁니다. 잠실은 처음에는 부촌이 아니었어요. 대단지 4곳 입주가 겹쳐서 전세도 쌌고요. 초반엔 그랬지만 교통이 좋으니 전셋값이 계속 올랐죠. 그와 함께 거주하는 사람들과 거주양식도 많은 변화를 겪었고요. 물론 잠실지역이 모두 그랬던 건 아닙니다. 신축 고층아파트 단지들 건너편에는 재래시장이 있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해 있죠. 어떻게 보면 강남보다 더 강남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강남 같지 않은 곳이기도 하고요. 여러 층위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공간입니다. 또한 잠실은 서울 그 자체이기도 하죠.
잠실이 서울이라는 말씀이 인상적인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잠실이 대표성을 띈다고 생각하는 게, 아직까지 서울에 이렇게 고층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곳이 없어요. 제2롯데월드까지 들어오면서 스카이라인이 환상적으로 높아졌죠. 현재 타지역에서 재건축 예정인 오래된 아파트들은 대부분 30~50층짜리 청사진을 내놓고 있습니다. 분담금을 낮추려면 15층 이하로는 안 되거든요. 은마 아파트도 50층으로 올린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런 면에서 잠실은 서울의 현재이자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명이 주인공인 소설
『잠실동 사람들』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억지 질문이지만 이 작품에서 굳이 주인공을 꼽아 주신다면?
주인공이 따로 없어요. 등장인물 17명이 모두 주인공입니다.
그렇다면 잠실이라는 공간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고층아파트로 상징되는 해성 엄마 장유미겠죠.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인물은 원래 계획에 없었는데 쓰는 도중 자생적으로 생겨난 인물이에요. 어학원 상담원 지윤서가 대표적인 경우죠.
초등학교 교사 김미하의 자살 시도를 읽으며 최근 한 아파트에서 있었던 경비원 분신 사건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을 듯합니다. 실제로 상관 있었나요?
꼭 경비원 사건을 보고 쓴 건 아니에요. 실제로 교사 중에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예전처럼 편한 자리가 아니라서 선생님들이 굉장히 힘들어하셔요. 교권은 떨어졌고 아이들의 사고방식은 예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는데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학교문화는 그대로잖아요. 이런 걸 모두 교사가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이에요. 우리사회에 이런 일이 많죠. 경비원 사건도 그런 일들 중 하나고, 그게 합쳐져서 소설 속 장면으로 나왔어요.
전작에 이어 사교육, 학벌이 주요한 주제잖아요.
『모던 하트』가 계층이 정해진 성인들의 이야기라면『잠실동 사람들』은 그 이전, 그러니까 계층이 나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교육이 테마였는데, 쓰다 보니 공간의 역사가 더 재미있어졌어요. 현재 부촌이라 일컬어지는 강남이나 삼성동이 허허벌판이었던 시절을 따라가보면서 입맛을 쩍쩍 다셨죠. 이런 걸 소설에 녹여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이번 소설이 교육과 공간사라는 두 가지 축을 갖게 됐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엄마들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였어요.
제 자신, 어떤 때는 아이에게 온갖 사교육을 다 시키다가 어떤 때는 어릴 때는 놀아야지! 하면서 마음껏 놀게 해주는 일관성 없는 엄마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줏대가 없지? 고민하면서 둘러보니 제 주위에 있는 엄마들이 다 저와 비슷하더라고요. 우리 아이들이 가는 길의 끝에는 결국 ‘입시’라는 철벽이 있잖아요. 그 철벽이 건재하는 한, 대한민국의 어떤 부모도 소신 있게 아이를 키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났던 부모 중에서 ‘난 미치도록 공부만 시킬 거야’라고 생각하거나 ‘난 사교육 절대 안 시키고 실컷 놀게만 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전방위적인 사교육 마케팅의 덫에 걸려 아이들을 몰아붙이면서도 마음 한켠으론 죄책감을 갖고 가는 거죠. 그렇게 부모와 아이 모두가 불행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론 상위권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남은 인생이 완전히 보장되었던 구시대 패러다임은 신자유주의의 돌풍에 밀려 지나가버렸지만, 그럼에도 뚜렷한 대안이 안 보이니까 부모들이 과거의 패러다임에 매달려 기를 쓰고 사교육을 시키게 되는 거죠.
결말이 직설적이지 않고 상징적인데요. 어떤 의미를 담으셨나요.
지환은 동물과 식물을 좋아하는데, 그 엄마는 아이에게 다른 애들은 해리포터 원서로 보는데 넌 왜 달팽이나 보느냐며 답답해합니다. 지환이야말로 강하고 현명한 건데 어른이 그걸 모르는 거죠. 생명에 대한 친화력이 진정한 힘임을 자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겁니다. 과외 교사가 문책하듯 질문을 던질 때에도 아이는 끈질기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생각하고 답하죠. 저는 결말을 밝게 그렸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끔찍한 상태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멀쩡한 정신, 생명력, 선한 본성 또한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독자들이 어떻게 이 소설을 읽으면 좋을까요?
바람이라면 우리의 주거 문화, 아파트로 쏠려 있는 주거 문화를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되돌아봤으면 좋겠어요. 관광 서울, 디자인 서울이라고 말들을 하던데 도대체 뭘 보여주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동서남북, 어느 쪽을 봐도 아파트만 있는데, 관광객 유치가 가능할까요? 스위스 같은 나라는 살고 있는 집만 찍어도 그대로 그림이 되잖아요. 이대로 계속 가면 대한민국은 국토 전체가 모두 아파트로 덮일 겁니다. 우리의 편리주의적인 가치관 때문에 아파트로 상징되는 주거 문화가 생겼고, 마구마구 쌓아 올린 콘크리트가 문화, 교육, 가치관까지 잡아 먹고 있습니다. 교육도 결국 여기서 나온 문제죠. 내 옆집이 얼마에 팔렸는지를 바로 알 수 있고, 사는 곳을 돈으로 평가하며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게 아파트잖아요. 『잠실동 사람들』이 이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소설가 정아은의 과거 그리고 미래
바로 소설을 쓴 건 아니잖아요. 중간에 일도 했고, 번역도 했는데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장 많이 했던 것, 봤던 것, 들었던 것을 결국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소설을 쓰게 될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어릴 때부터 소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게 된 듯 합니다.
어릴 때부터 소설을 좋아한 것은 누군가 영향도 있었을 듯해요.
저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는데요. 제가 등단한 뒤에 아버지와 아주 가까웠던 지인분이 연락을 해오셨어요. 오랜 이야기 끝에 지나가듯 ‘너희 아버지도 소설을 쓰고 싶어하셨다’, 라고 말씀 하시더라고요. 아버지가 원래는 독문학을 하셨는데 나중에는 윤리학과 철학쪽으로 전공을 바꾸셔서 전 아버지가 소설에 관심이 있으셨는지 몰랐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성향이 이어진 게 아닌가 싶어요.
아직 많은 작품을 발표하신 건 아니지만, 감히 작가님에게 문학이란 무엇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저는 문학의 덕을 많이 보고 살아왔어요. 문학작품에는 못난 사람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걸 보는 게 좋았어요. 관계에서 오는 좌절과 상처로 고통 받을 때마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동병상련을 느꼈죠. 아, 나처럼 못난 인간이 또 있구나! 인간은 원래 못났구나! 덕분에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었어요. 제 개인적으로는 그렇고요. 제가 문학으로 하고 싶은 건 불씨나 이미지 하나를 심는 것이에요. 지금 문학이 누군가를 당장 행동하게 할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요. 우리는 매일매일을 살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보지 못하잖아요? 그걸 보여주는 게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아, 내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깨닫고 그걸 마음에 불씨로 담는다면, 다른 계기를 만났을 때 그 불씨가 변화로 타오르지 않겠어요?
전작에서는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았고 이번에는 주로 엄마의 모습을 그렸는데요. 일과 육아 사이에서 많은 여성이 힘들어하는데, 작가님은 어떤가요.
막 등단했을 때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싶은 욕심에 아이 키우는 게 짐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소설 쓰기는 외로운 작업이잖아요. 혼자 벽 보고 나를 다독이며 쓸쓸하게 쓰다 보면, 있지도 않은 환상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진짜 인생을 외롭고 지질하게 보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게 싫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유치원에서 돌아온 눈이 반짝반짝한 아이가 “엄마, 나 무릎꿈치가 아파” 라고 말 하면 외롭던 마음이 축축해지면서 아, 아이가 내게 짐이 되는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살게 하는 거구나! 생각하죠. 아이는 팔이 팔꿈치니까 무릎도 꿈치라고 생각해서 말한 건데요. 제가 공상의 세계에서 펼쳐나가는 복잡한 인간세계와는 정반대되는 순수한 세계이고, 어른이 못 보는 걸 보는 막강한 힘이죠. 요즘엔 아이 키우는 일상을 많이 긍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이를 현명하게 키울 수 있을까요.
부모가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야 할 텐데, 쉽지 않죠. 우리나라는 힘센 몇몇이 다 가져가는 구조잖아요. 일단 교육쪽을 보면, 시골 초등학교의 자잘한 사항들도 대부분 교육부에 결정 권한이 있죠. 그 시골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나 아이들의 부모를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고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학교에 대한 많은 것을 결정하는 겁니다. 교육자치라고 해서 교육감 제도가 도입됐지만 마지막 단계에서는 결국 교육부에서 결정을 번복하잖아요. 결국 교육분야도 중앙 거대 권력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정치도 마찬가지죠. 중앙, 특히 서울의 권력이 막강해요. 지방 국회의원 뽑을 때도 서울 정치권과의 연고를 가장 먼저 내세우잖아요. 자원은 또 어때요. 원자력 발전소는 모두 서울과 멀리 떨어진 지방에 있지만 그 사용량의 대부분은 서울에서 소비되잖아요. 기업도 대기업이 모든 분야를 독식하고 있고, 유통업도 거대 마트가 지방상권을 다 포식해버렸고, 이 이상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승자독식구조인데 이런 구조라면 결국엔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학벌사회도 인구 때문에라도 지금 체제를 지탱하지 못할 거고요. 엄청난 패러다임의 변화가 올 겁니다. 이런 흐름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할 거 같아요. 그런데 부모가 그런 흐름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버리는 게 사교육 마케팅이죠. 이런 데 안 먹히려면 부모가 많이 공부해야죠.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실지 알려주세요.
사회의 여러 문제를 따라가다 보면 늘 만나게 되는 벽이 있어요. 분단이죠. 『잠실동 사람들』을 쓰면서도 그랬어요. 해방 이후 우리 교육이 근본적으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잖아요. 왜 그랬을까, 주욱 따라가보니 그 끝에 분단이라는 거대한 난제가 버티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분단에 관한 소설을 구상하고 있어요. 그런데 한 켠으로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써보고 싶단 생각도 들어요. 그동안 사회 비판적인 소설을 연달아 냈잖아요. 그래서 두 쪽 다 초안을 잡았는데, 아직 어느 한 쪽이 확 튀어나오지 않았어요. 한쪽이 확실하게 튀어나오길 기다리면서 양쪽 다 조금씩 써나가고 있습니다.
잠실동 사람들 : 정아은 장편소설정아은 저 | 한겨레출판
전작이 서른일곱 헤드헌터의 일상을 통해 학벌이 계급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그렸다면, 신작 잠실동 사람들은 계급을 상승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교육’을 좇는 부모들과 ‘교육’으로 먹고사는 학교 선생님, 원어민 강사, 과외 교사, 학습지 교사, 어학원 상담원 들이 벌이는 분투기, 더불어 불공정한 출발선이 시작되는 공간사까지 아우르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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