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오는 일을 할 뿐”이라는 대답이 묵직하고 산뜻하게 돌아왔다. 양평이형은 정말로 ‘계획이 없었다.’ 한국에서 록을 하며 산지 20년인데,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어냐는 질문에 “여전히 계획하지 않는 것이 저의 계획”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간결하고 진정성 있는 답이었다. 그 답에 매료돼, 어디서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면 그런 답을 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여흥 수준”으로 시작해 강한 인상을 남겼던 밴드 ‘곱창전골’부터 ‘장기하와 얼굴들’로 활동을 하기까지, 하세가와 요헤이(양평이형)의 한국 록 사랑은 그대로 그의 삶이 되었다. 신중현, 산울림을 듣고 충격을 받아 무작정 한국에 왔고, 밤새 술을 마셨어도 눈을 뜨면 청계천으로 가 오래된 음반들을 뒤졌다. 숨겨진 음반을 찾아냈을 때는 전율했다. 김추자, 펄시스터즈, 장현부터 다섯손가락과 팝송, 키보이스, 히식스, 김태곤 등 다 나열하기도 어려울 목록들이 그렇게 쌓인 음반들이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묵묵히 하다 보니 자신의 영웅을 만나고, 함께 음악을 하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양평이형의 록 스피릿이랄까,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어딘지 독특하지만 참 매력이 있었다.
불안했으리라. 이 길이 맞는지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멀리 가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지름길이었다는 생각을 해요. 때문에 그때의 나에게도 지금 그대로 하면 된다, 너는 이대로 하면 언젠가 지금 음악을 듣고 있는 그 형님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죠.”
이것이 그의 진심이다. 앞으로도 이대로 살고 싶은 굵직한 이유다.
양평이형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 그러나 그의 역사는 꽤 깊었다. 『고고! 대한 록 탐방기』는 그의 역사에 대한 증명이자, 그가 안내하는 한국 록 이야기다. 음악을 사랑한, 누구보다 삶을 사랑한, 양평이형의 ‘한국 록 탐방기’, 그가 들려주는 김양평의 흥미진진 “인생사 중간보고”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하세가와 요헤이가 양평이형이 되기까지
먼저 일본에서 책이 출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에도 책을 소개하게 되셨는데요.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서문에서 ‘인생사 중간보고’라고 표현하기도 하셨어요.
이 책을 내고 나서 잊고 있던 사실을 생각하게 됐어요. 일본판을 다시 봤는데 소울스케이프의 마지막 한 마디가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이런 책이 한국에도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딱 보니까 뭔가 이어갔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 책은 이런 운명이었나 보다.’라는 생각을 좀 했어요. 일본에서 냈을 때 했던 마지막 한 마디가 한국판에 대한 예고가 됐었다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원래 책으로 내려는 기획은 아니었던 것 같던데요?
그렇죠. 처음에는 오오이시 씨가 다른 책 때문에 오셨던 거예요. 한국 인디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아는 분을 통해서 연락이 왔었어요. 그때 오오이시 씨와 부인을 만났어요. 부인이 사진 찍으신 분이고요. 거의 가족들이 만든 책 같은 느낌인데요.(웃음) 그렇게 해서 인터뷰, 촬영을 마치고 술 마시러 갔는데요. 술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더니 하는 얘기가 ‘너무 재미있다, 이런 얘기를 담은 책이 나오면 좋을 것 같다’고 했어요. 사실 저는 그냥 있던 일이고 아마 재미없을 거라고 했어요. 책 얘기도 그냥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인 줄 알았었거든요. ‘나중에 하죠.’이러면서요. 그런데 몇 달 있다가 구체적인 안이 왔어요. 그때부터 책을 내는구나, 생각했었죠.
오오이시 씨도 음악에 대한 지식이 굉장히 많으신 것 같더라고요.
이 분은 일단 음악을 좋아하고요. 아시아권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요. 영미권 음악은 당연한 거지만 제3세계도 그렇고, 브라질 이런 쪽도 좋아하세요. 그런 의미에서도 신뢰가 갔던 부분이 있어요.
각주를 보니 ‘김양평’이라고 적어두셨던데, ‘하세가와 요헤이’와 ‘양평이형’ 둘 중 어느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으세요? 사실 ‘하세가와’라는 이름을 한국에서는 많이 모르기도 한데요.
만약 편하게 부르는 게 ‘양평이형’이라면 저는 둘 다 상관없어요. 신경 쓰고 그러는 것보다 편하게 부르는 게 제일 좋죠.
‘김양평’에서 ‘김’은 어디에서 온 거죠?
김창완 선생님이요. ‘하세가와’를 한자로 쓰면 ‘長谷川’이잖아요. 그래서 처음에 ‘장양평’이냐, ‘하양평’이냐 이런 얘기를 했었어요. 그때 김창완 선생님이 “당연히 ‘김’이지.” 하셔서 ‘김양평’이 된 거죠. 그런데 지금은 ‘김양평’이라고 쓰는 것보다 ‘양평이형’이라고 훨씬 많이 아시니까요. ‘김’이고 ‘이’고 간에 ‘양평이형’이 되었으니까요(웃음). 그러면 그렇게 해야죠.
‘김양평’이라니, 산울림에 대한 애착이 느껴집니다. 또 산울림이 형제 밴드이기도 하니까요. 산울림 밴드에 참여한 것이 스스로에게 무척 의미 있는 기간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긴 하죠. 책에도 썼지만 그것을 작정하거나 예상하거나 그렇게 해서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죠. 이만큼도 예상한 것이 아니었어요. 뭐라고 할 수 없는데, 저로서는 참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항상 동경했었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지냈던 입장에서 그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된 그 순간의 전율이 읽는 사람에게도 느껴졌어요.
처음에는 감이 안 왔어요. ‘내가 할 수 있을까?’이런 것보다 ‘왜 나한테?’라는 생각, 이게 어떤 건지 아예 감을 못 잡았어요. 이건 무슨 의미일까? 한참 고민했어요. 과연 내가 해도 될까, 이러면서 말이에요.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라고 물어서 ‘당연히 하죠.’ 라고 답했고, 그렇게 하게 됐어요. 선곡표를 받았을 때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와! 이 노래들을 하는 거야? 이 노래를 연주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죠.
막상 산울림 밴드로 참여하실 때는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오는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선배라고 하기엔 좀 더 나이가 많으시고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신경을 많이 썼죠. 선생님이시기도 하고요. 편하게 뭔가를 말할 수 있고 그런 건 아니었고요. 다만 여기서 나를 보여주자, 나를 보여주기 위한 자리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김창완 선생님 손이 두 개뿐이니까 세 번째, 네 번째 손이 되는 정도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시작했었죠.
멀리 가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지름길이었다
한솥밥 먹는 한국 문화에 위화감이 없었다고도 하고, ‘계획을 세우면 계획에 지기 쉽다’(32쪽)고도 하신 것을 보면 삶에 대한 태도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산울림 밴드에 참여하시면서 가졌던 생각도 같은 맥락인 것 같고요. 예민하지 않은 편인가요?
그때는 예민했었죠. 저는 사실 예민한 사람이 맞는데요. 지금에 와서 그때 나를 생각하면 어렸구나, 하고 생각하게 돼요. 자존심으로도 부딪치고, 싸우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친구든 여자 친구든 말이에요. 지금은 이상하게 상대가 왜 화를 내는지, 뭐가 불만인지 보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른이 됐구나, 생각하게 돼요. 아직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어요. 상대가 왜 그렇게 느끼는지 내가 알고 있다는 걸 그대로 말해버리는 거예요. 너는 이래서 화가 났구나,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당연히 더 화가 나잖아요. 그걸 참고 있어야 하는데 그걸 아직까지(웃음). 보면 왜 화가 나거나 싸우는지 하는 걸 알 것 같아요. 아직 어려서 불타고 있구나, 이런 생각도 해요. 자신이 없구나, 라는 생각도 하고요. 희한하게 언젠가부터 자신이 생기고 인생을 즐겁게 살자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진짜 즐겁게 살자, 이런 말하기 정말 싫지만요.
왜 싫으세요?
그걸 굳이 말을 해야 하나? 싶어져요. 괴롭게 살기 위해 사는 거 아니잖아요. 당연히 즐겁게 살고 싶어서 사는 거니까요. 계획을 세우는 것도 그렇고, 이런 말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을 하자, 무엇을 합시다, 이런 건 적어도 저에게는 좀 안 맞아요. 여러 가지 면에서요. 해야 할 때는 당연히 해야죠. 그런데 너무 강박감을 주거나 받는 건 별로 안 좋아요.
결국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가 삶으로 꾸리게 되셨잖아요. 내공도 대단하신 것 같고요. 계획도, 예상도 못한 일들이었다고 하셨고, 오히려 목표했다면 이르지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하셨는데 다시 어렸을 때로 돌아가도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내공이 대단하다고 하셨지만 내공이 정말 대단하면 지금 아내가 있겠죠.(웃음) 저도 아는 거예요. 그런 역량이 없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포기해야 된다는 생각을 해요. 한 가지를 추구했다는 건 정말 좋은 이야기지만 다른 것을 버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까지 욕심을 냈다면 기둥이 흔들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만큼밖에 역량이 없다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특히 젊었을 때 그랬어요.
한국에 감사할 일이 있다면 제가 이곳에 와서 정말 어른이 된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밴드가 있는 런던, 뉴욕, 혹은 리버풀에 있는 비틀즈를 생각하면 그곳은 너무나 높은 산이고 너무나 높은 별들이에요. 당연히 그곳까지 갈 수 없고, 인공위성을 탈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했을 때, 내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도 좋지만요, 조금 창피하더라도 자기의 산을 쌓아서 보여줄 입장이 되는 게 조금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좋게 말하면 선택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포기한 거죠. 좋은 뜻의 포기를 한 거예요. 그러다보니 희한하게 그쪽에서 다가와요. 런던에 정말 좋아하는 밴드가 있었는데 그 분과 만나게 되고, 얼마 전에 런던에 갔을 때는 같이 밥도 먹고, 음악에 대해서도 가족처럼 얘기를 하게 됐어요. 뉴욕에 있는 밴드와 얼마 전에 함께 공연도 했고요. 과연 그것을 목표로 런던이나 뉴욕에 무작정 가서 음악 활동을 했다면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오히려 지금 하게 됐어요. 멀리 가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지름길이었다는 생각을 해요. 때문에 그때의 나에게도 지금 그대로 하면 된다, 너는 이대로 하면 언젠가 지금 CD를 듣고 있는 그 형님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죠.
참 부러운 삶이에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가던 방향대로 가다 보니 모두 그곳에서 만난 거잖아요.
그렇죠. 거기 있는 걸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서 거기 갈 때까지 너무나 괴로웠죠.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서도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며, 계단 중간에는 무엇이 있을 것이며, 하는 것들이 도무지 예상이 안 되는 거예요. 이 계단이 맞는지도 알 수 없고, 산꼭대기가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냥 계단을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거였죠. 하지만 어느 순간 지나온 곳을 돌아보니 좋은 경치도 보이고, 이렇게 높이 올라 왔구나, 느끼게 됐어요. 아래를 보며 올라가는 거예요. 그게 계획 없는 삶이죠. 계획 있는 사람들은 위만 보며 올라가는 거잖아요. 어느 정도 가면 무엇이 보일 것이고, 거기에 가면 밥을 먹을 수 있을 거고, 쉴 수 있을 거고, 할 텐데요. 저는 정말 아래만 보고 넘어지지 않게 올라가는 거였어요.
위만 보고 오르다가 계획했던 것이 나오지 않으면 더 지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럴 수도 있죠. 위를 보면 기대를 하니까요. 그런데 밑에만 보고 올라가니까 갑자기 이런 곳이 있었네? 쉬었다 가자, 할 수도 있는 거고. 이쪽에 지름길이구나, 이럴 수도 있는 거죠.
한국 인디밴드만의 개성
1995년 처음 한국을 찾았다고 하셨는데요. 당시는 경제 호황기였고 지금과도 분위기가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책에서도 변화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걸 느낄 수 있어요. 무엇이 가장 아쉬운가요? 또 아직 변하지 않은 소중한 것이 있다면요?
시대 흐름 따라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지금 홍대를 보고 그때가 더 좋았네, 이런 식으로 아저씨처럼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때 홍대도 좋았죠. 하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아요. 다만 정보가 많아져서 여러 가지 공부나 노력 없이 조금 더 쉽게 하는 것 같긴 해요. 쉽게 하는 걸 좋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저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거든요. 쉽게 하면 쉽게 포기하게 되기도 해요. 96, 97년 인디음악을 들었을 때 그런 노력이 보였어요. 정보가 없기 때문에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정말로 자신의 작품에 자기를 표현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나온 음반들이 정말 개성 있었어요. 지금은 세계 각국의 인디밴드 중에 한국 인디밴드, 이렇게 됐지만 그때는 정말로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음악이었어요. 왜 이렇게 음악이 나왔지? 하게 만드는 그런 한국 인디밴드만의 개성이 강하게 있었어요.
그런 개성이 아마 한국 록에 매료되었던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정보가 아니라 예상해서 만들었던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이렇지 않을까?’라는 부분. 그것이 사실 창작이잖아요. 정보를 얻어서 하는 건 창작이 아니잖아요. 이렇지 않을까, 그래야하지 않을까, 하는 부분에서 창작이 일어난 것 같아요. 인디 문화뿐 아니라 그 당시 그 특이한 감성이 곳곳에 있었어요. 책에는 안 썼는데 ‘편의방’이라는 것도 그렇고요. 편의방이라는 게 있었는데요. 당시에 12시 이후에는 술을 팔면 안 됐어요. 불법이었죠. 술을 편의점에서 살 수는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넓은 공간을 얻어서 구석에 편의점을 만들었어요. 나머지 공간에 의자와 탁자를 놓고요. 편의점에서 술을 사서 그 옆 탁자에서 먹는 거예요. 그러면 법에 걸리지 않는다, 이런 거죠. 그런 게 상상력이잖아요. 정보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렇지 않을 경우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하면 괜찮지 않나? 하는 짐작으로 말이에요.
아쉬운 것으로 ‘우짜집’을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요.
아, 우짜집 좋아요. 문을 닫은 이유는 모르지만 노부부가 운영하셨었는데, 새벽까지 영업하니까 아무래도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해요. 거기 참 맛있었어요. 또 처음에 한국 왔을 때 깜짝 놀란 게 있었는데요. 여자분들 입술이 다 시커멓던 거였어요. 어디에도 없는 화장이었어요. 그게 또 인상적이었죠. 그것도 한국만의 창작이 있었겠죠. 압구정 가면 오렌지족이 있었고 그랬었으니까요.
한국을‘펑크가 태어날 만한 나라’(108쪽)이라고 하셨어요. 어떤 면에서 그렇게 느끼셨나요?
그런 창작 때문에도 그럴 수 있고요. 사람 안에 뭔가 폭발할 만한 느낌이 있었어요. 억압이라고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나라 시스템이나 사람, 인간관계의 어려움 같은 건 어느 나라나 있겠지만 특히 한국은 그런 느낌이 강했어요. 사실 12시 이후에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고요. 듣기로 그 전에는 나가면 안 된다는 법도 있었다고 하던데 말이죠. 억압이 생길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펑크가 태어날만한 나라네.’라고 생각했었던 거죠. 위에서 안 된다고 하면 밑에서는 그러면 하겠다, 하는 반발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반발심이 또 펑크니까요.
일본은 뭐든 해도 됐었죠. 밴드만 해도 60년대, 90년대 이렇게 밴드 붐이 있었어요. 보통 밴드면 부모님들이 반대하잖아요. 돈도 안 되고, 하지 마라, 하는 게 보통인데요. 90년쯤에 일본에 아주 큰 밴드 붐이 있었는데 그게 가능했던 건 그 세대의 부모 세대가 1차 밴드 붐 세대였기 때문이었어요. 자식이 기타를 치고 밴드를 하겠다고 해도 해라, 나도 했었다고 허락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거죠. 한국은 그렇지 않잖아요. 밴드는 돈도 안 되고, 군대 다녀오면 취직 생각하고, 돈 벌어서 살아라, 이런 건데요. 이런 것들도 여러 가지 펑크가 태어날만한 나라의 이유기도 하죠. 밴드 한다는 자체가 반발심을 만들어주는 그런 게 있으니까요.
최근 ‘응답하라’시리즈 나 무한도전의 ‘토토가’처럼 1990년대를 재조명하는 문화적 분위기가 많이 있잖아요. 양평이형의 『고고! 대한 록 탐방기』 역시 시기가 비슷하게 겹쳐요.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간격이 조금 있습니다. 록에 대한 낮은 관심이 아쉽기도 하실 것 같아요.
록은 지금 어느 나라를 가도 메인 스트림이 아니죠. 그걸 인정하고 가야 하는 거니까요. 록이 메인 스트림이었던 60년대 중후반은 다 사라진 거고요. 70년대 말까지 펑크가 있었고 그때만 해도 중심이었지만, 그곳에 산업이 들어가고, 빌보드 차트나 MTV가 들어가면서 록이 밀려나게 되는 셈이고요. 전통적인 록이 그때부터 사라지게 된 거니까요. 그런 시대 흐름을 봐서도 록이 지금 시대에 대세는 아니 게 확실하고, 그걸 알면서 하는 거예요. 이걸로 많을 걸 보여주고 싶다거나 메인 스트림으로 다시 어떻게 하겠다, 이런 게 아니라 이런 세계도 있다는 걸 확실히 남겨야 하지 않느냐는 거였어요. 저는 90년대에 한국에 있었지만 당연히 모든 면에서 얘기를 더 잘할 수 있는 건 한국 분들이에요.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한 게 이 책이었거든요. 저는 직접 기타를 치고 같이 어울려서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평론가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고요. 구멍이 있었던 거죠. 그 구멍을 메울만한 책을 낸다는 그런 차원이었어요.
앞서 잠깐 언급하셨지만 책 후반부에 실린 소울스케이프와의 인터뷰에서 디스크 가이드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왔었는데요. 이 책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신건가요?
한국에서 내는 것보다 일본에서 낸다는 것을 먼저 생각했었으니까요. 한국에 어떻게 알린다기보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의 록이 뭔가, 했을 때 이런 일들이 있었고 이런 움직임이 있었다, 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지금 K-ROCK이라고 하면 K-POP 안에 있는 K-ROCK을 먼저 접하게 되고, 흥미 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뒤지면 들을 음악을 찾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인터넷에도 없는 정보들,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에 관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을 때 가이드가 될 수 있을만한 책이면 좋겠다고 해서 만든 게 저희 책이라고 보시면 돼요. 출판사 쪽에서도 아주 많이 팔리지 않아도 한국 록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 꼭 사게 되는 책을 만들게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유튜브에 들어가면 원하는 음악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어떤 음악을 검색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정보는 다시 필요하니까요.
한국 친구들이나 한국 분들보다 일본인이 봤을 때 한국 록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앞에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부분이 많았고 이런 면이 있었다는 것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어떻게 보면 저는 외부 사람이 아니잖아요. 한국에서 록을 하는 사람으로서 일본에서 조금만 알고 오해가 될 만한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 이런 것이다.’ 라고 제시하기 위해 낸 것도 있어요. 오해하지 말라는 뜻도 있었거든요. 다른 사람이 잘 모른다고 해서 조금만 알아도 적당히 쓰는 사람 많거든요. 그런 것들이 싫었어요. 그것이야말로 한국에서 밴드를 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죠. 내가 이렇게 해왔고, 내가 직접 봤는데 네가 뭐라고 말할 수 있냐, 하는 책이라고 해야 할까요. 외부사람들, 어떤 평론가가 이러이러하다고 쓴 것에 ‘아니다, 너는 직접 보지 않고서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라고 말할 권리를 얻을 수 있는 명함이자 증명서 같은 게 이 책이라고 생각해요.
신중현과 엽전들 1집!
어려운 질문이겠지만,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있다면요?
어려워요. 그건 진짜 어렵네요.
정말 많이 들었던 앨범은요?
그래도 고르자면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이 아닐까요? 처음에 제일 충격을 준 음반이었으니까요. 제가 지금까지 한국에 와서 지냈던 20년의 입구라고 해야 하나, 뿌리라고 해야 할까요? 처음 한국에 이런 록이 있더라 해서 카세트 테이프를 재생했을 때 나온 노래가 ‘미인’이었어요. 이게 뭐지? 라고 생각했던 게 이 노래였어요. 그 카세트 테이프 A면 첫 곡이 ‘미인’이었고 B면 첫 곡이 산울림의 ‘아니 벌써’였어요. 그것도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가장 진한 정수가 있었던 부분이에요.
첫 밴드 ‘곱창전골’이야기가 궁금해요. 이름은 어떻게 지으신 거예요?
제가 리더가 아니었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요. 당연히 한국은 불고기나 갈비가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어요. 곱창전골의 리더가 되는 그 사람이 한국에서 갈비를 시켰는데 그곳이 곱창전골이 맛있는 곳이었나 봐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빨간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고 있더래요. 물어봤더니 저것은 곱창전골이라고 했어요. 아, 다들 이렇게 먹는 것을 보니 한국인들이 곱창전골을 그렇게 좋아하는구나 했던 거죠. 일본에서도 갈비, 김치, 비빔밥 이런 것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곱창전골이라는 건 모르는 거였어요. 낯설었죠. 이걸 이름으로 지으면 좋겠다고 해서 정했던 것 같아요.
곱창전골의 한국 공연을 둘러싼 극적인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좀 더 해주세요.
저희도 조심성이 없었던 게 관광비자로 그냥 왔어요. 공연장 관계자도 편하게 생각했던 거고요. 한국 록을 한국말로 노래하고, 아무리 일본인이라고 해도 아마추어고, 뭐가 문제냐 했던 거예요. 매상이 생겨봤자 얼마 되지 않았고요. 전단지 같은 걸 붙여서 압구정에서 공연한다는 사실을 알렸죠. 그런데 공연 리허설 직전에 전화가 온 거예요. 일본 밴드가 공연을 하느냐, 안 된다, 만일 하는 경우에는 모두 추방시키고 가게 영업 정지를 시키겠다, 했던 거예요. 일본 아마추어가 우리말로 노래하는데 뭐가 문제냐? 한국 밴드곡을 커버하는데 왜 문제냐? 물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허락을 받지 않은 이상 법적으로 그렇게 된다, 통보를 받았죠. 가게 주인이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미안하게 됐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희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실망하지 말자고 생각했었어요.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가게 점원들 앞에서 연주나 하자, 고 리허설을 했죠. 리허설을 들은 가게 주인이 연주가 좋다며 꼭 보여줘야겠다면서 고민을 하더라고요. 결국 영업을 안 하고, 불을 끈 상태에서 공개 리허설 형태로 공연을 한 거예요. 돈도 안 받고요, 부를 사람만 부르고요. 그렇게 했죠.
일본에서도 그 일이 많이 알려졌다면서요?
그 일이 있고 도쿄에 있는 한인 타운에 가서 식사하러 갔는데, 거기 주인이 괜찮냐고, 너무 고생하셨다고, ‘정말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면서요?’ 하는 거예요. 왜냐고 물었더니 온갖 신문에 소식이 나왔다는 거예요. 일본 밴드가 한국에 가서 공연 하면 안 된다 하는 일이 있었다고요. 저희는 그때 알게 됐어요. 오히려 그게 선전이 됐죠. 이런 밴드가 있었다고요.
곱창전골의 가장 반응이 좋았던 커버곡은 무엇이었나요?
유명한 노래들이죠. ‘미인’이나 ‘아니 벌써’나 ‘커피 한잔’같은 곡들이요. ‘님은 먼곳에’이런 노래들 연주하면 사람들이 다 좋아했어요.
여러 밴드에서 수많은 공연을 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나요? 책에서 언급한 SBS 기쁜우리젊은날 공개방송 일화가 아찔하지만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요.
그날은 정말 망한 날이죠. 놀이 기구를 타고 나서 정말 힘들었어요.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보였는데 옆으로 도는 놀이기구, 그게 엄청 났어요. 처음에는 힘으로 이기자고 해서 버텼는데 어느 순간부터 끈이 완전히 끊어진 거예요. 너무 기분이 안 좋아지고 계속 어지러운 거예요. 김C는 왜 그러냐고 하고요. 기타줄까지 끊어져서 나비효과라는 친구한테 그것도 너무 미안한데 기타를 빌려서 연주했는데, 기타도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못했죠. 너무 힘들었어요.
계획하지 않는 것이 계획
책에 수록된 사진들이 재미있어요. 주로 거리에서 찍으셨던데요. 재미있는 일이 많았을 것 같아요. 하루에 다 촬영 하신 거죠?
그래서 다 같은 옷을 입고 찍었어요.(웃음) 오오이시 씨가 얼마 못 있어서 사진은 하루 만에 다 끝냈죠. 인터뷰도 거의 이틀 안에 다 끝냈을 거예요. 굉장히 빡빡한 일정이었어요. 청계천에서 사진 찍고 싶다고 해서 갔는데 오랜만이었죠. 놀랍게도 그때 발견한 게 ‘Runaway’(배철수의 밴드 ‘활주로(Runway)의 오타로 제작된 초기 앨범)’였어요. 뭐가 있었구나 했어요. 정말로 오랜만에 갔는데 ‘Runaway’가 있는 거예요. 진짜 오랫동안 찾았던 건데 말이에요. 가격을 물으니까 만 원만 달라고 하더라고요. 거기 있는 사람은 ‘Runaway’를 모르니까요. 그래서 오오이시 씨에게 얘기했죠. 10년 동안 찾았던 음반을 지금 발견했다고요. 그래서 ‘돌레코드’봉투 들고 찍은 사진이 있는 거예요. 그 안에 ‘Runaway’가 있어요.
“전날에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어도 무조건 아침 9시 전에는 벌떡 일어나 청계천으로 갔습니다”(126쪽)라고 하셨는데, 참 대단한 열정이었던 것 같아요. 아직도 구하지 못한 음반이 있을까요?
돈을 많이 주면 살 수는 있어요. ‘Runaway’도 만 원에 설마 구할 수 있을 줄이야,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만요. 가장 흥분했었던 순간이 뭐냐면 ‘GOLDEN GRAPES’음반인데요. 이걸 만 원 정도에 샀어요. 앨범 이름 밑에 ‘즐거운 GOGO 파티’라고 쓰여 있는데 가게 주인 분이 이걸 뽕짝 코너에 두신 거예요. 그쪽에 낡은 판이 쫙 있었거든요. 여기에도 뭔가 있겠지 해서 봤는데 이게 딱 나오는 거예요. 가격을 물으니까 주인이 ‘글쎄, 이건 신중현이니까 비싸’해서 또 비싸다는 말이 나오는구나, 했는데 ‘만 원?’ 하는 거예요. 바로 샀죠.
지금은 비싸게 주고 구해야 하는 음반들이 많아요. 그게 너무 안 좋아요. 음반이라는 게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어야 좋은 건데 말이에요. 오천 원, 만 원 주고 산 사람으로서 그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천 원만 주고 사겠다고 하면 한 장 더 가져가 이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비싸졌어요.
리스너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강하다고 하셨지만 '사생결단 OST'도 하셨고 여러 가지 다른 역할을 할 기회가 앞으로 점점 많아질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여전히 저는 오는 일을 하는 것뿐이고, 뭘 하겠다고 하는 계획을 하지 않는 것이 제 계획이기 때문에요. 오는 일을 그냥 하나씩 하고 가는 거죠. 사적으로는 여행을 좀 더 하고 싶어요. 아시아 쪽을 많이 보고 싶어요. 인도네시아나 태국이나 이런 곳을 간 적이 없어서 가보고 싶고요. 그런 것 외에 나머지는 별로 다른 생각 없어요. 지금처럼 살면 될 것 같아요. 저는 갖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요. 결혼은 어떤 느낌일까 조금 궁금하기도 해요.
이제는 좀 여유가 생기셨나봐요.
그런 것 같아요. 남의 인생까지 책임질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죠. 자신이 조금 생긴 것 같아요. 서로 책임질 수 있는 그런 게, 나눌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금은 해요. 그런 경험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른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고요. 그런데 결혼을 한 사람들은 다 하지 말라고 해요.(웃음)
고고! 대한 록 탐방기하세가와 요헤이(a.k.a.양평이형) 저/오오이시 하지메 편/신혜정 역
이 책은 하세가와 요헤이 개인의 역사이자, 외국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1970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 록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활동하며 한국 록에 대한 애정을 지켜온 그의 20년, 200여 매에 달하는 희귀한 한국 록 레코드와 양평이형의 논평, 그리고 장기하(장기하와 얼굴들), 김명길(데블스), 신윤철(서울전자음악단) 등 한국 음악계의 개척자들과 나누는 유쾌한 대담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신중현, 산울림부터 장기하와 얼굴들까지. 심장을 뜨겁게 달구는 록의 향연이 이 책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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