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도 파스텔을 선물 받고 싶었던 소년은 후에 파스텔로 달을 그린다. 어느 곳을 가나 달이 따라왔고 환한 달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세상 만물이 달을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꽃씨가 그러했고, 어머니의 둥글고 두툼한 허리가 그러했다. 당신의 이마, 눈썹, 입술, 모두 달을 닮았다. 달을 잊고 여행을 떠나도 그곳에 전에 본 것과 똑같은 달이 둥실 떠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의 그림은 프라하의 달, 타지마할의 달, 남프랑스에서 만난 라벤더를 담은 보라의 달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는 매일 새로운 달을 그리고, 달항아리를 그리고, 달기타, 달포장마차, 달까지 가는 택시를 그린다.
달 시인 권대웅은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것이 “하나의 긴 달빛 바늘에 꿰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지금 이 자리를 뛰어 넘는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담은 사람의 넉넉함과 겸허함이 느껴졌다. 그가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고 말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달을 보지 않는 사람들, 달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달을 그리워한다. 우리는 달빛 아래 만들어졌고, 달에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달은 매일 밤 사람들에게 나를 퍼다 쓰라고 말한다. 그 빛의 소리를 들어라. 달을 베끼고 창조하라. 그렇게 달은 사람들에게 자꾸 쓰여야 한다. 그래야 환해지니까, 마음이 따뜻해지고 착해지니까. 어둠이 무섭지 않아지니까. 달빛처럼 끊임없이 나누어주게 되니까.”(33쪽)
달을 그린 지 3년. 길지 않은 시간동안 달은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것을 느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시인은 그가 느낀 달의 따뜻한 기운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달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달시를 쓰고 달을 그린다. 몇 차례 시화전을 했고, 판매 수익금을 ‘착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었다. 달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때 이 세상에 사랑과 여유가 생긴다고 믿는 시인. 그가 본 달과 오늘 밤 떠오를 달이 얼마나 닮아 있는지 궁금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달을 닮아 있는 것 같아
얼마 전 시화전을 하셨죠?
합정 빨간책방에서 시화전을 했었는데 사람들이 정말 좋았다고 한 번 더 하자고 했어요. 못 온 사람들이 또 하자고도 했고요. 때마침 빨간 책방 전시가 끝난 후 논현 북티크에서 전시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릴레이로 ‘동네 서점 살리기’차원에서 이런 문화 공간을 살리는 그런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홀몸 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 돕기를 하게 된 거죠. 동네 서점에서 전시한 시화 액자들이 팔리면 전액을 환원하는 것으로 기획을 했어요. 이어 상암 북바이북에서도 하고 있고요, 모두 세 군데에서 하고 있죠. 이후에 지방으로 갈까 해요. 전국 순회를 할 예정이에요. 공연과 시화전을 같이 하려고 합니다. 시화전에 온 사람들에게 공연도 볼 수 있게 하려고요.
처음에는 게스트 분들에게 돈을 드렸어요. 뒤풀이는 출판사에서 지원을 하고요. 고마운 게 두 번째는 게스트 분들이 전부 돈을 안 받고 나왔어요. 뒤풀이는 회비들을 내서 충당하고요. 기획하기를 ‘밥’이니까 좀 나눠주자 해서 예담에서 책을 협찬 받았고요, 마음의숲 출판사에서도 협찬을 받았고, 노트까지 해서 오신 분들이 네 권 씩 들고 가실 수 있게 했어요. 오는 사람들도 선물들을 가져왔어요. 어떤 분은 허니버터칩을 세 박스 가져오시고요.(웃음) 제가 여행하면서 구한 애장품들도 내놨죠. 남프랑스에서 산 라벤더 비누, 인도 여행하면서 샀던 청동램프, 영국 귀족이 쓰던 술병, 이런 것들이요. 아끼면서 가지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소장해봐야 소용이 없더라고요. 나만 보고 있다가 이번에 내놓자고 생각했죠. 덕분에 오신 분들은 책과 선물을 가져가실 수 있었어요. 모두들 좋았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춘천에서도 하자고 해서 계속 돌면서 하게 될 것 같아요.
게스트 중에는 기황후 장영철 작가도 있고요, 샐러리맨 초한지 만든 유인식 감독도 있고 그래요. 이런 분들과 함께 동네 서점 살리기와 여러 가지 고민들을 해서 달 시화전을 함께 전국 순회 공연으로 기획하고 있어요.
시화전 사진 첨부 : 권대웅 시인 제공
시화전 수익금을 홀몸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 소외계층에 기부하시는 활동들이 약하고 어려운, ‘착해서 가난한’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 또 시인의 달에 대한 관심과도 닿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달동네에 살았어요. 청년 시절에도 그랬고요. 청년 시절 산동네에 살 때 옆방으로 이사 온 친구가 김연수 작가예요. 김연수 작가 대학교 1학년 때 ‘여기 너무 좋다, 나도 이사 올래’해서 그곳에 와서 시, 소설로 데뷔했어요. 김중혁 작가도 놀러왔고, 문태준 시인도 놀러왔고요. 거의 가족 같은 친구들이었죠. 산동네에서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지금 사는 곳도 산동네인데 그곳도 폐지 줍는 할머니들 너무 많아요. 어렸을 때 살던 기억도 나고 그래서 이제는 도와야 할 나이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또 제가 달에 대해 몇 가지 신기한 체험을 했어요. 여행을 하면서도 그랬고요. 한 4년 전에 달이 나에게 말을 건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영국 갔을 때예요. 오래된 영국의 타자기가 있었는데 달빛이 거기에 들어오고 있었어요. 타자기를 쳤는데 활자가 달빛으로 날아가면서 나한테 스쳐지나가는 경험을 했어요. 새벽달이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고 얘기를 하지만,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러다 2년 정도 후였는데 마당에 나가 담배를 피우는데 정면에 달이 떴어요. 철쭉이 환하게 피어 있었는데 그 아래서 달을 보다가 갑자기 울었어요. 달이 얘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분명히 달의 에너지가 있다고 느꼈어요. 태양은 열매를 주고, 풍성함을 나눠주죠. 하지만 가을이면 다시 거둬들이잖아요. 달은 아낌없이 다 줘요. 온유해요. 또 우리는 밤의 산물이에요. 엄마, 아버지가 밤에 사랑을 해서 태어난 거잖아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달을 닮아 있는 것 같아요. 눈동자, 이마, 눈썹, 모든 씨앗들도요. 물고기알, 둥지, 새, 전부 다 달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지구와 가장 가깝게 있는 달의 자력 안에서 모든 것들이 달을 닮아 있어요.
사람들이 너무 살기 어렵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래 마음에는 달이 있다, 참 밝은 달이다, 그런 걸 느꼈어요. 그때부터 갑자기 달을 그리게 됐어요. 원래 그림을 정말 못 그렸어요.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고요.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스케치북을 안 가져왔다고 정강이를 찬 이후로 미술 시간에 안 들어갔어요. 어느 날 달에 대한 생각이 들고, 그 전에 런던에서, 영국에서 봤던 달들이 자꾸 떠오르면서 달을 한 번 그려봤어요. 그렇게 그리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달시를 썼고요. 달을 그리고 나면 내가 그린 게 아닌 것 같아요. 참 신기해서 공개를 했는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정말 많더라고요.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는데 제 그림을 보고 위안을 얻었다면서 그림을 한 점 달라고 하더라고요. 줬죠. 보니까 한 달 있다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더라고요.(웃음)
달시를 SNS에 게재하셨고, SNS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NS라는 창구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제 신문의 시대는 갔다고 생각해요. 포털 역시 일방적으로 보여주기만 하잖아요. 댓글을 달긴 하지만요. 그러나 SNS 같은 경우는 의견들이 서로 오고가는 장소예요. 그런 장에서 이야기가 서로 통하니까 교류가 되고 좋았어요. 이곳을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다른 어떤 채널보다도 소통의 힘이 센 것 같아요.
책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는 시집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하고, 시화집이자 여행기 같기도 합니다. 이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책에 대해 직접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차별화시키고 싶었어요. 달시도 보여주고 싶고, 그림도 보여주고 싶었는데요. 디자인을 할 때 앞부분에 그림들을 넣는 식으로 묶었어요. 요즘은 좋은 글들이 정말 많잖아요. 이렇게 비뚤비뚤한 글씨와 엉성한 그림 이런 것들을 친밀감 느낄 수 있도록 넣으려면 어떻게 할까 고민했죠. 기존에 나온 책들과 달리 글씨와 그림을 넣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기본적으로 손글씨로 쓴 달시와 그림을 넣으려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또 여행을 계속 하면서 사진을 찍잖아요. 여행하면서 얻게 된 귀한 사진들도 많았어요. 남프랑스에서 깊은 산 속까지 들어가서 찍은 사진도 있거든요. 라벤더는 일 년에 딱 열흘만 피는 꽃이에요. 그때 가서 찍은 것들이니까 이건 보여줘야죠.
‘달항아리’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요. 화가 김환기 선생의 이야기도 하셨어요.
김환기 선생님의 그림이 달항아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 줄은 몰랐어요. 어느 날 자료를 찾아보니까 김환기 선생님이 ‘나의 모든 그림은 달항아리에서 영향을 받았다’라고 했어요. 제가 달항아리를 처음 본 건 작년 전시회 때에요. 작년에 첫 전시회를 인사동에서 했거든요. 제가 수익금을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한다고 했더니 어떤 플로리스트 분이 달항아리를 협찬을 받아서 벚꽃을 꽂아서 정말 아름답게 해놓아 주셨어요. 그때 달항아리를 봤는데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진짜 예뻐요. 그런데 너무 비쌌어요. 제가 여기 취지에 안 맞는다고 했었죠. 그랬더니 협찬 하신 분이 가격을 크게 낮춰줬어요. 그래서 몇 개를 뒀죠. 이후 달항아리를 찾아봤어요. 달항아리가 예쁘기도 하지만 원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달항아리는 투박하거든요. 어머니의 허리통 같은, 배 같은, 뚱뚱한 아줌마의 몸매 같은 질박하고 투박한 달항아리들이 정말 예쁘더라고요. 그래서 달항아리를 그렸어요. 달항아리에서 들리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지구에서 들리는 달의 웅웅거리는 소리처럼 느껴졌어요. 제가 느꼈던 달의 비밀들이 저 항아리에 들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것이 우주의 소리라는 생각 말이에요. 그 소리가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저것을 쏟아 부어도 끊임없이 에너지가 나오고, 꽃들이 나온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모습의 달항아리를 그리기도 했죠.
“달이 떴다. 남프랑스의 달이나 서울의 달이나 중세의 달 역시 매양 마찬가지고 하나이고 같다. 그러나 다른 것은 우리가 살았던 곳이다. 당신이 살았던 시대에 바라보았던 달, 당신이 다음 생에도 이 세상에 와서 바라볼 달, 우리가 무언가 간절히 빌며 바라보던 달.”(128쪽)
달은 인류의 거울
전기가 없었을 때 어둠은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쓰는 법을 잃어버렸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달을 그리워한다, 그리운 모든 것은 달에 있다고 하셨어요. 시인에게 ‘달’은 뭘까요?
저에게 달은 그냥 밝은 빛의 둥근 달이 아니라 어떤 기운을 주는 존재예요. 우리가 달에게 소원을 빌었다고 하잖아요. 왜 소원을 빌었겠어요. 옛날 사람들은 달에게 소원을 빌면 진짜로 들어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소원 빌기를 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전기도 없었고, 통신 수단도 없었지만 피라미드를 지을 정도의 지식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달이 주는 기운이나 에너지를 지금보다 더 분명히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제게는 그런 의미에서의 달이에요. 달은 분명히 사람들에게 기운을 주고 있고, 에너지를 주고 있고, 말을 하고 있고, 인간들에게 어떤 것들을 주고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달이에요. 분명히 있다는 생각을 해요. 자꾸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점쟁이 같아서.(웃음)
『시크릿』이라는 책을 안 읽었는데 그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온대요. 저는 이게 바로 ‘시크릿’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달에 매료되고 달 그림을 그리게 된 거예요. 달은 인류의 거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언젠가부터 달을 보지 않으면서 거울을 보잖아요. 하지만 예전에는 밤에 달을 보면서 회상했잖아요. 오늘 내가 잘 살았나? 누가 그립다, 하면서 하루를 반추하면서 마음의 거울을 비춰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그런 것들이 없어지니까 여유가 없고, 겨를이 없고, 화가 나고, 분노하고, 싸우고 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꼭 거울이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보는 모든 것들이 거울이 된다고도 하셨잖아요.
그렇죠. 달을 그렇게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한 거죠. 그렇긴 한데 지금은 달을 잘 볼 수도 없고 아쉽죠.
시인에게 중요한 주제는 ‘사랑과 여유’인 것 같습니다. 니스에서 여유를 발견한 대목이나,“첫 걸음을 어떤 마음의 발로 딛느냐에 따라 걸음의 방향이 달라질 것”(41쪽) 이라고 말하면서도 ‘사랑과 여유’를 말씀하셨고요.
남프랑스에서 느꼈는데요. 여유는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교육제도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곳에서는 사람들을 만나면 다들 환하게 웃어요. 눈을 마주치면 사람들이 웃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눈 마주치면 싸움이 나죠. 남프랑스에서 정말 감동 받았던 게 결혼식에 온 하객들이 모두 함께 춤을 추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었어요. 그 정겨움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했어요. 여유가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거죠.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그림도 그리고, 시도 읽고, 하는 마음의 여유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놀 수 있는 거예요. 와서 바쁘게 밥만 먹고 가는 게 아니라 말이죠. 토요일이나 이럴 때보면 가족들이 좁은 식당이지만 와인도 마시면서 두 시간 씩 식사를 하잖아요. 그런 여유가 사람을 다르게 만드는 것 같아요. 문화가 달라요. 우리나라는 무서워요. 여유가 너무 없어서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들죠. 이혼율, 자살률 너무 높잖아요. 여유가 없어서인데, 그럴수록 사람들이 여유가 어디 있어, 겨를이 어디 있어, 하고 말해요. 제 글을 본 친구들도 지금 한 발이라도 더 빨리 뛰어야 할 때라고 말을 하니까요. 바쁜 가운데에서도 여유를 찾아야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바쁘게 살다 가는 거죠.
지금은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을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언제부터 이런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신 건가요?
저는 늘 시간이 많았어요. 취직이 잘 안 돼서 밤에 산동네에서 달 보면서 소주 마셨고요. 늘 시간이 있었어요. 출판사에 취직하고 다니다가 출판사도 차리게 됐고 바빠졌지만 그래도 항상 아내와 여행을 다녔어요. 유럽 여행을 일 년에 두 번 씩 꼭 갔어요. 여름에만 시간 내면 돼요. 가다보니까 여유가 있고, 달을 보게 되고, 글을 쓰게 됐어요. 여유를 스스로 만들어 찾았죠. 그렇지 않으면 못 가요. 친구들 중에도 아직 한 번도 유럽 여행 못 가본 친구들 많은데요, 제가 이런 얘기 하면 자랑한다고 얘기를 못하게 해요. 그렇지만 어떻게든 찾아서 가면 돼요.
우주은행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사람들은 미래에 저축하는 셈인데요. 먼 미래보다는 현재에 집중하시는 거군요.
실제로 저희 부부는 적금을 안 해요. 돈이 생기면 떠나요. 작년에는 세 번이나 다녀왔어요. 남프랑스, 프라하 등 계속 다녔죠. 여행비로 많이 쓰고요. 출판사를 하고 있지만 베스트셀러도 없는 출판사고, 직원들도 다섯, 여섯 명 있는데 책이 안 팔리니까 힘들잖아요. 이곳저곳 다 나가고 나면 돈이 없어요. 하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게 뭐냐 하면요. 밀물과 썰물이 있잖아요. 썰물과 밀물이 오지만 물이 들고 나는 자리는 그대로잖아요. 딱 그 자리인 것 같아요. 결국은 달의 메시지기도 하지만 은행이 저 우주에 있다, 생각해요. 그러니까 좀 더 마음이 편안해지고,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었어요. 도우니까 또 들어오고요. 있으면 쓰게 되고 없으면 들어오게 되더라고요. 마흔 이후부터는 거의 그 수준인 것 같아요.
그런 마음 자세라는 것이 물질적으로 부유하다 해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돈이 많은 사람도 그런 얘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새로운 금치산자 같다는 생각을 해요. 너무 아끼더라고요. 악담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결국은 나중에 잘 안 되더라고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려요.
그렇죠. 살아가면서 돈을 써야죠. 모아서 뭐 하겠어요.
어느 시인이‘슬픔, 고통까지도 많이 경험한 사람이 부자다’라고 했는데 저자의 경우가 그런 것 같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을지 몰라도 삶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저자는 부자가 아닐까 싶어요.
아이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아이가 있었으면 쉽지 않았겠죠. 저는 그래도 그랬을 것 같지만요. 계속 놀러갔을 것 같아요. 우리 회사 사훈이 ‘벌며, 놀며, 쓰며’고 집의 가훈은 거꾸로‘쓰며, 놀며, 벌며’예요. 집은 먼저 ‘써야’해요.(웃음)
자꾸 달이 쫓아와요
여행을 “죽음을 연습하는 것”(88쪽) 이라고 하셨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연습이라고요. 여행을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신 건가요?
제가 5대 독자고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까지 돌아가시는 것을 제가 다 목격했어요. 죽음에 대한 것들을 목격하다 보니까 제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덤이라고 생각해요. 다들 일찍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러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일찍부터 했었죠. 결국 언젠가 우리는 죽을 텐데 무엇을 갖고 있느냐, 내가 덤으로 살고 있는 이때 나눠주고 살자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았죠. 여행을 떠나서도 보면 전부 완전히 낯선 곳이잖아요. 아예 다른 곳인데, 돌아오면 다시 이곳이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것이 이생과 저생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곳에서 보는 달과 이곳에서 보는 달이 또 한 뼘이고 저승에서 보는 달과 이승에서 보는 달이 한 뼘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떠나는 것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죠. 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슬렁거리는 것, 그곳의 문화를 보는 것이죠. 제일 좋은 것은 여행지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거예요. 유럽은 맥주가 정말 맛있어요. 맥주 마시고 달을 보면 정말 좋아요. 한 6개월만 안 가면 미치겠어요. 가고 싶어서 울컥해요. 가서도 달에 대한 어떤 게 생겨요. 인도 타지마할을 갔었어요. 그곳은 밤에는 못 들어가요. 경비가 삼엄해요. 보물이 많으니까요. 한 달에 딱 한 번 보름달이 뜰 때 개방을 해요. 저녁 8시 30부터 9시까지요 딱 한 번만요. 갔던 날이 딱 그 날이었어요. 그곳에 들어가려면 아침부터 대사관에 가서 수속을 밟고 이것저것 해야 해요. 다 하고 가서 달을 봤는데 왕비가 타지마할이 아니라 달에 누워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아름다웠어요.
여행지에서도 달과 만나셨군요.
프라하에서도 그랬어요. 프라하에 가면 12세기에 지은 수도원 안에 운영하는 호텔이 있어요. 그곳 3층 다락방에 자리를 잡았어요. 첫 날 술 먹고 들어와 방에 누웠는데 그때도 풀문(full moon)이 떴어요. 자꾸 달이 쫓아와요.(웃음)
제가 액자 팔아서 얼마나 돈을 벌겠어요. 달시를 통해서라도 좋은 기운들을 전해주라는 달의 뜻인 것 같아요.
공감합니다. 달에 대해서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해주시니 훨씬 더 달에 대한 감정이 증폭되는 걸 느꼈거든요.
북티크에서 진행했던 행사 때는 사람들이 노래도 부르고 정말 재미있게 놀다 갔어요. 도무지 집에 가질 않더라고요. 밤 12시까지도요.(웃음) 사람들도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요.
달꽃밥 그림 사진 : 권대웅 시인 제공
단식하며 ‘달꽃밥’ 그린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많이 울렸어요.‘처방 같은 단식’(210쪽) 이라고도 하셨는데요. 단식을 하시면서 특별히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들려주시겠어요?
저는 사실 낭만주의자예요. 운동권도 아니고, 세월호 사건 당시에 문인들이 광화문에서 단식을 했는데 그곳에 가긴 싫었어요. 당시 모든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너무 슬펐어요. 너무 힘들었는데 거기서 좀 벗어나고 싶더라고요. 내가 스스로 그 심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단식을 했어요. 3일 단식은 작심삼일이니까 4일로 하자, 아예 발표를 하고 했죠. 아침에 뜨거운 물에 티스푼으로 된장 반스푼 타서 한 잔 마시고, 저녁에 한 잔 마시면서 4일을 했어요. 단식을 하면서 ‘달꽃밥’을 그렸는데 무척 잘 그려졌어요. 나흘을 단식하니까 나 스스로 좀 벗어나서 글도 쓰고 편안해지자 마음먹을 수 있었죠. 자기 위로나 다름없었는데요. 그 아이들에게 달꽃밥을 바치고 저 달에 가서는 꽃밥을 먹고 있어라, 말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그림을 함께 그렸어요.
당시의 감정이 그림에 담긴 것 같더라고요. 다른 달시의 그림과는 느낌이 좀 달랐어요.
어떤 분이 그림을 보고 하는 말이, 꽃을 그렸는데 아이들 같다고 해요. 저도 몰랐어요. 꽃이 배에 탄 아이들 같다고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분명히 꽃을 그렸는데 거기 아이들이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놀랐죠. 그게 나타났던 것 같아요.
놀라운 게, 달을 그리신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3년 밖에 안 됐어요. 몇 년 동안 달이 나를 쫓아오는 것 같고, 계시를 주고, 말을 붙이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어요. 어느 순간 아까 말씀 드렸던 그런 것들이 확 오더라고요. 달이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하려 했었고, 그것들이 저런 의미가 있었구나 하고 깨달았죠. 그렇게 그린 게 3년 밖에 안 됐고, 그 전에는 그림을 전혀 못 그렸어요.
색감을 보면 감각이 남다른 것 같던데 그림을 그린 적 없다니 참 신기해요.
그림 그리는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색을 선택하느냐고요. 모르겠어요. 그냥 꺼낸 거예요. 전부 파스텔이거든요. 파스텔로 그리고, 문지르고, 뿌리고 하죠. 제가 그림은 못 그렸는데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면서도 사람들에게 파스텔을 선물해달라고 하곤 했어요. 묘하게 파스텔의 부드러운 느낌이 좋았고, 갖고 싶었어요. 여행 다니면서도 희한하게 문구류를 많이 샀어요. 펜, 색연필, 크레용, 파스텔. 결국 그런 것들이 여기에 다 쓰이게 됐죠.
소원을 빌고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룬다
‘식상한 말이 가장 의미 깊다‘(52쪽)고 하셨는데 ‘달’ 역시 그런 것 같아요. 늘 그곳에 있어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 말입니다. 이런 것들에 시인은 많이 끌리는 것 같아요.
그렇죠.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가깝게 있는 것들이죠. 못 찾고 멀리서 찾고 돌아다니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에요. 결국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삶의 시크릿이 바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소원을 빌고 믿는 사람들이 이루는 것 같아요. 저도 정말 너무 가난하고 그랬지만 지금이야 여행도 가고 돈을 써도 또 허덕이지 않게 와주잖아요. 내가 어떻게 그렇게 했겠어요? 물론 열심히 살았지만요.(웃음)
사람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당연히 그래요. 저는 후배들을 만나면 늘 얘기해요. 일단 밥을 사면 부자가 되니까 항상 밥값을 낼 때는 서부의 총잡이처럼 꺼내서 내라고요. 우주와 달에는 정말로 많은 에너지가 있고 그것이 결국엔 네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니 주면 돌아온다고요. 무소유의 속성이 주면 얻는 거라고 항상 이야기해요. 법정 스님도 무소유을 말하니까 절이 생겼잖느냐고요.(웃음) 실제로 그래요. 주면 꼭 와요. 후배들에게도 그렇게 얘기를 하고요, 책에도 그런 메시지를 담고 싶었어요. 주면 또 좋아요. 기분이 좋잖아요. 사람들에게 자꾸 주는 사람들이 결국은 주는 입장에 서게 되고 안 그러면 결국 가진 게 없어지더라고요.
‘거미줄에 매달린 물방울 같은 것이 삶’(62쪽) 이라는 말하셨는데요.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다른 시선이 느껴집니다. 시인에게 거미줄은 무엇이고 물방울은 어떤 부분이었나요?
그 문장을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우리 모두가 사실 밥벌이에 사지가 매달려 있잖아요. 거미줄이라는 건 밥벌이처럼 끈끈하고, 끈적한 것이죠. 인간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하잖아요. 이 세상은 견디는 세계라는 거죠. 공부를 하는 것도 견디는 거고, 취직을 하는 것도 견디는 거고, 뭐든지 견뎌내야 하잖아요. 힘들어도 견뎌야 하고, 아파도 견뎌야 하고요. 그렇지만 견뎌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면서도 고통과 역경 속에서 자신의 품성을, 영혼을 높이는 거죠. 견뎌야 하는 것들이 거미줄처럼 붙어 있지만 이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걸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삶이 과거에는 없었잖아요. 앞으로는 없어질 거고요. 여름의 눈사람처럼 흔적도 없이 없어질 존재인데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일과 삶과 관계와 여러 가지 조건들에 사지가 딱 붙어 있으면서도 지금 이순간이 물방울처럼 아름다운 순간이 아니냐, 하는 거예요. 힘든 동시에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모든 과정을 아름답게 여기면서 가자는 의미예요.
글에 불교적인 언어나 느낌이 일정 부분 있어요. 불교에 영향을 받으신 부분이 있나요?
원래 종교는 천주교였어요. 미션스쿨을 나왔는데요. 종교는 다 믿어요. 종교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하다 보니까 불교가 인간과 가장 맞는 것 같았어요. 동양 문화에도 가깝고요. 불교적인 것들이 글을 생각할 때 더 쉽게 이해가 가더라고요. 그래서 불교의 글들을 많이 차용을 해요.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철학이라고 보기 때문에요. 제 글과 많이 닿아있어요.
1988년 신춘문예로 등단하신 후 시집은 두 권 출간하셨어요. 시집 계획은 없으신가요?
등단하고 나서 시를 열심히 써야 하는데, 너무 가난했었기 때문에 책 만드는 일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집에 돌아가서도 시를 써야 하는데 책 카피를 고민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제가 근무했던 출판사에서 나름대로 좋은 책들, 베스트셀러도 많이 나왔지만요. 어느 날 생각했어요. 내 삶에서 시는 2순위가 됐구나 하고요. 그런 글을 썼어요. 그걸 본 후배가 ‘시가 2순위가 아니고 0순위야’그러더라고요. 시를 다시 쓰게 된 것은 달시를 쓰면서부터였어요. 달시를 쓰다 보니 감각이 살아나서 다른 시도 70편 정도가 모였어요. 그걸 정리해서 다시 십 년 만에 시집을 내려고 해요.
한 유럽 대사관에서 달시집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스웨덴 대사관에 계신 분인데 한국에서 뵌 적이 있어요. 스웨덴에 돌아가서 SNS를 보셨나 봐요. 그분이 이 정서가 동양과 한국의 미를 소개하기 참 좋은 글이다, 번역만 잘 된다면 그림과 시를 묶어 시집을 냈으면 좋겠다 하더라고요. 유럽 사람들이 동양적인 정서를 굉장히 좋아한다고요. 번역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데 제 아내가 동화 번역을 하거든요. 외부에서 번역자를 찾았는데 어느 날 아내가 시를 한 편 번역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아내가 지금 하고 있어요.(웃음)
달과 달을 노래한 글은 국경을 떠나 공통적으로 주는 감성이 있잖아요. 외국에도 달시가 소개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국경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죠. 고려시대, 조선시대 사람들도 달을 바라봤고요. 그것이 하나의 긴 달빛 바늘에 꿰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 눈빛들, 그리움들, 그런 게 달에 비치고 연결이 되어 내려오고, 그것들이 결국 좋은 기운으로 엮여있지 않나, 생각해요.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권대웅 저 | 예담
주위의 다양한 계층과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저자는 나만 외롭고 힘든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고, 달을 통해 위로받으며 치유해가고 있다. 그 환하고 따뜻한 달의 기운을 어둡고 차가운 별에 사는 이들에게 전하고자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예담 刊)]를 책으로 엮어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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