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속도에 이르면 시간이 느려지는데
우리의 그리움은 언제나 광속을 넘는다
우리가 늙지 않는 이유다 (65쪽, <특수상대성> 전문)
글에서 힘찬 기운과 동시에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고 한다면 거짓일까. 인터뷰를 위해 시인을 만나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앞서 그 느낌은 글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 글에서 어떤 상반된 기운, 희망을 소망하는 마음과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마음을 함께 느꼈던 것 같다. 정체 불분명한 굴곡이 느껴졌고, 동시에 천진난만함이 느껴졌다. 좀 의아한 느낌이다.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아닌가. 인간의 마음이 천 길 물속이라지만 잘 이해되지 않았다.
김주대 시인은 말한다. “무엇을 이루었다고 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어느 끝에 이른 것이 아니라, 이미 또 다른 ‘시작’에 서 있을 뿐”(13쪽)이라고. 또 시인은 말한다. “낮술에 취해 떠돌며 만난 모든 폐가에서는 두고 온 가족들이 새처럼 깃들여 비를 피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목숨이 물컹 만져졌다.”(186쪽)고. 힘차게 시작을 말하는가 하면 위태롭게 목숨을 만지작거리기도 한다. 이런 느낌은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등이 굽은 아버지의 가녀린 모습을 그리고, 빨갛게 물든 아름다운 단풍나무를 그려 보인다. 샛노란 개나리는 물론 ‘고뇌’라는 글자로 고개 숙인 사람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대체 어째서 시인은 이토록 다른 감정을 한 자리에 담았을까?
대학교 4학년, 이른 나이에 등단한 김주대 시인은 오랫동안 시와 떨어져 살았다. 크게 사업을 해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망했다’. 가족과 뿔뿔이 흩어졌고,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 낮에도 술에 취해 있었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먹고 살았다. 매일 시를 썼다. “칼을 안 쓰려”고 시를 썼다. 고통스런 시간이었을 텐데, 시인은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망하길 잘했죠. 지금 훨씬 좋아요. 원래 나로 돌아온 거예요. 정말 좋죠.”이것은 그가 자신의 그림 한 곳에 어김없이‘목숨’이라는 빨간 도장을 찍은 이유기도 하다.
성숙한 어른, 천진난만한 청년, 모두 김주대 시인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보며 가졌던 의아한 느낌은 인터뷰가 끝나고 말끔히 해소되었다.
시는 물질이다
들어가는 말에서“시인은 시를 지어 실제로 거기에 거주”한다고 하셨어요. 시인에게 ‘시’라는 ‘물질’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보통 ‘언어의 물질성’을 많이 얘기하거든요. 시란 개념이잖아요. 색도 모양도 없죠. 단지 문자라는 기호로 표현될 뿐이에요. 그런데도 제가 실제 거주한다고 한 것은요. 물질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느낄 수 있잖아요. 물질과 마찬가지로 시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는 의미예요. 가령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공포를 느껴요. 사람이라는 물질이 공포라는 감각을 일으키죠. 어떤 시를 봐도 공포를 느낄 수 있잖아요. 어떤 사람과 포옹 했을 때 따스함을 느끼듯이, 어떤 시를 보면 실제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요. 시를 읽고 가슴이 두근거릴 때가 있죠. 그래서 시를 물질과 동일한 존재로 보는 것이죠. 어떤 시를 보면 상당히 슬프고 눈물이 나는데요. 그것은 실제로 눈앞에 슬픈 사건이 벌어진 것이죠. 실체로서의 사건들, 물리적인 사건이라는 차원에서 그래요. 철학적인 의미기도 해요.
제목도 그렇지만 시를 보면 ‘물리’, ‘광속’, ‘중력’, ‘화석’, ‘진화론’처럼 과학적 언어를 많이 사용했어요.
시가 막연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 흔히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인간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몸이나 이성으로 느낄 수 있는 ‘실제 있는 것들’이거든요. 때문에 시인의 비유도 본인이 모를 뿐이지 어쩌면 실재를 느끼고 말한 것이라는 거죠. 실체에 가장 잘 접근해 들어가기 위한 것이 과학인데요. 과학자들은 자연을 아주 간명하게 설명해요. 시인도 과학자처럼 심플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심플하게 느낄 수는 있어요. 느낌은 과학자들보다 강렬하게 느끼는데 표현을 못할 때 과학자들이 쓰는 용어를 더 알면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공부를 하는 거죠. 자연 과학 공부를요.
‘특수상대성’에 대한 시도 두 편이나 쓰셨는데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하게 느끼는 게 시간과 공간이에요. 어제 있었던 일, 내일 닥칠 일 같은 시간과 내가 있는 곳이라는 공간이요. 시는 공간을 축소시킨다고 볼 수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부산에 있다면 실제 공간은 400km가 넘겠지만 그 사람을 이곳에서 느끼는 느낌은 훨씬 짧아요. 그 사람이 옆에 있는 것처럼 그려낼 수도 있다는 것은 400km를 단 4cm로 줄일 수 있는 기능을 하는 것이죠.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들인데요. 그것을 시에 변용해본 거예요.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빛의 속도보다 빨라지면 시간이 느려진다고 했는데, 시간이 느려진다는 것은 늙지 않는 거죠. 빛의 속도보다 빨리 내 심장에 그 사람을 끌어오는 것, 그것은 그리워하는 동안 내 몸의 시간이 느려지는 것이라 볼 수 있어요. 안 늙는다는 것, 젊어진다는 의미예요. 때문에 그리움이 많은 사람은 잘 안 늙는다고 한 거고요. 시적인 비유를 과학적 사실과 연결해서 유추해봤어요.
「지도를 그려」(42쪽)라는 시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도라는 것은 공간을 축소한 모형이니까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시에서는 얼마든지 축소시키거나 확대시킬 수 있다는 의미예요. 시인은 시에서만큼은, 시를 쓸 때만큼은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거죠.
기존의 것들과 다른, 새로운 시선이 많아서 시가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그런 걸 많이 생각하죠. 예술이라는 건 좀 낯설게, 독창적으로, 새롭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시각을 얻기 위해 다양한 작업을 해요. 그림도 그리고, 과학도 공부하고요.
과학적인 내용에 영감을 얻으신다고 하셨는데, 영화도 즐겨보시나요?
즐겨 보지만 영화에서는 영감을 많이 못 느껴요. 영화보다는 주로 독서하면서 많이 생각해요. ‘영감’이라고 하면 갑자기 싹 떠오른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고요. 늘 생각하고 노력하는 거예요. 요즘은 연재 때문에 못 나가지만, 한 번 나가면 거의 안 들어와요. 지방에 내려가서 시장이나 풀 같은 것들 관찰하고요. 서울도 사람들이 그냥 못 보고 지나가는 것들이 많아요. 자연은 꼭 바깥으로 가야 있는 게 아니라 도시 안에도 있어요. 좀 다른 형태로 있을 뿐이죠. 틈에 있거나, 밟혀 있거나, 웅크려 있거나, 일부러 누군가 가꿔서 있거나 말이에요. 그런 것을 찾아다녀요. 지방에 가도 그냥 골목길을 돌아다녀요. 그러면 이야기가 많이 보이니까요. 아이들 눈빛, 노는 모습, 억양 등에서 독특한 공간과 이야기가 느껴져요.
그래서인지 관찰한 장면을 쓴 작품이 꽤 있어요. 「부녀」(81쪽) 같은 작품이 그렇고요.
그렇죠. 관찰한 것, 공부한 것, 느낀 것들이 다 시가 돼요. 사진 촬영한 것들도 많고요. 촬영해서 시를 쓰고 그 다음에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책 표지에 詩書畵(시서화)라고 해두었는데요. 사람들이 그림도 잘 그린다고 하는데 제게는 솔직히 기분 나쁜 말이에요. 저는 시만 쓰는 거예요. 제가 가진 시의 본래 이미지, 주제가 있잖아요. 그 주제를 품고 다니는 거죠. 사진을 찍는 것은 시가 시각적으로 확장이 되는 것이에요. 출발도 시고, 최종적으로도 시가 그림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봐야 해요. 발이 아파서 신발을 신으면 발바닥의 확장을 신발로 볼 수 있는 것과 같아요. 시의 확장이 사진이고 그림이에요. 쓰지 않고 그린 그림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림도 잘한다고 하면 기분이 안 좋아요.(웃음) 저는 한 가지 잘하는 사람이에요.
모든 것이 포함된 작은 것
사랑과 자연(꽃, 풀)에 대해 많이 쓰시고, 섬세한 감성도 인상적입니다. 요즘 풀, 들여다보지 않잖아요.
제 본래 주제는 소외된 것, 작지만 소중한 것, 작은데 전부를 포함한 것들이에요. 새싹에서도 우주 전체를 볼 수 있어요. 암컷과 수컷이 만나, 바람과 물과 빛의 작용으로 싹을 피우고, 비바람 맞으며 고통과 고난 속에 살다 생을 마감하고, 거름이 된단 말이에요. 이처럼 우주가 작은 데도 있어요. 모든 것이 포함된 작은 것들을 찾아다닌 거죠. 그것의 소재가 되는 것이 새싹, 풀 같은 것들이에요.
학원을 오랫동안 하다 망했어요. 입시 논술학원을 18년 했어요. 선생님도 많았고요. 돈을 엄청 많이 벌었는데, 하루아침에 망했어요. 등단은 대학교 4학년 때 일찍 했는데, 먹고 사느라 시를 못 썼죠. 돈을 워낙 많이 버니까 시 생각이 안 났어요.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으니 사업만 확장되지 시는 아예 못 써요.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4년 전에 망했어요. ‘길에 나선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랬어요. 가족들과도 다 헤어졌어요. 이 작업실에 이사 온 게 2주 정도밖에 안 됐는데, 이곳 집기들도 전부 독자 분들이 보내주신 거예요. 망하고 매일 페이스북을 했어요. 매일 시를 한 편 써서 올렸어요.
소셜 펀딩으로 시집을 출간하셨는데, 그런 과정이 있으셨죠?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시집이었어요. 독자들이 돈을 모아주셨어요. 당시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불안하잖아요. 낮에 막걸리를 많이 마시고 돌아다니다 잔뜩 취해 들어와서 컴퓨터 앞에 앉았어요. 페이스북 친구들이 쪽지로 그래요. 매일 공짜로 시와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요. 취한 김에 페이스북에 썼어요. 그렇다면 갚아라, 시집을 낼 테니 투자하라고 썼죠. 15분 있다가 오백만 원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날 저녁까지 천만 원이 넘게 들어왔어요. 깜짝 놀라서 중단했어요. 다음날 또 술을 먹었어요. 얼마나 내는지 보자는 생각이 들어 다시 투자하라는 글을 살렸어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시집을 냈죠. 그땐 소셜 펀딩이란 단어도 몰랐어요. 시집을 내고 행사를 하려 했는데 할 수가 없었어요. 세월호 사건이 터졌거든요. 그달 말에 시집만 내고 투자하신 300분 정도에게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죠. 돈을 돌려줄 수 없으니 그림을 그려서 투자하신 분들에게 선물했죠. 그때 그린 그림이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26쪽)이라는 그림이에요. 그렇게 다 갚았어요. 2014년 8월쯤 조계사에 2층 강당에서 출판기념회 비슷한 걸 하긴 했죠. 그렇게 소셜 펀딩을 했었어요.
그림을 그린 것도 그 시기였나요?
그림한지는 1년 반 정도 됐어요. 물론 어렸을 때는 그리기도 했지만 그림과 관련 없는 생활을 20년 넘게 했죠. 페이스북에 시를 판다고 했는데, 무형물이니까 팔 수 없잖아요. 페친(페이스북 친구) 한 분이 아이패드를 보내주시면서 친필로 시를 써서 파일을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글만 써서 보내기 뭣해서 그림 몇 개를 그렸어요. 아주 조잡한 그림이에요.(웃음)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도구를 써야하는지조차 모르니까 물감은 뭘 사야 하는지, 화선지는 뭘 사야 하는지 다 페친들에게 물어봤어요. 시키는 대로 그림을 그려서 올렸어요. 한 1년을 그렇게 올렸죠. 또 거의 매일 신작 시를 올렸어요. 안 쓰면 죽을 것 같았어요. 불안하고, 슬프고 그래서요. 한 6개월 정도 칼을 옆에 두고 잔 적이 있어요. 죽고 싶어서요. 칼을 쓰면 시를 못 쓰잖아요. 칼을 안 쓰려면 시를 쓰면 되고요. 아이들 생각하면서 매일 시를 썼죠. 아이들이 처음에는 저를 미워하다가 페이스북 보면서 저를 이해하게 됐어요.
삶의 커다란 위기를 시로 치유하신 거네요.
그렇죠. 그걸로 할 말 다 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만나고요. 시 쓰면서 생활이 많이 회복된 거죠. 아이들과의 관계도 회복되고요. 솔직히 말해 저는 망하길 잘했죠. 안 그랬다면 골프장이나 다니고 했겠죠. 지금 훨씬 좋아요. 시골에 살다가 처음 서울 왔을 때 누가 좋은 장소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그게 무척 불편하더라고요. 백화점 같은 곳이었는데, 반질반질하니까 불안해요. 그 주변이 못 있고 멀리 갔었어요. 본래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 면이 있는데 학원하면서 돈을 워낙 많이 버니까 그런 진짜 제 모습이 사라졌던 거죠. 비싼 차도 쉽게 사고요. 망하고 나니 옛날 내 모습이 돌아오더라고요. 밥만 있으면 아무거나 잘 먹고요. 옷도 닳을 때까지 입는 옷 하나만 입고요. 원래 나로 돌아온 거예요. 정말 좋죠.
우리 모두 언어다
“모든 존재는 해석을 기다리는 의미 있는 기호들”이라 하신만큼, 시인은 모든 사물에서 시를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비유적이긴 한데요. 성경에서 ‘빛이 있으리 하니 빛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빛이 있으라고 ‘말씀’을 한 거예요. 빛은 결국 ‘말씀’으로 만들어진 거죠. 빛 이후의 모든 존재들은 다 언어로 만들어진 거고요. 그러니까 나도 언어고, 상대방도 언어예요. 누군가의 표정, 주름살, 몸짓에서도 언어가 보인다는 거예요. 걸음걸이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뒷짐을 지고 걸어요. 거만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몸이 불편해서 그렇게 걷는 사람도 있어요. 몸이 불편해서 그렇게 걷는 사람은 그 자체가 겸손하죠. 그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어요. 구두 닦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새끼손가락을 들고 있거든요. 한 번 보세요. 한 사람만 그러면 언어가 아닌데 거의 다 그래요. 왜 그런지 자세히 보면 그렇게 해서 정밀해지는 거예요. 새끼손가락을 들면 닦는 범위가 좁아지면서 정밀해지죠. 그 직업에 충실해지려고 나타난 자세들이에요. 그것이 언어죠. 돌아다니면 그런 것들이 보여요.
나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들에서 이야기가 느껴지는군요.
네. 막 보여요. 우주 탄생 직후, 엄청 짧은 시간에 물질들, 미립자들이 만들어졌잖아요. 그 물질들은 지금도 그대로 있죠. 우주 탄생이 137억 년이면, 지금의 물질들 모두 137억 년 된 물질들이라는 거예요. 한 사람이 오는 건 137억 년이 오는 거예요. 그 사람의 몸짓 속에는 우주의 어떤 것도 보이고, 그 사람의 인생도 보이고, 짧게는 그 사람의 생활도 보이는 거죠.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기 전
서로의 외부였을 때에도
나는 그들의 내부였다 (128쪽, 「오래된 시간」)
특히 ‘사람’에 대한 특별한 시선이 많이 느껴졌어요.
인간은 부자연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살아있을 동안은 오장육부로 내용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는 거예요. 항문은 오므리고 있잖아요. 인간은 실제로 그렇죠. 죽으면 이게 다 빠져나가고요. 굉장히 불편한 존재인 인간이 자유에 이르려면 미립자로 돌아가는 것, 죽음 상태에 이르는 거예요. 그러면 자유로운 존재가 돼요. 살아있을 땐 그런 자유로운 존재가 못 되잖아요. 하지만 죽지 않고 자유에 이르는 길은 내 안에 있는 것을 빼내는 것, 그게 바로 시라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물질들, 시, 언어를 밖으로 확산하는 것이에요. 그림은 우주, 엄마로부터 받은 색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고요.
“사람이 있는 풍경만이 선경이 될 수 있다”(32쪽)고도 하셨고요.
결국 제가 찾는 것은 사람일 거예요. 인간이 자신과 가장 닮은 존재를 찾는 거죠. 나 아닌 사람들에서도 나를 볼 수도 있고, 내가 가진 고통을 가장 잘 토로할 수 있는 대상도 사람이죠. 그래서 친하고 싶고요. 알고 보면 다 착한 사람들이에요. 모두 나만큼의 서정과 정서가 있어요. 사람 만날 때가 제일 좋죠.
그에 비하면 그림 속에 표현된 사람은 굉장히 작아요. 이건 왜 그런 걸까요?
옛날 그림에도 보면 꼭 조그맣게 사람이 있어요. 산수화에도 아주 작게라도 사람이 있죠. 사실 작은 그 사람이 주제예요. 주제를 작게 그렸거든요. 이진경(철학자) 선배도 말하기를 본래 사람이 가장 소중한 존재인데 사회적 조건 때문에 작아진 거죠. 위치, 계층 때문에 존재가 약해진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복원한다면서 갑자기 크게 그리면 안 돼요. 주제가 작아지면 오히려 관심을 가지거든요. 그런 효과도 있고요. 작은데 작지 않은 거죠. 작은 것이 우주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언어로도 가능하게 하고, 그림으로도 가능하게 한 거죠. 불교에서도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이 실재라는 거예요. 제 그림을 본 사람은 그걸 느끼겠죠. 그럼 저와 진짜 친구가 되는 거예요.
시와 그림은 불과 기름의 관계
그림 그린 지 1년 반 정도 되셨다고 했는데요. 그림을 그리면서 시가 어떤 영향을 받았고,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합니다. 시와 그림을 불과 기름이라고도 하셨어요.
시를 그림으로 보완한다 혹은 그 반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됐어요. 이 둘이 만나면 보완재가 아니라 불과 기름처럼 만나는 순간 새로운 존재로 폭발한다는 거예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요. 그림을 보면서 시를 읽으면 더 잘 꿈틀거리며 다가와요.
그림에 있는 ‘목숨’은 무슨 의미인가요?
유인(遊印)이라는 건데요. 이름 끝에 찍는 건 낙관이라고 하고요. 유인은 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이나 아무 데고 찍으면 돼요. 유인으로 공간의 구도를 맞추기도 하고, 전체 공간을 평화롭게 만들기도 해요. 내용도 되고, 형식도 되는 거죠. 특별히 ‘목숨’이라는 글을 쓴 것은 제가 매일같이 죽고 싶었을 때 시로 살아났으니까 이 단어를 택했죠. 보통 예쁜 단어를 많이 쓴다는데 그게 좀 짜증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목숨’이라고 했어요.
시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글자를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들입니다. 아버지, 집, 고독, 풍경 같은 작품을 보면 글자 자체로 작품이 됐어요. 쉽지 않은 작업일 것 같습니다.
‘모든 존재는 해석을 기다리는 기호’라고 했는데 기호에서는 언어 기호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한글도 만든 분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우주나 세계의 진실을 분명히 그 글자 형태에 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 번 해봤어요. 가장 먼저 한 것이 ‘아버지’라는 글씨였어요. 이응은 사람 머리와 가장 닮았어요. 등이 굽은 아버지의 모습에 맞춰서 그려보는 거예요. 그렇게 그려지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지금도 계속 시도하고 있어요.
「세한도」(148쪽)라는 작품에는 특별히 김정희의 동명 작품에 대한 작가의 말이 자세히 있었어요.
사실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때문에 처음 그림을 시작했어요. 국보 180호인데요. 그 작품은 구도도 엉망이에요. 잘 그린 그림이 아니에요. 대신 글이 좋죠. 제가 용감하게 시작한 이유도 나는 시를 쓰니까 그림은 좀 못 그려도 된다는 자신감이었어요. 화가들이 제게 이렇게 그리지 말라고 하진 않을 거니까요. 나는 시를 쓰고, 정신을 그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추사의 「세한도」를 보니 나무들이 있는데 사람 모습과 비슷했어요. 저의 작품에서 나무를 아예 사람으로 바꾸어버렸어요. 그렇게 하니까 나무에서 사람이 보이고, 사람에게도 글자가 있을 것 같았어요. 글자로 그림을 만들게 된 것도 그와 같아요. 많은 분들이 좋아해줘서 재미있게 또 했어요. 어려워요. 연구를 많이 하죠.
「돌아오십시오」, 「2014년 4월」, 「무소의 뿔처럼」 등의 작품은 세월호에 관한 작품들입니다. 당연하겠지만 시인은 세상의 아픔에 솔직하고 담담하게 말을 건네요. 벌써 1년이 넘었는데, 이 사건이 시인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처음에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충격적인 게 있었어요. 인터넷에서 본 거예요. 게임방에 들어오던 친구가 안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들의 언어로 ‘야, 돌아와, 빨리 게임해야지, 관심 끌려고 그러지? 이제는 돌아와’라고 장난으로 쓴 거죠. 며칠 있다 안 오니까 ‘이상하다, 장난이었어, 미안해, 진짜 돌아와’라고 해요. 또 일주일 지나니까 ‘이거 장난 아니다, 미안하다’라고 썼더라고요. 그걸 보는데 섬뜩하더라고요. 그래서 자세히 보게 됐어요. 이건 이성을 떠나서 그것에 대해 안 쓰고, 관심을 안 가진다는 게 사람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때는 광화문을 매일 갔어요. 힘들었어요. 요즘은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어요. 그림 그려서 기증도 하고요. 이 사건이 제가 그림 그리는 방향을 더 공고하게 해준 것 같아요.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다른 사람보다 감각적인, 1차원적 존재인 것 같거든요. 판단을 잘 못하겠어요. 아직도 그냥 허우적거리고 있어요. 사회사적, 정치사적 의미로 써낼 자신은 아직 없어요. 내가 있었던 세계의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지켜보고 있긴 해요.
굴곡진 경험도 그렇고, 죽음에 대해 남다른 감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경험할 수 있다면 가장 절절하게 우리를 깨닫게 해주겠죠. 하지만 죽음을 경험하고 나면 깨달음을 얻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잖아요. 죽지 않고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는 거예요. 혹은 내가 죽음 비슷한 곳에 가보거나. 그때 많은 것이 다가오죠. 어마어마한 것들이 올 거예요. 우리 사회도 그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후에 오는 것을 알게 되겠죠. 중요한 것은 유가족들이에요. 그 분들은 반쯤 죽은 분들이거든요. 살아도 살지 않은 그 사람들이 세상을 가장 올바르게 보는 거예요. 죽음에 가까이 가봤으니까요. 산 사람이 그걸 깨닫는 게 쉽지 않잖아요. 작가라면 그런 걸 예민하게 생각해야 해요. 제 경우 우연히 왔었어요. 사업이 망하면서 그랬죠.
그리움은 언제나 광속김주대 저 | 현암사
페이스북 시인’, ‘SNS 시인’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김주대 시인의 첫 번째 시화집 『그리움은 언제나 광속』이 나왔다. 부드럽고 따스한 그림과 감성적 시어가 주를 이루는 다른 시화집과는 사뭇 다르게, 이 책은 남성적 기백이 가득하다. 지면을 가로지르는 힘 있는 터치, 강렬한 색감이 시선을 먼저 사로잡고, 생의 본질을 꿰뚫을 듯 강직하면서도 서정적인 표현으로 깊이를 더해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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