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토 유니온', '윈디시티'로 한국 음악씬에 펑크(Funk)와 레게, 소울 등 다양한 장르를 싹 틔워오던 그가 온전히 '김반장'으로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솔로 작업인 「한 이불 속 우리」, 「혼자 걷는 이 시간」, 「No more sad-mistake」는 그동안 그가 말하고 실천했던 '촌사람'이나 '비빔정신'과는 조금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재의 변화만큼 표현의 방식도 달라져 '레게'라는 장르로 스스로를 울타리 치지 않는다. 김반장의 눈에 띄게 달라진 움직임은 변절이 아닌 그야말로 '발효',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익고 여물어가는 그런 '숙성'에 가까웠다.
거의 한 달에 한 번 솔로곡이 나오고 있습니다.
올해는 김반장 먼슬리 싱글처럼 나와요. 앨범은 내년쯤이고요. 한 달에 한 번씩 12월까지.
이번에 나온 「No more mistake」는 어떤 곡인가요?
우선 힙합이고요. 배경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요즘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많잖아요. 보면서 안타까웠던 심경들을 담았어요. 재능 있는 어린 친구들이 신기도 어려운 신발에 화장 진하게 해서 어른들의 문법으로 얘기를 하잖아요. 자신의 앞날을 진열장 상품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이게 저는 대단히 슬픈 실수 같아요. 아이들은 아이들로 살아가야지 그 때부터 어른으로 살아가면 안 되잖아요. 얼마 전에 태국, 라오스 여행을 다녀왔어요. 거기 아이들은 자기네들 나이에 맞게 재밌게 지내는 반면 우리나라 아이들은 어른 나이의 기준으로 힘들게 살죠. 큰 차이를 느꼈어요.
솔로 김반장과 밴드 윈디시티와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윈디 시티는 제가 프로듀싱을 맡고 있지만 밴드다보니 멤버 개개인의 즉흥적인 것들이 많이 들어가요. 예를 들자면 같이 연주하다가 합이 맞아 좋은 부분이 나왔을 때 그 순간을 극적으로 담고자 노력하죠. 즉흥성이 50% 정도 비중을 차지한다고 하면 돼요. 반면 솔로 작업은 준백(前 소울 스테디 락커스)이가 프로듀서를 맡고 여기에 외국 프로듀서까지 추가로 기용했어요. 즉흥성이 적은 대신 디테일한 사운드 메이킹이나 제가 전달하고 싶은 음악적 파장을 키우려 해요. 그런 부분에서 윈디 시티와 차이가 있습니다.
솔로작업에서 오히려 프로듀서를 따로 두셨군요. 준백씨와의 작업은 어떤가요?
제가 못보는 부분을 이 친구가 잘 봐요. 많은 설명 없이도 서로 공감을 잘 하고요. 신뢰가 있어요. 같이 하는 게 즐겁기도 하고. 재미있어요. 재미없으면 안하겠죠? (웃음)
윈디시티와 솔로곡들은 작업방식이 조금 다르네요. 그러면 내용적 차이는 어떤가요?
아무래도 밴드는 각자의 역할이란 게 있잖아요. 그렇다보니 다들 윈디시티에서 풀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윈디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룹 안에서는 제 주장을 강하게 얘기하기 쉽지 않죠. 밴드에서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비하인드로 빼고 팀의 전반적인 색을 내는 데에 주력해요. 지금은 그 때 뒤로 뺐던 제 개인 사는 얘기를 꺼내는 거죠. 마음껏. 하지만 큰 메시지는 윈디시티 때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나이를 먹어가니 평화와 행복, 삶의 즐거움, 이런 것들을 좀 더 세련되게 전달하고 싶어요.
그럼 윈디 시티 활동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재미있는 게 윈디 때 연주했던 친구들이 요즘 싱글 작업에 들어갔어요. 베이스 치는 선택이도 솔로 만들고 같이 작업했던 기타리스트 시문이도 솔로 싱글을 만들었고요. 그래서 저도 이때 쯤 작업을 하게 됐어요. 윈디시티는 내년 쯤 다시 만나서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윈디시티 2집 이후 우리나라 전통과의 '비빔', 그리고 '토속'과의 접목에 집중을 많이 하셨어요? 그 계기가 궁금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페스티벌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에 갔을 때인데, 거기 프로모터 분이 저희를 메인무대에 세웠어요. 아시아 쪽 레게 밴드가 메인에 서는 건 처음이라고 해요. 감사하게도 그 해 최고의 팀으로도 선정됐고요. 분명 저희는 본토 레게 밴드가 아닌데도 말이죠. 이런 걸 보면, 제가 느끼지 못 할 뿐이지 외국의 소울과 교집합을 형성하는 우리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주신 한국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자메이카 할아버지들이 북을 치는 걸 보면 우리 풍물놀이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그 교집합은 더 찾아보고 공부해야죠. 그래서 판소리 배우러 다니고 굿판에 다니고 했어요. 노래도 부르고 못 치는 장구도 쳐보고.
그렇게 탄생한 「잔치레게」나 「모십니다」 이런 작품들은 평단에서는 새로운 시도라고들 하는데 대중들 사이에서는 낯설다, 생소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사실 전반적인 반응이 좀 그랬어요. 윈디 1,2집과 많이 달랐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그 당시에 이걸 꼭 해야겠다 하는 심정이었거든요. 마치 사춘기 때 찾아오는 과제처럼요. 한국적인 요소를 넣은 한국의 레게를 들려주고 싶었고요. 본토의 흐름을 따라가는 자메이카 리바이벌도 분명 좋지만 이왕이면 제가 가진 전통을 비비는 게 더 좋을 것 같았어요. 제게는 한풀이기도 했죠. 하지만 제가 음악을 더 잘 했다면 사람들이 낯설고 생소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거든요. 아티스트 소양의 문제도 분명 있어요. 이러한 시도들을 해보면서 제 깜냥도 좀 알게 됐어요.
어떻게 보면 전통이나 토속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오히려 더 낯설어 하는 것 같아요.
한국의 것이라는 게 한국 사람들에게 굉장히 무겁게 다가가는 것 같아요. 저도 한국문화에 대해 잘 모르고 잘 못느꼈어요. 소울, 레게, 힙합을 들으며 예전에는 '우리 가락은 왜 이렇게 느리지', '호흡이 길지' 이런 생각을 자주 했거든요. 경험이 쌓이고 견문이 축적되면서 최근에는 우리 장단이 굉장히 좋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요. 땅, 하늘, 사람 이런 요소들이 들어가면서 철학을 만들어내고 또 짜임새를 갖추고 있죠. 디자인이 굉장히 잘 돼있어요. 이런 한국적인 요소를 제 안에서 깨우고 싶어요. 서구 음악으로 생긴 고정관념을 깨고도 싶고요. 황병기 선생이 얘기했던 것처럼 비서양적이 가장 한국적인 거라잖아요.
그동안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전통을 잘 틔우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전통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는 우리 세대가 해결해야 할 몫이라 생각해요. 일단은 현대화 작업을 잘 해야겠죠. 한때는 전통이 강한 지역의 문화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전통이라는 게 무조건 다 좋은게 아니라 불필요한 인습도 있다는 것을 그 양면성을 느끼게 됐어요. 전통이 강한 나라는 보수적인 관성도 강하게 있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나라가 훨씬 더 열려있는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중심만 잘 잡으면 여러 가질 수용해 새로운 걸 많이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서 한국 음악에서 희망을 많이 보기도 하고요.
윈디 시티에서 해온 토속적인 실험들이 솔로 작업에도 계속 되는 건가요?
일단은 당장에 제가 낼 수 있는 표현법이 솔로 앨범들의 표현법에 해당할 것 같아요. 아프로(afro), 레게, 펑크(funk), 소울, 라틴 이것저것 해볼 수 있겠죠. 때가되면 우리 장단 같은 게 들어가겠고요. 다만 「모십니다」 와 「잔치레게」를 해보니까 조금 더 연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아소토 유니온부터 윈디시티, 그리고 김반장까지 지금까지 12년 동안 음악을 했어요. 그동안의 길을 좀 되짚어 보고 싶네요.
일단 음악에 몰입한 건 드럼 소리가 너무 좋았고요. 또 친구들 다 가요들을 때 서구 음악 들으면서 혼자만의 만족, 위안을 얻기도 했고요. 개인적인 얘기를 더 하자면 집안 분위기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어요. 저의 세대에 흔히 볼 수 있는 도시노동자가정의 이해와 소통의 부재였죠. 저는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화와 소외를 예민하게 느꼈고 거기에 휩쓸리기보다 자유롭고자하는 욕구가 강했습니다. 그 때 탈출구로 삼았던 게 음악이었던지라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야 숨을 쉴 수 있었죠.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다가 20대 초반에 음악 동아리를 찾아 정보를 얻었고 더 많은 노래들을 들었죠. 그 때만해도 음악을 하면서 벌이를 해야겠다는 결심은 없었어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음악을 하자는 생각이었고. 시작부터 음악을 생계로 삼으면 너무 무거워지잖아요. 그러다가 아소토 유니언 때 「Think about chu」가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사실 히트 같은 건 예상도 안 했거든요. 그 때도 마케팅 같은 건 전혀 몰라서 당시 라디오 피디 분이 곡 러닝 타임 5분이 다 나간 게 처음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방송을 위해 곡 길이가 조금 짧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아예 못한거죠. 그냥 좋아서 했어요. 어떤 면에 있어서 전 음악 애호가에요. 링에 올라와있지만 일단은 음악을 좋아합니다. 제게 영감을 주는 음악을 듣고 따르면서 특화된 저만의 그라운드를 깊게 파려 하고요.
인디신에도 오래 계셨죠. 이번 인디 20주년 기념 앨범에 「나에게 쓰는 편지」가 수록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상당 기간 봐오신 만큼 느끼시는 점도 많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 비해 양적으로는 확실히 커졌어요. 힙합 신의 경우에는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죠. 음악 하는 사람, 아트워크를 하는 사람, 기획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생력 있는 크루를 만들잖아요. 그거야말로 인디펜던트 예술이죠. 다만 서로의 가치 목표가 서로 비슷하다보니 독자 노선이 생기긴 힘들어 보여요. 기성에 있는 걸 다 같이 바라보는 느낌이랄까요. 당장 돈이 되는 것 보다는 자기 작품, 자기 화법에 내실을 기여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인디 신 전반에 대해 얘기하자면, 매스미디어에 생긴 트렌드에 자주 영향을 받는 경향이 최근 잦아졌어요. 다들 비슷한 소리,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잖아요. 좀 더딘 발걸음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인디펜던트라는 중심에는 아직 내실이 가득 차지 않았어요. 또 요즘 활동하는 친구들을 보면 포맷화된 모습이 없지 않아 있어요. 이래도 될까, 저래도 될까 하면서 자기 표현을 절제하죠. 솔직함, 진솔함을 보여주는 게 인디잖아요.
저는 12년 동안 활동하면서 무대에서 자유로움을 보여주고자 하는 데에 힘을 쏟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무대 뒤에서 엄청 힘들 게 연습해요. 무대 위에서 자유로워야 하거든요. 놀기 위해 연습을 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무대 위에서 연습을 하게 되잖아요. 권투선수 유명우님이 했던 말이 있어요. “링 밖에서 많은 땀을 흘리지 않으면 링 안에서 많은 피를 흘리게 된다.”
2009년이었나요,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에서 하셨던 공연이 기억납니다. 이른바 '한예종 사태' 직후 격려차 열렸던 감사 파티 무대였는데요. “내 친구가 한예종에 다니는데 과제 때문에 정작 자신이 하는 일,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사유할 시간이 없다더라. 여러분도 예술과 자신이 하는 작업에 대해 많이 생각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투박하긴 해도 애정을 담은 얘기였어요. 한예종에 있는 친구들이야말로 자기 예술을 마음껏 뽐내야 하잖아요. 다만 지금 이 얘길 다시 하라면 조금 균형을 맞춰서 지혜롭게 하지 않을까 해요. 그 땐 너무 파이터 같아서. (웃음) 그때는 지금이든 얘기의 골자엔 결국 같은 내용이 담길 거예요. 여유롭고 자유롭게 가자는 얘기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분명 파이터 이미지가 있었어요. 분노하는 이들과 함께 분노하던 때가 있었죠?
그렇죠. 다만 그렇게 행동하면 분노에 불을 더 지피는 게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전부터 들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좀 더 전체적인 상황을 보고 움직이게끔 하는 게 아티스트의 움직임이라고 여겨지고요. 또 언제부터인가는 저항만을 이야기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해요. 아픔을 모른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지금 당장의 화풀이 보다는 전체를 신중히 볼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인지 요즘 김반장의 활동이나 음악을 보면 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도 먹고 여러 경험을 하면서 생각이 바뀐 것 같아요. 제가 옳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옳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느낌을 자주 받아요. 나이를 먹으면서 눈이 떠진다는 게 이걸 말하나 싶어요. 하나를 보더라도 여러 관점을 이해할 수 있고 마음에 안 드는 걸 보더라도 또 다른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죠.
이젠 음악적으로도 레게에 국한되지 않을 것 같아요.
네. 이제 어디에도 국한되고 싶지 않아요.
때로는 레게가 올가미처럼 다가온 적도 있었겠죠?
레게를 하면할수록 레게의 표현법에 갇힐 수 있다고 생각해요. 레게를 막 시작할 때는 그저 좋았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레게 풍의 음악을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레게의 삶과 철학과 음악을 함께 하는 사람은 없었잖아요. 훼손되지 않은 영역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제가 잘해서 다음 세대에 넘겨줘야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런데 음악을 하다 보니 자메이카의 역사를 내 그릇에 담는 게 아니라 그냥 담는, 오히려 레게적이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여러 나라에 가보면 본토 레게와 변형된 레게가 공존해있거든요. 우리의 정체성을 갖고 주도적으로 다른 문화를 가져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인 '빠'만을 생산하게 되는 문제가 나와요. 뭐든 간에 형식에만 치우쳐지면 본질하고 멀어지죠.
2005년 이즘 인터뷰에서 음악으로 체제를 넘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그 때의 생각은 아직도 변함 없으신가요?
무엇 때문에 음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피하려고 해요. 결국은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재미가 중요해요. 그리고 주변에 퍼져나갈 재미가 중요하고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른 것들과 연결되지 않을까 합니다.
인터뷰, 정리 : 김반야, 이수호
사진 : 이한수
2015/06 김반야(10_b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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