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준은 연주 경력 10년을 훌쩍 넘긴 재즈 피아니스트다. 2014년 초, < 디어 섬원 Dear Someone >(에반스)이라는 제목을 단 그의 첫 번째 음반이 드디어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작년에 발매된 재즈 음반들 가운데 단연 손에 꼽혀야 뛰어난 음반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매체는 이 음반에 무심했으며 이 음반을 주목하는 재즈 평론가는 거의 없었다. 앨범이 발매 된지 1년이 이미 지난 5월 말, 늦게나마 그를 만났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인터뷰가 약속되었던 날 그는 이태원의 재즈 클럽 '올댓재즈'에서 연주를 할 예정이었다. 연주가 있기 전 이태원 뒷골목의 한 식당에서 만나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오늘 클럽 연주는 자신의 밴드로 출연하나?
아니다. 오늘 밴드는 색소폰 주자 한승민의 5중주단이고 나는 사이드맨으로 연주한다.
- 연주 경력이 꽤 되는데 왜 이리 첫 음반을 늦게 발표했나? 요즘은 데뷔하자마자 음반 내는 사람도 많은데.
사실 이 음반의 기본적인 컨셉은 2004년부터 시작됐다. 그때부터 정상이(베이스), 신동진(드럼) 여기에, 현재는 미국에서 공부 중인 신명섭(색소폰)까지 더해져서 사중주단이 짜여졌다. 하지만 음반을 녹음해야겠다는 생각은 그간에 하지를 않았다. 재즈 음반이 팔리지 않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연주자 숫자들이 너무 많아 앨범을 통해서라도 자신을 알려야 했지만 이미 10년 이상 연주해온 나로서는 새삼스레 음반으로 날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음반 한 장은 내야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권유에 결국 녹음했지만 말이다. 정상이, 신동진은 이 음반에서도 베이스와 드럼을 맡았다.
- 어떻게 하다가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었나?
원래는 대중음악 작곡 전공이었다. 피아노라고는 클래식 피아노 교육을 받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가요 작곡에 재즈가 도움이 될 것 같아 서울재즈아카데미에 입학했다.
- 그곳에서 재즈 피아노를 공부했나?
아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전공은 작곡이었다. 그런데 1999년에 분당에서 '한미일 재즈 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열렸다. 이 행사에 이정식 쿼텟 그리고 더 쿼텟(The Quartet)같은 당시 한국 재즈를 대표하는 팀들이 참가했는데 이정식 쿼텟의 피아니스트 곽윤찬 선생님, 더 쿼텟의 양준호 선생님 모두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계셨다. 그분들의 연주를 듣고 깜짝 놀랐다. 즉흥연주라는 게 저런 거구나. 나도 저런 연주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바로 섰다. 당장 작곡에 쓰던 컴퓨터 장비를 모두 팔아버렸다. 그리고 재즈 피아니스트의 훈련을 시작했다.
- 그때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한 연주자 중에는 누가 있었나?
프렐루드의 희안이 형(피아니스트 고희안)이 함께 있었다. 1년 과정이었기 때문에 곧 졸업했고 나는 재즈가 더 배우고 싶어서 동아방송대에 입학했다.
- 동아방송대를 졸업하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 입학을 해보니 오히려 내 연습시간이 줄었다. 나는 당장 프로 뮤지션처럼 연주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대학엘 들어가니 교양도 들어야 하고 학교의 이런 저런 행사에 참여하다가 보니 한 학기가 그냥 끝나더라. 이렇게 학교를 다니다가는 시간과 돈만 허비할 것 같다는 생각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리고 다시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찾아가 월마다 조금의 돈을 내고 연습실도 쓰고 청강도 하면서 계속 재즈를 배웠다.
- 뮤지션의 꿈을 안고 대학에 들어간 젊은 친구들이 많다. 하지만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정말 다녀야하는지 방황하는 학생들도 많다. 그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고 싶나.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실용음악과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하려면 재즈를 익혀야 하는 학교들이 많다. 그러니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재즈를 연습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재즈를 정말 좋아해서 연주하는 학생은 열 명 중에 두, 세 명에 불과하다. 심지어 대부분의 학생은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음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대학에 입학한다. 그런 학생들은 자신이 음악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정말 인생을 바칠 만큼 좋아하는 음악을 찾으라고 이야기 한다.
- 다시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연습하던 시절에 연주활동은 하지 않았나?
오늘도 함께 연주하게 될 한승민과 그때부터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20대 초반으로 재즈동네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다. 그래서 밴드이름을 '스윙키즈'라고 했다. 그런데 그 무렵 창훈이 형(드러머 이창훈)이 함께 연주하자고 연락이 왔다. 색소폰에 영우 형(길영우), 베이스에는 현재 밴드 프렐루드에서 연주하는 진배 형(최진배)이었다. 그때 창훈이 형이 춘천의 한 클럽과 이야기를 해서 매주 수요일이면 춘천에 가서 연주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이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것 같다. 내가 매일 연습하고 연마했던 재즈를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기뻤다.
- 서울에 있는 클럽에서는 연주하지 않았나?
아니다. 얼마 후 색소포니스트 신동진 선생님께서 연락하셔서 자신의 사중주단에서 연주를 해달라는 거였다. 매주 목요일 클럽 야누스에서였다. 그때 정말 너무너무 기뻤다. 그때까지 주로 재즈 1세대 선생님들과 함께 연주해 오셨던 신동진 선생님은 당시 내게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분이었다. 심지어 전통의 클럽 야누스에서 연주할 수 있다는 게 믿겨지지를 않았다. 나의 꿈이 너무 빨리 이뤄지는 것 같아,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때가 2001년이었는데 국내에 재즈 피아니스트가 스무 명도 채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신인과 연주하고 싶었던 신동진 선생님은 나를 지목하신 것이다.
- 다른 밴드에서는 연주하지 않았나?
물론 아니다. 그 무렵에 세존이 형(에반스 뮤직의 홍세존 사장)과 처음 만났다. 당시 베이스를 연주하던 세존이 형이 함께 트리오 팀을 결성해 연주하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클럽 '원스인어블루문'에서 매주 월요일에 연주를 했다. 그런데 정작 월요일이 되면 세존이 형과 드러머들이 다른 일로 바빠서 내가 베이스와 드럼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마도 그때 국내에서 활동하던 베이시스트, 드러머들과 거의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재즈동네가 작았기 때문에 모두들 한 식구처럼 전부 알고 지냈다. 자연스럽게 여러 연주자들로부터 함께 연주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매일 밤 쉴 새 없이 연주했다.
- 물론 연주자 숫자가 적었다고는 하지만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한지 2년 만에 정말 빠른 성장을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면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빠르게 성장한 만큼 정말 이게 맞는 길인가 회의도 찾아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난 더 성장해야 하고 그만큼 연습도 더 많이 해야 하는데 거의 매일 연주 일정이 잡히다 보니 나 스스로를 위해 써야 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어느 음악 동네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연주자들은 무대가 끝나면 팀워크도 다질 겸 해서 간단히 술 한 잔 씩을 한다. 그러니까 무대 기회가 많아질수록 자연히 술자리 횟수도 늘어나게 된다. 처음 연주생활을 시작했을 때 거의 매일 술자리를 갖는 선배 연주자를 본 적이 있었다. 저 선배는 언제 연습을 하나 궁금해지면서, 저런 연주자가 되면 절대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바쁜 연주 생활을 하면서 나도 비슷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재즈 연주자가 되어 정신없이 5년 동안 활동했을 때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치더라. 신체검사를 보충역 판정을 받아 공익근무를 하고 나서 마치고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 그런데 이제 20분 뒤면 연주가 시작 되는데 클럽으로 지금 자리를 옮겨야 하지 않나?
앗, 벌써 그렇게 됐나. 자리 옮기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자.
밤 8시 30분부터 '올댓재즈'에서는 한승민 퀸텟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배선용(트럼펫), 한승민(테너 색소폰), 오영준(피아노), 최진배(베이스), 김영진(드럼)의 연주였다. 어쩐 일인지 요즘은 흔히 듣기 힘들어진 정통 하드밥 스타일의 연주였다. 한 시간의 1부 무대가 끝난 후 다시 오영준과 자리에 앉았다.
- 그래서 네덜란드 유학은 언제 떠났나?
2008년 여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음악원에 입학했다.
- 늘 스윙과 블루스를 강조하는 정통 스타일을 추구하는데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만들어진 성향인가?
아니다. 암스테르담 음악원은 스윙을 강조하는 악풍과는 거리가 있다. 굳이 말하자면 그 학교에서 재즈 피아노의 출발점은 빌 에번스다. 피아노 전공의 학생들은 대부분 브래드 멜도의 스타일을 따랐다.
- 그 학교의 교수로 있는 롭 반 바벨(Rob Van Babel)은 연주에서 정통적인 면모도 많이 보이지 않나?
그렇다. 하지만 그 학교의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는다. 맨 처음에 그게 무척 당혹스러웠다. 뭔가 구체적인 것을 지적하고 숙제도 많이 내주길 원했는데 레슨 시간에 '뭘 연주할까?' 물은 뒤 레퍼토리가 정해지면 그 곡을 교수는 한 시간 내내 아무 말 없이 학생과 함께 연주하는 거였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웃음) 그때 함께 연주하면서 선생의 가르침을 귀로 터득했어야 하는데 나는 한국 스타일로 말로 뭔가를 지적해 주기를 원했던 것 이다.
- 네덜란드에서 공부한 기타리스트 박용규씨도, 뉴욕에서 캐니 배런에게서 배운 피아니스트 임미정 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
맞다. 유럽과 미국에서 음악교육이란 뭔가를 주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학생의 재능과 개성을 끌어내려고 한다. 내가 선생이 말하는 것을 노트에 적으려고 하니까 그들은 적지 말라 했다. 그냥 들으라고 했다. 어떤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고정되는 것을 그들은 원치 않았다. 물론 학교마다 학풍의 차이는 있다. 헤이그에 있는 댄 하그 음악원은 스윙과 비밥을 매우 중시하는 학교다. 스타일로 놓고 보자면 난 댄 하그 스타일에 더 가깝다. 그래서 그곳 연주자들과도 여러 차례 잼을 했다.
- 스윙과 비밥을 추구하는 스타일은 언제 만들어졌나?
재즈를 처음 연주하면서부터 그 스타일에 끌렸다.
-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누구인가?
오스카 피터슨, 진 해리스, 윈턴 켈리, 베니 그린. 이 분들을 최고로 꼽는 것은 옛날에도 그랬고 현재도 변함이 없다. 난 확실히 외골수인 것 같다.
- 본인의 스타일과 학풍이 좀 달랐던 것 같은데 별 문제는 없었나?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1학년은 예비학생, 2학년부터가 본과에 들어가는 체계를 갖고 있다. 2학년에 진학하기 전에 시험을 치르는데 무사히 합격해 2학년으로 진급했다. 시험을 치르면 지도교수가 학생들을 일일이 지적해 주는데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잊히지 않는다. '너는 이미 스윙, 비밥, 블루스에 있어서 입학생 중에 가장 뛰어났다. 이제부터는 요즘 스타일의 음악도 많이 듣고 그러한 스타일의 곡도 한 번 써보고 연주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빌 에번스도 많이 듣고, 키스 자렛, 브래드 멜도도 많이 듣고 그들의 음악적 장점도 많이 느낀다. 그래서 2011년에 졸업하고서 특히 한국에서 좋아하는 재즈 스타일이 보다 컨템포러리한 스타일이다 보니 그 경향으로 바꿔볼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물론 다시 나의 본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 유학 생활은 순조롭게 마쳤나?
언어문제, 외로움 등과 많이 싸워야 했다. 그래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방학이 되면 한국에 들어와 계속 연주활동을 했는데 2009년 여름에 클럽 원스인어블루문에서 연주하다가 숨이 막혀 쓰러져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다. 공황장애라는 진단이 나왔는데 스트레스가 큰 원인이라더라. 지금도 버스를 타면 불안해져 버스를 타지 못한다. 연주를 할 때면 그것이 클럽 연주라고 할지라도 약간씩 긴장을 하는데 그 긴장이 쇼크로 번지지 않기 위해 늘 약을 먹고 있다.
- 처음 연주자로 활동하던 시기와 2010년 즈음을 넘어서면서 재즈동네가 급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았나?
물론이다. 우선 연주자가 무척 많아졌다. 실력 있는 젊은 친구들도 계속 등장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클럽을 찾아가면 무대 위에는 늘 아는 연주자들만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늘 모르는 연주자들과 마주친다. 상황이 이러니 어떤 연주자들이 한 장소에서 고정적으로 연주하는 레귤러 긱(regular gig)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재즈클럽에서 연주하고 싶어서 일정을 잡아달라고 하면 이미 두 달 동안의 출연 일정이 꽉 짜여 있는 상태다. 옛날처럼 클럽에서 매일 연주할 수 있는 시절은 이미 끝났다.
- 현재 직업 재즈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략 몇 명 정도 될까?
한 300명은 족히 될 것이다. 현재 외국에서 유학 중인 학생들이 3~400명 정도 되니 수 년 안에 그들이 전부 국내에 들어오면 국내 실용음악과 출신 연주자들까지 더해져 숫자는 급격히 불어날 것이다. 연주자는 급격히 늘어나는데 클럽은 하나 둘씩 문을 닫는 추세고........큰일 났다.
- 그래도 늘 보면 바쁘게 생활하는 것 같다. 일주일의 일정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네 군데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일주일에 1~2회 정도 클럽에서 연주한다. 대구에 있는 대학에도 출강을 했는데 시간을 너무 빼앗겨 이번 학기부터는 그만 두었다. 그 시간에 내 작품을 쓰거나 연습 시간을 더 가질 정이다.
- 이제 음반 < 디어 섬원 >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선 음반이 스윙으로 가득 차 있다. 스윙의 매력이란 무엇인가?
글쎄.......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있어야 재즈는 더욱 재즈답게 들리는 것 같다. 재즈를 표현하는 데는 여러 방식이 있다. 보통 그것을 재즈 랭귀지라고 부르지 않나. 재즈의 말투다. 그런데 아무리 풍부한 재즈 랭귀지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스윙이 빠지면 그것은 설득력 있게,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어휘를 갖고 있더라도 발음이 좋지 않으면 상대방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음반은 네 박자 스윙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박자 실험을 하고 있다.
언뜻 들으면 변박으로 연주하는 것 같지만 실은 4/4박자를 고수한 것이다. 「나는 구식예요 I'm Old Fashioned」는 4/4로 연주하지만 중간 중간에 더블타임을 불규칙하게 삽입했다. 그래서 좀 복잡하게 들린다. 「너는 내 모든 것 You're My Everything」은 한 라인이 4/4박자의 네 마디, 그러니까 16비트인데 그것을 6/4 6/4 4/4로 변칙적으로 쪼갠 것이다. 변박이라고는 할 수 없고 일종의 트릭이다. 모두들 이런 스탠더드 넘버를 연주하기 때문에 개성을 불어넣기 위해서 리듬에 변칙을 주었다.
- 직접 작곡한 오리지널 곡들은 고전적인 형식이고 선율도 또렷하고 인상적이다. 제목에 담긴 의미도 궁금하다.
「디어 리 양 Dear Ri Yang」에서 리양은 내가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다. 「미스터 H Mr. H」는 네덜란드에서 화성학을 가르친 행크라는 이름의 교수에게 헌정한 곡이다. 그분에게서 배운 이론으로 곡을 썼다. 「베니의 곡 Benny's Tune」에서 베니는 내가 존경하는 베니 그린이다. 그 분의 연주를 생각하며 곡을 썼다. 「패닉 Panic」은 이 음반에 담긴 유일한 마이너 키의 블루스다.
- 피아노 음색이 아름다운데 특별히 신경을 쓰는가?
맨 처음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화성과 즉흥연주에만 신경을 썼다. 그런데 암스테르담에서 나를 맨 처음 가르쳐 준 선생님이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의 창립멤버 카렐 보에리였는데 정말 그의 소리가 너무도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내 소리가 얼마나 엉망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다음 부터는 멋진 소리를 내기 위해서 많이 애썼다. 명연주자의 음반을 들을 때도 저 소리가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신경을 많이 쓴다.
- 가장 보편적인, 전통적인 재즈 피아노 스타일인데 왜 유사한 유형의 피아니스트가 국내에는 별로 없는가?
글쎄, 모르겠다. 사람들이 이런 음악을 그냥 구식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나의 음악이 오히려 괴짜가 된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든다.
- 혹시 다음 음반에 대해서도 구상을 갖고 있는가?
베이시스트 진배 형과 작업을 함께 할 것 같다. 피아노 트리오 편성에 기타를 더할 예정인데 진배 형이나 나나 모두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레이 브라운이 러셀 말론, 몬티 알렉산더와 함께 만들었던 사운드를 우리도 해보고 싶다. 하지만 연주곡목은 우리가 직접 만든 곡으로 할 예정이다.
- 많은 사람들이 재즈를 듣는 것 같지만 국내 재즈시장은 여전히 척박하다. 앞으로의 전망은 어떤가?
지난 15년 간 활동을 돌아보면 정말 잘 버텼던 것 같다. 초창기에 음악활동을 같이 해왔던 선배들 가운데서도 이제는 어느덧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분들도 계시다. 음악 말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가져 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더욱이 내가 처음부터 목표로 삼았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온 것도 정말 다행이었다. 걸어온 길을 계속 갈 생각이다. 편협한 것 같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길일 것이다.
- 인터뷰, 정리: 황덕호
- 사진: 이한수
2015/06 황덕호(saturnman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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