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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애 교수 “시적인, 너무나 시적인 여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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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자기반성, 삶에 대한 무한히 예민한 감각, 모순으로 점철된 인생, 그 안에 시인들이 남긴 영롱히 빛나는 시가 있다. 어느 삶이 늘 행복하기만 하겠느냐만 특히 시인들의 삶은 평탄과는 거리가 멀었다. 약물, 음주, 누이동생과의 근친상간 끝에 자살한 게오르크 트라클, 홀로코스트로 부모를 잃고 본인은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결국 센 강에 투신한 파울 첼란, 담뱃불이 번져 화재로 죽은 잉에보르크 바하만, 반체제작가로 낙인 찍혀 추방당해야 했던 라이너 쿤체... 이러한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시인들이 짧고 혹독한 삶을 견뎌내며 시를 써내려간 시인의 집을 따라간 것은 공간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시를 알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는 전영애 교수. 그는 시인이 걸었던 곳을 함께 걸으며, 조심스레 그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얹어보면서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로 짓눌릴 때 시인들이 써내려간 시구들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몸의 고됨은 중요하지 않았고 다만 시인의 삶이 말을 건네면 그것을 받아 적는 일에 몰두했다.

 

또다시 둘러보는 나의 어수선한 삶. 거기 누운, 마흔한 살 생일을 바로 앞두고 죽은 카프카보다 나는 이미 더 살았다. 그렇건만, 언제나 번잡하게 겉돌기만 했을 뿐 무언가 정말 중요한 것은 아직도 시작도 못한 듯 어수선한 나의 삶을 통렬하게 되돌아본다. 남은 것이라도, 이제라도, 쏟아부어야 할 것 같다. 무엇인가에.(155~156쪽)

 

『시인의 집』의 모든 문장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겸손하다. 시적인 문장들이 정갈하게 놓여있다. 쉽게 책장을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은 끈끈함, 사유의 밀도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삶이라는 어려운 여정을 시인들과 함께 견뎌내는 것이 꼭 의미 있는 일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늘한 바람이 훅 끼쳐오는 계절에, 참 어울리는 책이다.


문장과 꼭 닮은 전영애 교수, 그의 ‘집’은 여주에 있는 ‘여백서원’이다. 이제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다는 그는 비록 서원을 돌보는 일로 고된 날을 보내고 있지만 언제나 감사하다. 열린 공간으로, 누구나 와서 쉼을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그 공간이 전영애 교수의 글과, 말과, 삶과 닮았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전영애-(5).jpg

 

 

시 속으로 들어간 순간들


한 사람의 독자로 꼭 드리고 싶은 감상인데요, 책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어느 시기엔가는 책을 써도, 한 사람이나 읽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마 그래서 자꾸 독일어로 글을 쓰게 됐던 것 같아요. 이 책은 진짜 우리말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썼어요. 너무나 감사해요. 한 분이 그렇게 읽으셨으면 쓸모가 있는 거겠죠.(웃음)

 

여러 해 두고 쓰인, 힘들게 만들어진 책이라고요.


여러 해 썼고, 여러 해 출판사에 있었어요. 상당 부분을 연재한 적이 있어요. 연재했던 이유가 우리말로 글을 쓰고 싶어서였는데요. 자신도 없었고요, 조금 더 좋은 그릇에 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굉장히 여러 해를 묵어있었어요. 혹시 디테일에서 약간 오래된 느낌이 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출간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어떠세요?


정말 감사했어요. 책도 정말 자기의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억지로는 안 되고요. 공들였던 책이 잘 나오니까 얼마나 좋은지요. 사실 보통 책이 나오고는 복잡한 생각들이 많이 있거든요. 이번에는 참 좋았습니다.

 

이것은 가장 아름답고 적극적인 시 읽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인의 ‘집’에 매료된 이유가 특별히 있었나요?


공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시라는 추상을 찾아간 것 같아요. 사실은 자신의 문제인데 책에 자신의 문제를 쓰진 않았어요.(웃음) 어디선가는 대답을 찾은 거지요. 어느 집에서 시인이 나를 맞아줘서 내게 상담을 해준다거나 그러진 않지만 글을 쓰면서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여서요. 세상 어느 시인이 그렇게 떵떵거리면서 잘 살았겠어요. 심지어 그러리라고 추측되는 괴테도 안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이유가 더 컸었어요. 제 자신의 추구이기도 했고, 제게 조금 남아 있을 수 있는 허영을 털어내는 일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시를 찾아갔다고 하셨는데요. 공간에서 어떤 시적 영감을 찾으셨던 건지 궁금했었어요.


그건 아니었어요. 영감을 받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그 시인들의 시를 알잖아요. 제가 그 시인이 된 것처럼 공간을 바라봤어요. 저 시구가 이렇게 나왔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시 한 구절도 굉장히 크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어요. 예를 들면 게오르크 트라클 같은 경우 정말 교회 바깥에 걸려있는 왕관이라든지, 교회 벽에 적혀있는 시라든지 이런 게 그냥 글로만 보는 것하고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건 좀 다르더라고요.

 

프라하 성에서 카프카의 『소송』어느 구절을 떠올리는 장면이 있거든요. 집과 시인이 거주한 지역들은 그대로가 언어로, 감각으로 남아 시인과 시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요.


네, 정말로요. 정말 겹겹 성 안에서 바닥은 전부 돌이고, 가끔 불이 켜져 있는데 『소송』의 현장에 빠져든 것 같았어요. 괴테 같은 경우에도 그랬어요. 그 창문에서 바깥을 내다본 삶이라는 게, 정말 시인의 마음속을 읽을 수 있더라고요.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게 보이니까 정말 좋았어요. 어디나 조금 시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계기였던 것 같아요.

 

어느 창문에 괴테가 섰을지 잠시 생각해본다. 알 수 있다. 복도 끝이 아니고 그 곁의 창문이 분명하다. 그 창문으로부터 보이는 풍경의 흡인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큰길 비아 델 코르소가 보이고, 거기서 나눠지는 골목길 하나가 전면을 채우며 아득하게 뻗어져 나간다. 거의 물가인지 지평선인지 알 수 없는, 더는 인적이 없고 나무의 모습만 어렴풋한 그 끝에까지.(중략)
나도 오래 그 창가에 서 있다. 창가에 한참 서 있다보니, 왠지 여기까지 나를 오게 한 일들 중 가장 중요한 일을 다하고 난 느낌이 든다. 다른 것들은 어쩐지 나머지 같다.(465~466쪽)

 

시인의 집을 다녀온 후 곧바로 순간순간 짧은 글들을 쓰셨던 건가요?


조금씩은 노트를 해요. 기록의 의미에서 한다기보다는 대부분은 뭐라도 끼적이면서 극복해야 되는 상황들이 많아서요. 그런 식이에요.(웃음) 제대로 르포를 쓰는 것처럼, 혹은 일기를 쓰는 것처럼 그렇게 체계적으로 한 건 아니고요.

 

전영애-(12).jpg

 

 

글쓰기, 가장 선명하게 나를 돌아보는 방법


프롤로그를 읽고 ‘에스토니아’를 소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꼭 가보고 싶어지는 곳이었어요. 중세 유럽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요.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을 조금 더 들려주세요.


가게 된 것 자체가 너무나 놀랍죠. 오래 전 이야기인데요. 그 나라가 독립해서 십 몇 년이 됐을 때 갔으니까요. 정말 어린 독립국이었어요. 재미있는 후일담이라면, 그곳 학회 언어가 영어였어요. 지금도 시원찮은데 그때만 해도 영어가 시원찮아서 영어로 바로 논문은 못 쓰고 독일어로 써서 옮겼어요. 왜 그랬는지 독일어 원고를 하도 힘들게 써서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고를 어디 투고했다가 떨어졌어요.(웃음) 당연해요. 그 학회의 포맷이 있잖아요.

 

그리고 함량이 안 되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건데요. 몇 달 지났는데 세상에, 스페인에서 기가 막힌 잡지가 하나 우송돼 왔어요. 그렇게 예쁜 학술지를 처음 봤는데요. 제가 에스토니아에서 영어로 발표했던 원고를 스페인어로 번역해서 너무나 아름다운 포맷으로 실어줬더라고요. 거기서 서툰 영어로 했던 글이 참, 아름답게 남아 있어요.

 

그것 또한 대단한 선물이었네요.


정말 선물이죠. 이미 많이 받았는데 말이에요.(웃음) 정말 그래요. 전에는 철이 없어서 그래도 누가 좀 알아주면 좋겠고, 조금 그런 생각이 많이 있었는데요. 이제 더 나이 들어 돌아보니까 받은 게 더 많고, 그것도 별로 공도 없이 받은 게 많아서 어떻게든 좀 나누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좀 들고요. 가끔씩 글을 쓰는 이유도 이제는 좀 그렇습니다. 전에는 어떤, 삶을 감당하는 방법이었는데요. 이제는 조금은 남다른 경험이 있고, 제 분야에서는 조금은 공부한 것도 있고 해서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주제넘은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웃음)

 

대단히 자기반성을 많이 하는 모습이어서요. 좀 여쭤보고 싶었어요. 글에서도 종종 그런 면이 엿보였거든요.


유학 경력이 세 학기 밖에 안 돼요. 독일어로 어린이와 대화를 했을 때 만세를 불렀어요.(웃음) 칸트, 헤겔, 괴테는 읽어도 어린이하고 말을 해봤어야죠. 어찌됐던 그렇게 독일이라는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서 혼자 읽고 그랬는데요. 자꾸 독일어로 글이 쓰여서 조금 제 글로 쓰고 싶어서 『시인의 집』을 쓴 거예요. 시인에 대한 건 그렇게 썼고, 정말 제 글은 독일어로 썼어요. 두 개가 이중적으로 나왔죠. 독일어로 쓴 건 물론 출판과는 상관없어요. 출판할 생각은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어요. 언제나 글은 일단 삶을 감당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저를 돌아보는 방법이어서요. 가장 선명하게 자기를 돌아보는 방법이에요. 좋지 않은 글이나마 글을 써왔으니까 사람이 이만큼 되지 않았나 해요.(웃음) 안 그러면 감당이 안 됐을 텐데요. 지금도 문제투성이지만요.

 

시집을 내는 것이 취미나 장기자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적은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그러면서도 책은 조금 냈는데 반성투성이에요. 시집은 더 못 내고 있어요.

 

그래도 쓰긴 쓰시죠?


그건 제 의지는 아니고요. 출간하지 않은 걸로는 조금 묶어놨어요. 다만 묶고 정리하는 동안 그 생각 하나는 완결이 되니까요. 아마 출판을 하면 조금 더 다듬어질 수는 있겠지만요. 어쨌든 씀으로 해서 또 그 시절을 감당을 하고, 그 시절이 무엇인가를 생각을 하고, 이런 한 단계, 한 단계였던 것 같아서요. 종합적으로 글 배운 건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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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열어준 사람은 카프카, 시를 열어준 사람은 첼란


“하루 반쯤의 일정, 그 이상의 시간이 내게 주어진 적은 없는 것 같다”(130쪽)고 적으셨어요. ‘그곳’을 가기 위해 힘든 여정을 보내는 장면이 곳곳에 나오기도 하지만 힘든 기억만은 아닐 테죠. 지금, 그 시간들이 어떻게 남아있는지 궁금합니다.


여러 가지 하고 사니까 학회 갔다가 여행 다니고, 많이 돌아다닐 수는 없는 입장이잖아요. 실은 공부도 다 도둑질하듯 했어요.(웃음) 학회는 완전히 야반도주처럼 다녀서 하루 남으면 감지덕지였죠. 한참 지나 원칙을 세웠어요. 학회 끝나고 하루는 비운다, 하루는 비워서 돌아도 보고, 근처도 가고, 숨도 돌린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은 하루는 비워요. 그런 시간이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에요.


예전엔 나이도 들고, 경험도 많아지면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요. 경험도 쌓이지만 쌓인 경험보다 요구가 더 높아져서 여전히 힘들어요. 내내 힘들게 있다가 돌아오기 때문에 하루 비는 시간이 무척 소중하죠. 공부가 거의 독학이었기 때문에 배울 기회가 있으면 거의 달려갔어요. 모든 게 그렇지만 얼마나 외로워요. 자기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 한 마디라도 나눌 사람이 있다면 너무나 반가워서 학회를 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누가 저렇게 기웃거리나 해서 끼워주고, 그러다가 불러도 주고, 그렇게 됐어요.(웃음)

 

쿤체 시인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는, 독일어에 뿌리내리려는 어느 먼 분단국의 목소리인 나의 시로 시작하여, 독일 분단을 거쳐, 다시 날카로운 심지를 박으며 분단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던 이데올로기의 비극과 분단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 온몸으로 겪었던 시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또다른 분단국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어 공명하고 있었다. 그 순간은, 내가 꿈꾸어본 적도 없는 어떤 순간, 삶의 절정이라 할 어떤 것이었다.(206쪽)

 

라이너 쿤체는 책에 소개된 시인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시인이자 선생님과 깊은 교류가 있는 시인입니다. 독일까지 한옥을 보낸 일화에서 볼 수 있듯 두 분의 우정이 정말 감동적으로 읽혀요. “삶의 절정”이 아닐까 라고 표현하기도 하셨고요.


정말 감사하죠. 거의 독학이었기 때문에 평생 스승을 찾아 헤맨 것 같아요. 젊었을 때는 오만하게 누가 새끼손가락만 좀 잡아줘도 될 것 같았어요. 나중에 보니 결국 혼자 하는 거였어요.(웃음) 참 감사해요. 시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요. 사람이 꼭 원하는 건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한옥 지은 이야기를 굉장히 예쁜 책으로 일곱 권을 만들었어요. ‘작은 집 이야기’라고 이름 지었는데 출판하지는 않고요. 선생님(라이너 쿤체)과 주고받은 편지들인데요. 한옥을 지으면서 나눴던 편지도 너무나 대단한 기록이어서 예쁜 책으로 만들어뒀어요.

 

멋진 책일 것 같은데 왜 출판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늘 자신이 없어요. 『시인의 집』도 그렇고요. 누가 이 책을 읽겠나, 생각이 들어서요. 책은 어찌됐건 상품이잖아요. 출판사에게 이런 책으로 장사하라고 드릴 수가 있겠나, 이런 생각이 앞서요. 책 내면 늘 좀 죄 지은 사람 같아요. 정말로요. 이러면 책을 안 내야 맞는 거잖아요. 그런데 책을 많이 냈단 말이에요. 하지만 책을 냅시다, 하고 책을 낸 건 평생 두세 번 밖에 안 돼요. 그냥 공부하는 방법으로 해서 뒀다가 기회가 닿으면 냈는데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책을 척척 내는구나 하시겠지만 그렇지는 않고요. 죽을 만해야 책이 나오더라고요.(웃음)  

 

‘시인의 집’이지만 카프카가 수록되어 있잖아요. 카프카를 넣어야만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요.


참 예외적이죠. 이물질이라.(웃음) 행운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아주 큰 행운은 문학을 카프카로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인 것 같아요. 누가 골라준 것도 아니고 작심한 것도 아니죠. 그때만 해도 카프카는 너무 낯설고, 『변신』같은 건 엄두도 안 나던 시절인데요. 친한 사람은 아니고 동창 한 명이 카프카로 석사 논문을 쓰다가 세상을 버렸어요. 과로였던 것 같아요. 도대체 카프카가 누구기에 그런 일이 다 있나 싶었어요. 작품을 볼 엄두는 안 나고 일단 카프카 평전을 한 번 본다고 아주 공들여 번역을 했고요. 그때 했던 생각이, 작가는 작품으로 알아야지 작가에 대해 논한 걸로는 아니다, 였어요. 그래서 그 번역 마무리 되고부터 작품을 읽게 됐어요. 번역을 하면서 작품을 읽었죠. 카프카야 말로 그렇게 읽기 적합한, 어쩌면 그렇게 읽어야 할 작가일 거예요.


카프카에게는 문학이 삶의 대안이었어요. 결국 문학이 너무 버거워서 삶 속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했다가 언제나 다시 문학으로 돌아온 작가죠. 그렇게까지 문학에 자기를 다 쏟는다는 게 무엇인가를 알게 해줬어요. 그땐 문학공부인지 몰랐지만 문학공부의 시초였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입구를 가질 수 있었다는 건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조금 과장을 하자면 어떤 시가 카프카의 문학만큼 진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조금 들었어요. 그만큼 카프카의 문학이 아주 조탁된 시의 밀도와 강도와 적어도 같거나 더한 것이어서요. 그래서 카프카를 꼭 넣고 싶었어요.

 

넣고 싶었지만 담지 못한 작가들도 많이 있겠네요?


당연히 많죠.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더블린에서 학회가 열렸다, 한다면 더블린을 갔다가 그냥 올 순 없잖아요. 평생 읽으려고 해도 못 읽는 작품 중 대표적인 게 또 『율리시스』예요. 그걸 어떻게 읽어요.(웃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더블린에 앉아서도 『율리시스』를 못 읽으면 나는 평생 『율리시스』를 못 읽겠구나 싶었어요. 그때는 유일한 예외로 사흘 시간을 내서 더블린에서 『율리시스』를 읽었죠. 거기 쓰인 현장들이 환하니까요. 그곳에 앉아 『율리시스』를 읽었던 건 정말 너무나 좋은 기억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서 감히 쓰겠어요. 그래서 쓰지는 않았는데 그 방대한 작품의 현장이 다 보이니까 좋았죠.

 

시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대한 세계를 산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인간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참 서글프고, 서러운 감정이 많이 들었어요. 특히 비교적 길게 다룬 시인 파울 첼란을 읽으면서 그랬는데요. 선생님께서 옮긴 시 선집『죽음의 푸가』를 함께 들춰보며 읽으니 더욱 그렇더라고요. 물론 서글프고 서럽지만 반드시 필요했던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고요. 


1980년에 파울 첼란을 읽고 있는 동안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죠.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선명하게 보였어요. 안에서는 아직도 유언비어로만 돌고 이런 시점에 저는 밖에 있었기 때문에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거예요. 일제라면 상상을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마침 첼란을 우연히 읽었죠. 역사의 문제들이나 인간의 수렁, 불합리 같은 것을 감당하는 측면도 있었어요. 거꾸로 광주가 있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조금 더 가깝게 느껴볼 수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해요. 문학을 열어준 사람은 카프카라 했지만 시를 열어준 사람은 첼란이에요. 문학이 무엇인가를 정말 혹독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로 문학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게 참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문학적인 것도 있지만 역사와 인간의 모순에 대해서 치열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는데요. 기가 막힌 만행도 인간이 저지르고, 또 그런 것을 토대로 너무나 높은 정신의 결정물들이 나오는데 그것도 또 인간이 한 일이라 여러 가지 공부를 깊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글 쓰는 마음으로 사는 것


개인적인 질문입니다만 선생님께서 곳곳에 적으신 ‘시를 산다’는 감각은 어떤 것일까요? 시심을 고백한 대목이 무척 인상적이었거든요. 고백을 적어 내려간 자체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해서 미안한데요.문학 학문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전부 소설이나 시를 쓸 용기가 조금 부족했던 사람들 아닐까요.(웃음) 그 안에서 조금은 안전한 길을 간 거라서 말이에요. 그런 자기반성도 좀 있고요. 제가 스무 살 때 한 일이라고는 시 안 쓰겠다고 결심한 정도밖에 없는, 참 한심한 사람인데요. 잠깐 문단에 나가본 적이 있어요. 왜냐하면 시를 쓰고, 읽으면서 사람이 됐으니 나도 시를 조금 돌봐야 도리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었는데요. 일단 저는 아니더라고요. 안 되겠더라고요. 그냥 글 쓰는 마음으로 사는 게 어떨까 그런 생각이죠. 별 것 아니에요.


지금은 많이 뻔뻔해졌지만 돌아보면 너무나 부끄러움이 많았어요. 그런 결심을 한 건 간단해요. 학교 잡지에 글을 한 번 내봤더니 그 다음부터는 학교에 가면 속옷만 있고 서 있는 것 같았어요.(웃음) 도저히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나는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표현을 하려면 나가는 것도 씩씩하게 나가고 이래야 되는데, 소심한 것과 표현하는 것이 합쳐질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죽음의 푸가』옮긴이의 말에 보면 딸 세인이 시를 함께 추려주었다고 하고, 이 글도 읽어주었다는 작가의 말이 눈에 띄었어요. 책에는 딸에게 쓴 편지도 그대로 실으셨는데요. 세인 씨는 선생님께 어떤 영감을 주는 존재인 것 같았습니다. 


딸이 안 중요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전혀 돌보지 않았는데 잘 자라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참 좋은 친구여서요. 늘 감사하고, 미안하고 그래요. 도무지 상식적인 엄마가 못 돼서요. 

 

에필로그에 자신의 공간을 공개하셨어요. 애정이 물씬 느껴지기도 했고요. 얼마나 자주 그곳에 계세요? 그곳에 가면 ‘숨이 쉬어진다’고 하셨기에 그곳에서의 생활, 그곳에 계실 때의 느낌이 참 궁금했습니다. 


너무나 좋아서 새벽 두 시건 세 시건 몸만 뺄 수 있으면 거기를 갔어요. 아무리 늦더라도 거기를 가야 시들은 꽃을 컵에 꽂아놓으면 좀 살아나는 것처럼 살아나서 글도 쓰고 조금 사람이 제대로 돌아오는데요. 어느 날 걱정이 되는 거예요. 이 집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쩌나 해서요. 알아보니 건넌 마을에 굉장히 넓은 땅이 있어요. 아무것도 안 따지고 계약을 했어요. 그 빚을 작년까지 갚고(웃음) 그 땅이 너무 넓어서 저 혼자 쓸 수가 없기에 서원을 지었어요. 그게 여백서원입니다. 요즘은 주경야독이 극에 달했어요. 그럴 듯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아무도 이렇게 살기는 싫을 거예요. 노동이 좀 심하게 과합니다. 오셔서 보시면 알아요. 넓어서 일이 많아 낮에는 일을 많이 해야 하고요. 서원지기 한다고 제가 본업을 다 제쳐놓을 수는 없으니까 밤에는 또 일을 하고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일단 감사해요. 서원은 함께 사는 공간으로 생각하니까 내가 좀 힘들어도 감당이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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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전영애 저 | 문학동네
삶은 어쩌면 평생에 걸쳐 안주할 단 하나의 집을 찾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힘겨운 대낮의 일상을 마치고 어둑해지는 길들을 지나서, 마침내 돌아가 곤한 몸을 누일 장소.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고 부른다. 집이 없는 자에게는 휴식이 없다. 주변을 온통 경계하느라 잠조차 편하게 잘 수가 없다.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자라 할지라도, 그날 밤의 거처를 생각하며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몸과 마음을 쉬게 할 곳. 든든한 식사와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곳. 그리고 마침내 구원받을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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