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음악계에서 톱스타 못지않게 분주한 인물이 기타리스트 함춘호다. 연주자 개인적 명망이 높아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데다 무수한 가수들이 수십 년간 변함없이 자신의 노래 혹은 공연에 기타 세션을 요청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연주가 브랜드임은 얼마 전에도 국악 관현악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국악 산조와 피아노 협주곡의 접점을 찾는 <산조하조(散調何造)> 무대를 재즈 피아니스트 로랑 권지니와 협연한데서 알 수 있다. 세시봉의 주역인 송창식 공연의 단골 세션으로 그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세션 플레이어로서의 정점을 알리는 사례일 것이다. 이 공연에서 그의 위치는 세션이 아니라 거의 '듀엣'급이다.
송창식만이 아니라 자신의 백업밴드가 없는 스타가수들은 거의가 함춘호 기타에 신세를 진다. 세션 연주자로서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말까지 전성기를 누리면서 매년 국내 차트 순위 20위권에 오른 히트작의 기타연주를 도맡았지만 그의 이름은 듀엣 '시인과 촌장'의 멤버로도 찬란하다. 현재 한국연주자협회와 기독음악인연합회의 회장이면서 서울신학대학교의 교수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경기 부천 소재의 서울신학대학교를 찾아가 그를 만났다.
30년이 넘게 음악적 중심을 레코딩 세션 활동에 두는 이유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기에 자유기질도 있고 각자 선호하는 음악적 색채가 있죠. 세션 활동을 좋아한다는 것은 '특정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겠다'라는 고집에서도 기인합니다. 밴드에 일원으로 있다 보면 음악에 대한 대중적 통념에 사로잡히게 되요. 시인과 촌장을 떠올려보죠. 그 시대 음악 중심이 포크였기에 포크밴드라 규정되었지만 되돌아보면 저희가 과연 포크였는지 자문합니다.
사실 시인과 촌장 LP를 들어보면 다양한 스타일이 혼재하는 작품이지요. 그럼에도 시대 때문일까요, 함춘호 옆에는 '포크 기타리스트'라는 수식어가 아교같이 따라붙습니다.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각인을 벗어나기 참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 수식어 덕분에 좋은 세션의 자격을 갖춘 것 같기도 합니다. 세션을 하며 음악을 섬세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남다른 희열을 느꼈습니다. 아직까지 스튜디오를 고집하는 이유 또한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저는 공연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 숨 쉬는 퍼포먼스가 뛰어난 아티스트도 존경하지만 음악 내용의 완성도로 감동시키는 뮤지션을 추구해요.
저도 1991년 제작자로서 세션으로 함춘호씨를 요청한 기억이 있습니다. 포크곡이 아닌 블루스 풍 「꿈꾸는 도시」(박헌종 노래)를 맡겼는데 참 기분 좋은 작업이었습니다. 세션 맨은 제작자 혹은 가수와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친 시간이었죠.
세션을 한다는 것은 대중에게 알려지기 참 힘든 일입니다. 연주인으로서 기능만 가지고 있다고 세션을 시작할 순 없어요. 클라이언트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여유, 나아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식이 꼭 필요합니다. 세션을 하는 아티스트들은 다들 건축공이라 생각합니다. 음악가라는 개인이 정말 살고 싶은 집을 지을 때 그 집을 지어주는 시공자 역할이죠. 저는 평소 일주일에 15건 이상 세션 요청이 들어오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2~3곡을 합니다. 그래도 시간적여유가 부족해 음악적 교류와 공감대형성이 점점 힘들어져서 아쉽습니다.
제작자와 음악적 비전의 차이로 충돌한 사례가 있었는지
아주 많죠.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하는 고민입니다. 그걸 잘 풀어나가는 방법을 많은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데이터로 체득했어요. 충돌했을 때 가장 편한 방법은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에요(웃음). 하지만 저는 '관계의 미학'을 염두에 두고 힘들더라도 노력해서 맞춰주는 편이에요. 저도 사실 제작자가 '불가능한 연주'를 요구할 때는 '그것보다는 이게 맞다.'고 우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확고한 고집이 없는 제작자라면 최대한 제 의견을 맞춰주더라고요. 최대한 이런 상황은 자제하죠. 제 주장만 고집했으면 음악적 시야가 매우 좁았을 겁니다. 제작자들이 요구하는 것에 맞추면 일종의 음악공부가 됩니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공부를 통해 독특한 개성을 가진 하나의 주도적 아티스트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이었어요.
30년 세션 인생의 하이 포인트를 꼽아볼까요.
무엇보다 김광석과 함께 작업했다는 것은 역사적 축복이죠. 3집 < 나의 노래 >앨범 전체, 그 중에서도 곡 「나의 노래」가 떠오르네요. 광석이는 그 자체가 소리꾼이죠.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 이렇게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노랫말을 여과 없이 전달하기 어디 쉬운가요. 원래 가수가 세션들 반주녹음과정에서 연주하기 편하도록 가이드녹음을 해놓잖아요. 그 단번에 녹음한 가이드 보컬을 앨범에 그대로 쓰는 그런 가수에요.
지금도 활동하는 아티스트들 중에서는
그 후에 발라드 시대가 열렸죠. '이문세 이영훈' 시대 앨범을 전부 참여했어요. 현장에서 연주하면서 영광이라는 느낌이 들었죠. 또 대전에서 올라온 신승훈이라는 신예를 만났을 때가 기억나네요. 아침에 녹음을 시작했는데 밴드가 자리 잡고 마이크를 갓 잡은 신인가수의 설렘 가득한 눈빛을 잊을 수 없어요. 그리고 울려 퍼지는 「미소속에 비친 그대」의 '너는 장미보다 아름답지 않지만...' 첫 대목이 시작되는 순간, 머리가 맑아지며 '아'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김종서의 「겨울비」를 녹음할 때도 비슷했습니다. 이런 곡들이 실제로 빅 히트하는 것을 보며 기뻐했던 추억이 남습니다.
공연으로도 여러 역사적 순간을 함께했죠. 기억에 각인된 공연은 고른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시인과 촌장 시절 '꿈나무 소극장'에서 2집 < 푸른 돛 >의 앨범 수록곡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진행한 공연이에요. 「고양이」 시작 부분 무대에 조명이 켜지지 않아 베이스를 맡았던 조동익이 전주만 계속 반복해 연주했죠. 최초로 관객 만 명 시대를 연 이승철 체조경기장 공연에서는 첫 곡 연주를 시작할 때 앞에서 울리는 함성이 연주소리와 맞닥뜨렸을 때 소리가 감쇄되는 현상을 처음으로 느꼈어요. 그리고 지오디(god) 전국공연을 함께 하며 새로운 세대의 세계에 돌입했음을 실감했죠.
송창식 선생님과 함께한 무대는 전부 잊을 수 없습니다. 2012년 호주 오페라하우스에서 했던 세시봉 공연에서 시작 전 스텝들이 우리를 한국의 올드 팝 가수로 여겨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공연이 끝난 후, 그들은 송창식을 보며 저런 소리꾼은 처음이라 말하며 경탄했죠. 가장 최근 공연으로는 올해 5월 달에 CCM 가수 송정미와 함께 한 카네기홀 공연이 대단했습니다.
송창식과의 공연은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음악적 거장과 함께해도 밀리지 않는 기타. 훌륭한 판소리꾼이 제대로 된 고수를 만난 느낌이었어요.
사실 저는 송창식 음악을 듣고 기타를 시작하고 노래한 '송창식 키즈'에요. 심지어 제가 같은 고등학교에서 같은 과(성악)를 전공한 후배죠. 처음 만났을 때는 영웅을 만나 정말 떨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분은 음악을 울타리로 본다면 이미 뛰어넘으신 분이죠. 최근에는 일종의 정형화된 리듬을 강제하는 '밴드'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 기타리스트인 저와 듀오를 제의하셨어요. 저희는 같이 음악을 하지만 같이 논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합니다. 제 기타의 선을 타며 리듬을 가지고 노는데 제가 막 애가 타더군요. 이 맛에 저도 음악 하는 게 아닐까요? 최근에는 전인권 선생님께서 '송창식, 전인권, 함춘호 셋이 명작을 만들었으면 한다.'라고 제의하셨어요. 저도 극진한 예우를 갖추며 같이 음악하고 싶어 잘 조정하고 싶어요.
함춘호 기타의 비밀이자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나요
어릴 때부터 함께해온 친구의 비밀, 매우 어려운 질문이네요. 답을 하자면 기타로 얘기하기, 스토리텔링을 살리는 겁니다. 사실 기타의 생명인 블루스는 간단하게 펜타토닉 스케일에서 결정이 납니다. 그렇기에 함께 하는 밴드들의 구성이 중요하고 뭐랄까 연륜이 중요해요. 저의 경우는 스토리텔링을 위해 구성을 간단히 하는 것을 선호하죠. 기본적으로 기타, 드럼, 베이스, 건반 그 이상이 들어가면 경험적으로 과욕으로 나타나곤 하더라고요.
기타리스트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노래하듯이 기타를 치면 좋겠다.' 노래방에서 노래할 때는 분위기 잡고 부르면서 기타만 치면 작아지고 맹맹한 느낌이 들면 금물입니다. 결국 공연장에서 세션은 노래를 따라가기에 그 노래가 주는 느낌을 기타가 잘 살려줘야겠죠. 이런 것들을 후배, 그리고 학생들에게 전달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벌써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한지 5년이 넘었네요. 화려함도 좋지만 '생각'을 하면서 음악을 할 수 있게끔 현장경험이 많은 교수들과 함께 특화된 교육을 하고 있어요.
하덕규씨는 함춘호를 두고 '내가 끼적거린 시를 연주로 풀어준 사람이지'라고 평했습니다. 단 한 장의 앨범이었음에도 '질기게' 시인과 촌장의 일원으로 기억됩니다.
당연히 감사하죠. 시인과 촌장을 하기 전엔 전인권 선생님과 듀오를 하고 있었죠. 그 때도 형용할 수 없이 좋았지만 하덕규를 만나서 음악을 하며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 만나기 전엔 하덕규의 너무 세련된 느낌을 질투하기도 했어요. 저는 투박한 질그릇이었으니까요. 그러다 '종이비행기'로 활동하던 1979년, 하덕규와 함께 대구 수성호텔에서 기타연주를 하게 되었어요. 그러자 지금껏 그려보지 못한 새로운 스타일의 명작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이를 함께 그려나간 건 커다란 행복이었죠. 아쉽게 그 진척이 마감된 건 너무 아쉽습니다. 당시 전 '연주'에 초점이 있었기에 상호 지향이 균형을 맞추지 못했던 거지요.
생각보다 젊은 세대들도 시인과 촌장도 많이 알고 함춘호를 자주 언급하던데요.
원래 공연장에 서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어요. 완벽주의 적 측면에서 그 정제되지 않은 느낌 때문에 무대를 등한시한 경향이 있었죠.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다보니 공연 세션으로 참가할 때 주도하진 못하더라도 끌려가지는 않은 수준이 됐다고 봅니다. 그러다보니 가수 뒤에 숨기보다는 '콜라보'를 하게 되어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역량이 예년에 비해 배가 되었죠. 그걸 즐길 줄 아는 젊은 세대도 좋아해준다고 봐요.
우리나라에서 세션으로 성공하긴 정말 힘들죠.
한국 연주자 협회 회장을 6년째 맡고 있습니다. 그 동안 작지만 정기적으로 세션만의 공연도 기획했죠. 제 모토는 '연주자가 폼이 나야 한다.'에요. 힘든 만큼 좌절감에 빠지는 후배들이 많은데 자존감을 잃지 말고 대접받는 것을 자연스레 여기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음악인들도 세션을 돈 주고 쓰는 객체로 여기지 않고 대우해줘야 하고요. 사실 세션들의 아이디어가 음악이 완성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요. 세션과 음악 평론이라는 분야도 '순수함'이라는 측면에서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평론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역사로 남기는 작업이죠. 우리도 순수하게 좋은 곡들을 역사로 남깁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요즘 대한민국 대중음악이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첫째, 대중음악이 편집광적 음악이 되고 있습니다. 음악을 제작할 때 주안점이 감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흥행을 위해 계획된 시스템에 맞추는 것 같아요. 그런 곡에 참여할 땐 제 기타도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뭐 요새는 밴드 사운드를 다 컴퓨터로 처리하기도 하죠. 우리가 연주하던 민족적 감성들, 예를 들어 애환과 슬픔, 그리고 기쁨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야기되는 두 번째 생각, 그 안타까움을 승화시켜 발전해 나가야해요. 유행과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대중의 감성과 멀어지기에 도태됩니다. '내 분야에서 난 최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 제 음악을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잃지 않을 겁니다. 유행은 돌고 돌아요. 현재 유행도 언젠가는 또 대체되어 제게 유리한 시대가 오겠죠. 최근 영화< 인턴 >을 인상 깊게 봤어요. 끝나고 나오면서 든 생각, 음악가에게 은퇴는 없습니다. 아마 죽는 날이 제가 은퇴하는 날이겠죠.
인터뷰 : 임진모, 이기찬
사진 : 이한수
정리 : 임진모
2015/10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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