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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특집] 황인찬 “한 번에 읽히는 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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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여버린 생각에서 달아나기. 시인 황인찬과의 인터뷰는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고, 또 끝을 맺었다. 시와 시인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 좋은 시에 대한 정형화된 기준, 그 모두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시인은 바라고 있었다. “새로운 시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평단과 독자들을 주목시켰던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는 그 ‘조용한 변혁’의 기반 위에 세워졌다. 이후 3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에서도 황인찬은 ‘남다른’ 시선과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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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으로 현 시대를 산다는 건 ‘손해 보는 장사’


시인에 대한 편견 혹은 고정화된 이미지가 있다고 느끼시나요?


(시인이) 왜 이렇게 젊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대부분 시인은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 젊은 시인이라고 하면 식민지 시대의 시인들을 떠올리시는 것 같아요(웃음). 지금 21세기에 젊은 사람도 시를 쓰고 있다는 걸 잘 생각해 보지 않으신 것 같아요. 진지함이나 엄숙함에 대한 생각들도 있죠. 시인은 매일 술 마시고 사랑에 죽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웃음). 먹고 살기 힘들어서 술은 좋아해도 잘 못 마시고요. 돈이 없어서 죽고 살겠지, 사랑에 죽고 살겠어요? 다들 똑같이 사는데 그 중에 시를 쓰는 것뿐이죠. 그렇다고 그런 시선들 자체가 불편하지는 않아요.

 

시라는 문학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요?


맞아요. 항상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이에요. 독자들한테는 시인이라고 하는 것도 업데이트가 안 되고 있는 셈이죠. 그 자체는 크게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기도 한데, 시 쓰는 사람들에게 벗어나기 어려운 지점이 되는 것 같기는 해요. 생활적인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시인이 왜 그런 일을 해?’라는 태도들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다들 먹고 살기 힘든 와중에도 열심히 입에 풀칠하면서 시를 쓰고 사는 거니까, 시인처럼만 살려고 하면 굶어 죽거든요. 그 외에도 시란 이런 것이다, 이런 시가 좋은 것이다, 라는 생각들은 시 자체 내부에서도 업데이트가 안 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시다움, 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게 생각보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고정관념들의 자리는 저한테 조금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지점들인 것 같아요.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시를 ‘좋은 시’라고 생각할까요?


사람들은 어떤 시도 좋은 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고요. 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관심이 없기 때문에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만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요. 이런 식으로 말하면 너무 젠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조심스러운데, 어떤 것이 좋은 시라는 생각을 딱히 갖고 있지 않으니까 옛날의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는 것 아닌가 싶어요. 몇 년 전부터 하상욱 시인의 작품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하상욱 시인은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모든 것들이 아주 적절하게 배합된 새로운 양식을 발명해냈다고 생각해요. 짧고, 분명하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고, 잠깐 재밌을 수 있고, 공감을 할 수 있어요. ‘좋아요’를 누르기 좋은 건데, 그게 지금 시대가 원하는 텍스트의 형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보다 조금 더 불편해지고 복잡해지면 그때부터는 여러 종류의 삐걱댐이 발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시인에게 있어 반가운 현상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쓰는 사람으로서는 ‘좋아요’를 누를 수 있는 시를 쓰는 것만을 욕망하진 않는 것 같아요. 저한테 있어서도 독서, 시 쓰기, 시 읽기의 즐거움은 충돌에서 오거든요. 텍스트와 제가 부딪치게 돼서 어긋나는 불편한 순간들, 그 충돌들이 문학을 시작한 이유이고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예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식의 불편함을 만들어내는 걸 원치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어떤 괴리가 발생한다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그건 저와 독자의 괴리라기보다는, 현대 예술로서 시와 독자들이 기대하는 시 사이의 괴리인 것 같아요. 시뿐만 아니라 모든 고도화된 예술 양식들이 마찬가지인데, 그건 그것대로 지켜가는 동시에 다시 맞닿을 수 있는 면을 고민하는 방향으로 형태를 바꿔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요즘 부쩍 시의 독자가 늘어난 게 느껴진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시를 읽기 시작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SNS에서 많이 체감하시나요?


네, 비교적 그런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수치가 늘어난 건 아니에요. 일단 독서 시장이 10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반 토막이 나버린 상황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시가 갖고 있는 위상이 변했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제는 한 편의 시가 온전히 소비된다기보다 한 구절이 떼어져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게 되면 어떤 충돌도 가능한 배제되고, 마음을 울릴 수 있는 한 마디의 문장에 집중하게 되죠. 그런 식으로 20대를 중심으로 젊은 층에게 조금 더 쉽게 퍼지게 되고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자체에 대해서는 흥미로우면서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점차 시인들을 알아가게 되고 시집도 읽게 되니까요.

 

이런 시대에 젊은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손해 보는 장사인 것 같은데요(웃음). 20대 초중반에 같이 데뷔한 친구들이 있는데, 막 데뷔했을 때는 시에 대한 이야기도 더 많이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20대 후반에 접어드니까 확실히 먹고 사는 이야기를 많이 하게 돼요. 시인이 아닌 누구를 만나더라도 크게 다르진 않은데, 너무 갑갑한 거죠. 시를 아무리 열심히 쓰고, 잘 쓰고, 모두에게 사랑 받는 시인이 돼도 먹고 사는 게 해결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젊은 시인으로 이 시대를 살려면 자력구제가 급선무인 것 같아요. 이 또한 문학만 그런 건 아니죠. 거의 모든 현대 예술들은 그런 식이니까요. 그런데 먹고 살기 힘들다고 징징대도 결국 제가 선택한 거잖아요. 다른 일을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시를 쓰는 건, 저에게 있어서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중요한 건 아니라는 거겠죠. 시를 쓰는 게 즐겁고, 제 시를 보고 사람들이 좋다고 말해주는 것도 즐겁기 때문에 시를 쓰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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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어야 할 곳은 생경함과 놀라움의 자리


이번 시집에서 「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는 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변화를 겪으면 ‘이제 좀 시인 같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걸까요?


그런 통과점은 딱히 없는 것 같고요. 스스로가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 같기는 해요. 계속 시를 쓰고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과정들 자체가 시인임을 자각하고 내재화하는 과정인 것 같은데요. 「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는 시인이라고 하는 자리를 빨리 도망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쓴 거예요. 시와 시인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나 관념에서 빨리 도망가는 게 지금 해야 될 일이겠다고 생각됐거든요. 첫 시집을 내고서 반성문 내지 포부 밝히듯이 쓴 시들이 몇 편 있는데 「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시인을 그만두겠다거나 시인처럼 살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시라고 하는 것 혹은 시적인 것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무시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게 된 거예요.

 

매일 커피숍에서 밤새워 시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곳도 편해져서 집중이 잘 안 된다고 하셨는데요.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시를 쓰시는 이유가 있나요?


편하다는 게 내 방 같다는 이야기거든요. 방에 있으면 늘어지게 되지, 허리를 세우게 되지는 않잖아요. 제가 원래 산만하고 오래 집중을 잘 못하는 편인데, 방 안에서는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으니까 일의 효율이 떨어지거든요. 약간 어색하고 불편한 쪽이 머리가 굴러가기가 좋아요. 저는 도서관처럼 완전 조용한 곳에서는 집중이 전혀 안 되고요. 약간 시끄러운 곳이 좋아서 카페를 찾아간 것도 있어요. 어쨌든 카페는 내 방이 아니니까 누울 수 없잖아요(웃음). 누울 수 없다는 게 너무 편한 것 같아요. 조금 긴장을 만들어야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편하면 일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이 생경하고 새삼스러운 태도가 시를 쓰기 좋은 태도”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인가요?


그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은데요. 공감을 한다는 건 ‘난 이걸 알아’라는 태도잖아요. 그러면 생각은 거기에서 멈춰요. 어떤 생각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시의 자리는 공감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생각을 만들어내려면 ‘이게 내가 알던 건가? 내가 알던 게 이게 맞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생경함의 자리, 놀라움의 자리로 가야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좋은 지점이라는 생각은 굳어져 온지 오래돼서, 한편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는데요. 저 역시 그런 이상함과 생경함에 끌려서 시를 시작하게 됐으니까, 끊임없이 공감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게 제가 시를 만들어내는 방식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쓴 시가 ‘이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라고 생각되는 건 아니기도 해요(웃음).

 

『희지의 세계』는 이자혜 작가의 만화 『미지의 세계』에서 제목을 빌려왔다고 밝히셨는데요. 두 작품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이자혜 작가님 팬인데요. 『미지의 세계』라는 만화와 (표제작) 「희지의 세계」라는 시가 관계 있는 건 아니고요. 『미지의 세계』라는 제목이 좋아서 갖다 쓴 건데, 제가 착각을 해서 미지가 희지로 바뀐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게 오히려 제 시랑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보다 미지의 자리가 폭이 넓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미지는 무한한 거지만 결국에는 하나인 거나 다름없거든요. 그게 희지로 바뀌어버리는 순간 오히려 더 많은 뜻이 생겨나는 것 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희지라는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폭을 갖게 되잖아요. 그 지점이 너무 재밌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르는 것보다 착각을 하는 게 더 좋고, 착각을 하는 게 새로운 것들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누구인가요?


이승훈 시인을 제일 좋아해요. 좋아하는 시인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승훈 시인 이야기를 꼭 해요. 이미 세상을 떠난 시인들 중에 한 사람을 꼽으라면 어려울 것 같은데, 살아있는 시인 중에 제일 좋아하는 시인은 이승훈 시인이에요. 그 분이 만들어 놓은 아주 확고하면서 아주 불분명한 지점을 너무 좋아하고요. 진짜 사랑하는 시인이에요.

처음으로 읽은 시집은 무엇이었나요?


제일 처음 읽은 시집은 기억이 잘 안 나고요. 저는 문창과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시를 읽었거든요. 그 전까지는 소설만 읽었고 원래 소설을 쓰려고 했었으니까요.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시집을 읽었던 건 아니고, 문창과에 들어왔으니까 소설을 쓰더라도 일단 시를 좀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본 것 같아요. 도서관에서 종종 시집 빌려서 보고 했어요. 제가 처음으로 읽고 나서 ‘이거 좋다’라고 느꼈던 시집은 신대철 선생님의 『무인도를 위하여』였어요. 너무 아름답고 탁월한 시집이에요. 그걸 보면서 ‘시가 이렇게 좋은 느낌이 있는 거구나’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어요. 그 시집이 좋았기 때문에 이후로 조금씩 더 읽어나가면서 눈이 넓어지게 됐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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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시키는 대로 쓰면 자위하는 작품만 나올 뿐


시인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일은 감성이 무뎌지는 것 아닐까 싶은데요. 어떠신가요?


감성이 무뎌지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어요. 감성을 가진 말들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나오는 거지만 동시에 머리를 쓰는 일이에요.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글을 쓰는 건 지극히 머리를 가동시키는 일이에요. 가슴으로 쓰면 자기만 기쁜 글이 나와요. 제 시집에도 말랑말랑한 부분들이 많이 있는데, 그건 당연히 머리를 쓰는 거예요.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가슴이 시키는 대로 쓰면 나 혼자만 기쁜, 자위하는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제 생각에는 감성으로만 글을 쓰는 건 미숙한 것 같고요. 프로는 머리로 하는 것 같아요.

 

작가 지망생들에게 지표가 될 법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 분들도 알고 있을 걸요. 알아도 머리로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을 못하거나, 자기 진정성이 포기가 잘 안 되는 걸 거예요.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욕구가 아닌 나의 감성에 충실하기 위해서 예술을 선택한 거라고요.


그러면 일기를 많이 쓰시면 될 것 같아요. 뭔가를 만들어내는 건, 어쨌든 소통 행위예요.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쓰고 나만 만족하는 거라면 소통이 아니고 일기죠. 심지어는 일기도 나하고 하는 소통이잖아요.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해서 잘 되는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운 좋은 사람이거나, 혹은 그런 척을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예요.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거나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죠.

 

시를 쓸 때 독자에게 전할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메시지를 던지는 건 정말 의미가 없어요. 아주 일시적이고, 심지어는 내가 무슨 메시지를 갖고 있었는지 나도 잘 몰라요. 그런 건 다 착각이에요.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고른 말이, 오히려 그 말을 선택하는 순간 훼손돼요. 손상되고 아무것도 아닌 덜 떨어진 종류의 말로 메시지가 갈 수밖에 없어요. 말하자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오’ 하고 짚어서 전달하는 게 아니고, 그물을 더 넓게 펼쳐서 던지는 거예요. 그러는 편이 원래 내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 생각, 진정성을 덜 훼손시켜요. 창작이란 깎아나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훼손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면 메시지를 깎지 말고 구조를 깎아야 되는 거예요. 구조가 알아서 메시지를 더 크게 만들거나, 더 다양하게 만들거나, 더 힘 있는 형태로 만들어줄 테니까요.

 

구조를 깎는다고 하셨는데요. 그런 이유에서 다른 장르의 문학이 아닌 시를 선택하신 건가요? 시는 간결한 구조로 많은 여백을 확보하잖아요.


어떤 장르든 구조를 통해서 확장되지 않은 여백을 만들어 두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다만 시는 조금 다른 방식을 갖고 있는 게, 정보를 적게 주는 것이 곧 정보를 많이 주는 일이 돼요. 디테일이 길게 늘어날수록 그물이 아주 작아지는 거죠. 언어는 애매한 거잖아요. 내가 기쁘다고 말을 해도 상대는 어느 정도의 기쁨인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요. 그런데 불명확한 거라고 해서 가능한 수사를 모두 동원해서 묘사해 버리면, 오히려 더 전달이 안 돼요. 언어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정말 이상한 지점인데요. 소설은 더 큰 구조 단위로 소통이 오고 가는 거니까 그런 면이 조금 덜해요. 그런데 시가 활용하는 언어는 다른 매체들보다 조금 더 애매한 측면이 있죠. 불확정적이고 임의적인 매체여서, 말을 많이 하면 손해를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꼭 그래서 시를 썼다기보다는 시를 쓰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언어의 측면들을 더 의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정보를 많이 주면 오히려 정보가 적게 전달되는 미묘한 장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작가의 생각을 읽으려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희지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단초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이미 충분히 드린 것 같고요. 시를 읽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건, 시에서 활용된 언어들이 어색한 게 이유일 수 있어요. 언어의 층위나 밀도 같은 게 다르잖아요. 그 층위에 접촉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클래식을 듣거나 미술 작품을 볼 때에도 나름의 규칙이나 맥락들을 알아야 더 많은 걸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독자들은 뜻을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즐겨도 될 것 같아요. 보이는 말들만으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요. 더 많은 걸 알고 싶으면 그걸 받아들이는 화법과 독법을 공부하면 되죠. 시험공부 하듯이 공부하는 게 아니고요. 그냥 많이 보면 어느 순간 읽고 만들어지는 법들이 머릿속에 맞춰져서 경향성 같은 게 생기는 거예요.

 

“술술 읽히되 뭔지는 금방 안 들키는 시를 쓰고 싶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제가 시를 쓸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읽었을 때 바로 쓱 읽혀야 된다는 거예요. 시의 층위가 미로라고 생각하면 출구가 있어 보이고, 암호가 있어 보이면 암호를 푸는 순간 다 알았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 순간 생각이 멈춰요. 그래서 저는 한 번에 읽히는 시를 쓰는 게 좋아요. 시가 가진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니까요. 텍스트 자체는 쉽게 읽히되 그것이 무엇인지는 들키지 않게 만들고 싶은 거죠. 그게 제가 시를 쓰면서 갖고 있는 태도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님께서 가장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독자들은 가장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웃음)


그렇다고 완전히 미궁에 빠뜨리는 건 아니고요. 결국에는 말과 생각들이 모여 있는 거라서 ‘이런 경향의 이야기구나’라는 건 충분히 받아들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거기까지면 됐죠(웃음). 영원히 풀리지 않는 비밀을 두겠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도 읽을 수 있지만 다르게도 읽을 수 있다는 태도에 훨씬 가깝거든요. 제가 생각하기에 답이 없다는 건, 처음에는 이것이 답이었다가 다시 보면 다른 게 답이 되는 거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확정 짓기 어려운 상태, 애매한 상태에 도달하는 게 시가 오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어느 방향이어도 제가 생각한 큰 방향성 위에 같이 놓여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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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지의 세계황인찬 저 | 민음사
이번 시집 『희지의 세계』를 통해 시인은, 한국문학사와의 대결에 돌입한다. 그것은 ‘매뉴얼화’된 전통과의 다툼이며, 전통에 편입하려는 본인과의 사투이기도 하다. 주체가 퇴조한 동시대 젊은 시인의 움직임 중에서 황인찬의 시는 돋보이는 사유와 감각을 보여 준다. 치밀한 싸움을 멈추지 않는 젊은 시인 황인찬이 구축한 『희지의 세계』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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