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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 “세상을 단순하게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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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들려주었던 작가 채사장이 『시민의 교양』으로 돌아왔다. 복잡한 세계의 구조를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정리한 이 이야기는 보통의 시민들을 위한 것이다. 세금, 국가, 자유, 직업, 교육, 정의 등 우리 앞에 쌓여있는 서 말의 구슬을 단 두 줄의 실로 일목요연하게 꿰어냈다. 시장의 자유를 보장할 것인가, 정부의 개입을 강화할 것인가. 선택에 따라 정부의 형태, 경제 체제, 노동과 교육 환경이 달라진다. 『시민의 교양』은 그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보수와 진보를 나누기 전에, 세금 인상과 노동 유연화를 결정하기 전에, 시민이라면 응당 집어 들어야 할 교양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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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단순하게 볼 필요가 있어요


이번 책에서 세금, 국가, 자유, 직업, 교육, 정의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셨는데요. 이 모든 이야기를 ‘시장의 자유’와 ‘정부의 개입’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풀어내신 게 놀랍습니다.


시장의 자유와 정부의 개입으로 세계를 정리하는 내용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하 『지대넓얕』) 1권에 나오기도 하는데요. 굳이 찾아낸 게 아니라, 그것이 본래 기본적인 구조라고 생각해왔어요. 실제 현실은 다양한 사람들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복잡하게 살이 붙어서 그 구조가 보이지 않는 거죠. 시장의 자유, 정부의 개입이라는 용어가 낯설기는 한데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개인의 재산권을 계속 인정해줄 것이냐, 아니면 빈부 격차나 소득 격차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냐’하는 것이 기본적인 내용이에요. 재산권 보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측면에는 부유층의 이익이 있을 거고, 분배와 관련해서는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이 있을 텐데요. 두 계급의 대립은 현대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어져 왔어요. 부유층의 재산을 지켜주는 방향으로 국가를 운영하다가 몇 년 후에는 대부분의 대중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바꿨죠. 특별한 구조를 찾았다기보다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가장 본질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완독률이 높은 책을 쓰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시민의 교양』에서 그 목표를 달성하신 것 같습니다(웃음). 스토리텔링 형식을 더하셔서 결말이 궁금해지더라고요.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분들이 지치지 않고 끝까지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책장이 쉽게 넘어가게 하려고 여러 군데 장치를 했고요. 일부러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책은 선택의 순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을 맺습니다. 우리 사회에 시민으로서 선택을 유보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로는 ‘대중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고, 두 번째로는 ‘왜 선택을 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대중을 두고 어리석다거나 잘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사람들을 모아 놓으니까 문제가 되어 보이지만, 실제로 한 명 한 명을 만나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의 양이 어마어마하거든요. 그러니까 집단 지성이 계속해서 옳은 방향을 선택해 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왜 선택을 하지 못할까’를 생각해 보면, 복잡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무엇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단순화되어 있어야 하는데 복잡한 거죠. 미디어에 나오는 피상적인 이야기들을 보면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기준점을 잡아주지 않잖아요. 그래서 세상을 조금 단순하게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고 『시민의 교양』도 그런 목적에서 쓰게 됐어요.

 

“세계를 복잡하게 이해하려다 지치지 말고, 세계를 관통하는 단순함에 집중해야 합니다”라고 쓰신 문장이 기억나네요.


예를 들면 정치적인 선택을 할 때, 정당을 선택하는 기준도 사람마다 달라요. 어떤 사람들은 청렴도를 기준으로 선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선과 악으로 나누려고 하기도 해요.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계속 주어지기 때문이죠. 미디어에서는 정치인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있으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지 헷갈리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시민의 교양』에 나와 있듯이 세금과 복지 문제가 기준이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조금 돌아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복잡한 지식들 말고, 가장 근본적인 최소한의 지식들에 대해서 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시민의 교양』에서도 복잡한 이야기들을 단순하게, 어려운 이야기들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얕음에서 깊음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어떠셨나요?


실제로 그랬어요. 『지대넓얕』때 얕은 지식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뭔가를 보여줘야겠다 싶었고, 어렵고 심도 있게 써보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이미 많잖아요. 깊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신데,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분야만 이야기하려고 해요. 그렇지 않은 분야에 대해서는 잘못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러다 보니까 시민들만 힘든 상황에 놓여있거든요. 그 많은 전문가들의 생각을 종합해야 되는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시민들한테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죠.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잘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 대부분의 독립된 분야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걸 말해주는 사람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결과적으로는 『지대넓얕』에 썼던 방법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분야들을 연결시켜서 최대한 쉽게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고민을 많이 할 것 같아요. 어깨에 힘을 빼고 많은 분들이 기대하시는 방식으로 글을 써나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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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는 탈탈 털린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보수적 자유주의자에 가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민의 교양』에서 설명하신 내용에 비춰보면, 보수란 시장의 자유를 보장하는 야경국가가 세금을 적게 걷고 복지 수준도 낮게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요.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이 이야기를 하면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시거든요. 먼저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어휘가 사용되는 방식과 전 세계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방식을 구분해야 할 것 같아요.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에 대한 논쟁이 첨예한 이유는 단순히 시장과 정부의 개입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 독재 문제, 군부정권에 대한 문제, 친일에 대한 문제가 섞여 있기 때문이죠. 제가 보수에 가깝다고 이야기했던 건, 한국적인 상황을 배제하고 일반적인 측면에서 보수와 진보를 나눌 때 보수에 속한다는 의미였어요.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은 어디에 있다고 보세요?

 

보통 자유주의적인 이념을 토대로 하면 보수라고 하고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토대로 하면 진보라고 부르잖아요. 그렇게 일반적인 개념으로써 보수와 진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누어서 생각한다면 실제로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예요. 그런데 근현대 한국사회의 역사적인 문제가 보수, 진보의 문제와 연결되어 왔기 때문에 보수라고 이야기하면 거부감이 드는 거죠. 저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보수, 자유주의자라고 밝혔던 거예요. 다만 한국의 근현대 역사를 고려하면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보수를 지지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에 대해서 이해하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한국사회에서 보수 정권을 지지하는 건 조금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시민의 교양』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많이 노력하셨잖아요. 그래서 ‘당신은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답하셨다는 게 굉장히 의외였습니다(웃음).


계속 안 했었는데, 자꾸 물어보세요(웃음).

 

당시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된다면 “부유세를 도입하고, 복지를 강화하지 않을까 한다”고도 말씀하셨어요.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자본주의라고 하면 어느 정도의 빈부 격차가 유지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의무를 준수하고 경쟁에서 노력한 사람에 대한 보상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차별할 수 있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정의라고 볼 수도 있거든요.『시민의 교양』에서 적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도 그걸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정의란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어느 정도 적절히 조율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현재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너무 치우쳐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복지를 강화하고 세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민의 교양』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없다. 노동자는 탈탈 털린다”고 하셨습니다.

 

가치가 생산되기 위해서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의 노력과 시간이 만들어낸 생산물의 총량에서 내가 배제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복잡하기도 하고 허상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그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가 했던 이야기거든요. ‘물질이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그중 하나가 임금에 대한 이야기고요. 임금에서 소외된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독특한 건 아니고,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들인 거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잖아요.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고, 임금 역시 자신과 가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쓰인다고 생각하죠.

 

그렇죠. 인간은 기본적으로 보수화될 수밖에 없잖아요. 개인은 사회보다 너무나 작고, 사회가 견고한 상태에서 개인이 등장하기 때문에, 개인은 계속해서 사회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회사라는 시스템이 있고 월급을 받는 시스템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이것 자체가 부조리하다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는 거죠. 노력을 통해 나의 월급을 더 올리는 것에서 만족하게 되지요. 이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시민의 교양』이 됐든 마르크스의 생각이 됐든, 그 부분에 대해서 누군가 쉽게 이야기해주면 그때서야 환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개인 스스로가 생각하고 극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 임금노동자의 경우에는 노동에서 얻을 수 있는 성취, 보람, 임금 모두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우리는 일하는 즐거움이나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개인과 집단으로 나누어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개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아갈 수 있어요. 비임금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요. 일에 보람을 주는 소수의 직업들이 있으니까, 그것들을 선택할 수도 있어요.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아낼 수 있는 방법들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개인적 차원에서는 일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가능한 것 같아요.

 

집단의 경우는 어떤가요?


노동자 집단의 측면에서 생각하게 되면, 그건 불가능해요. 원천적으로 안 되는 거죠.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산업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산업화는 공장의 탄생을 기반으로 하잖아요. 공장은 기본적으로 분업이 전제되어 있는 거고요. 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작업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부분인 거예요.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개인은 일의 결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 같아요. 일의 결과 전체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은 없을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시민의 교양』에서 노동자가 보상받을 수 있는 건 임금밖에 없다고 한 거예요. 문제는 실질임금이 계속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고요. 일에서 보람을 얻을 수 없는 대신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필요하니 실질임금을 높여야 하고, 빈부 격차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선택이 중요해지기 시작한다는 게 ‘직업’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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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서울(in seoul)’에 목을 매는 진짜 이유

 

‘주주 자본주의’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개념에 대해서도 설명하셨습니다. 어쩌면 노동시장 유연화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에는 이 두 가지 개념, 그에 따른 시각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본적인 마인드는 그럴 것 같아요. 개인이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해서 이것이 정의롭다 정의롭지 않다를 말할 때 ‘기업이 어떤 목적을 갖고 존재하는가’의 차이에 따라서 판단이 달라질 것 같은데요. 조금 복잡한 것 같아요. 『시민의 교양』은 현실을 추상화시켜서 단순화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단순하게 다루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것이 기업이 져야 할 리스크를 노동자에게 돌리는 거라는 내용이 ‘직업’과 관련된 장에 나오죠. ‘교육’ 부분에서는 덴마크의 사례를 통해서 노동시장 유연화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요. 이 주제는 심도 있게 논의되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의 현실과 직결된 문제이므로 합의나 대화의 장이 필요합니다.

 

덴마크의 사례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주 쉽게 생각하면 둘 중의 하나가 피해를 봐야 하는 거죠. 기업이 이익을 포기하거나 노동자가 이익을 포기하거나, 그 두 가지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정부가 중간에서 역할을 함으로써 문제를 해소할 수도 있거든요.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기업이 아닌 정부가 노동자의 고용 불안정성을 보장해준다면 문제가 조율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한 문제는 집중적으로 제대로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교육’의 장에서는 평가의 내용이 아닌 방식 자체가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셨어요. 객관식 평가에 노출된 경험이 진리관에 영향을 미친다고요.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입시 논술을 가르치다 보니까, 다행히도 객관식으로 평가할 필요가 없고, 항상 토론하고 대화하는 수업이 가능했는데요. 생각보다 학생들이 굉장히 똑똑해요. 그런데 처음에는 토론도 못하고 말을 잘 하지 못해요. 자기가 하는 이야기가 틀릴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내가 지금 모르고 있을지 모르지만 어딘가에 정답이 있을 거라는 걸 전제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생각이 객관식으로 문제를 푸는 연습을 반복하면서 습관이 되고요. 선입견이 되기도 해요. 문제는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어른이 된다는 게 아닐까 싶어요. ‘교육’과 관련된 부분에서 그런 아쉬움에 대해서 써보려고 했어요.

 

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주의적 진리관을 가진 어른”이 된다는 말씀이신데요. 우리 사회의 많은 담론들이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식으로 귀결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개개인의 시민들이 토론을 하고 대화를 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이 돼요. 그런데 자기가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빌려오려고 하는 거고요. 정치나 경제적 분배의 문제는 가치의 문제이지 정답의 문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결정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하죠. 그 점이 아쉬운 것 같아요.

 

과도한 입시 경쟁이나 사교육 때문에 아이들이 불필요한 패배감을 느끼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데요. 『시민의 교양』은 경제적인 구조를 바꿈으로써 이런 현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대학 입시에 있어서 평균의 기준이 ‘인 서울(in seoul)’이 되어 있어요. 책에도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65만 명 중에서 7.5%가 서울권 안의 대학에 진학하거든요. 그러면 절대 다수는 ‘인 서울’을 하지 못하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이나 부모님들은 ‘인 서울’이 항상 기준인 거예요. 학생들도 그런 생각을 갖거든요. ‘인 서울’에 성공하면 어른으로서 성장의식을 잘 치른 거고, 실패하면 공부를 못했던 학생인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사회의 대다수가 콤플렉스를 가져요. ‘내가 공부를 못했던 사람이구나’라는 콤플렉스를 갖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거죠. 수능이 9등급이니까 5등급의 학생이 평균이 되어야 하는데 왜 상위 7.5%를 기준으로 삼을까, 저는 항상 그게 궁금했어요.

 

그런 기준이 경제적 구조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건가요?


개인의 중위소득 분포를 보면 재미있다는 거죠. 동국대 김낙년 교수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사회에서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월 소득이 90만 원이 채 안 돼요. 반면에 상위 10%의 사람들은 약 4000만 원 정도의 연봉을 받고 있거든요. 이런 조사결과를 ‘인 서울’이 기준이 되는 현실과 병렬적으로 나열해 보면, ‘인 서울’이 강조되고 상위 7.5%의 학생들만이 인정받는 건 경제 때문이라는 거죠. 상위 10% 안으로 들어와야지 최소한의 인간적인 경제적 수준을 향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나 체감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학생들에게 7.5% 안에 들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진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것이 소수 엘리트에 대한 순응으로 이어지기도 할까요? 자신이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90%의 사람들은 ‘상위 10%의 사람들은 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을 양성해내는 사회인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부에 대한 아쉬움을 평생 갖고 살아가거든요. 나는 공부를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학력 수준도 높고, 인류 전체로 놓고 보면 너무 많이 배운 사람들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콤플렉스가 가득한 사람들이 태어나게 되죠. 그리고 익숙해져 있어요. 소수의 상위권에 대해서 계속해서 칭찬을 하고 보상을 해주는 것에 대해서 사회나 부모가 정당하다고 인식하니까 자신도 그렇게 되는 거죠. ‘저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는 것이나 저들이 하는 말을 인정해주는 것이 올바른 거구나’ 하고 학습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오랫동안 공부를 해야 되고 개인의 지능이 중요한 영역들은 분명히 있죠. 그런 건 중요하고 사회적으로 지켜져야 해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분배에 대한 문제나 세금에 대한 문제에 정답을 제공해 주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문제는 우리가 합의를 통해서 도출해야 되는 거죠. 그걸 조금 분리해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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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은 ‘세상의 기본 구조를 단순하게 바라보는 눈’

 

경쟁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면 결과는 정당한 것이며 책임은 온전히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은 보편적입니다. 작가님께서는 그것이 “사회적 위선”이라고 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경쟁이 중요하다고 믿어요. 경쟁에 따라서 차별적인 대우를 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한테 많은 보상을 하고, 경쟁에서 진 사람들한테는 적은 보상을 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제는 너무 과하다는 거죠. 우리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잘했고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잘 못 한 거야’라고 이야기하려면,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을 봐야 해요. 만약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열심히 살지 않아도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라는 게 전제된다면, 노력한 사람을 보상하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사회는 건전한 사회인 거예요. 그런데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먹고 살 수 없는 사회라고 한다면 평가 방식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지금 한국이 그런 모습에 가까운 것 같아요. 중위소득이 월 90만원이 되지 않는데, 그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왜 그들의 소득이 이렇게 적은 것인가, 하고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야 돼요.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구조가 갖춰진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어야만 타당하다는 거죠. 그것이 제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의 골자입니다.

 

시민의 교양이란 무엇일까요?

 

시민은 어떤 이상향이나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무엇이 아니에요. 어쨌든 우리가 시민인 거예요. 내가 잘 모르고 선택을 하든, 어리석게 생활을 하든, 열심히 살든 게으르든 상관없어요. 우리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담지하고 있는 시민으로 존재하고 있는 거죠. 시민은 그냥 우리들, 다수의 사람들, 나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시민이 가진 권한을 활용해서 미래를 정확하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어떤 정당이나 경제 체제가 나 또는 집단에게 이익을 주는지’ 정도는 구분했으면 더 좋겠다는 거고요. 최소한 세상을 단순하게 볼 수 있는 눈, 기본적인 구조를 보는 눈을 단순하게 교양이라고 이름 붙인 거거든요. 그러니까 다수의 사람들이 최소한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 ‘시민의 교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민이 교양을 쌓고 난 다음에는 무엇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무엇을 위해서 교양을 쌓아야 하는 걸까요?

술어가 잘못됐어요. 저는 지식이라는 단어에 붙어 있는 술어도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지식이나 교양을 ‘쌓는다’는 말에는 선입견이 있는 거예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중첩해 나가는 게 지식이고 교양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거든요. 이미 너무 많이 가지고 있고, 조금 제거해 가야 해요. 불필요하거나 비본래적인 것은 잘라내고 본질만 남겨야 하죠. 그 본질을 저는 시장의 자유와 정부의 개입으로 봤던 거고요.

 

그렇다면 ‘갖춘다’라는 술어를 쓰면 괜찮을까요?


그 정도가 제일 나을 것 같아요. 시민이 가져야 하는 교양은 그 정도인 거죠. 어마어마한 게 아니고요. 단순하게 시장의 자유라는 것이 있고 정부의 개입이라는 것이 있고, 그거에 대한 본질적인 내용은 ‘세금을 높일 것인가 낮출 것인가, 복지를 높일 것인가 낮출 것인가’예요. 그게 사실 전부인 거거든요. 너무 단순한 이야기니까 어떤 분들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세상은 조금 더 복잡하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라고 생각해서 자꾸만 겁을 내시는 건데요.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그게 전부인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시장의 자유와 정부의 개입이라는 개념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볼 수 있는 교양을 갖춘 다음에 정치적 선택을 해야 되겠죠. 정당을 선택하고, 정당을 토대로 해서 경제 체제를 선택하고요. 그러면 더 좋은 세계가 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데요. 조금 더 합리적인 세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민의 교양』에서 앞으로 우리 사회는 디플레이션을 겪게 될 거고, 빈부격차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셨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성장과 경기침체가 아니라 “성장만이 정상이고 경제적 성공만이 유일한 목표라는 지난 시대의 가치관”이라고 덧붙이셨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가치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새로운 이념이나 가치관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고, 이미 젊은이들이 갖기 시작한 것 같아요. 소비에 대해서 거부하기 시작하고, 미래를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즐기려고 하는 방식으로요. 그게 어른들에게는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요. 조금 더 노력하고 극복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구조적으로 그게 가능한 사람들도 있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가능하겠죠.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그러기 힘들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럼으로써 긍정적인 면이 있을 거예요. 성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순간순간을 꾸려나가기 시작할 거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체감하게 될 거예요. 젊은 층은 부모 세대가 삶에서 배웠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많은 것들을 배울 거라고 생각되거든요. 그렇게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어른들이 그걸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그들을 안타깝거나 불쌍하게 여기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경제체제 안에서 성장한 인류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응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가님의 책을 읽다 보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이렇게 통섭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걸까’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독서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계시지는 않은 것 같아요. “독서에 대한 강박관념은 산업화, 자기계발 담론과 연결된다고 봐요. 책 내용이 좋아서 읽는 게 아니라 읽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는 겁니다”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잖아요.


책을 읽어야겠다는 의무감은 가지고 있어요. 제가 비판하고자 하는 건 자기계발 담론과 연결되어 있는 독서예요. 그럴 때 책을 읽고 싶다는 건 자신의 생각이 아니잖아요. 산업화 이후 개인한테 모든 경쟁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거죠. 그거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거예요. 그런 이유가 아닌 재미로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 거죠. 어떤 분들은 (책을) 종교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책이 하나의 종교가 돼서, 책을 읽으라고 누군가를 강요하거나 스스로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위안을 얻는 분들이 있어요. 책을 강요하는 분위기도 조금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책만큼 좋은 게 없는 건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 또는 재미있기 위해서 책을 선택하고 읽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같은 이유에서 영화를 선택하거나 음악을 듣는다거나 미술을 감상하는 것도 책과 동일하게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읽는 건 매우 좋지만 이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유일하게 영혼을 확장하는 방법인 양 생각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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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교양채사장 저 | 웨일북
《시민의 교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이 선택을 결정할 국가의 주인을 찾아 길을 떠나며 이야기는 뻗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지금 이 시대에 자유란 무엇인지, 자본주의 시대에 직업의 의미는 무엇인지, 정말로 중요한 교육의 문제는 무엇인지, 다양하게 부딪히는 사회 문제들의 본질은 무엇인지 알아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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