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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 교수 “경제적인 외로움, 당신 친구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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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경제나 사회는 이분법적 접근이 불가능한 매우 복합적인 영역이고, 한 사회의 현재와 방향성은 역사적인 맥락, 그 사회가 겪은 경험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섬을 탈출하는 방법’을 모색하려면 어떤 장면에서도 ‘그럴 만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서 길이 갈라진다는 점이다. 사회는 선택해야 한다. ‘그러니까 할 수 없다’와 ‘그러니까 이제는 해야 한다’ 사이에서.

 

지금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 곳곳에 위기 담론이 넘친다. “우리는 ‘너무나 경제적인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산다.”(6쪽) 그런데 들리는 것은 대안 쪽보다는 좌절 쪽이다. 냉소하고, “다 알지만 안 하는 거”라고 한다. 과연 유행하는 말처럼 이곳은 ‘헬(지옥)’이고, ‘노답’인 걸까? 선진국의 ‘합리적인 선택’을 여기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걸까?

 

조형근 교수는 “복잡하고 어려워 보여도 이런 문제도 있다는 것을 서로 공유하고 우리의 집합적 지혜가 커질 기회를 만들면 좋겠”다고 말한다. 유럽 국가의 복지 정책이나 협동조합, 참여 경제, 기본 소득 등에 대해 한 마디로 단언하지 않는다. “이게 참 좋은 건데 사실은 이런 문제도 있다”면서 독자를 힘들게 한다. 불편하지만 그것이 세계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렵지만 끊임없이 고민하고 용기 내 대안을 상상하자. 이 상상이 쌓여 산을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외로운 섬 넘어 다른 세상을 보고, 그곳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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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경제적인 외로움

 

서두에 로빈슨 크루소를 인용했습니다. 합리적 경제인의 원형인 동시에 섬에 고립된 인간이죠. 신자유주의라는 환상이 깨진 지금, 사람들은 ‘너무나 경제적인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표현도 뇌리에 남더라고요.

 

신자유주의라는 거창한 이념이나 제도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각자가 느끼는 심정에 먼저 눈높이를 맞추고 공감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치열한 경쟁에 노출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 인생 궤적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살아남은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 사람도 힘들죠.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 전체가 거의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초, 중등학교부터 시작해서 말이에요. 친구와 다 같이 공부 잘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내가 못해도 친구가 더 못 하면 좋은 거고요.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굉장히 외로워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고독이 아니고 아주 구체적인 것이죠.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너무나 경제적인 외로움’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었는데요. 우리가 그렇거든요. 외롭고 힘들어도 일부러 자꾸 잊어버리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진실을 마주하면 힘들기 때문에 그래요. 상처받지 않을 도피처를 계속 찾으면서 ‘나는 외롭지 않아’라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굉장히 외로워요. 독자분들께서 이런 고독을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렇게 썼어요.

 

외로움이나 상처를 회피하려는 태도는 각자도생의 삶이라는 모든 개인들의 처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해요.

 

직시하면 굉장히 괴롭거든요. 또 직시해서 대안이 있다고 하면 직시하겠지만 사실 답이 없잖아요. 오늘날의 문제는 냉소주의라는 부분이 굉장히 크죠. 냉소하는 주체는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고요. 정치가든 사회개혁가든 장밋빛 약속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약속 어떤 것도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다시 말하면 실패를 미리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냉소로 견뎌내는 거죠. 다 알지만 안 하는 거라고 해요. 좌절하거나 그걸 진지하게 고민하면 괴로워지니까요. 이것이 지금의 전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대안을 고민하려면 다른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겠죠. 그런데 보면 지금 좌든 우든, 모두가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좌는 좌로 가고, 우는 우로 가는 게 맞는데요.(웃음) 우왕좌왕 하고 있다는 진단에 저도 전폭 동의합니다. 경제가 주제니까 이 분야에서만 본다면요. 노벨상 받으신 기라성 같은 경제학자들도 많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의 현재에 대한 진단, 처방을 봐도 중구난방 같아요. 한 방향으로 모이는 그런 느낌이 없어요. 비전의 우왕좌왕이라고 하는 현실 이전에 사실은 그것의 기초가 되는 경제 자체가 우왕좌왕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정확한 진단이겠죠.

 

‘뉴 노멀(New Normal)’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지금도 연초부터 경제가 난리잖아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 러시아, 브라질, EU 곳곳과 중국, 가장 최근에는 일본까지 난리라는 건데요. 금융 위기가 과거 대공황처럼 한꺼번에 터지진 않았지만 그건 대공황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대신 여기저기서 터졌다 꺼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죠. 소위 말하는 마이너스 성장, 지속적인 고용부진과 고실업은 어쩌면 이 시대의 ‘새로운 정상(뉴 노멀)’이라는 진단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어요.

 

정책이나 비전 이전에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거군요.

 

우리가 우왕좌왕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현재 시스템이 답이 없기 때문이에요. 대안도 마땅찮지만 지금 들고 있는 카드도 이미 쓸 수 없는 카드인 거죠. 최근 로봇이 장래에 노동자의 50%를 대체한다는 뉴스가 있었는데요. 경제를 굴리는 여러 수레바퀴 중 대다수 사람들에게 절대로 중요한 건 소득이잖아요. 소득은 노동을 통해 얻는 거죠. 그런데 이런 대부분의 삶의 근거가 뒤흔들리고 있다는 거예요. 이 상태로는 자산가도 위기죠. 갈수록 돈이 쌓이면 뭐해요. 소비자가 물건을 팔아줘야 하는 걸요. 금융 자본주의 무너지는 것 봐서 알잖아요. 아무리 돈놀이를 해봐야 사람들이 소득을 통해 그걸 뒷받침해주지 못 하면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거죠. 이 시스템이 벽에 가로막힌 거예요. 근본적으로는 한계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어요. 훌륭한 석학들이 똑똑하지 않아서 제대로 진단하지 못 하는 게 아니겠죠. 이것이 ‘우왕좌왕’의 근본 원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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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발전

 

소련,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해 유럽 각국의 사회 발전에 따른 사회복지 시스템 등을 짚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역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겠네요.

 

사실 고민했어요. 옛날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좋을까 하고요. 대부분 다 잊어버렸죠. 사회주의는 망한 거고 그걸 다시 들추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할 것 같아서 망설였는데요. 저는 어쨌든 그것이 대안을 꿈꾼 인류가 수행했던 가장 거대한 실험이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해서 ‘끝났어’ 해버리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과정에서는 일면 옳은 선택들이 있었고요. 그러니 역사를 보는 게 어려운 거죠. 결국 진지한 무언가를 꿈꾼다는 건 항상 강력한 반발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걸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그냥 낭만주의겠죠. 

 

저는 설혹 전쟁이라고 해도 좋을 강력한 반발과 갈등이 있겠지만 그것조차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대안을 꿈꾸는 사람들이 더 철저하게 지금부터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안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사정이 너무 급하니까 일단 이런 건 넘어가자’라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분들일수록 지금부터 대안을 현실 속에서 만들어나가고, 그렇게 살려고 해야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반대하는 세력이 있을 때도 대중의 지지 속에서 대안을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독일, 영국, 스웨덴 등 다른 선진국에서 경험한 잘못된 사례의 전철 밟지 않을 기회가 있다는 게 한국 사회의 무기일 텐데요. 현상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미, 특히 미국식의 정책 결정이 대다수를 차지하죠.

 

역사적으로 우리가 겪어온 과정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영미식, 콕 집어 말하면 미국식의 삶의 방식, 경제 노선이 유일선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에요. 당연히 그렇죠. 그러나 한국이 해방 이후, 적어도 1960~70년대 이후 경제적 성공 과정에서 밟아온 게 그 노선이었어요. 미국이 만든 세계질서 속에서 ‘초대받은 발전’이었다는 표현을 쓰는데요. 물론 한국 노동자들의 노력이 많았지만 미국으로부터 ‘초대받은 발전’이라는 열차의 탑승권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죠. 그런 성공의 경험 때문에 이 믿음이 굉장히 대중적 차원의 것이 됐어요. 소위 진보개혁 진영에서도 이런 믿음을 적지 않게 발견하게 돼요. 그걸 너무 자학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이 식견이 좁고, 미국 숭배주의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걸어온 경로가 그렇다는 사실도 분명하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감히 다른 상상을 한다는 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거든요. 두려운 거죠. 그러나 이제는 상황에 떠밀려서라도 용기를 내야만 할 때가 된 게 아닌가 해요. 이 시스템으로 안 된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진다면, 해야죠.

 

경쟁 없이 협력만, 협력 없이 경쟁만 하는 시스템 없다, 경제는 경제만으로 굴러가는 게 아니다, 같은 말은 아주 중요하게 들립니다.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문제들이므로 종합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가장 염두에 뒀던 게 그거예요. 사실 단칼에 ‘이거다’라고 말하는 게 저도 마음 편하고 독자분들도 편할 텐데, ‘이게 참 좋은 건데 사실은 이런 문제도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힘들어요.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고민이었어요. 그래도 그러지 말자, 실제로 경제 정말로 복잡하다, 생각했죠. 복지국가,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과연 계속 갈 수 있을까 라든가 기본소득, 이걸 왜 우파도 찬성하는 걸까 라든가 이런 질문들을 계속 던지지 않으면 과거에 했던 잘못을 반복하게 될 거란 생각을 한 거죠. 저는 대중이 엘리트가 비전을 제시하면 박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선택하는 사람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대중이 정치 소비자고, 정치를 생산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 전형적인 시장 논리잖아요. 그렇지만 대중은 정치 주권자고, 주권자가 그러면 안 되죠.

 

책에서 다룬 사회적 경제, 참여 경제나 기본 소득도 그렇지만 이것들은 대중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모델이에요. 상품을 고르는 게 아니고 만드는 과정 자체에 자신의 지혜를 발휘해야 해요. 가급적이면 복잡하고 어려워보여도 이런 문제도 있다는 것을 서로 공유하고 우리의 집합적 지혜가 커질 기회를 만들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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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은 안 된다

 

미국 뉴잉글랜드와 남미 복지를 비교해 빈부격차가 작은 사회의 복지 수준이 더 높다는 사실을 증명한 학자 케네스 소콜로프(Kenneth Sokoloff) 연구가 인상적이었어요. 명백한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여전히 복지는 잘 살고 난 뒤에 하자고 말하죠.  

 

5공화국 국정 지표 슬로건 중 하나가 ‘복지국가 구현’이었어요. 이해되세요?(웃음) 그때는 우리나라가 아직 부유하지 않아서 복지를 제대로 못하지만 복지국가로 가는 건 당연하다는 게 일종의 합의였어요. 차이가 있죠. 지금 복지는 잘 살고 난 뒤에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복지국가를 지향하지 않아요. 복지국가는 지금 안 될 뿐 아니라 앞으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역시 역사적 경험의 축적이 중요한 건데요. 한국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복지는 나중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자꾸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얘기하는데요.(웃음) 90년대 고도성장을 하면서 계속 참으라고 했고, 많은 국민들이 희생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상승했다고요. 산업화에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국민 다수가 소득 상승과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체험한 거예요. 그래서 기다리란 말이 먹힐 수 있었던 거죠. 당장은 복지 안 하고 참았더니 나아졌다는 걸 체험한 세대인데요. 평생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문제는 그게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게 명백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적어도 지금 시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야 해요.

 

독일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눌까 해요. 한국 사회에서 호감도도 높은 곳이고, 그 사회의 정책 중에 실현가능성이 엿보이는 부분도 있거든요. 독일의 여러 장면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방법론은 어떤 것인지 질문이 생겨요.

 

독일에 사는 분들은 독일이 재미없는 사회라고 하던데요.(웃음) 독일에 대해선 한국 사람들의 호감도가 높죠. 덩치도 그나마 비슷하고요. 제조업 중심, 분단 경험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막상 독일처럼 경제 시스템을 취하자 하면, 의문을 갖죠. 가령 노사 공동결정제도,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하고 2천 명 이상 대기업에서는 동수로 경영을 결정하는 이런 제도를 말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종북좌빨(웃음) 취급을 받아요. 경계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안 돼’라는 생각을 갖지 말자는 점이에요. 독일 역시 후진적이고 비합리적인 나라였어요. 히틀러 체제에서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을 일으킨 민족이기도 하고요. 독일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고요. 우리는 독일처럼 합리적인 사회가 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사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한다면 정당 역사를 들 수 있겠죠. 독일 사민당은 제가 알기로는 서구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당이에요. 1875년에 창당했거든요. 창당 주역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였죠. 세계 최초의 합법화된 사회민주당이기도 하고요. 그 당이 아직까지 있는 겁니다. 어떤 우파 정당보다도 역사가 오래된 당이에요. 아주 강력한 역사와 전통의 좌파 정당인 거죠.

 

합리적 우파는 치열하게 싸우는 대중, 좌파 없이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책의 구절이 떠오르네요.

 

우리는 너무 성급한 것 같아요. 소위 386세대가 80년대 주로 대학생으로서 사회운동을 하다가 90년대부터 정치권에 들어가거든요. 반면 1968년 유럽 차원에서 일어난 68혁명 이후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10년 뒤에 사민당, 무슨 당 들어가서 국회의원이 됐느냐? 그렇지 않단 말이죠. 가장 대표적인 게 녹색당이에요. 완전히 새로운 당이 만들어졌고, 심지어 사민당보다 더 왼쪽이죠. 독일 녹색당 지도자 다니엘 콘 벤딕트(Daniel Cohn-Bendit)는 프랑스 유학 당시 68혁명에 참여해 지도자가 된 사람인데 이후 베를린 시장이 된 게 2000년대 중후반 이후에요. 오랜 시간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을 해나갔던 거죠. 독일 사회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합리적인 모습보다 끈질김입니다. 이렇게 지독하고, 끈질기게 한 길을 가는 사람들 때문에 우파도 합리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니까요.

 

지금 한국 사회는 투쟁 동력을 잃은 것 같아요. 좌절감이 지배하는 사회죠. 성공의 경험이 없기도 하고요.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면 이른바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대안은 있다’는 말을 더 많은 곳에서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굉장히 중요한 지적 같아요. 특히 세대가 젊어질수록 어제보다 오늘이, 내일이 더 나아지고, 힘을 합쳐서뭔가를 조금이라도 바꿔본 경험이 점점 줄어들죠. 젊은 세대는 거의 없고요. 이런 상황이 아마도 지금의 사회 전반적인 좌절, 활력의 소진의 원인인 것 같아요. 굉장히 공감을 하고요. 그런데요, 약간 근거 없는 소리 같지만 저는 믿음이 있어요. 젊은 세대가 좌절한 건 맞지만 진공 상태에서 그들만 살아온 건 아니잖아요. 부모 세대, 선배 세대를 보면서 크는 거고 그들과 대화하고 접촉하면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저는 한국 사회가 가진 독특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흔히 하는 말로 한국인들이 평등 의식이 강해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정치적 역동성을 가졌고요. 예컨대 전쟁과 4.19 혁명, 격렬한 이촌향도와 산업화, 6월 항쟁과 2008년 촛불까지 면면이 이어져오는 것이 있잖아요. 보고 배운 것이 그건데 그게 어디 가겠어요. 너무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말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가요. 거기서 희망의 단초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렇지만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개인이 희망을 갖기엔 지금 상황이 너무 요원하지 않나요?

 

제가 너무 옛날 얘기를 했죠?(웃음) 방금 얘기는 거시적인 이야기였고요. 실제 생활에서는 구체적인 게 필요하죠. 전쟁 용어를 사용해서 조금 그렇긴 한데, 공중전도 필요하지만 게릴라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에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해요. 20세기 내내 가장 활성화된 정치, 사회적 행동의 근거지가 대학이었거든요. 학생이라는 지위의 엘리트 집단이 정치적으로 활성화 돼 있었죠. 다른 무엇보다 연대의 경험을 한 거잖아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런 면에서 젊은 사람들이 함께 세대 체험을 하면서 자원으로 끌어갈 만한 기반이 붕괴돼버린 상황이에요. 저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원을 가진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들이 뭔가 만들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젊은이들이 스스로 하기에는 취업이나 스펙 경쟁이 너무나 심하니까요. 젊은이들도 연대의 체험을 해야죠. 친구,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의 경험을 하는 거예요. 하다못해 영화를 같이 보는 모임이라도 만들어서 집요하게 개인이 외로움에 떨지 않고 사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작은 경험이 확장되면 책 후반에 이야기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으로 이어질 수 있겠죠.

 

당연하죠. 책 상당 부분을 사회적 경제에 관해 썼는데요. 사회적 경제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좋은 약이라서가 아니에요. 사회적 경제는 오히려 자본으로 들어가는 거란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왜 사회적 경제를 굳이 그렇게 말했느냐 하면 당장 그런 게 필요한 분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많아요. 복지 국가를 만드는 건 정말 필요한 일이죠. 그런데 이것은 긴 시간이 드는 프로젝트잖아요. 한편 지금 당장 직업을 잃은 분들이 너무 많아요. 제 주변에도 무척 많습니다. 이분들이 뭘 할 거냐는 거예요. 저는 이런 분들의 입장에서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을 만드는 투쟁과 복지 국가를 만들자고 하는 게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대립되는 용어가 아닌 거죠. 미래에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국가가 책임을 져줘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지혜를 모아 대안을 만들고 이런 대안에 대해 정부가 더 제도적으로 지원해줘야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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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탈출하는 방법

 

개인의 삶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모든 개인이 ‘상품화’ 되어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스웨덴의 복지가 노동의 탈상품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했다는 사실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스펙 경쟁이 엄청 치열한 사회가 됐잖아요. 이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을 노동 시장에서 얼마나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 건가를 가지고 경쟁하는 건데 우리는 이 사실을 굉장히 당연하게 생각해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정치적 성향과도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을 상품으로 만드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건데요. 이게 자연스러운 거면 힘들지 않아야 하는데 너무 힘들죠. 한국 사회가 스펙 경쟁에서 탈진에 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웨덴 복지에서 탈상품화를 굳이 강조한 이유는 한국 사회의 복지 담론이 가진 왜소함에 대한 개인적 문제의식 때문이었어요. 한국에서 복지를 이야기할 때는 주로 보편적 복지, 선별적 복지를 말하잖아요? 당연히 보편적 복지로 가면 좋겠죠. 그러나 이 논쟁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복지 국가는 큰 국가가 될 수밖에 없어요. 출생부터 죽음까지 국가가 관리해주는 거거든요. 국민이 길들여져 있는 국가죠. 스웨덴을 볼 때 자꾸 우리는 사민주의는 빼고 복지만 보는데요. 봐야 할 것은 ‘사회민주주의’거든요. 보통의 국민들이 이 시스템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거예요. 주인이 되려면 상품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복지를 하는 거다, 이거거든요.

 

탈상품화와 연결되는 이야기 같기도 한데요. 본격적인 선거철을 앞두고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기본소득 이슈를 많이 논의하고 있어요. 책에도 한 챕터를 다루고 있는데요. 기본소득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오해에 대해 한마디 해주세요.

 

질문의 취지와 다른 답이 될 수 있겠지만 저는 기본소득이 오히려 대세가 될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주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해요. 핀란드 경우는 우파적 맥락에서 도입하려는 건데요. 이것이 더 절약된다는 겁니다. 다른 복지를 없애도 기본소득으로 복지를 통합하면 말이죠. 기존 복지 제도는 운용 자체에 비용이 많이 들어가거든요. 기본소득은 계좌에 돈 꽂아주면 돼요. 얼마나 편해요. 엄청나게 비용이 절약되는 겁니다. 또 세금으로 만들어진 돈이 소비를 통해 사기업으로 들어가고요. 우파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기본소득이 대세가 될까봐 걱정된다는 거고요.

 

진보 정당에서 그리는 기본소득은 그런 게 아니겠죠. 최소한 지금 지출하는 복지비용보다 같거나 그 이상을 기본소득으로 지출할 것을 생각하는 거죠. 기본소득으로 받은 돈을 시장에 바로 쓸 것이 아니라 공공부문, 혹은 사회적 경제 부문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겠고요. 결론적으로 기본소득이라는 건 더 이상 하나의 안이 아니라는 겁니다. 경합하는 모델이에요. 결국 기본소득은 앞으로 점점 더 많이 이야기될 거예요. 그 때문에 기본소득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반박은 줄어들 거고 오히려 ‘어떤 기본소득이냐’가 더 중요해질 거예요.

 

마지막으로 ‘섬을 탈출하는 방법’을 한 마디로 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협력할 방법을 찾자고 말하고 싶어요.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가 제일 문제가 되는 건 ‘혼자 있다’는 거잖아요. 한참 뒤 프라이데이가 등장하지만 그는 협력할 동료가 아니죠. 우리가 있는 곳은 로빈슨 크루소의 섬이 아니고 바로 곁에 협력할, 함께할 사람이 있어요.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불행하고, 더 이상 행복해지지 못한다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퍼지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경제적인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것, 어쩔 수 없다, 이런 건데요. 다 이렇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내 옆의 친구도 이렇구나, 하고 공감하면 돼요. 그러면 뭔가 할 수 있는 거죠. 결국은 우리 모두 이기적 인간이지만 인간이 본성적으로 협력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 정도로까지 이기적인 세상을 만들 수 없었겠죠. 협력이 우리 인간의 최고의 본성이에요.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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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탈출하는 방법조형근,김종배 공저 | 반비
『섬을 탈출하는 방법』은 성장은 멈추고 일자리는 점점 더 불안정해져 모두가 끝없는 경쟁으로 내몰리게 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시대에 다르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하는 책이다. 이제는 각자도생의 지옥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와 삶과 사회의 모델을 모색하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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