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정말 몰랐어요." 14년 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화제를 모은 이혜리 작가의 『아들이 있는 풍경』이 이제야 한국 독자를 만났다. 1997년에 실제로 벌어진 외삼촌의 탈북기를 다룬 에세이. 작가는 북한의 독재와 그 치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을 조명하고자, 자신의 가족사를 고스란히 책에 담았다. 책의 주인공은 작가도, 6.25 전쟁 때 큰아들과 생이별을 한 외할머니도, 외삼촌의 탈북을 도운 북한 가이드도 아니다. 2016년에도 똑같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북한 동포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이혜리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4세 때, 미국으로 이민했다. UCLA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MTV, NBC, CBS 등에서 작가와 PD로 활동하던 중, 1996년 실화소설 『할머니가 있는 풍경』을 펴냈다. 현재는 한국과 미국에서 탈북인 인권을 주제로 강연하며 서울예술대학교 로스앤젤레스 분교장을 맡고 있다.
In the Absence of Sun
꽤 오랫동안 한국어판 출간을 시도했다고 들었습니다. 14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보았을 때, 어떤 심경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무척 기쁘다는 이야기로밖에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모국어로 이 이야기를 알리게 됐다는 사실이 너무 흥분되고 좋습니다. 그간 한국과 북한의 정치적 상황이나 출판사의 여건이 적절하지 않아 한국 독자를 만나기 어려웠어요.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지금이라도 책이 나왔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럽고 기뻐요.
500쪽이 넘는 에세이인데, 한 호흡으로 읽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책이었어요.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요. 쓰기까지의 과정은 너무 어려웠지만, 사람들이 이 스토리를 아껴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정말 감사해요. 많은 우여곡절 끝에 책이 나왔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좋은 타이밍이 없는 것 같아요. 그 사이에 저도 엄마가 되면서 할머니의 자식을 향한 사랑을 더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시간과 함께 깊이가 더 커졌으니까요.
『아들이 있는 풍경』의 원제는 ‘In the Absence of Sun’입니다.
북한이 빛(Sun)이 없는 어두운 곳이라는 뜻과 함께, 또한 할머니가 아들(Son)을 잃어버린 고통의 시간을 뜻해요. 제게 이 책은 한국에서 펴내는 두 번째 책입니다. 먼저 1996년에 미국에서 『할머니가 있는 풍경(Still Life with Rice)』를 펴냈고, 이것 역시 실화소설이었어요. 이번 책에도 이야기가 나오지만, 『할머니가 있는 풍경』을 썼을 때, 북한에 있었던 친척들 이름이 실명으로 나가면서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그래서 『아들이 있는 풍경』을 쓸 때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촌과 그의 가족들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가족들이 많이 응원해줬어요. 이 책은 꼭 써야 한다고요. 결국 탈고를 한 후, 6개월 동안 두드러기 증상이 심해 약을 먹어야 했어요.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인데, 정작 미국에서 더 화제가 됐어요.
제가 미국에서 책을 발표했기 때문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한국어판 출간이 오래 걸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북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대개 세상에 알려지는 북한 소식은 정책과 관련된 이야기잖아요. 미사일 발사 뉴스가 가장 많죠. 지금 북한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많이 속상합니다. 이 책을 통해 북한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그런 쪽으로 영향을 받는다면 더없이 좋을 거라 생각해요.
『아들이 있는 풍경』은 현재 미국 전역의 학교와 교육기관에서 한국에 대한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그냥 묻힐까봐 고민하던 때가 있었어요. 꼭 알려야 하는 이야기였으니까요. 할머니가 미국에서 이 책이 출간되는 걸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는데, 책 판매가 부진했을 때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할머니를 실망시켰다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로부터 출연 요청을 받았고 이후 여러 방송 매체와 대학기관에서 강연을 청했어요. 급기야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초청으로 워싱턴 DC에 가서 이민법 관련 청문회에서 탈북민의 현실을 증언했고요. 할머니께서 제 기도에 응답해주셨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고요. 미국인으로서, 한국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작가로서 제게 역할과 책임이 있음을 통감하고 있어요.
통일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선택의 여지 없이 통일은 올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5년 후쯤은 통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5년이란 시간을 굉장히 짧게 느끼는 분도 계실 거예요. 하지만 북한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그 5년이란 시간 안에 굶주리고 죽을 수 있어요. 우리 국민들이 북한 사람들을 생각해줬으면 해요. 제가 북한을 다녀온 게 1997년이에요.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요. 그런데 그들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게 없어요. 송환을 두려워 하는 수많은 탈북자가 중국, 러시아, 몽골 등에 숨어 지내고 있으니까요. 과연 누가 저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한 가족이, 한 사람이, 하나의 행동이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요. 저희 할머니가 아들을 위해 그 험난한 여정을 보내신 것처럼요.
좀 더 평화가 있는 곳에서 살기를
삼촌의 탈북을 직접적으로 도운 가족은 작가님의 아버지였어요. 할머니께는 사위죠. 자신의 형제도 친모도 아닌데, 이렇게 헌신적일 수 있었을까. 읽는 내내 놀라웠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장모님을 위한 희생일 수 있잖아요. 그렇게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도 한 번도 아버지는 포기하자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어요. 진짜 희생과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이 단순히 탈북기만이 아닌 이유이기도 해요.
탈북, 가족애를 다루는 동시에 예기치 않은 로맨스도 등장합니다. 책을 읽은 독자라면 외삼촌 가족의 탈북을 도운 ‘가이드’의 근황도 궁금할 것 같습니다.
(웃음) 책을 읽은 많은 분이 제게 물었어요. “부끄러웠을 텐데 왜 가이드와의 에피소드를 책에 썼냐”고요. 사실 창피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의 이야기도 이 책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더 멋지게 쓸 수 있었지만 솔직하고 인간적인 모습이 들어가야, 진심이 전달될 수 있잖아요. 영웅은 다른 게 아니에요. 전 외삼촌 가족의 탈북을 도운 저희 아버지와 책에 나오는 북한 동포 '가이드'가 영웅 중의 영웅이라 생각해요.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탈북 가이드를 하고 있어요. 각자 동기가 다를 테지만, 순수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용기 있는 분이 많아요. 저희 아버지와 가이드가 그 분들을 상징한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연극을 기획하고 계세요.
『아들이 있는 풍경』이 나왔을 때, 이제 제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끝이 아니더라고요. 미국에는 한국 역사를 소재로 한 연극이 거의 없어요. 역사는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소재이고, 영화가 됐든 연극이 됐든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북한은 권력을 내세우기 위해 정보를 숨기지만, 작가는 정보를 더 많이 갖고 알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된 일이 자랑스러운 건,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거예요. 연극은 관객들과 같은 공간에서 냄새와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요. 더 특별한 감성을 나눌 수 있는 매체예요. 다양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독자에게 특히 『아들이 있는 풍경』을 소개하고 싶으신지요?
전 세대가 관심을 가졌으면 해요.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전쟁을 직접 겪으셨잖아요. 당신의 이야기를 우리가 아직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거라 생각해요. 지금 젊은 세대는 직업, 미래, 돈, 연애에 몰두하고 있지만, 역사를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바로 옆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잖아요. 얼마나 중요한 미션인지 꼭 알았으면 해요. 세대 간의 격차가 크고 나름의 다양한 경험이 있지만, 내 조상들의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세대를 이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안에 있으면 저도 몰랐을 거예요. 밖에 있기 때문에 보이는 진실이 있어요.
또 다른 책을 한국에서 출간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으신가요?
예전에 룸메이트였던 흑인 친구와 함께 '김치'와 '콘브레드'를 소재로 책을 쓴 적이 있어요. 콘브레드는 미국 남부 지역을 상징하는 음식이고, 김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식이죠. 서로의 문화, 다양성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어요.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도 소개하면 좋을 거라 생각해요. 서로의 문화를 안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문제니까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제 쌍둥이 아이가 올해 6살이 됐어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생각해요. 이 아이들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꿈꿔요. 좀 더 평화가 있는 곳에서 살기를 원해요. 그들이 자랐을 때, 자연에서 나오는 자원이 부족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가장 심각한 문제예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는 동시에 함께 사는 이웃, 서로를 배려했으면 해요. 우리 할머니 세대 때는 정말 그랬어요. 다같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굉장히 초보적이고 단순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모두의 꿈이라고 생각해요.
아들이 있는 풍경이혜리 저/노은미 역 | 디오네
1997년 4월 18일. 미국에 사는 86세의 할머니는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서울과 베이징(北京)을 거쳐 드디어 옌지(延吉)에 도착하였다. 47년간의 생이별 후에 드디어 남한 엄마가 북한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할머니는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도착하는 이 힘겨운 여정을 버텼다. 그 길에 손녀딸인 이혜리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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