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윤’은 14년간 한 번도 정규직이 되어본 적이 없다. 오랫동안 준비하던 방송사 PD 시험에 낙방한 이후 4대 보험의 혜택을 누린 적도 없고 적금을 든 적도 없다. 통장 잔고가 남아있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여태껏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스스로 궁금하기도 하다. 한국의 시급과 노동을 견디지 못해 워킹 홀리데이 신청이 가능한 가장 마지막 해에 기회의 땅, 호주로 떠나기도 했다. 닭 공장, 선글라스 판매, 꽃 포장, 방청객 알바, 뮤직바 서빙 등 서른 개에 가까운 불안한 아르바이트를 거쳐 지금은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로 자신을 정의한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않아 직장도, 직책도 없는 『미쓰윤의 알바일지』저자 윤이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언제든 지금의 밥벌이를 잠시 내려놓고 바르셀로나를 갈 수도 있고,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활동할 수도 있다. 기회는 많아졌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건 아니다. 그저 오늘도 무엇이 되고 싶진 않고, 무엇이든 되고 싶다.
14년 간의 알바일지, 책으로 엮이다
이제까지 직종별로 알바를 몇 개나 하신 것 같으세요?
정리해 본 적이 없어요. 과외도 종류가 나뉘잖아요. 개수가 많았다기보다는 상황 자체가 특이했던 것 같아요. 보통 알바를 편의점 근무, 바 서빙이나 판매 등 어딘가에 소속이 되고 정착이 되기 전까지 임시로 거쳐가는 일로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프리터로 계속 소속 없는 상태를 유지했어요. 『미쓰윤의 알바일지』는 직종별 아르바이트 특징을 소개하는 책이라기보다 넓은 개념의 소속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 기록으로 봐주시는 게 더 좋겠어요.
<IZE>(아이즈)에서 연재한 칼럼을 바탕으로 책이 나왔습니다.
서른 살에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갔어요. 알바 경험이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많으니 호주에서의 실시간과 알바 경험을 엮어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죠. <IZE> 창간이 그해 7월 즈음이었는데 창간과 동시에 연재한 칼럼이에요.
호주에서의 경험이 전체 내용을 관통하고 있어요.
편집자랑 기자 분들이 직장을 잃고 차린 매체가 <IZE>였어요. 그분들도 그렇고 저도 연재처를 잃은 상태였고, 이런 식의 반복이 의미도 없고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장을 다니고 있었으면 그런 생각 못 했을 텐데, 당장 다음 달에 들어올 돈도 얼마 안 되니 (한국을) 나갈 수 있잖아요. 완전히 다른 삶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워킹 홀리데이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끝이면서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홀리데이’ 보다는 ‘워킹’, 돈 버는 일에 방점이 찍힌 시간이었긴 하지만 그래도 휴가의 시간이었어요. 이전의 생활과 아직 놓지 못한 것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워킹 홀리데이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스파드의 웹툰 <선천적 얼간이들>에서도 나오지만 돈, 영어, 휴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해요. 두 가지도 병행이 안 돼요. 워킹 홀리데이를 가면 한국에서는 못 보는 현상을 볼 수 있어요. 그런 생각만 가지고 가도 좋을 것 같아요. 나와서 한국인들끼리 놀기만 한다고 나쁘게 보는 경우도 있잖아요.
놀면 안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러게요. 안 놀면 거기까지 가서 뭐해요. 워킹을 하든 홀리데이를 하든 그건 자기 마음이에요. 뭘 해도 되는데 대신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사는 경험을 해보라는 거죠. 삶을 꾸리는 건 여행이랑은 다르잖아요.
불안은 기본이지만 후회는 없다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면서 왜 이렇게 불안정하게 사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불안에 관한 걱정은 누구나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부모님은 안 걱정하실 수가 없어요. 대학 때도 공부 잘했으니 부모님도 기대가 있으셨을 텐데, 결코 원하시는 방향으로 간 건 아니잖아요. 다행히도 제가 선택에 있어서 불안을 의식하지 않는 타입이기도 했고 부모님도 잔소리하는 성격이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적은 돈이어도 손 내미는 일 없이 살았던 게 부모님이 간섭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였어요. 살고 싶은 대로 산다는데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요(웃음). 그리고 적어도 원하는 일을 하고 내가 선택한 길을 가면서 누굴 원망하거나 불안감을 누구한테 전가하지 않겠다는, 내 삶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부모님이 봐주셨던 것 같아요.
불안을 전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스스로 느끼는 불안이 있었을 텐데요.
통장 잔고의 자릿수가 정말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죠.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한 달에 100만 원을 쓴다면 저도 똑같이 100만 원을 쓰거든요. 다만 그 사람들은 200만 원 버는데 100만 원 저축한다면 저는 취업준비 이후로 100만 원 벌고 100만 원 쓰는 상황이 반복됐던 거죠. 안 불안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늘 미지수가 생기잖아요. 아플 수도 있는데 예외가 허용되지 않는 빡빡한 통장인 거예요.
주거 문제도 큽니다.
결국 독립하려면 주거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목돈을 모을 수가 없잖아요. 보증금이 없으면 월세를 아주 많이 내면서 살아야 하고요. 그런 불안이 계속 있어요. 그래서 워킹 홀리데이로 닭공장에서 번 돈이 입금되었을 때 넉넉한 통장 잔액이 확실히 사람을 덜 불안하게 한다는 생각을 했죠.
생애 전반에 걸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면요?
굳이 꼽아야 한다면 PD 시험 준비를 3년 했을 때 힘들었어요. 그때 힘들었기에 지금의 좋아진 내가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힘든 건 힘든 거예요. 결국 불안을 견딜 수 있는 근육이 남들보다 조금 더 발달해서 어떻게든 소속이 되고, 취업하는 삶 대신 지금의 삶을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후회는 없어요.
일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순간에는 화나지 않으셨어요?
당연히 화나죠. 후회는 없는데 분노는 심하게 일어나요(웃음). 보통 월급을 떼먹히면 소송까진 안가잖아요. 저는 돈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 화와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소송을 해야 했어요. 글 쓰는 사람들을 후려치거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지금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있어요.
그나마 덜 불안해 보이는 정규직이나 돈을 많이 주는 일자리에 대한 부러움은 없으셨나요?
결국 기회비용이잖아요. 오래 준비했던 시험에 떨어지고 방송국에 들어가는 준비를 하는 것이 더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 했을 때, 될지 안될지 모르지만 다시 회사에 들어갈 준비를 하느냐, 아니면 이대로 어떻게든 삶의 방법을 찾아가느냐 두 가지 선택이 있었어요. 첫 번째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잘해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꼬박꼬박 출근하고 월급을 받아가는 삶이었다면 저는 회사에 들어갔어도 금방 그만뒀을 것 같아요. 제 시간의 운용과 정기적인 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면, 돈은 물론 너무나 중요하지만 후자를 포기했을 거란 거죠. 대기업 다니고 새벽같이 나가 종일 일하는 친구들을 봐도 부럽다고 느꼈던 적은 없어요.
본인 선택도 있겠지만, 일자리 문제는 사회 요건이나 세대 간 갈등 때문이라는 생각도 하셨나요?
욕먹어도 할 말은 없는데, 일자리 문제는 윗세대 탓이 큰 게 맞아요. 물론 제 경우는 선택이었지만 02, 03학번 정도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였던 것 같아요. 이제는 저처럼 살기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떠밀리는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의도하지 않았어도 저보다 젊은, 특히 20대들은 정규직을 선택하고 싶어도 그렇지 못하는 상황이 올 거라는 거죠. 비정규직이라든지 계약직이라든지, 프리랜서의 삶을 택하더라도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은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마감 이야기를 해 보죠. 마감 노동자로 살면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마감이 들쭉날쭉하니 하루 일정은 매일 엉망진창이고요(웃음) 예를 들어 원고를 청탁받으면 언제 시작해서 첫 번째 원고를 언제 보내야겠다는 계산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럼 항상 계산을 못 맞추는 순간이 와요. 마감을 못 지킨다는 게 아니라 오늘 저녁까지 끝나야 하는데 못 끝내고 다음 날 새벽까지 가는 거죠. 마감을 지키는 게 마감 노동자의 1차 관문이니까. 최근에는 원고뿐만 아니라 일을 다양하게 하다 보니 일의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해졌어요. 자질구레한 일도 많아지고요.
특히 마감 노동자로서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나요?
원고료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저는 원고지 1매당 만 원이 최저라고 생각하거든요. 2000년대 초반에도 만 원이었어요. 그 이야기는 만 원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마지노선이라는 거죠. 호주 가기 전 1매당 팔천 원에 청탁했던 매체에서 호주 갔다 온 뒤에도 같은 금액으로 일을 부탁했는데 그때는 썼지만 지금은 도저히 못 쓰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하면 외부기고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어요. 그래서 매체마다 원고료에 대한 합리적인 책정이 필요해요.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돈 이야기를 잘하는 팁이 있나요?
예전에는 돈 이야기를 먼저 못 했어요. 하지만 프로가 되는 건 결국 돈 받고 일하는 거잖아요. 어느 경우는 금액이 너무 적어서 이 정도는 주셔야 한다고 미리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금액이 적더라도 의미있는 일이면 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적정한 돈을 미리 요구하는 이유는 프리랜서가 이 정도 일했을 때 이 정도 돈을 받아야 적정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에요. 다른 기고자도 있고, 넓게는 방송작가 알바라든지 해서 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분들도 생각해서 하는 만큼 받아야 하는 게 옳아요.
그리고 큰소리쳤으면, 해야 돼요. 못할 수가 없어요. 이 정도 금액은 주셔야 한다고 큰소리쳤는데 일을 엉망으로 했어(웃음), 그럼 다신 일이 들어오지 않아요.
프리랜서는 특히 일이 몰아서 오잖아요.
돈도 몰아서 오죠. 책에 수입이 0원일 때도 있다고 쓴 걸 보고 슬퍼해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슬퍼할 일은 아니에요. 어느 달 수입이 0원이라는 건 다음 달에 많이 들어온다는 이야기거든요. 일은 계속하고 있으니까 그저 몰려 들어올 때가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불안을 견뎌야 해요. 일을 하면서도 당장 월세를 내고 생활비를 유지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생각해야 하는 거죠.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와일드 블랭크 프로젝트를 진행하시기도 했습니다. 프로젝트 소개를 해주세요.
작년 1월, <그라치아> 48호에 김태훈 씨가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 이후에 장동민 씨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한혜진 씨한테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게 싫다’고 말한 사건이 다시 조명받았어요. 여자는 말하는 것도 싫고 생각하는 것조차 싫다는 거잖아요. 너무 위험한 발언이라고 생각했는데 SNS 사용자 중 한 분이 그 발언을 토대로 ‘Go wild, Speak loud, Think hard(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라는 페미니즘 구호를 만들었어요. 이 구호를 크게 써 붙이고 다닐 수 없나 생각하다가 친구와 에코백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SNS 상에서 이슈가 됐었죠.
‘Go wild’에서 ‘Go’ 사이가 비어 보여서 괄호를 넣었는데, 사람들이 괄호에 세월호 배지도 달고 좋아하는 캐릭터 배지도 달면서 자신만의 의미로 빈칸을 채워서 확장해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와일드 ‘블랭크’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만들어졌고요. 티셔츠, 파우치, 겨울용 에코백 제작까지 진행하고 지금은 쉬고 있어요. 수입이 들쭉날쭉해서 제일 아쉬웠던 게 정기적으로 후원을 못 하는 거였는데, 프로젝트 수익 일부를 꼬박꼬박 후원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요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어요.
특히 올해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중에서 말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더 크게 말하고 발언권을 더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이요. 페미니즘에 대해서 발언권은 여자한테 먼저 있는 게 맞고, 미디어에서도 일련의 사건에서 젠더 문제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오랫동안 20대로서, 여성 노동자로서 일했던 경험도 페미니즘을 생각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 같습니다.
방송작가로 일한 경험도 있겠지만, 엔터테인먼트, 영화, 미디어 매체에서 작품을 내놓고 콘텐츠를 만들 때 콘텐츠 자체의 성 불평등도 계속해서 나타나요. 불평등에 대해 말할 기회도 별로 없었고 사실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작년부터 일련의 심각한 이야기가 촉발됐을 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그러면서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되고, 페미니즘에 대해 조금 더 크게 이야기하게 된 게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 같아요.
최근에는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라는 슬로건도 나왔습니다. 직관적으로 페미니즘은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문장이지만,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이슈조차 자본주의로 풀어나가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어요.
와일드 블랭크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유의미한 소득이 나온 건 아니었어요. 저희가 오히려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건 예쁘게 만드는 거였어요. 영화나 TV 같은 콘텐츠도 못 만들고 재미없는데 의미를 담았으니 보라고 강요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작게는 파우치 하나를 만들고 에코백 하나를 만들어도 페미니즘 이슈가 담겨 있으니까 사라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의미가 있는 척하면서 의미 없는 일이죠. 최근 메갈리아에서 진행한 페이스북 소송을 위한 티셔츠 판매도 1억 넘게 모금됐잖아요. 물론 운동에 힘을 실어주고 싶어 하는 분들의 움직임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디자인이 예뻐서 샀다고 생각하고요, 소비 지향적인 문화라거나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페미니즘이 돈이 된다는 걸 보여줘야 결국에는 시장이 움직이거든요.
여성혐오 콘텐츠가 들어간 광고 불매 운동도 포함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로서의 시장만이 아니라 방송이나 미디어 같은 매체들도 움직일 거라고 생각해요. 돈이 된다는 걸 보여줘야 적어도 여성혐오 논란을 일으킨 연예인들을 광고에 고용하지 않을 거라는 거죠. 단지 페미니즘으로 돈을 벌었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소비자로서, 여성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을 혐오하는 콘텐츠, 시선, 젠더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매체를 구매하지 않을 권리, 시청하지 않을 권리를 보여주는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미스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기를
자기소개를 ‘어찌됐든 윤이나’라고 썼습니다.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작가 소개가 ‘황정은’이라고만 나와요. 그게 가장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윤이나라고만 쓰면 아무도 모르니까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예전에는 꼭 작가였으면 좋겠다, PD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기는 했어요. 어느 명칭으로도 저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게 지금의 제 소개예요. 기자, 칼럼니스트, 평론가, 사장님, 온갖 직함들로 불리는데 제가 어딘가 소속이 되고 호칭을 받은 게 아니어서, 대표할 수 있는 건 제 이름밖에 없어요. 제 이름을 스스로 좋아하는 편이에요. 결론적으로 나를 소개할 때 이름만 남는, 결국 윤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서문에 ‘자신만의 알바 일지를 찾아 나가는 미쓰윤을 위해’라고 썼는데, 독자들도 자신의 이름을 찾길 바라신 건가요?
누군가 미스로 부르는 게 좋은 의미나 그 사람을 대우하는 의미의 호칭은 아니잖아요. 일종의 풍자로 받아들여 주길 바라서 미’쓰’윤이었던 건데, 모두가 각자의 이름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었어요.
특히 여성 독자들을 향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상상했던 독자는 항상 여성이었어요.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경험이라고 한다면 책에 실린 빼빼로 데이 에피소드 정도지만, 그 외에도 당연히 여자라서 겪었던 경험들이 있었겠다 싶어요. 그런 부분을 공감하는 면에서도 여성분들께서 읽어주시면 좋겠죠.
‘무엇이든 되고 싶다’라고 쓰셨지만 ‘무엇이든’이 ‘아무거나’는 아닌 거잖아요.
분명 ‘무엇’이 되고 싶었던 시점이 있었어요.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 이 정도까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었을 테고요. 다행히 지금은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길을 걷고 있고, 적어도 제 삶의 몫은 책임질 수 있는 시간까지 어렵게 온 것 같아요. 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이 되고 싶진 않아요. 순간순간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저에게 정말 중요한 일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조금 더 일상을 재밌게 사는 거예요. 연기를 배울 수도 있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축구를 좋아하니까 바르셀로나에 가서 축구만 한 3개월 볼 수도 있겠죠. 전보다는 훨씬 가벼워졌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윤이나의 알바일지를 쓴다면 어떤 내용이 들어갈까요?
이미 쓸 게 몇 개 있어요. 여성영화제 매거진 편집장도 있고, 케이트 블란쳇 만나러 LA 간 이야기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알바일지에서 중요한 건 돈이 되는 뭔가를 계속해나가는 거죠.
건강이 뒷받침되어야 할 텐데,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건강 검진을 예약했는데 더 싼 데서 해야 하나 고민이에요. 회사에 다녔다면 2년마다 해줄 텐데 저는 한 번도 안 받아봤어요. 생각보다 너무 비싼데 거기다 수면 내시경 받으려면 10만 원을 추가하래요(웃음).
미쓰윤의 알바일지윤이나 저 | 미래의창
서른 개에 가까운 아르바이트를 거쳐 결국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에 이른 알바생의 잔잔하지만 치열한 생존의 기록. 지금도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않지만 어디에나 가능성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무엇이 되고 싶진 않고, 무엇이든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