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간이 다목적이든 단일목적이든 그러한 목적을 가진 공간은 그것이 주어진 시간 내에 성취되는 것이라면, 그 시간이 지난 후 그 공간은 블랙박스에 갇혀 있게 되며, 갇혀 있는 동안 우리의 삶과는 전혀 관계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딱히 쓸모없어 이름짓기조차 어려운 그런 공간은 건축의 생명력을 길게 하며, 정해진 규율로 제시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다양하게 만든다.(『빈자의 미학』, 83쪽)
일찍이 『빈자의 미학』을 ‘선언’한 건축가 승효상의 시대 정신은 2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이긴 듯하다.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고 한 무거운 말을 읽노라면 건축이라는 것이, 도시라는 것이 그동안 이 사회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승효상은 토지의 장소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건축가로서 지켜야 할 토지에 대한 신성한 의무”라고 말한다. 바로 공공성이다. 건축은 결코 한 개인에게 소유권이 있지 않다. 토지 또한 마찬가지다. 소유권은 인류에게 있으며 당대의 개인은 잠시 사용권을 확보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건축이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그 건축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 그 자체가 건축이다. 쓰임과 나눔, 비움이 중요한 삶, 그 자체다. 승효상의 ‘빈자의 미학’은 여전히 호명되어야 할 시대의 가치가 아닐까.
무엇보다 도시의 어지럽고 파편화 된, 불통의 풍경이 사회의 경박과 몰염치를 가져온 큰 요인이라고 하는 승효상의 진단은 아주 특별하다. 서울시 초대 총괄건축가를 역임한 그가 끊임없이 연결과 보행을 강조한 이유는 건축이 잃어버린 가치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자기 내면의 고유한 존엄성을 지키게 되기를, 그는 희망하고 있다.
소유권은 우리 모두의 것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셨어요. 글쓰기도 꾸준히 하고 계시고요. 건축과 언어, 선생님께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요소들 같습니다.
건축 하는 것이나 글 쓰는 것이나 거의 똑같다고 보고 있어요. 집‘짓기’고, 글‘짓기’니까요. 저는 설계를 할 때 그 설계에 대한 글부터 지어요. 개념어가 확실해야 설계를 할 수가 있어요. 그 개념어를 찾기 위해 아주 많은 자료를 뒤져요. 역사도 찾고, 땅에 관련된 문서나 소설 등을 다 뒤져서 저의 개념을 찾아내는 작업을 하죠. 개념을 찾아내면 그 다음부터는 딱 풀려요. 언어를 먼저 발견하는 게 중요하죠. 언어란 집단 지성의 산물이니까요. 진리거든요. 제 건축을 결정하고, 속박하고, 한정짓는 굉장히 중요한 수단이 제게 언어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집의 이름이 생각이 나요. 거의 매번 그랬습니다.
‘모든 땅은 고유하다’, 때문에 땅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건축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바로 건축의 공공성인데요. 역사성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이를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땅이라고 하는 게 개인의 소유가 될 성질이 결단코 못 되죠. 땅은 개인이 만든 것도 아니고요. 사람이 돈을 주고 거래를 한 것인데요. 개인은 사용권만 있는 것이지 소유권은 없어요. 소유권은 우리 인류에게 있는 것이에요. 좀 더 명확히 이야기하면 우리 후손에게 소유권이 있는 것이지 당대의 개인에게는 소유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건축도 마찬가지예요.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별일 없으면 사람의 일생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고요. 그 건축이 어떤 밀실에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땅 위에 지어지니까 옆집 사람도 그 건축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때문에 건축 또한 소유권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사회에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건축이나 토지를 부동산 가치로만 생각해서 소유권이 개인(본인)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과도하게 행사를 해요.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붕괴되어왔죠. 사용권은 인정해주지만 소유권은 우리 모두의 것으로 하자고 하는 게 공공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공동체가 붕괴되지 않는다고 하는 걸 확신하고 이런 이야기를 드린 거죠.
어떤 사회에서는 그 이야기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어떤 사회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기도 하잖아요.
소유를 해봐야 몇 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죽으면 결국 소유 못 합니다. 건축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가요. 폭격으로 무너지거나 경제적 이유로 빨리 사라지지 않는 한 그렇죠. 본인이 죽었는데 어떻게 소유를 합니까. 명확한 일이거든요. 잘 사용하면 되는 것이죠. 소유권은 절대 개인한테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옆집 사람이 그 집 때문에 영향을 받아요. 그 영향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집니까. 본인이 지어야죠. 그러니까 본인이 짓는 건축에 대해서 공공적 가치를 인식해야 하는 겁니다. 옆집이 모두 2층, 3층으로 되어 있는데 혼자 10층으로 올리면 그 풍경이 파괴된 책임은 본인한테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죠.
‘건축에 시간의 때가 묻어 윤기가 날 때 가장 아름답다’고, 건축의 역사성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셨거든요.
건축은 사실 건축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거주자가 완성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거주자가 살면서 완성되어 나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시간이 지난 건축은 원본과 굉장히 다릅니다. 살면서 고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굉장히 아름다운 거죠. 인간의 의지가 묻어나는 것이고, 삶의 형태가 건축화 되어 나타난 거니까 그 자체가 무척 귀하죠. 인간의 생명이 귀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흔적도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건축에 훨씬 더 이야기도 많고요. 그것이 모여서 역사가 되는 거예요. 그 자체도 보존을 해야 해요. 결국 건축은 붕괴되기 마련인데 붕괴되기 직전의 모습은 굉장히 찬란하죠. 장대한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어요.
건축을 인위적으로 멸실 시킨다는 건 아주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한테 건축 설계를 부탁하려고 온 사람의 땅에 혹시 건축이 있는 경우에는 제가 무척 조심하지 않을 수 없어요. 되도록 고쳐서 사용하라고 권유를 하니까 황당해하는 사람도 있죠.
의뢰를 했는데 건축가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당연히 당황할 거예요.
지금도 비슷한 일이 있는데요. 대학로의 한 필지에 굉장히 오래된 주택이 하나 있었어요. 보니까 일제시대 때 지은 거예요. 그곳에 6층 건물을 짓겠다고 하는데 짓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어요. 그 집 하나만 1층 건물이고 모두 고층 건물이었거든요. 고민하다가 그 건물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짓기로 했어요. 물론 지하층도 파야 해서 허물 수밖에 없어요. 허물지만 지금 상태를 옮겨 두었다가 다시 가져올 거예요. 그 위에 집을 짓는 거죠. 공간을 그대로 보존하는 방법을 택한 건데요. 건축주는 잘 모르죠.(웃음) 대충만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게 되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고 특이하니까 이게 뭔지 물어보게 되고, 이런 집이 있었다고 이야기하게 되고, 그 역사가 다 남게 되는 거죠. 결국은 새로 지은 그 건축 자체가 아주 풍부해지는 거죠.
그런 모습을 오래된 골목, 구시가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골목에 대한 아름다움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많이 말씀하셨잖아요.
특히 골목은 그래요. 골목이라는 게 다니는 통로의 구실만 하는 게 아니에요. 골목길이 있는 데는 대부분 작은 단위의 주택들이 있는 곳이죠. 그곳에 사는 사람들, 많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길이 다 골목길인데요. 골목은 그들의 공공영역이거든요. 그 동네의 공동체적 생활이 묻어나는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모여 살아왔는가를 다 훑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에요. 그런 것들을 멸실하는 것은 정말 우둔한 짓일 수밖에 없죠. 골목이야말로 가장 유효한 관광자원이기도 하고, 도시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수단인데 그동안 우리가 너무 많은 골목을 없앴어요. 지금도 없애려고 하고요. 그래서 없애지 말자고 계속해서 강조하며 쓴 글들이에요.
오래된 골목에 실제 거주하는 사람들이 불편함이나 노후함을 들어 재개발 이야기를 하기도 해요. 당사자들의 이런 이해관계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로 그렇게 재건축 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보니까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더라고요. 와서 시세 차익이나 부동산 이익을 노리고 온 사람들이 많고요. 워낙 그곳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거의 재건축이나 골목길 없애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에요. 터줏대감들은 반대를 하죠.
유네스코 같은 세계의 유수한 역사 문화 보존을 권고하는 단체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하는 말이 길을 없애지 말라는 겁니다. 길이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의 가장 핵심적인 공공영역인데 그걸 없애는 순간 공동체가 와해된다고 하는 거죠. 아무리 가파르고, 좁고, 거칠더라도 길은 없애지 말라는 게 아주 중요한 권고 사항이에요. 그런데 지난 시대에 너무 많이 없앴죠.
또한 가로막혀버렸어요. 아파트 단지라는 섬에 의해서 말이에요.
우리나라의 길은 서양 길과 달라요. 서양은 도시가 평지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길부터 만들죠. 길을 만든다는 건 직선으로 만든다는 거거든요. 모이기 위해서 광장을 만들고, 이런 거죠. 그러니까 집은 길가에 나란히 지어요. 반면 우리는 주로 집을 짓는 곳이 산비탈이잖아요. 길을 만들기가 어려워요. 영역부터 생기고, 집과 집 사이에 남은 부분이 길이 되는 거죠. 직선이 거의 없어요. 산비탈에 직선을 만들 수도 없죠. 구불구불하고 휘어져 돌아오고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니까 이 안에 광장이라는 개념도 없었어요. 길이 광장이 되고, 마당이 되고, 통로가 되고 하는 부분이었죠. 놀이 또한 길놀이 문화가 있지 광장 문화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길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동네 정체성을 가장 확실히 나타내는 공간이에요. 그것을 아파트 같은 것이 들어와 전부 깔아뭉개고, 서양처럼 평지로 만드느라 축대를 쌓고 올리는 게 지난 시대의 방법이었죠. 지금은 서울에서는 그런 짓을 못하게 되었어요.
서울시 총괄건축가 역임하던 때의 이야기죠?
제가 그 일을 몇 년 하는 바람에 그것에 대해 공무원들에게 수없이 교육을 했고 왜 안 맞는지에 대해 강의도 엄청나게 많이 했어요. 이제 저와 같이 일한 공무원들은 골목 없애는 것이 나쁘다는 걸 다 알아요.
미학이 아니라 윤리가 중요
건축을 거대하고 웅장한, 새로운 어떤 것으로 여기는 오해들이 있었어요.
그게 전 시대의 개념인데요. 세우는 자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혹은 치적을 만들기 위해 랜드마크 같은 건물을 만들거나 그랬어요. 건축을 오브제처럼 보는 거죠. 숭배 대상이나 과시 대상으로 봤어요. 건축의 본질은 그런 드러난 모양이 아니에요.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건축의 본질이고요. 그러니까 전 시대의 그런 개념은 건축의 본질과 거리가 먼 거죠. 그런 건축은 파편화될 수밖에 없거든요. 혼자만 잘나서 서게 되니까요. 그런 것들이 많은 도시일수록 파편적 도시고요. 연결이 안 되니까 시민의 공존,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죠. 우리가 그간 몇 십 년 동안 서울을 그렇게 만들어왔어요.
서양에서도 이미 미학이 아니라 윤리가 중요하다고 선언을 해버린 상황이에요. 우리 역시 도시에 대한 관념을 바꿔야 되는 때라고 주장을 계속 하는 것이죠. 20년 전부터 계속 목청 높여 해왔는데요. 제가 목청 높인 결과는 아니겠지만 요즘은 바뀌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도시도 개발이 아니라 재생 하자고 하거나 마스터플랜을 쓰지 말고 침을 놓듯 작은 부분만 고쳐 나가게 하자, 이런 종류의 방법을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이 도시의 어지러운 풍경을 사회의 경박, 몰염치, 예의 없음의 한 원인으로 꼽으셨는데요. 이 부분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상황은 예전보다 더 악화되었다고 보고 있어요. 하루에 마흔 명이 자살하는 나라고요. 돈 있는 사람의 무례함이 극에 달한 판이니까요. ‘빈자의 미학’이라든가 이런 류의 가치가 더 필요한 때라고 보고 있는데요. 그동안 도시의 개발 양상을 너무 어지럽게 전개해 왔어요. 그 피해를 이제 사람들도 많이 알죠. 재개발을 다 하기로 했다가 지금 시장(市長)에 와서는 다 해지했고요. 주민들 또한 재개발이 나쁘다고 하는 걸 인지하게 되는 의식의 전환이 많이 된 상태예요. 지금이라도 도시 정책을 바로잡으면 얼마든지 사회의식 개선의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은 우리를 바꾼다, 건축으로 인간 조작도 가능할 것이다, 라고 한 대목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사회의 변화를 위해 건축이나 건축가가 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히틀러 같은 사람이 건축을 통해 민심을 조작하고 자신을 신격화시키는 일을 굉장히 즐겨 했죠. 과거 전제 군주도 다 그랬고요. 건축을 도구 삼아 인간을 바꾸고자 한다면 확실히 가능해요. 죄 지은 사람을 교도소 독방에 가두는 이유도 그런 것 아니겠어요. 공간이 사람을 바꾼다는 걸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건데요. 사실 그렇게 해석하면 건축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 안 하는 거거든요. 건축은 그렇게 도구로만 사용하면 안 돼요. 인간 스스로가 건축을 자기를 진전시킬 수 있는 기반으로 삼아야 합니다. 건축에서 모든 걸 결정해놓으면 안 되고요. 인프라만, 기본적인 조건만 갖추고 살면서 바꿔 나가는 거죠. 그것이 ‘비움’이라고 하는 겁니다. 건축가가 모든 것을 결정해놓지 말고 비워서 거주하는 사람의 의지에 맡기자고 하는 게 제가 주장하는 건축입니다.
미니멀리스트는 아닙니다. 미니멀리즘은 바꾸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제가 비우고 단순하게 만드는 까닭은 사람이 살면서 스스로 바꾸라는 이야기예요. 이것이 제가 말하는 ‘건축이 우리를 바꾼다’고 하는 이유고요. 모든 것을 건축가가 결정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빈자의 미학』에서도 ‘무용의 공간’을 말씀하셨죠.
그렇죠. 스마트폰 같은 거예요. 보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렇지만 누르면 나타나기 시작해요. 사용자가 바꿔서 쓰고요. 보통 때는 비어있고요. 그러나 이 안에는 우리가 바꿔 쓸 수 있도록 아주 정교하게 기능이 깔려 있어요. 이렇게 만들자고 하는 겁니다. 건축도 그 안에는 우리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설정해두지만 겉으로는 비워두자고요. 우리의 전통적인 마당 같은 것이죠. 우리 마당은 항상 비워져 있지만 아이들이 놀 수도 있고, 잔치도 하고, 축제도 벌이고, 제사도 지냅니다. 그 일이 다 끝나면 다시 비워져 있죠. 그런 공간은 세상에 우리 마당밖에 없거든요. 지금이라고 해서 그것을 못 만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건축을 그렇게 비워놓자고, 그것이 ‘무용의 공간’이라고 한 겁니다.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통해 변화시키니까 그곳은 개인의 의지에 다 맡기는 거예요. 그래야 해요. 건축이 정한대로 따라서 살면 인간이 도구화되는 겁니다. 건축을 도구로 삼아야지 인간이 도구가 되면 안 되는 거죠.
서울시 총괄건축가 임기 중, 서울역 고가공원화나 사대문안 지하 공간 연결 작업처럼 보행도시로의 전환을 도모하셨어요. 보행이라는 것은 도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모리기념재단(Mori Memorial Foundation)이 작년에 조사한 세계 도시 국제경쟁력지수(Global Power City Index, GPCI)가 있어요. 서울은 6위에 랭크되었는데요. 동시에 머서(MERCER)리포트에서 삶의 질을 따지는 조사로 서울을 평가한 결과는 115위였어요. 이 불균형이 어디서 오는 걸까요. 잘못된 도시 정책에서 나온다고밖에 볼 수 없어요. 삶의 질을 따지는 리포트에서 지난 십 년 동안 끊임없이 1위에 선정된 도시가 비엔나입니다. 보면 비엔나는 철저히 보행도시입니다. 지난봄에 가보니 아주 중요한 간선 도로가 있었는데 그것마저 보행화를 시켜버렸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그 도로는 도무지 도시의 구조상 바꿀 수 없는 도로인데도 바꿨더라고요. 그만큼 보행화하는 데 아주 관심이 많은 도시가 비엔나입니다.
‘보(步)’자 자체가 한자로 ‘머물 지(止)’자 두 개를 합친 거예요. 걸어 다니는 게 목적이 아니고 머무는 게 목적이니까 그것은 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죠. 서울은 도시 안에 산이 있는 구조예요. 보행 조건이 다른 도시와 다르죠. 뉴욕이나 런던은 평지에서만 걸어요. 동경은 지표면과 지하가 많이 개발이 되어 있고요. 홍콩은 지표면과 빌딩과 빌딩 사이의 가교로 걸어요. 대부분의 도시들이 하나에서 두 개의 면만 사용하는데 서울은 네 개의 면을 사용할 수 있거든요. 첫째, 지표면이 있고요. 둘째, 서울역 고가나 세운상가처럼 빌딩 사이를 갈 수 있고요. 셋째, 지하공간이 굉장히 큽니다. 넷째, 산길이 있어요. 이 네 개의 레이어가 어떨 때는 만나기도 하고요. 이것만 잘 살리면 이처럼 역동적인 보행로를 갖는 도시는 서울뿐일 거예요. 유래 없는 도시거든요.
구체적인 사례를 좀 더 설명해주세요.
이를 현실화시키는 첫 번째 방법으로 서울 성곽길을 활성화시키고, 끊어져 있는 지하 보행로를 다 연결시키는 일을 했어요. 심지어는 청계천도 그렇죠. 어쨌든 청계천을 복원했는데 양쪽 길을 차로로 사용하고 있잖아요.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전부 보행로로 청계천을 만들면 수변의 풍경이 얼마나 달라지겠어요. 그런 것도 주장했고요. 물론 아침에는 배송, 유통 차량이 통행해도 되겠죠. 오후에 다 막으면 되는 거거든요. 이런 엄청난 보행의 매트릭스가 생기면 실질적인 삶의 질도 질적 전환을 가져온다고 저는 믿고 있고, 그러한 제안을 많이 했었습니다. 실행이 되겠죠.
내면에 존재하는 존엄성
삶도, 건축도, 가치를 품어야 한다고 많이 말씀하셨어요. 선생님께서 품은 가치는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UN 인권선언문 서문에 보면 인권선언문을 작성하는 중요한 목적을 가리키는 단어가 하나 나와요. 영어로는 ‘inherent dignity’, 그러니까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존엄성’이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인데요. 이 말이 굉장히 근사한 말이에요. 모든 사람은 존엄한 가치를 가지고 있죠. 지난 시대에 물신에 완전히 빼앗겨 존엄적 가치를 많이 훼손시켰어요. 그 형태가 도시나 건축으로 많이 나타나 있어요. 건축이 우리 삶과 같은 말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도시를 그냥 기계적인 방법으로 분화하고, 계급적으로 가르고 했던 것이 지난 시대의 도시 정책이었거든요. 이런 것들은 전부 우리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었어요. 그런 것에서 벗어나자고 주장을 아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원래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존엄성을 되찾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역시, 가장 결핍된 가치라고도 볼 수 있을 테고요.
물론이죠. 예컨대 얼마 전 우리를 굉장히 슬프게 했던 ‘송파 세 모녀 사건’이 있었어요. 그 어머니가 두 딸과 죽기 직전에 한 달 치 월세를 놓고 죽었더라고요. 정말 감동 받았어요. 그러니까 사회가 쫓아서 자살을 하지만 자기 속에 있는 존엄성을 지킨다는 의지의 발로로 이렇게 한 거거든요. 모든 인간에게 다 그것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못하거나 그것을 무참히 짓밟거나 무시하거나 했던 것이 지난 시대가 저질러 놓은 양태였죠. 저는 이것을 건축을 통해서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더구나 지금처럼 인터넷, 가상현실이 발달돼 우리 모두가 밀실에서만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죠. 건축은 이것을 회복시킬 수 있거든요. 서로 만나게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동네라는 공동의 공간을 지나가게 만들고, 모이게 만들고요. 사람들이 그런 게 필요 없다고 할 때 건축가는 ‘아니다, 해야 한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 건축가입니다. 그런 공공성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 좋은 건축가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찍이 ‘빈자의 미학’을 말씀하셨는데요. 최근 20주년 기념판이 새로 나왔어요. 어느덧 20년이 흘렀는데요. 여기서 하시고 있는 말씀은 지금도 부족함 없이 유효한 것들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새롭게 들리기까지 했어요.
『빈자의 미학』은 20년 전에 너무 거칠게 쓴 글이라서 개정판을 언젠가 쓰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언젠가 마지막으로 쓰는 책이 『빈자의 미학』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20년 전에 쓴 이 책이 절판이 되었다고 해서 복간하자고 하는 얘기에는 안 하는 게 좋다고 했었어요. 여러 이유로 할 수 없이 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대가 아직도 이것이 유효한 시대라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해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때문에 복간에 동의를 한 거죠. 더 필요하면 더 필요했지 전혀 덜 필요해지지 않은 것이 우리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도시, 더 나아가 이 사회를 사는 사람들 안에 상처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정치의 잘못이 굉장히 커요. 정치하는 사람들은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인데 아직도 부족한 제도가 너무 많은 거예요. 약자, 가지지 못한 자들을 더 약자가 되게 하고, 더 가지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죠. 기회를 안 주죠. 청년들, 엄청나게 힘들잖아요. 지금은 불황의 시대가 아니거든요. 불황이란 호황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앞으로는 호황이 안 옵니다. 지금은 저성장의 시대인데 이것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스템을 바꿔야 해요. 가치를 바꿔야 하고요. 그 생각은 않고 정부에서는 계속 부동산으로 경기 진작시킨다고 하는, 이런 후진적 정책을 펼쳐요.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대결, 갈등, 대립, 분열이 더 심해지지 결단코 치유가 안 되는 것이죠.
사실은 건축과 도시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만 해서는 한계가 있어요. 그것은 틀림없어요. 큰 것이 바뀌어야죠. 그렇다 하더라도 저 같은 사람이 하는 노력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볼 수가 없어서 건축을 통해서 혹은 이런 글을 통해서라도 소리 지를 수밖에 없는 거죠.
지금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잖아요.
사회는 진보만 하지 않아요. 건축도 마찬가지죠. 항상 진보하지는 않아요. 도시도 마찬가지고요. 퇴행의 역사를 거듭한 때도 있어요. 지금은 한창 퇴행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는 때라고 보면 틀림없겠죠. 그러니까 끊임없이 이 상황을 타계할 방법을 모색해야 해요. 중요한 것은 타계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힘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연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앞날은 선해질 것이라는 믿음도 포기해서는 안 되고요. 항상 희망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희망이란, 이룰 수 있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고 했어요. 마종기 시인의 시집 제목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라는 제목처럼 말이에요. 성경 구절에서 나온 말인데요. 아주 절망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찾아야지요. 퇴행한다 하더라도 희망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 내면에 흐르는 존엄성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저는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승효상 저 | 돌베개
이 책은 승효상의 도시건축론을 담고 있다. 그는 우리 도시가 권력과 자본을 위한 기념비적 건축과 천편일률의 마스터플랜에 오랫동안 집착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펙터클의 건축은 우리에게 허망함만을 안겨주기에, 이제는 다원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공공영역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빈자의 미학 승효상 저 | 느린걸음
멈출 줄 모르던 성장의 질주는 길을 잃고, 발 딛고 선 토대마저 흔들리는 시대에 우리는 서 있다. ‘가진 것이 충분하지 않아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다시, 『빈자의 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