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열의 새 앨범 < V >에는 시작부터 알베르 까뮈의 문제작 『이방인』의 구절이 흐른다. 소설의 첫 문장(‘오늘 엄마가 죽었다’)만큼이나 강렬한 첫 곡 「Minotaur」는 이번 앨범의 중심이 주변적이고 이질적인 변두리 존재들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곡의 제목도 반인반수의 신화 속 괴물 미노타우로스다). 이는 아티스트 자신이 음악에 또렷이 부각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방인’은 이승열을 가장 투명하게 은유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 이민자로서의 정체성과 스스로의 주변인적 기질을 언급하며 “이 곡을 첫 트랙으로 두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고 말했다.
까뮈의 소설을 평한 사르트르의 문투를 빌리자면, 이승열의 신보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방인’이다. 음악적 틀을 허물고 관습을 배제하며 은폐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내면을 발현해냈고, 이는 앨범 전체에 낯설고 생경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파격감은 언제나 독창성과 이질성을 동전의 양면처럼 동반한다. 앨범에 대한 음악 팬들의 반응이 감탄과 당혹으로 양분되는 것도 독창성과 이질성의 갈래를 두고 서로 다른 줄기에 무게를 둔 때문일 것이다. 이런 반응을 예감한 듯 그도 앨범 부클릿에다 수록된 음악들로 인해 ‘즐겁거나, 혼란스럽거나 혹은 무감각해지길’ 바란다고 썼다.
이즘과는 두 번째 만남이다. 인터뷰는 이승열의 음악을 지금의 모습으로 이끈 매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그는 그간 자신에게 손을 뻗어 준 우연과 인연, 영감과 생각들을 가만히 풀어내며 네 번째 앨범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를 찬찬히 짚어 나갔다. 한 시간 반가량 ‘작가의 말’을 듣고 난 후 이르게 된 결론은, 이번 앨범이 이승열에게는 가장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작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홍대 벨로주 공연이 이름만 공개된 블라인드 티켓 방식으로 진행됐다. 어떤 이유로 이런 기획을 하게 되었나. 신곡 발표를 위한 복선은 아니었나?
제 의도는 없었어요. 순전히 마케팅. 저는 처음에 ‘블라인드 티켓이 뭐예요?’라고 물어봤거든요. 어둠속에서 뭐 쓰고서 공연하는 건가?(웃음) 팬들에게는 가격이 할인되는 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케이했죠. 작년 4월의 벨로주 공연은 제가 그전에 했던 공연 셋과 변한 게 많았어요. 랩탑을 들고 올라가고, 3집 곡을 재해석하는 느낌으로 가져가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 모습은 새로웠을 거예요.
그렇잖아도 공연이 다소 색다르고 아방가르드해 보였다는 후문이다.
제가 하던 것에서 열 발짝 앞으로 나간 느낌이죠. 아방가르드하게 느끼셨다면 저는 제 미래를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거예요. 지난해 1월에 카입과 함께한 뷰직 세션 공연에서 처음으로 제가 잘 쓰지 않던 테크놀로지를 쓰게 됐어요. 그걸 준비하면서 랩탑과, 앨범으로 보여 주지 않았던 사운드스케이프를 만들어서 실제로 보여주고 싶어졌고요. 그러니까 슬슬 시작을 한 거죠. 카입과의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그전 해 11월부터 구상하다가 자연스럽게 흘러와서 뷰직 공연이 끝난 후부터 랩탑은 저와 계속 붙어 다니는 요소가 됐고, 그걸 최초로 쭉 나아갔어요. 그렇게 시작한 작업이 작년 말에 완성이 된 거예요.
정규 비정규를 나누는 기준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확히 설명을 드리자면 네 번째 < V >앨범이면서 라이브 실황은 아니고 저희가 풀 밴드와 함께 즐겁게 연주하는, 특이하게 녹음된 앨범이죠.(웃음) 라이브 앨범은 환호와 박수 소리도 넣잖아요. 그런 식으로 라이브 앨범의 티를 내는데, 그런 건 없습니다.(웃음)
< V >라는 타이틀의 의미는.
최근에 조용필 선생님도 19집을 내셨지만 캐리어가 많은 선배님들은 앨범이 열 몇 장씩 되고 저도 아마 음악을 계속 하면 10장이 넘어가는 날이 올 텐데, 그러면 그렇게 앨범 숫자로 언급되는 게 저는 개인적으로 싫었어요. 물론 기사화하는 입장의 기자분들은 그렇게 써야겠지만, 저는 그게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반 장난식으로 회사랑 얘기하면서, “그럼 네 번째 앨범이니까 어차피 4집이라고 얘길 할 테지만, 브이로 합시다” 했죠. 다섯 번째.(웃음) 간단한 예로 어떤 엘리베이터는 4층이 F로 돼 있잖아요. 그것과 비슷한 경우예요.
1집부터 3집까지는 4년 간격으로 나왔는데 이번 신보는 2년 만에 나왔다. 그간의 리듬을 봤을 때 비교적 빨리 나온 앨범 같은데.
4년 걸쳐 나올 때마다 심적 압박은 늘 있었어요. 회사나 제가 게을러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고 과정이 그만큼 있었던 건데, 과정 중에서 뭐가 불필요하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느냐를 생각해 보니 몇 가지가 있더라고요. 빨리 내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4년은 길다 싶었어요. 그렇다고 곡이 없는 상황에서 앨범을 낼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앨범을 위해 곡을 쓰는 것도 웃기고요. 이번 앨범은 곡들이 지난 앨범에 비해서도 비교적 쉽고 자연스럽게 나와서 일이 쉬워졌어요. 녹음방식에 있어서도 스튜디오에 개별적으로 와서 몇 번씩 연주하고 영어로 나온 가사를 한국말로 개사하는 일들을 제작과정에서 확 들어내 버렸어요. 라이브 앨범을 내고 싶었다기보다는 스튜디오가 아닌 공간, 울림에 대한 중요성도 염두하고 있었고요. 그게 시간을 절약해 주는 일등공신이었을 거예요. 마지막 트랙들인 「Bluey」는 2009년에 나온 곡이었고, 「Cynic」도 3분의 1만 완성돼 있던 과거의 곡이었는데 이걸 집에서 완성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어요. 그것 외에는 시간이 그렇게 들지는 않았네요.
원 테이크가 어떻게 보면 옛날 방식이지만 하는 입장에선 매력이 있을 것 같다.
희열이 있죠. 원 테이크를 섣불리 못하는 이유가 핸디캡들이 있거든요. 소리가 샌다든가 분리가 안 되는 단점이 있는데 그걸 장점으로 바꿔 보자는 게 의도였어요. 스튜디오에서 개별적으로 연주할 때 느낄 수 있는 희열은 아주 적어요. 그래서, 객석에 관중이 없더라도 공연을 준비할 때나 연습실에서 합주할 때 느꼈던 희열을 상상하면서 재현을 한 거죠. 그걸 엔지니어가 기술적으로 최대한 단점을 보완하면서 잡아 줬고요.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는?
우려되는 부분이 두드러진 곡도 있었어요. 앨범을 들을 때 보컬이 잘 들려야 되잖아요. 보컬이 안개 너머에 있는 듯 들린다든가 의도된 선을 넘어서 희미할 때는 난감하잖아요. 녹음된 소스 자체가 그렇다면 더 그렇고요. 몇몇 곡에서 그게 살짝 보이는 부분이 있었어요. 어떻게 보완을 할까 하다 몇몇 곡은 집에서 제가 덧댔어요. 그렇다고 바꿔치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질감을 좀 더 두껍게 만들어 주는 작업을 한 거죠.
앞의 여섯 트랙은 벨로주에서 녹음했고 뒤의 네 트랙은 스튜디오 녹음이다. 어떤 기준으로 벨로주 녹음과 스튜디오 녹음을 나눈 건가?
「Who」라는 곡을 두 번 한 이유는, 저는 괜찮은데 회사에서는 이 곡이 좀 더 좋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었어요. “왜요?” 했더니 “혹시 알아, 이게 주요 곡이 될 수도 있잖니.” 그렇게 들은 말은 한번 더 생각을 하게 되고, 스튜디오에서 라이브 한번 더 하는 건 힘든 게 아닌데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했어요. 플럭서스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고 싶어서 아래 곡들을 녹음한 건 아니에요. 단지 편리에 의해서. 마지막 두 곡은 밴드를 소집하고 다시 녹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제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거예요. 9번곡 같은 경우는 베이스를 다른 분이 치셨지만요.
곡 길이가 전반적으로 더 길어졌다. 짧은 싱글 위주의 요즘 음악 추세와도 거리가 있는 방식인데, 자연스러운 결과물인가 아니면 특별한 이유가 있나.
글쎄요. 그건 ‘넌 왜 이렇게 키가 크니?’라고 물어보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캔버스 사이즈를 이만한 걸 쓰고 싶어 라고 할 수는 있는데, 저는 처음부터 캔버스를 상상하고 곡의 그림을 그려 나가는 입장은 아니에요. 일단 템포라는 게 있잖아요. 곡이 원하는 템포가 있으면 그걸 끝까지 가져가야 되잖아요. 물론 사족 같은 부분을 들어내야 하는 건 맞는데, 이번 작업에서는 그런 걸 느낀 적이 없어요. 유일하다면 「Fear」라는 곡에서 1절과 2절의 베레이션이 뭘까라는 고민을 살짝 한 적은 있지만 그 외에는......, 이건 호흡과도 같은 것 같아요.
이번 앨범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 있다면?
자주 듣게 되는 곡은 1번과 6번. 골고루 좋아해요.
베트남 전통악기인 단보우는 어떻게 넣게 됐나.
음악에 대한 구상과 관계없이 일상을 보내다가 운전을 하던 중 라디오에서 국악 오케스트라 협연을 듣게 됐어요. 마지막 부분에 솔로 협연자가 무슨 악기를 연주하는데, 엠프로 증폭이 되고 비브라토도 많이 들리고, 기타처럼 하모닉스가 들리는 스트링 악기인데 아무리 추측해도 이 소리는 무슨 악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이 연주자인 펑(Le Hoai phuong)을 수소문 끝에 찾아내서 만났어요. 국악을 공부하면서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더라고요. 레슨을 하느냐, 얼마나 받느냐 그런 것들 물어보기도 하고.(웃음) 연주를 같이 해 보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작년 7월 올림픽홀 뮤즈 라이브에서 처음으로 협연을 하게 됐죠.
앨범에 참여한 모로코인인 오마르 스비타르(Omar Sbitar)씨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
단보우를 하고 나니까, 왜 상상만 했던 욕심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아랍인의 남자의 목소리. 모스크에서 기도하듯이 노래하는 그런 아라빅한 요소에 대해 그간 동경이 있었고, 한동안 제3세계 음악을 찾아 듣기도 했는데, 이왕 이렇게 갈 거면 더 밀어붙여도 되지 않을까 싶어진 거죠. 그래서 펑에게 그대로 설명했어요. “아랍사람인데 한국에 있어야 되고 노래를 잘 해야 해. 그런 뮤지션 있어?” 그랬더니 있대요.(웃음) 모로코에서 왔고 한국에 산 지 좀 됐고 영어도 잘하고. 공연에 초대해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이야길 했죠. 편곡적으로 생각했을 때 「Who」와 「Minotaur」라는 곡에서 오마르가 뭔가를 해 줬으면 좋겠다는 밑그림이 그려져서 그렇게 작업을 했고요. 녹음은 실시간으로 참여하진 않았어요. 그 친구가 스케줄이 안 되서 후반에 더빙을 한 거예요.
원래 하던 음악에 베트남 풍도 섞이고 아랍 풍도 섞이게 된 건데, 처음부터 제3세계 음악에 대한 콘셉트를 잡고 시작한 건 아니었던 건가?
의도가 분명하면 편하긴 한데 그게 과격한 시도일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작위적일 수도 있고. 우연을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건, 오마르에 대한 물음도 캐쥬얼하게 던진 질문이 우연처럼 단추가 맞아서 이렇게 된 거고. 단보우를 넣게 된 것도 그렇고, 단보우 위주로 곡을 써보자 해서 「We are dying」이라는 곡을 쓰게 된 것도 그렇고, 연출의 콘셉트가 초반부터 딱 있었던 건 아니에요. 아랍풍의 제3세계의 월드뮤직을 하겠다는 전제는 없었어요. ‘내가 왜 이런 쪽으로 가고 있는 걸까’ 정도의 고민은 초반엔 하게 되죠. 나오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있으니까요. 근데 어느 순간 그냥 자연스럽게 믿게 됐어요. 공연을 해 보면 나름대로 관객의 반응도 있고. 근데 그 반응이 “우아!” 이건 아니었어요.(웃음) 아시다시피 “어?”하는. (웃음)
그렇다면 이번 앨범을 만드는 데 영감이 되어 준 대상이 또 있다면?
과거에는 제가 영미권의 영향을 받은 느낌이 묻어나는 음악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음악에 흥미를 잃고 안 듣기 시작한 지가 좀 됐고요. 이 모든 작업들이 시작되기 전에 <브로큰 플라워>라는 영화를 봤어요. 거기서 ‘물라투 아스탓케’라는 이디오 재즈의 거장이 만든 음악을 접하고 나서, 새로운 그림을 보게 된 것 같아요. 이 사람은 심지어 라틴의 영향도 있고, 학업은 버클리 음대에서 마쳤고, 고향인 에티오피아에 돌아가서 고유의 것들을 접목하고 있고. 2000년대 초반에 했던 모던재즈 팀과의 협업도 놀랍더라고요. 보컬 곡이 보컬 멜로디 위주의 곡은 아니고, 계속 반복되는 부분에서는 보컬이 악기처럼 들려오는 곡이었어요. 그때 내가 너무 제한된 음악을 했다는 생각을 한 거 같아요. 물라투 아스탓케 음악을 3개월 동안 술친구로 삼았죠. 굉장히 행복했어요.
원래 앨범을 만들 때마다 의도적인 콘셉트보다는 우연의 작용에 더 무게를 두는 편인가?
음. 3집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2집 끝나고 망한 뮤지컬이 있었어요. 그때 그 음악을 하면서 거기서 받은 영감이 있었고, 그 상황에서 3집 작업에 대한 생각도 정리가 되고 3집 곡들을 쓰게 되면서 박자가 순조롭게 가해졌어요. 곡은 나오는 대로 연주하고 싶잖아요. 빨리 나와서 테스트를 해 보고 싶고, 그래서 공연이 잡히건 페스티벌이 잡히건 그냥 했어요. 곡이 나오는 족족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해 왔던 음악들 들어보면 3집부터 단순히 장르적 차원을 넘어서 더 넓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번 앨범도 그 연장선으로 봐도 될까.
잘 보셨어요. 시간이 지나도 3집이 전환점이 됐다고 말할 것 같아요. 3집부터 마음을 좀 고쳐먹고 ‘자유를 얼마만큼 더 누릴 것인가’를 더 생각하게 됐어요. 앞을 더 내다보고 나니, 좀 더 자유로울 수가 있더라고요. 지금 이 순간 내가 대중의 어떤 리셉션을 받을 것인가 하는 현재적인 걱정보다는, 앞으로 10년 20년 이후의 내가 되어 돌아봤을 때는 이게 맞는 것 같아요. 여기서 이걸 시작 안하면, 그때 가서 제 자신에게 묻겠죠. 너 왜 그걸 안했냐.
그렇잖아도 3집부터 이 뮤지션이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편해졌다는 인상도 받았다.
그 편함이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한테는. 어느 순간 무대에 올라가건 이렇게 인터뷰를 하건 간에, 뭔가 ‘내가 잘난 모습을 보여야 겠다’ 하는 걸 포기했어요. 내가 하는 일, 내가 만든 음악에 대해 필요 이상의 칭찬도 거부하고요. 물론 필요 이상의 혹평도 화가 날 것이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다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이야길 하는 거나 연주하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하니까 그걸 계속 버릇처럼 느끼게 되더라고요. 근데 옛날 버릇 누구 못 준다고(웃음), 어느 순간 ‘이걸 더 멋있게, 좀 더 잘’ 하는 생각이 침투할 때가 있는데, 그 순간 일이 틀어져요. 그건 확률적으로 맞는 것 같아요. 다들 경험하셨을 거예요. 글을 좀 더 잘 써야겠다 거나. 그렇게 되는 순간 없어지는 게 있더라고요.
2집에서는 지선, 3집에서는 한대수, 이번 앨범에는 장필순이 피처링에 참여했다. 고정적인 기획으로 피처링 트랙을 넣는 건가?
앨범 만들다가 여유가 생기면 그런 공상을 하나 봐요. 곡을 계속 모니터하면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들의 블루스」는 혼자 하니까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러다 오십되는 거야~’가 굉장히 익살스러웠으면 좋겠는데. 이게 누가 제 꿈을 꿔 줬어요. 지인 친구 분이 “꿈속에 이승열이 나와서 방안에서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데 가사가 이렇더라~” 하고 얘기해 준 것 중에 ‘그러다 오십되는 거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 모티프가 됐죠. 그런데 저 혼자 ‘그러다 오십되는 거야’ 하기에는 느낌이 안 살더라고요. 그래서 그 맛을 살려 줄 목소리의 소유자가 누굴까 하다가 한대수 선생님이 생각났고요. 이번 「Bluey」 곡 같은 경우는 가사가 영어로 쭉 나가다가 어느 한 부분에서 푸른 꽃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걸 가장 ‘푸른 꽃’스럽게 불러주시는 분은 누굴까, 여자였으면 좋겠다 하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분이 장필순 선생님이었어요.
영어 가사가 많이 들어가는 앨범은 이번이 처음인데, 이승열에게 한국어 가사를 쓰는 것과 영어 가사를 쓰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영어가 2차적이지 않고 원래의 모습에 더 가까워요. 거의 90퍼센트는 영어로 중얼거리니까, 그리고 그것의 반 이상은 이걸 가사로 써도 되겠다는 판단이 서요. 그러면 곡과 가사가 동시에 나오는 거죠. 그것의 장점은 안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제가 하려는 말이 ‘진짜’로 나오는 거거든요. 설령 멋이 없거나 말이 안 될지라도 그건 1차적인 거기 때문에 그것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만약 예전처럼 영어를 한국어로 개사를 하면 이 곡을 적어도 몇 십번을 들어보면서 해석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제가 곡들에 지쳐버려 도대체 뭔 얘길 하는지 모르게 돼요. 애초에 지껄였던 묘한 뉘앙스의 말이, 어떻게 이런 말이 나왔지? 무슨 말일까? 하면서도 말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이제는 소설을 쓰는 것처럼 한국말로 글짓기를 하는 거니까 의미가 변하는 부분이 있죠. 노래함에 있어서도 원래 나왔던 가사대로 노래할 때 소리의 느낌들이 발음이 달라지니까 변하게 되기도 하고. 고음부에서 그 단어를 써야만 아름답게 나오는데 그걸 포기하기 싫어서 그 단어를 끝까지 유지하는 방법으로 주변의 가사를 조절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또 무엇보다 저한테는 이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에요.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시간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2차적인 걸 포기하면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엔 그런 것 고려 안하고 가보자 했어요. 실제로 예전엔 레이블과 이견이 있었어요. 2집의 「곡예사」나 「새벽, 아침의 문」 같은 경우는 제가 전부 영어로 부르겠다고 했는데 안 된다고.(웃음) 근데 결과적으로는 좋은 가사가 나왔어요. 고생한 만큼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곡예사」의 원래 가사가 살짝 생각나기도 해요.
그렇다면 이번 앨범이 이승열의 가장 1차적인 내면이 담긴 음반이라고 봐도 되나.
그렇죠.
첫 번째 곡인 「Minotaur」 같은 경우는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구절이 삽입됐는데, 어떻게 넣게 된 건가.
저는 중간 부분에 나온 것만 해 달라고 요청을 했거든요. 근데 오마르가 이곡을 듣고서는 인트로 길이가 있으니까 첫 부분부터 자기가 내레이션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 왔어요. 그래서 제가 이방인의 텍스트를 줄 테니 네가 모로코 출신이니까 불어로 하자. 묘하지 않아? 이게 아랍인을 쏴 죽인 장본인의 이야기를 아랍인이 이야기하는.(웃음) 그런 장난스러운 마음도 좀 있었어요. 그때 제가 영미문학관이라는 프로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방인』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뇌리에 박혀 있던 상태였어요. 근데 아주 기가 막히게 여기서 맞아떨어져서 쓰게 됐죠.
「Minotaur」뿐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작품이 갖고 있는 상징이 앨범 전체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앨범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도 이와 비슷하게 읽어도 되는 건가.
그렇게 봐 주셨다면 감사합니다. 메시지는, 말보다는 음악인 것 같고요. 이방인이라는 생각은 저는 늘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출신이 걸쳐져 있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이질감은 늘 느끼는 사람이어서요.
경계에 존재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양한 것 같다. 경계를 낳는 기준이나 규정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경계 지점을 추구하거나 즐기는 사람도 있다. 본인의 경우는 어떤가.
음. 성향이 파이터면 체제 전복이 목적일 수 있는 거고, 경계에 서서 머뭇거린다면 뭔가 애착이 남아서 그런 거겠죠. 저는 애착은 아니고, 사람에 대한 애정은 있는 것 같아요. 결국은 인간에 대한 얘길 하는 거니까. 그게 유일하게 저를 경계에 머물게 만드는 요소예요. 서울사람 어디사람 그런 구분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아이디어 자체, 그래서 특정 언어를 써야만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풀어도 이야기가 통할 거라 생각을 한 거죠.
또 다수가 있고 소수가 있는데, 저는 늘 소수의 입장인 것 같았어요. 소수일 때 더 편하고. 그렇다고 소수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낸 적도 없고 개인적인 사람이지만. 음악을 하는 게 적어도 개인적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음악을 통해 그걸 초월했으면 하는 거죠. 제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달변가도 아니고 글재주가 뛰어나서 매니페스토를 써서 ‘이렇게 합시다’라며 선봉에서 리드할 수 있는 의지도 없고, 단지 제 무기는 제 음악인데, 음악은 식상한 말이지만 초월적인 미디어인 것 같아요. 어차피 상업적인 시스템에서 이러고 있지만 비상업적인 마인드로 하다 보면 그런 어젠다나 경계가 우스워 보이게 되더라고요.
새 앨범도 발매됐고 디제이도 하고 해외 공연 준비도 있고 앞으로 더 바쁠 듯하다.
저는 일하는 걸 즐기는 것 같아요. 워커홀릭일 수도 있어요. 쉬는 것도 즐기는데 일하는 것보다 멋지게는 못 쉬어요. 어느 날 전화했더니 로밍돼 있고 “엇, 하와이야?” 그런 적 한번도 없고.(웃음) 쉰다 해 봤자 경기도에서 혼자 음악 들으면서 술 한잔 하는 게 전부예요. 전 할 일이 있다는 것에 연연하는 것 같아요. 스케줄이 있다는 건 안정감을 줘서 좋아요. 내가 이 시간에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즐겁고요.
음악적으로 뮤지션 이승열은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 것 같나. 지금까지의 행보를 스스로 평가한다면?
음. 제가 작가로서 많이 읽히고 많이 들려지고 팬이 엄청나고 그런 상황은 아니지만 제 자리를 가지고 있긴 한 것 같은데, 또 절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수 되고. 근데 그게 10년 됐어요. 제 위치를 잡으면서 오래 하다 보니까 시간이 해결해 주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한테 전달하면서 번져나가는 식으로.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걸어 나간 건 음악적 행보로 봤을 때 잘한 거란 생각이 들어요. 만약 지금 좀 서두르는 감이 있다면, 그래봤자 2년이지만. 탄력을 받는 시기랄까, 작업이 많이 나오는 시기가 있는 것도 같고요. 또 우린 인간이기 때문에 나이에 대한 부담은 어떻게든 느끼는 것도 같아요. 음. 스스로 내가 뭘 쓰고 싶어 하는지를 포착해 낸 건 다행인 것 같아요. 내가 이런 작품을 기록하고 남기려는 구나라는 걸 잊고 살 수도 있는데, 10년 지나고서 그걸 다 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런 맥락에서는 음악적으로 성실하게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정리 : 윤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