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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취미를 갖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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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부쩍 다가왔음을 체감하던 날, 시인 마종기와 마주했다. 인터뷰 장소는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6월 30일까지 ‘책으로 남은 아동문학가 5인5색 전’이 열리고 있는데, 시인의 아버지인 마해송의 개인문고 대표작품과 유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 날은 전시회 개막을 기념해 마종기 시인이 기념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시인은 자신의 새 책 출간보다 아버지의 전시회를 더욱 뜻 깊어 하는 듯 했다. 『우리 얼마나 함께』에도 기록한 아버지 마해송 작가에 관한 추억을 곱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학생 때였던가,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함께 살던 때인데, 어느 날 아버지가 원고료를 많이 받았다고 ‘르네상스’라는 다방을 데려가셨어요. 어떤 맛있는 음식을 사줄까 기대를 하고 갔는데 따끈한 우유를 사주시며 고전음악을 들려 주셨죠. 그 때 들었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쇼팽의 피아노 곡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이제는 아들 셋에 손주도 여덟,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가장 익숙하지만 한국에 오면 어김없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여지없이 찾아온다.

시인 마종기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서 유년기, 청년기를 보냈다. 동화작가 마해송과 여성무용가 박외선의 장남으로 어릴 적부터 예술에 남다른 취미를 보였고, 대학 재학 중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해부학교실」, 「나도 꽃으로 서서」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문학에 탐닉했지만 과학을 공부해보라는 친지의 조언을 듣고 의학의 길에 들어섰고, 의예과 공부를 하면서도 꾸준히 시를 발표했다. 모교 ‘연세문우회’ 활동을 하던 중에 첫 시집 『조용한 개선』으로 제1회 연세문학상을 수상했고 군의관 시절 두 번째 시집 『두번째 겨울』을 출간했다. 1966년, 많은 의학도들의 선택이 그러했듯 미국으로 건너가 수련의 과정을 거쳐, 전문의가 된 마종기 시인. 2002년 의사생활을 은퇴한 후 영구 귀국을 계획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매년 봄은 꼭 한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마종기의 시를 추억하고 궁금해하는 지우, 후배들이 있기 때문이다. 2010년 시작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시집 『하늘의 맨살』이후, 3년 만에 산문집을 펴낸 마종기는 『우리 얼마나 함께』는 조금 굴곡졌던, 그러나 별 것 없는 내 삶의 생활잡기”라고 말했다. 시인은 자신의 글을 잡기로 표현했지만, 모국어를 사랑하는 시인의 이야기는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누군가를 위로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내 희망사항 가운데 하나는 언젠가 내 아이들 중 누구든 내 글을 한 편이라고 읽고 평생 글을 쓴다더니 이런 글도 썼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헛된 희망사항은 버리기로 결심했다. 우선은 이뤄질 가능성이 없고, 내 생을 뒤돌아보고 이해하고 느껴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주변에는 아직도 내 글을 아껴주는 분들이 있어 내게 용기를 준다. 바로 그들이 결국 내 정신의 인연들이자 내 감성의 친구고 조카들이라는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행복하다. (p.10~11)



한국에 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봄을 맞아 한국을 찾은 마종기는 요즘 모든 일상이 감사하다.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출근길 지하철도 고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견딜 만 하다. 며칠 후, 미국에 있는 둘째 아들 가족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라, 시인은 손꼽아 그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미국에 한국관광회사가 운영하는 고국 여행 프로그램들이 제법 있어요. 둘째 아들 막내가 11살인데, 이제 고국을 조금 알만한 나이가 돼서 며느리랑 같이 제주도를 시작으로 부산, 경주까지 한국 여행을 하기로 했죠. 할아버지가 시인이라고 해도 잘 모르는데 이번 기회에 좀 알려줄까 봐요(웃음). 아들 셋은 모두 문학에는 문외한이었는데 그래도 손주들은 글 쓰는 걸 제법 좋아해요.”

손주들이 쓰는 스토리 북을 볼 때 유년 시절을 추억한다는 마종기. 아버지와 함께 갔던 고전음악감상실, 창경궁 돌담을 넘어 우걱우걱 씹어먹었던 아카시아 꽃송이, 아버지의 낡은 라디오, 가장 아껴 읽었던 오 헨리의 단편 소설『마지막 잎새』를 떠올린다. 한국에서 봄을 만끽할 때면 마냥 행복하다는 시인은 손주들의 귀국과 『우리 얼마나 함께』의 출간 기념 북 콘서트를 기대하고 있었다.

“낭독회 같은 행사는 해봤지만 북 콘서트는 어떤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제가 좋아하는 신경숙 작가, 이병률 시인이 와준다니 고마울 따름이죠. 함께 서간집을 냈던 루시드폴도 공연을 해준다네요. 외국에 오래 머문 노시인한테 이런 관심을 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제가 은퇴를 좀 일찍한 편이잖아요. 한국 시인으로 살고 있는데 외국에서만 살고 있으니 어쩔 때는 창피하기도 하고 그래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왜 영구 귀국을 하지 않냐’는 건데, 자식들이 모두 미국에 있으니까 아내가 쉽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래도 매년 봄 한국을 찾고 있어요. 비행기를 18시간 정도를 타야 하지만, 한국에 오면 그렇게나 기분이 좋을 수 없어요(웃음).”

시인은 “모국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다는 게 내 평생의 한”이라고 말했다. “인생에 있어서 후회하는 건 별로 없어요. 하지만 지금 이 나이가 되어 가만히 보니까 한 가지 실수를 했어요. 한국을 너무 오래 떠났다는 거예요. 언제라도 원할 때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부모님한테도 죄송하죠. 대를 끊어 버렸으니. 그런 거에 대한 죄책감이 커요.”

고국을 떠난 지 이십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내 시가 나도 모르게 고향 그리기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국과 고향 땅이 아니라 내 자신 속을 파고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내 속에서 고국과 고향을 다른 색깔로 보기 시작했다. 그것을 통해 나 자신이 지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어차피 모든 이의 고향은 같은 곳이 아니겠는가. (p.256)


내 삶에 영향을 주는 취미, 정말 중요해요

40년간 의사로 환자들을 만난 시인은 지난 2002년부터 6년간 모교 연세대학교 초빙교수로, ‘문학과 의학’ 수업을 통해 예비 의사들에게 문학과 인문학의 관심을 독려했다. 의사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고자, 2010년 뜻 있는 의사들과 문학인들을 모아 문학의학학회를 창립해 매년 학술대회를 열고 있고, 현재 문학의학학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는 개인주의가 발달해서 주변 이웃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몰라요.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의사들이 많이 실패하고 사라지죠. 의료사고로 인해 의사 생활이 끝나고 정신병원에 장기 입원하는 경우도 많고. 미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사라지는 건 무척 쉬워요. 그런데 실패한 의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경우 취미가 없어요. 음악을 좋아해 콘서트를 가고 미술을 좋아해 미술관을 가는 그런 취미는 있지만, 자기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극히 드물어요. 대개 의학, 과학을 지상 최고의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실수를 하게 되면 삶의 의지가 단번에 꺾여요. 다른 취미가 없이 외골수로 살아가면 인생에 있어서 큰 일이 닥칠 때 쉽게 이겨내기가 어렵죠.”

미국 의과대학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문학과 인문학 강의를 해왔다. 하버드, 존스 홉킨스, 시카고 대학 등이 앞장서서 <문학과 의학> 같은 잡지도 출간하고 의료 문학을 소재로 한 강연회도 자주 열고 있다. 마종기 시인은 “의대생에게 문학과 예술,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하는 건, 의료 시술을 하는 과학자로서의 의사에서 벗어나 환자라는 인간을 대하는 전인격적 의사로 태어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내 삶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취미를 갖고 그것을 즐기면, 의사로서 좌절하고 봉변을 겪게 될 때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생겨요. 많은 경우 의사들은 생명 앞에서 결정권을 갖게 되잖아요.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할 때, 어떤 예술이 주는 힘이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줘요. 제가 무난하게 의사 생활을 무난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시를 계속해서 썼기 때문일 거예요. 제가 만약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의사가 됐다면 문인의 길을 포기했을 수도 있어요. 늘 공부를 해야 하는 바쁜 의사의 일상만으로도 힘에 부쳤을 테니까요.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괜찮은 의사가 되어 고국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낯선 이국 땅에서 시는 내게 유일한 위로였으니까요.”

의사와 문인. 내게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때로는 분초를 아껴 허둥대며 살아왔지만 되돌아봐도 나는 한 점의 후회가 없다. 나는 내가 시인이었기에 외국에서 힘들다는 의사생활을 잘 이겨냈고 오히려 동네 의사들에게 존경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의사였기에 오랜 세월 한 해도 그치지 않고 모국어로 시를 써올 수 있었다고 믿는다. 낙오되고 잊혀진 시인이 아니고 이 나이까지 현역 시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렇게 이상하고 복잡한 내 삶은 생의 끝까지 틀림없이 이어질 것이고 그 어느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눅들지 않은 채로 이 기구한 생을 사랑하며 살아가리라고 약속할 수 있다. (p.248)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일, 어찌 행복하지 않은가

“몇 년 전 제 등단 50주년을 기념해서 후배 문인 권혁웅, 정끝별, 김경주, 이병률 시인 등이 소극 장을 빌려서 낭독회를 열어준 적이 있어요. 함께 자리한 친구가 ‘한국 문단에서 이런 자리를 받은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냐고’ 하더군요. ‘아마 나를 동정해서 그렇겠지’라고 답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내가 그 사람들을 좋아하고 또 소통이 된다는 일이니까요. 마종기라는 사람은 굉장히 외로운 시인으로 여겨졌는데, 이렇게 후배들과 지내는 걸 보면 행복한 시인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종기 시인은 미국 현대시의 대부, 의사이자 시인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다. 윌리엄스는 1963년에 언론과 문단의 엄청난 각광을 받으며 장례식을 치를 떼서야, 많은 이들이 그가 세계적인 시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일화가 있다. 윌리엄스를 회상하는 동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친절한 의사였고 동네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었다고 증언했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가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기자가 ‘당신은 근사한 집에 살고 유능한 의사인데다 친구도 많은 행복한 사람인데, 시는 왜 그리 외롭냐’고 물었더니 ‘외로움을 모르는 자는 시인이 될 수 없다. 가슴에 큰 구멍을 가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지 않으면 시인이 될 수 없다. 나는 시인이기 때문에 외롭다’고요. 베토벤도 ‘내 종교는 외로움’이라고 말한 것처럼, 내게도 태생적으로 외로움이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해요.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 생활을 했으니 표피적으로 상당히 외로운 상태에 있었지만, 문학을 종교로 외로움을 이겨낸 게 아닌가 싶어요.”

노시인이 된 지금, 마종기는 언제 펜을 들어 시상을 적을까. 시인은 “특별한 변화는 없지만 부쩍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옮기게 된다”고 말했다.

“5월 달인가 <현대시학>에 발표한 ‘나이 든 고막’이라는 시가 있어요. 내가 언젠가 귀가 잘 안 들린다는 걸 느꼈을 때가 있었어요. 정확하게 안 들리는 건 아니고, 집사람이 가끔 ‘당신 기억 안 나’라고 말할 때 문득 느꼈어요. 나이가 드니까 그게 별 일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거예요. 잘 안 들린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않나, 싶은 거죠. 싫은 소리 안 듣고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아요. 소리라는 게 다 의미가 있겠는가, 이제 내게 들리는 소리가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의사를 은퇴하면서 앞으로 2년에 한 번씩 책을 내자고 다짐했지만, 쉽지만은 않다는 시인. 그는 시인이란 마라톤 주자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단다. 다만 시인에게는 결승점도, 완주를 알리는 화려한 테이프도 없다. “되도록 적게, 단지 빛나는 보석처럼, 그리고 따뜻해서 몸을 기대고 싶은 말을 글로 표현하고 싶다”고 말하는 마종기 시인. 어느덧 그의 얼굴에서 서정적인 아우라가 풍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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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얼마나 함께마종기 저 | 달
이 책은 시인의 시집이나 다른 산문집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세세한 일상과 생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심(詩心)이 되었던 맑고 투명한 마음은 사랑하는 가족과 여러 인연들로부터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화작가 아버지, 현대무용가 어머니를 비롯하여 동생들과 세 아들, 친구들, 문단의 지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정 깊었는지도 우리는 새삼 느낄 수 있다. 오십 년 세월 꾸준히 시를 써온 시인이 눈을 감고 되돌아보는 풍경에는 필연적으로 그리움의 정서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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