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이 시작되면서 헌법은 국민적 관심사가 됐다. 다수의 시민은 권리를 되찾기 위해 헌법책을 펼쳤고, 일부의 정치인은 통치 구조를 바꾸기 위해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어떤 경우에도 헌법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난해한 법 조항과 복잡한 통치 구조, 이 두 가지를 명쾌하게 설명해 줄 대상이 부재한 까닭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헌법의 상상력』은 탄생했다. 역사가 심용환이 저술한 이 책은 딱딱한 법리적 해석에서 벗어나, 역사와 인문학의 관점에서 헌법을 말한다. 대한민국의 헌법이 어떤 상황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했는지, 그 과정이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어떻게 다른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역사적 사건과 헌법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현재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지금의 현실은 헌법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심용환 저자는 2015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파동 때 대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역사가다. 그가 SNS에 게재한 ‘카톡 유언비어 반박문’이 전국적으로 큰 화제가 됐고, 이후 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 <노유진의 정치 카페>, <정봉주의 전국구>, 시사주간지 <한겨레 21> 등을 통해 국정화 교과서의 문제점을 알렸다.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알리기 위한 그의 노력은 『단박에 한국사 : 근대편』, 『역사 전쟁』, 『심용환의 역사 토크』의 출간으로 이어졌고, TV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 <말하는대로>에 출연해 임시정부와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기도 했다.
헌법,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
지난해부터 헌법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헌법의 상상력』을 집필하시는 데 영향을 미쳤나요?
그렇죠. 직접적인 계기는 『역사 전쟁』을 쓸 때였어요. 그때 일본의 사례를 검토했는데요. 1980년대에 일본의 극우파가 검정제도를 이용해서 교과서를 원하는 방향으로 개선하는 데 실패해요.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결집해서 개헌을 준비해요. 작은 실패 속에서 더 큰 꿈을 꾼 거죠. 그 정보를 접하고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작년 4.13 선거 전에 당시의 새누리당이 개헌 이야기를 했었잖아요. 그때쯤 출판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주제로 책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조사를 해보니까 단순하게 현행 헌법을 잘 설명해 주는 책이나 아주 어려운 법학 서적은 있는데, 우리나라의 헌법사를 체계적으로 다루거나 외국의 헌법 역사를 들려주는 책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이건 내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블로그를 통해서 “이 책은 우리 시대에 대한 저의 대답”이라고 이야기하셨더라고요. 지금 우리가 헌법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지금 촛불 혁명 정국이잖아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대통령을 합법적 절차를 통해서 무력화시킨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죠. 중요한 시기인 만큼 고민이 많았고, 정치인 캠프나 시민 단체에서 함께 활동하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다 의미 있는 활동이기는 하지만, 근시안적이고 정치공학적이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연구를 하면서 발견하게 된 건, 과거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4.19 혁명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투표에나 관심이 있었지, 어떻게 새롭게 헌법을 만든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6월 항쟁이 끝난 뒤에도 김영삼이냐 김대중이냐, 후보 단일화냐, 여기에만 관심이 있었죠. 어떤 세계를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없었어요. 지금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고요.
결국 헌법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촛불 혁명에 대한 제대로 된 결과가 어디로 모아져야 될까’라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헌법이었죠. 기존 헌법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만약 헌법을 고쳐야 된다면 어떻게 고쳐야 되는가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헌법 자체가 오늘 우리의 생활 전체를 규정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헌법의 문제를 고찰한 거고 책 제목도 『헌법의 상상력』이라고 지은 거죠.
법학자가 아닌 역사학자가 집필한 책이라는 점에서 『헌법의 상상력』이 다른 헌법 관련 책들과 차별화 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비판적인 말이 될 수 있겠지만, 기존의 헌법학이라는 것은 결국 이론적이었다는 거예요. 매번 개념적으로만 접근한 거죠. 모든 나라의 헌법은 그 나라의 역사 과정 속에서 도출이 되잖아요. 입헌 전통을 최초로 만든 나라인 영국을 보면 봉건 귀족들이 존 왕을 겁박해서 최초로 문서를 만든 게 ‘마그나 카르타 대헌장’이에요. 그런 전통이 청교도 혁명이나 명예 혁명을 통해서 구체화된 거고요. 프랑스 같은 경우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서 국민 의회가 만들어졌고, 오랫동안 내각제로 가다가 해방 이후에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의원 내각제 전통에 대통령제를 섞은 거죠. 그래서 이원집정부제라는 모호한 제도가 만들어졌어요. 그러니까 각 나라는 다 자기들만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합법적인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 헌법이라는 절차적 정의를 만든 거거든요.
역사를 빼놓고는 헌법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씀인데요. 그 부분에서 『헌법의 상상력』이 가진 장점이 돋보여요.
역사성 속에서 개념이 나오는 건데, 우리나라에서는 법학자들이 다 개념적 접근만 하는 거죠. 그래서 생기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헌법이라는 게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들만 연구하는 학문으로 여겨지고, 대중들 사이에서는 헌법이 별 의미가 없는 거죠. 실제로 우리는 다 헌법에 의지해서,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요. 저는 역사학적 관점이나 인문학적 관점 속에서 헌법을 이야기한 거고, 그걸 통해서 헌법이 우리의 삶과 밀접한 이야기이고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어요.
이전에도 헌법 조항들을 보신 적이 있나요?
제가 학원 강사로 일할 때 ‘법과 사회’ 과목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지금은 ‘법과 정치’로 교과명이 바뀌었는데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저도 같이 공부를 하다 보니까 법이 굉장히 유용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법은 실생활을 규정하는 힘이고, 법이라는 절차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안전하고 공정하게 합리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그런 부분에서 재미를 느껴서 책을 많이 찾아서 봤어요. 헌법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됐죠. 적어도 헌법 조항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헌법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법령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알게 됐으니까요.
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헌법과 실제 생활이 유리되어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헌법 조항에 명시되어 있는 권리이지만, 실제로는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요.
그렇죠. 그건 대통령이 배신을 했고 국회의원이 배신을 했기 때문이에요. 이승만 대통령은 권력 연장을 위해서 두 번 헌법을 뜯어고쳤고, 박정희 대통령은 더 극단적이었어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켰잖아요.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 했던 걸 한 번 더 한 거예요. 사람이 바뀌었을 뿐이지 똑같은 구조가 재현된 거죠.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헌법은 시민들이 혁명을 통해서 자기의 의사를 관철하는 수단으로 쓰인 게 아니라,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개정된 거예요. 4.19 혁명과 6월 항쟁을 제외하면, 그 과정을 무려 70년 동안 거친 거죠. 그러니까 헌법이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거예요.
독재 정권을 경험하면서 시민들에게 각인된 헌법은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었겠죠. 나를 규제하고 탄압하는 것으로 인식됐을 거예요.
개헌과 관련해서도 8년 중임제냐, 의원내각제냐, 의원집정부제냐,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 자체가 이미 권력자들에 의해서 통제된 사유 방식이라는 거죠. 헌법 전문을 읽어보면 3분의 2 이상이 다 국민의 기본권이라든지 노동권, 사회권, 복지권 같은 권리 조항들이거든요. 근대 시민법은 시민혁명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국민의 권리 보장을 위해서 탄생한 거예요. 우리는 시작부터 좋은 헌법을 얻었지만 그걸 우리 걸로 체화시키지 못했어요.
‘다음 대통령’ 보다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최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하셨을 때 ‘대한민국 수립 이후 가장 좋았던 헌법은 제헌헌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행 헌법이 제헌헌법을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나요?
헌법학적 관점에서의 세련미는 지금 헌법이 더 좋은 부분이 있죠. 그러나 제헌헌법이 더 나아보이는 부분도 있어요. 대표적인 게 특권 계급 방지 조항이에요. 지금이 헌법에도 있기는 한데, 그냥 특권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되어있어요. 제헌헌법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국회에서 이야기된 것 중 하나가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가 불평등해질 수 있다는 거였어요. 특권 계급이 생길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국가는 특권 계급이 생겼을 때 그것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발언이 나왔고, 아무 이견 없이 통과가 됐어요. 헌법이라는 것 혹은 국가의 의무는 특권 계급을 용납하지 않고 그걸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라는 의미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안 하잖아요. 그렇게 인지하고 있지도 않고요.
‘이익균점권’과 관련해서도 깊은 인상을 받으신 것 같아요.
저만이 아니라 많은 역사학자들이 제헌헌법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아마 이익균점권 조항 때문일 거예요. 이익균점권은, 기업을 운영하면서 발생한 이윤을 노동자와 경영자가 균점해야 된다는 조항이에요. 당시 국회에서는 이익균점권을 위해서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요즘으로 말하면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들어가야 된다는 말이죠. (제헌헌법에는) 그런 이야기가 들어가 있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회 균등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었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특권 계급이 분명히 있잖아요. 그리고 기회의 균등이라는 말로 특권 계급을 포장해 주고 있죠. 그러니까 현행 헌법보다 제헌헌법이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장점들이 있는 거죠. 이익균점권은 그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 것 같아요.
책에서 지적하셨듯이 “제헌헌법의 급진성과 진보성을 격찬하면서 제헌헌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동의하지 않으시죠?
헌법을 명문을 어떻게 바꾸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들이 큰 사고를 치기는 했지만, 국회의원들도 자신들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의원내각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지금도 일부 정치인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개헌을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중요한 건 권력 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생활 구조를 바꾸는 거죠. 헌법의 내용을 먼저 바꾼 다음에 생활 구조를 맞춰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생활 구조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자연스럽게 개헌으로 맞물려서 헌법이 수정될 수 있겠죠. 우리가 오늘의 생활 세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바꾸어갈 것인가에 대한 마음이 많이 모이고, 그 결과가 헌법에 영향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문화된 조항을 의미 있게 만들거나 개헌을 한다면, 그런 목적으로 해야 되죠.
대한민국 헌정사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 칠레, 북유럽의 사례도 설명하셨는데요. 우리 헌정사는 너무 압축적으로 진행돼서,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부족한 부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좋은 모델에 대해서만 쓰지는 않았어요. 우리나라 헌정사가 다른 나라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미국이나 프랑스, 북유럽은 좋은 모델들이죠. 그런데 일본이나 칠레는 분명히 나쁜 모델이거든요. 일본의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선거구제를 개선한다고 해서 소수당의 입장이 무조건 반영되는 건 아니고, 소수당이 꽤 많은 의석수를 갖고 있다고 해서 사회가 한 번에 바뀌는 건 아니라는 거였어요. 그리고 칠레는, 최근 헌법은 조금 바뀌었지만, 민주화가 된 다음에도 2000년 초반까지 대통령이 국방부장관을 임명 못했어요. 군부를 전혀 통제 못한 거죠. 우리나라는 그렇지는 않잖아요. 대통령이 군부를 다 통제할 수 있는 구조가 되니까요. 그런 부분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 헌법의 장단점을 분명하게 보되, 다른 나라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을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일본과 프랑스는 각각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헌을 논의하기에 앞서 살펴봐야 할 나라들일 거예요.
일본은 양원구조이고 중선거구제이기 때문에 국회의원을 많이 뽑죠. 내각책임제이기 때문에 내각 해산에 따라서 선거를 여러 번 하고요. 이런 전통을 60~70년째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그 가간 동안에 우리는 민주화 투쟁이 중요한 과제였고, 경험해본 게 대통령과 단원제밖에 없어요. 갑자기 의원내각제를 적용하면 혼동이 생길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이원집정부제를 하면 권력을 두 개로 쪼개기 때문에 나라가 잘 돌아갈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프랑스의 이원집정부제를 보면 총리와 대통령의 권한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아요. 헌법을 봐도 애매해요. 이원집정부제를 개념화시켜서 쉽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는 거예요. 어떤 나라든 그 나라의 역사 속에서 그 나라의 헌법 질서가 만들어졌어요. 그걸 인정하고 우리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헌법적 위상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면서 풀어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19대 대선이 예정보다 빨리 치러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만큼 제2공화국이 출범한 과정이 궁금해지는데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이후에 치러진 선거는 순조롭게 진행됐나요? 당시에는 헌법 개정까지 함께 이루어졌는데요.
다음 권력을 누가 잡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혼란이 없었던 거거든요. 그 이중성을 인식해야 돼요. 지금도 다르지 않죠. 촛불 혁명의 결과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 것이냐를 두고 싸우고 있어요.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안정성은 사실은 비헌법적 태도 때문에 생긴 거예요.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켰을 때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새로운 세계와 체계를 만들어낼 것인지를 고민했어야 돼요. 결국 헌법적 논의로 가야 되는 거였는데, 그렇지 않고 누구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제2공화국 때는 의원내각제로 바뀌기는 했지만 결국은 야당인 민주당한테 권력을 준 거였죠.
6월 항쟁 이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김영삼한테 줄까 김대중한테 줄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전두환 대통령의 2인자한테 주게 된 거죠. 어떤 새로운 세계, 사회, 경제 질서, 정치 질서, 국가를 만들 것인가를 논의하지 않고 후계자 논의로 돌리면서 쉽게 쉽게 넘어간 거죠. 그 대가가 뭔지 보세요. 결국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고 과거 독재 정권에서 권력을 가졌던 세력들이 현재까지도 기득권을 가지고 있어요. 역사의 변곡점에서 어떻게 바꿀 것인지 국민적인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진통을 거치면서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역사 청산이 안 되는 거예요.
개헌을 말하는 사람들, 왜 그럴까?
『헌법의 상상력』에 이어서 곧바로 『심용환의 역사 토크』가 출간됐는데요. 새 책에서는 위안부, 친일파, 식민지 근대화론 등 근현대사 ‘역사 전쟁’의 핵심 쟁점을 다루셨어요. 이 가운데 가장 바로잡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가장’이라는 말은 조금 부담스럽고요. 책에 실린 여섯 가지 주제가 다 바로 잡히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마음속에 국정교과서의 가능성이 사라진다고 생각해요. 아시다시피 제가 꽤 긴 기간 동안 국정교과서와 싸워왔잖아요. 그러면서 내린 결론은, 제도 이전에 마음의 싹을 없애야 된다는 거였어요. 위안부를 둘러싼 유언비어에 현혹되어서도 안 되고, 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너무나 근거 없는 미화도 바로잡아야죠.
‘위대한 고대’를 그리는 건 열등감이라는 이야기도 실려 있죠?
옛날에 우리가 굉장히 큰 영토를 가졌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중국에 대한 열등감이거든요. 우리가 왜 영토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스위스가 영토가 크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나라도 아니고, 프랑스가 큰 나라라서 문화가 발전한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러시아가 더 발전했어야죠. 그 나라와 그 민족만의 고유성이 있는 거고, 우리의 내제적인 가치에 주목해서 자부심을 가지면 되는 거예요. 무조건 영토가 커야 한다는 건 남의 나라를 침략하자는 건데, 그게 일본의 제국주의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국사 교육만 보더라도, 고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가르치면서 근현대사는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죠.
『헌법의 상상력』에도 썼듯이 독재 정권이 발전하면서 교육중립성이 강조돼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 강조되는 거예요. 결국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옛날 이야기만 배우라는 뜻이죠. 옛날 이야기는 토론거리가 되지 않고 암기거리가 되거든요. 오늘의 이야기는 그냥 놔둬도 할 이야기가 있어요. 독재 정권,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요. 토론까지 안 되더라도 화라도 내는 거죠. 사건 자체가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우리랑 가까운 이야기라서 재밌는 거예요. 나랑 유관해야 재미가 있는 거죠. 돌덩이 쪼개고 광개토대왕이 땅을 늘리고... 그건 너무 먼 이야기이고 좋아하는 아이들만 좋아해요.
교육자의 정치적 중립이 독재 정권과 맞닿는 지점이 있었군요.
헌법과 법질서와 통치 정책을 통해서 학생들의 눈과 귀와 사고방식을 막아버리고, 또 한편에서는 교육정책을 통해서 근현대사 이야기를 못하게 한 거죠. 그러다가 2004년 이후부터 ‘근현대사’ 교과서가 만들어지게 되고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더 진척되면서,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거고요. (국정 교과서가) 그 흐름을 역행해서 막아버리려고 했지만 이제는 국민 의식이 많이 올라왔기 때문에 강한 저항에 부딪힌 거예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 토크』에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요. 부담스럽지는 않으셨어요?
제 생각에 역사가는 망루에 서 있는 사람 같아요. 정치가들은 창칼을 들고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역사가들은 현장에서 직접 싸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망루 위에 서서 흘깃 보는, 그 대신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역사가가 지혜로운 현자라서가 아니라, 높은 데 있고 망원경을 들고 있으니까,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해줄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저는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싶은 거죠.
역사가로서 망루에 서서 본 것을 서술할 때, 개인적인 해석이 개입될까 봐 많이 우려하실 것 같거든요. 어떠세요?
해석과 왜곡은 달라요. 왜곡은 목적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론을 정해놓고서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역사적 사실을 넣을 건 넣고 뺄 건 빼면서요. 해석은 사실과 자료들을 존중하고 그 위에서 합리적인 논리구조를 만들어서 이야기를 펼치는 거죠. 그러니까 해석은 자유로운 거예요. 다만 그 해석은 합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여러 비판 가운데 생존해내야 하는 거죠. 저는 헌법이라는 팩트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헌법 이야기를 꺼낸 거잖아요. 이건 해석이죠. 해석은 자유롭게 하되, 그 대신 책임이 있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수준 미달인 거죠.
만약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포함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내용이 있나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경제 개혁과 사회 복지라는 두 축이 핵심 화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는 한 저는 개헌은 반대예요. 지금 개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국회에도 개헌을 연구하는 모임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왜 모일까요? 국민들을 위해서 재벌을 개혁하고 중소기업 위주로 살리고, 생활 세계를 개선시킬 정도의 사회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모일까요? 전혀 아니죠.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없는 한,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고 자기 것을 많이 갖기 위해서 개헌 논의를 하는 거죠.
무엇을 전제로 개헌이 논의돼야 할까요?
일례로 재벌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지, 타이완 모델로 갈 것인지 북유럽 모델로 갈 것인지, 이런 식의 논의 속에서 개헌이 진척된다면 적극 찬성이에요. 사회권, 기본권, 노동권이 개선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면 찬성하죠. 그리고 요즘에는 성소수자 문제나 여성 문제에 대한 이야기도 많잖아요. 이런 주제들도 앞으로 큰 화두가 되겠죠. 사람들의 가치 판단, 사회적 합의 속에서 결론을 내리게 될 거예요. 이런 것들이 개헌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생활 세계와 관련된 문제에 초점을 맞춰서 개헌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기꺼이, 어떤 진영과도 함께 이야기할 거예요. 그런데 지금과 같은 식으로 정치권력 논의로 흘러가는 건 조금도 찬성하지 않아요.
헌법의 상상력심용환 저 | 사계절
우리는 누구나 헌법이 보장하는 삶을 살 권리가 있다. 『헌법의 상상력』은 지금껏 대한민국 헌법이 우리에게 보장하고자 했던 정의가,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제공하고자 했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와 가치가 무엇인지 내다보는 기회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