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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임인건, ‘야누스’의 과거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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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문을 연 클럽 '야누스'는 한국인에 의해 운영되면서 한국 재즈 연주자들이 정기적으로 연주한 최초의 재즈클럽이다. 재작년에 야누스는 37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새로운 경영진에게 인수되어 현재 '디바 야누스'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한국의 올드 재즈팬들은 옛 시절의 야누스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곳에서 오랜 세월을 연주해 온 연주자들이다. 그 중 한 사람인 피아니스트 임인건은 얼마 전 새로운 곡을 통해 야누스에 대한 기억을 담은 새 음반 <야누스, 그 기억의 현재>를 발표했다.

 

현재 제주도에 살고 있는 임인건은 가끔 서울에 올라온다. 하지만 이 음반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가 서울에 온 어느 일요일을 우리는 놓칠 수 없었다. 저녁 시간 강남의 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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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음반이 너무 좋았다. 들을 때 마다 뭉클하다.


그런가? 고맙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지 (웃음)

 

이제 초창기 야누스에서 연주하시던 선생님들이 음반을 녹음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을 터인데, 그것도 옛날 스탠더드 넘버들을 연주한 것도 아니고 후배가 쓴 새로운 곡들을 마치 자신들의 곡인 것처럼 노래하고 연주한 것을 들으니 기분이 너무 좋더라.

 

선생님들도 녹음이 끝나고 참 좋아하셨다. 일단 내가 전화를 드리면 이전보다 훨씬 반갑게 받아 주신다. 오, 인건아! 이런 식으로. (웃음)

 

언제부터, 어떻게 클럽 야누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나?


1986년 즈음이었는데 지금은 은퇴하신 트럼펫 주자 강대관 선생님의 소개로 연주를 시작했다. 강대관 선생님과는 명동 롯데호델에서 함께 연주를 했는데 그때 드럼에는 고(故) 최세진 선생님, 기타에는 목우영 선생님이라고, 최세진 선생님과 오래 전부터 함께 연주한 친구 분이셨는데, 정말 스윙 기타를 예쁘게 치시는 분이셨다. 아무튼 그 분들과 처음으로 재즈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강대관 선생님이 클럽 야누스에서 피아노를 맡아 달라고 하셨다. 원래 야누스에는 신관웅 선생님이 피아노를 연주하셨는데 이미 신관웅 트리오로 활동을 시작하셔서 야누스에 오지 못하셨고 그 다음 피아니스트가 이영경 씨였는데 얼마 후 내게 그 제안이 들어왔다.

 

그럼 언제까지 야누스에서 연주했나?


맨 처음 연주했을 때 야누스가 이화동에 있었던 시절이었고 그 다음 이대 후문 쪽으로 이사 갔다가 얼마 후에 지인들의 도움으로 청담동으로 이사 갔고 마지막으로 교대역 쪽으로 이사를 갔는데 내가 제주도 내려간 것이 2013년이니, 27년 동안 연주한 셈이다. 매주 토요일 밤이면 야누스에서 연주했다.

 

야누스를 떠날 때 기분은 어떠했나?


알지 않는가. 야누스는 늘 경영이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재즈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부터 재즈클럽을 시작했으니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는가. 그런 중에 내가 2012년에 제주도로 내려 갈 결심을 하고 야누스를 계속 경영하시던 보컬리스트 박성연 선생님께 말씀 드렸더니 박 선생님이 말리셨다. 그래서 일 년이 또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내 마음이 바뀌지 않아 이듬해에 다시 선생님께 제주도로 가겠다고 말씀 드리고 결국 야누스에서의 마지막 연주를 했다. 마지막 날이라고 내 앨범에 참여했던 지훈이(최지훈, 보컬리스트)가 왔고 어떤 손님 한 분, 그렇게 관객 딱 두 사람만이 있었다. 그들 앞에서 박 선생님 노래를 반주해 드리고 그날 공연이 끝났다. 야누스의 마지막 시절에는 관객이 한 사람도 없던 날들도 많았다. 그래서 연주자들에게 출연료를 줄 형편이 못됐고 그래서 돈과 관계없이 야누스를 위해 자발적으로 무대에 서고자 했던 연주자들만이 왔었다. 그런데 그날, 마지막 연주를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오니 박 선생님이 오만원이 들어있는 봉투 하나를 건네시면서 “자, 퇴직금이야” 하시는 거였다. 그리고 봉투를 건네시고는 주방으로 들어가셔서 나오시지도 않는 거였다. 봉투를 쳐다보면서 한 동안 그냥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퇴직금 오 만원'이란 곡을 써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 못 썼지만 언젠가는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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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음반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첫 번째 곡 「I'll Remember 이판근」은 이판근 선생님과 임인건씨의 공동 작곡으로 되어 있다. 언제 만들어진 곡인가.


이번 음반 만들면서 먼저 야누스에서 음악감독을 오래 하신 이판근 선생님의 작품을 꼭 담고 싶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전화 드려 피아노 솔로를 위한 작품 하나 그리고 재즈 1세대 선생님들과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곡 하나, 모두 두 곡을 써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이젠 연로하셔서 힘 드셨는지 딱 한 곡, 그것도 왼손으로 연주할 베이스 음 두 마디만 작곡을 해놓으셨더라. 그러시면 “네가 알아서 멜로디 만들어서 연주해” 하셨다. 그래서 거기에 멜로디를 덧붙이고 해서 한 달 만에 곡을 만들었다.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배선용(트럼펫), 김지석(테너 색소폰), 이원술(베이스), 임주찬(드럼) 등 후배 연주자들과 녹음했다.

 

「별빛의 노래」는 어린이 합창단도 등장하고 뭔가 희망을 주는 노래인 것 같다.


이 곡은 기본적으로 나 같은 음악인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지만 같은 음악을 했던 박성연 선생님의 음성으로 노래하면 더욱 설득력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박성연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가사를 썼다. 이제 다들 아시지만 박성연 선생님은 건강상의 이유로 야누스를 매각하시고 현재 병원에 계신다. 이 음반도 병원에서 스튜디오를 오가시면서 녹음하셨다. 병원에 계실 때 안부 전화를 드리면 그래도 감사하고 늘 즐겁게 산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인생을 살다 보면 즐거운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다. 하지만 음악 하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역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면서 얻었던 기쁨, 그때 얻은 힘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가사 중간에도 나오지 않는가. “내가 노래하면 모든 세상, 다 같이 함께 노래해/ 내가 슬퍼하면 모든 세상, 어두운 회색 빛 되네.”


그래서 어린이 합창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합창을 넣었다. <재즈피플> 김광현 편집장 딸, 피아니스트 비안 딸, 원술이 딸.......모두 와서 노래해 주고 스튜디오 밖에서 아버지들은 모두 사진 찍고. (웃음)

 

박성연 선생님이 건강 때문에 녹음을 힘들어 하시지 않았나?


참 그게 걱정이었는데 정말 의욕을 보이셨다. 그런데 이번 노래들이 선생님이 늘 부르시는 재즈 스탠더드 넘버가 아니라 새로운 창작곡이니 연습이 더욱 더 필요하셨다. 맨 처음에는 힘들어하셨지만 “내가 소화해 낼게요.” 하셨다. 하지만 병원에서 노래 연습을 할 수도 없어서 병원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잠시 퇴원해 댁에 가셔서 혼자 노래 연습을 하시다가 다시 입원하곤 하셨다. 일주일에 2, 3회 그렇게 하셨다. 그 일을 위해 페이지 터너의 홍원근 대표는 선생님을 댁에 모셔다 드리고 노래 연습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끝나면 다시 모시고 병원으로 가는 수고를 맡아서 했다.


선생님께서는 가수는 절대 가사를 보면서 노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녹음하실 때도 이 곡들의 가사를 전부 외워서 부르셨다. 또 완전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작업하셔서 틀린 부분만 수정해서 녹음하고 편집하는 게 아니라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노래를 부르셨다. 재밌는 것은 「별빛의 노래」 가사 중에 “우주가 생긴 지 백오십억 년”이란 부분이 나온다. 그런데 선생님이 녹음한 것을 나중에 들어보니 “우주가 생긴 지 백오십 년”으로 되어 있더라. (웃음) 녹음 당시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나중에 발견하고서는 어떻게 하든 '억'자를 넣으려고 했는데 도무지 기술적으로는 안 되더라. 그래서 나중에 선생님께 말씀드려 할 수 없이 그 곡을 다시 녹음했다.

 

이전에도 가사를 많이 썼었나?


아니다. <All That Jeju>에 처음 실렸던 「하도리 가는 길」이 처음 쓴 가사였다. 그 앨범에 실린 다른 곡들의 가사는 전부 다른 분들이 써 준 것이었다. 「하도리 가는 길」은 노래와 가사가 거의 동시에 만들어 졌다. 거의 3~4시간 만에 만든 것 같다. 그래서 가사가 너무 짧은 거 같아 다음 날 2절 가사를 썼다. 나도 신기했다. 내가 가사를 쓸 수 있다니. 그래서 이번 음반을 만들면서, 특히 박성연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가사를 써봤는데 의외로 써지더라. 전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음악도 만들고 나면 내가 만든 것 같지 않고 내가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나를 통과해서' 음악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가사도 마찬가지다. 쓰고 나면 내가 만든 것 같지 않고 무엇인가가 나를 통해 표현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이 부네요」도 가사가 참 좋다.


전화로 박성연 선생님 문안인사를 드렸는데 그때 느낌을 글로 써봤다. 언젠가는 전화를 드렸더니 어제 밤 창가에 달이 떠 있어서 달을 보면서 참 좋았다고 하시더라. “바람이 부네요. 춥진 않은가요/ 밤 깊어 문득 그대 얼굴이 떠올라.”라는 첫 가사는 그 말씀에서 생각이 난 거다.


앨범이 발매되고서 얼마 후에 성수 아트홀에서 기념 공연을 가졌는데 박성연 선생님이 병원에서 외출할 수 있는 시간이 딱 두 시간이었다. 리허설 같은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무대에 오르는 시간에 맞춰 병원에서 출발하시고 도착하시고서 얼마 후에 바로 노래 하시고 노래 끝나자마자 바로 차로 이동해 휠체어를 타고 병실로 이동하신 거다. 화려한 조명과 박수갈채가 있던 공연장에서 몇 분 안에 늦은 밤 깜깜하게 불이 꺼져있는 병실로 갑자기 들어서신 거다. 그 일을 맡은 후배가 그 느낌을 나중에 내게 전해주었는데 그때 선생님이 느끼셨을 고독이 전해졌다. 그때 「바람이 부네요」의 가사 첫 머리가 다시 머리에 떠오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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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은 합창곡으로 또 다른 버전이 실려 있다.


곡이 만들어 졌을 때 홍원근 대표와 편곡을 맡은 이원술 씨가 선생님 노래에 합창을 더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놨다. 나는 선생님의 고독감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합창이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고 그래서 그럴 바엔 「별빛의 노래」에 합창을 넣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결국 합창은 두 곡 모두에 쓰였는데 「바람이 부네요」는 선생님 노래에 합창을 더하지 않고 합창 버전을 따로 만들었다.

 

「하도리 가는 길」은 <야누스, 현재의 기억>이 기획되기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곡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이전 앨범 <All That Jeju>에 처음 실렸다. 하지만 그때도 이 곡을 원래는 이동기 선생님이 불러주셨으면 하고 기대했었다. 이동기 선생님은 클라리넷 연주자로 모두들 알고 계시지만 실은 노래 실력도 대단하시다. 하지만 이전 앨범에서 갑자기 이동기 선생님 목소리가 등장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강아솔 씨가 부른 것이다. 물론 강아솔 씨는 제주 사람이어서 그 감정을 잘 알아 노래를 잘 해주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언젠가는 이동기 선생님 목소리로 이 곡을 녹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번 음반에 그 꿈을 이뤘다.

 

「하도리 가는 길」은 트럼펫 버전도 실려 있던데 그 곡도 너무 좋더라.


사실은 원래 계획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동기 선생님이 「하도리 가는 길」을 보컬 버전으로 녹음하고 계시던 중에 밖에는 트럼펫 주자 최선배 선생님이 다음 곡을 녹음하러 대기하고 계셨다. 그때 사람들이 아이디어가 떠올라 최선배 선생님께도 「하도리 가는 길」을 부탁드려보자고 했다. 즉흥솔로는 하실 필요 없으니 그냥 테마만 불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런데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플뤼겔호른 소리로 그 곡을 부셨다. 원래 소리는 음반에 담긴 소리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니 앨범에는 세 분의 원로 연주자들이 모두 한 곡씩 주연이 되어서 녹음을 남기셨다.


원래는 이동기 선생님의 「When You Wish Upon a Star」와 김수열 선생님의 「미스터 김수열」 모두 무반주 솔로로 녹음하려고 했다. 그런데 원술이가 김수열 선생님과 듀오로 녹음을 꼭 남기고 싶다고 해서 콘트라베이스와 이중주로 녹음했는데 아주 훌륭했다. 그래서 이동기 선생님 클라리넷 독주는 이미 녹음이 되어 있지만 여기에 약간의 반주를 더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피아노 반주를 넣었는데 일반적인 재즈 스타일로 연주하니까 너무 상투적으로 되더라. 그래서 이미지 하나를 떠올렸는데 내가 달에 도착해 보니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앉았는데 어디선가 먼 하늘에서 클라리넷 연주로 「When You Wish Upon a Star」가 들려오는 장면을 떠올렸다. 별은 하늘에서 반짝이고. 그때 느낌으로 건반을 눌렀는데 그 느낌이 '프리(free)'하게 나오더라. 그 녹음을 선택했다.

 

이동기 선생님도 작년부터 건강이 안 좋아 지셨는데.......


폐에 문제가 생기셨는데 간도 함께 안 좋으셔서 치료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 좋아하시던 담배도 못 피우시고........그래도 노래하고 연주하실 때 보면 여전히 정정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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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천국」은 그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별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김수열, 최선배 선생님과 함께 마이너 키에 빠른 템포의 곡을 연주하고 싶어서 만든 곡이다. 아직도 정정한 두 선생님의 솔로 연주가 돋보인다. '잃어버린 천국'이라고 제목 붙인 것은, 현재도 그런대로 좋지만 그래도 지나간 과거, 선생님들이 다들 젊으실 때 야누스에 모두 모여 연주하던 시절이 정말 좋았기에 그런 제목을 붙여 보았다.

 

수록곡 중에 가장 뜻밖의 제목이 「개복동 꽃순이」였다. 어떤 의미의 곡인가?


제주도로 내려가고 나서 얼마 후 군산에서 미술 작업을 하고 있는 후배를 만나러 그곳에 갔다. 그의 작업실이 군산 개복동에 있는데 개복동은 현재는 슬럼화 되어 있는 군산의 구도심이다. 밤이 되면 동네 전체가 깜깜해 진다. 술을 한 잔 하고 그 거리를 걷는데 왠지 옛날 야누스가 생각이 났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늘 스탠더드 노래만 불러오던 박 선생님이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부른 앨범 하나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개복동 거리를 걷는 순간에 단지 박 선생님을 위한 앨범이 아니라 야누스 전체를 기억하는 앨범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맨 처음 생각한 앨범 제목이 <야누스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개복동은 이 앨범을 처음 생각하게 했던 장소였다.


사실 개복동이 이렇게 슬럼화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건일 텐데 2002년도에 이곳에서 대형화재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곳은 성매매업소가 밀집되어 있는 환락가로 그곳에서 일하던 많은 여성들이 희생당한 것이다. 그런데 화재 이후에도 여러 문제 때문에 그 지역이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 되어 있어서 미술 하는 내 후배가 그 안으로 들어가 봤다고 한다. 여성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미로처럼 만든 끔찍한 건물 안에서 그곳에서 일하던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십일조 헌금 봉투와 그 위에 쓴 메모를 발견하고 그 이야기를 후배가 해주었다. 그래서 그 이름 모를 여성을 위한 곡도 한 곡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복동은 이 앨범을 만들게 한 영감을 주었던 곳이기에 그 곡 역시 이 앨범에 넣었다.

 

「길 없는 길」도 박성연 선생님의 독백처럼 들린다.


맞다.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음악인들의 모습을 담은 노래다.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 열 분이 코러스를 맡았는데 그 편곡을 말로 씨가 맡아 주었다. 그 중에서 네 분은 스캣 솔로도 넣어 주었다. 맨 처음에 말로, 다음에 웅산, 박라온, 장정미 순으로 등장한다.

 

마지막에 「야누스 블루스」가 없었다면 앨범이 좀 슬펐을 것 같다.


옛날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시절, 활기 넘치던 야누스 음악회를 회상하면서 한 곡을 쓰고 싶었다. 어떤 형식이 좋을까 고민했는데 역시 단순한 블루스를 부기우기 스타일로 연주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곡에는 이동기, 김수열, 최선배 선생님이 모두 나오신다. 사실 부기우기 피아노는 평소에 별로 칠 기회가 없는데 막상 해보니 왼손이 8비트로 계속 움직여야 해서 굉장히 힘들었다. 손목이 저리더라. (웃음)

 

이 앨범은 단순히 과거의 야누스를 회고한 음반이 아닌 것 같다.


맞다. 그래서 제목이 <야누스, 그 기억의 현재>인 것이다.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야누스에서 함께 하던 사람들의 현재 모습, 현재의 나를 통해 바라보는 과거가 담겨 있다. 요즘은 그 생각에 한참 빠져 있는데,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상상하는 것 모두다 현재에서, 현재의 내가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나 미래가 실은 모두 현재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이 앨범은 현재의 이야기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말 의미 있는 앨범 한 장이 만들어 졌다.


선생님들이 아직 노래하고 연주하실 수 있을 때 이 작업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박성연 선생님께는 계속 노래를 만들 테니 힘닿는 만큼 계속 불러달라고 부탁드렸다. 이 음반을 위해서 이원술 씨가 정말 애 많이 썼다. 내가 제주도에 있다 보니 앨범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 대신에 원술이가 프로듀싱, 편곡, 베이스까지 맡아서 하고 선생님들 식사도 다 책임져 주고.......드러머 허여정도 참 많이 도와주었다. 또 홍원근 대표도 늘 박 선생님 모시고 다니면서 참 애 많이 썼다. 이 음반은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손길이 담겨 있다.

사진 : 박재규
인터뷰, 정리 : 황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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