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잘 쓴 작품? 마음을 움직인 한 문장? 또는 작품을 대하는 성실한 태도? 어떤 일도 어떤 감정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이유가 있다. 소설가 공지영이 쓴 단편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를 읽고 나는 작정했다. 실로 오랜만인 소설, 왜 계속 산문집만 냈냐고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 문장을 읽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제일 중요한 일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데 그다음으로 중요한 일들은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설명한다고 너그러이 이해받는 것도 아니었다.”(34쪽)
13년 만에 펴낸 소설집에는 표제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를 포함해 5편의 단편이 실렸다. 2000년부터 2011년까지 틈틈이 문학잡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기괴한 환상소설 같기도 범상한 산문 같기도 한 작품들. 「월춘장구越春裝具」의 주인공 말마따나 ‘소설은 무엇일까’를 따져보려 했지만, 공지영의 소설은 순식간에 소화됐다. 눈으로 글자를 읽고 머릿속으로 문장을 해석하고 마음으로 툭 던지는 과정. 이 시간은 짧을수록 좋은가, 길수록 좋은가. 이 또한 가려보려 했지만 곧 부질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다만 「맨발로 글목을 돌다」의 주인공처럼, 오래도록 마음속에 데리고 살고 싶은 문장 몇 개를 옮겨 적었다.
마치 요즘 시대를 바라보면서 작정하고 쓴 느낌
편안해 보이세요. 소설집을 내셔서 그런지, 후련해 보이는 느낌도 있고요.
그런가요? (웃음) 책을 냈더니 인터뷰 요청이 많아요. 예전에는 기자간담회만 하고 끝났던 것 같은데, 요즘 매체가 너무 많아져서 그런가 좀 놀라고 있어요. 인터뷰는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해요.
거절하기 어렵지 않으세요?
솔직히 말하면 ‘작가에게 인터뷰가 필요할까?’ 그런 생각을 해요. 어차피 글로 다 녹아나잖아요. 인터뷰는 소설에 덧붙이는 사족 같은 게 아닌가 하는 거죠. 사실 작가한테는 물어볼 게 별로 없잖아요. 글로 다 쓰니까요.
소설 쓰는 작가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 궁금한 점도 있잖아요.
독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렇죠. 좋아하는 작가를 더 알고 싶으니까. 인터뷰를 읽으면 충족되는 즐거움이 있어요. 제가 박경리 선생님을 좋아하는데, 인터뷰에서 풀 뽑고 사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어요. ‘아, 선생님은 풀을 뽑으면서 글을 쓰셨구나’ 하고 장면이 상상되더라고요. 이런 즐거움이 있긴 해요.
2013년에 장편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를 쓰셨지만 단편소설집은 13년 만이에요. 이렇게 단편을 안 내셨나? 놀랐어요.
그러니까요.(웃음) 솔직히 말하면 단편을 발표하긴 했지만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예전에는 소설이 다 두꺼웠잖아요. 한 권으로 묶을 양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묶어보니까 충분히 양이 되더라고요. 사실 단편은 독자들에게 많이 잊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읽어주는 독자분들이 많은 걸 보고 되게 감동했어요. 우리 어릴 때, 작은 단편 모음집 같은 거 많이 봤거든요. 막 설레면서. 그때 생각이 나서 좋았어요.
평소 독자 리뷰는 좀 찾아보는 편이신가요?
거의 봐요. 가끔 시간이 나면 블로그까지 다 봐요.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리뷰도 몇 개 봤어요. 한 페이스북 친구분이 대통령 후보자들의 네거티브 캠페인을 보면서, 제가 소설에 쓴 문장을 다시 떠올렸대요. 인상이 깊어 캡처를 해놨어요.
혹시 이 문장은 없었나요? “진실은 너무 게으르다.”(125쪽)
어, 있었어요.(웃음) 『의자놀이』를 쓸 때도 비슷한 문장을 썼는데요. 내가 마음을 많이 넣어 쓴 문장을 발견해주는 독자를 만나면, 참 기뻐요. 고맙고요.
한국 사회에서 가장 게으른 진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자기 자신이요. 사람들이 자기가 뭘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눈을 똑바로 뜨고 깨어있지 않으면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에요. 뭔가 유행하면, 사람들은 다 따라 하잖아요. 나의 선호와 관계 없이요. 저부터도 힘들어요. 그래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으려고 노력하죠.
표제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죽음에 직면한 할머니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에요. 임종 직전까지 간 할머니는 가족 누군가가 죽으면, 다시 살아나요. 주인공은 할머니가 죽지 않고 동생이 죽을까 봐 공포에 떨고요. 소설을 읽다 보면 아무리 악인이어도 조그마한 연민은 생기는데, 이 할머니는 도통 끔찍한 느낌이에요.
괴물이 되어버린 거죠. 현실에서도 괴물을 많이 봐요. 어떤 다면적인 느낌이 없는 사람, 마치 무슨 기계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좀비라고 해야 하나요? 목적 지향적인 좀비. 정치권이야 뭐 참 많아 보이고요.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제가 이런 문장을 썼어요. “진실보다 무서운 건 진실이 밝혀진다는 것이라는 걸. 거짓이라도,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붙들고 있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 이 소설은 제가 2000년에 쓴 작품이에요.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2001년에 썼고요. 10년이 넘은 단편인데 마치 요즘 시대를 바라보면서 작정하고 쓴 느낌이에요.
무턱대고 한 방향으로 돌직구하는 사람을 볼 때가 있어요. 물론 그 방향이 옳을 때도 있는데요, 쉼 없이 오로지 앞으로만 달리는 사람을 보면 숨이 턱 막혀요. 바늘로 살짝 건드려도 작은 구멍조차 안 날 만큼 자기 고집만으로 똘똘 뭉친 사람에게는 말 걸기가 무서워요.
젊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도 있어요. 생물학적으로는 너무 젊은데 마치 노인 같아요. 젊은 친구들한테 “산다는 게 다 이렇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아니에요, 선생님. 저희는 스펙을 쌓아야 해요”라고 답해요. 면접을 볼 때도 이미 학습된 앵무새처럼 답하는 거예요. 모두가 똑같은 대답만 하고 있을 때 참 답답해요.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이해가 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찾아야 하지 않나, 세상이 원하는 내 모습으로만 갈 것인가’ 이런 고민은 해야 해요.
써놓고 나서 이것이 소설일까 생각했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너는 왜 이 책을 썼니?”라고 물어요. 작가님께 지금 같은 질문을 하고 싶어요.
청탁을 받아서 썼어요.(웃음)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요. 저는 프로 작가잖아요. 항상 쓰는걸 준비하고 있어요. 하지만 글을 쓴다는 건 너무 고통스러워서 자발적으로 쓰지 못해요. 머릿속에는 항상 꿰어야 할 구슬들이 쌓이고 있어요. 꾸러미 꾸러미별로 쌓여 있는데, 어느 순간 어떤 동기가 생기면 고통 안으로 빠지는 거예요. 프로 작가니까요. 기자님도 그렇지 않아요? 인터뷰를 왜 하겠어요?
(웃음) 그렇죠. 큰 동기죠. 이번 소설집을 보면 작가님 개인의 이야기를 녹여낸 장면이 많아요. 만약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지우고 읽으면 ‘공지영의 에세이야?’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작품을 쓸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소설이라는 장르가 꽤 젊은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움이 너무 국한된 게 아닐까.’ 수많은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면서 소설도 어떻게 보면 위협을 받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 갇혀 있어요. 말하자면 외연의 확장? 더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설령 누가 저를 두고 소설가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작가여도 돼요. 에세이, 소설을 마구마구 나누지 말고 ‘글’이라는 한 장르로 생각하면 어떨까. 『의자놀이』를 쓸 때, 그러니까 5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떤 종류의 것이든 글로 쓰는 모든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르포, 평전 같은 글도 많이 써보고 싶어요.
최근에 『공지영의 성경공책 세트』도 내셨더라고요. 출간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찾아보고 알았어요.
작은 출판사에서 냈는데 아직 많이들 모르시더라고요. 오래전부터 제가 매일 성경 말씀 묵상을 하고 있어요. 비슷한 책을 내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특별히 고통스럽게 짜내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냈어요.
문학잡지 『악스트 Axt』의 커버 스토리를 묶은 인터뷰집(『이것이 나의 도끼다』)도 나와서 작가님의 인터뷰를 다시 읽어봤어요. “산문은 시간만 되고 체력만 되면 몇 권이고 써낼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2015년 11월 인터뷰)
산문은 쓰기가 되게 수월해요. 페이스북, 트위터에서 짧은 글을 올리는 것처럼 쑥쑥 써내려갈 수 있어요. 일상이 굉장히 뭐랄까, ‘낙수’라고 하죠. 그런 게 떨어질 때가 있거든요. 오늘 같은 날은 대선에 대해서 쓸 수 있겠죠. 쓰기가 귀찮아서 그렇지 쓰라고 하면 의미를 찾아서 쓸 수 있어요.
“써놓고 나서 이것이 소설일까 생각했다. 이런 것도 소설일까…… 그러면 소설은 무엇일까, 하는 내 안의 오래된 물음이 뒤따라 왔다. 누가 이것은 소설이고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해주는가. (37쪽)
「월춘 장구」에서 주인공은 소설에 관해 자문해요. 작가님은 ‘소설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셨나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에세이를 읽다 해답을 얻었어요. 감독이 어느 날 손주가 쓴 ‘우리집 강아지’라는 글을 읽었어요. “어떤 날은 오소리 같고 어떤 날은 돼지 같고 어떤 날은 여우 같고 고양이 같은데 우리집 강아지는 결국 개다.” 감독은 이 글을 읽고 “영화 역시 여러 가지로 보일 수 있다”는 답을 얻었대요. 소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영화 같고 연극 대본 같기도 하지만 결국은 소설이구나.’ 이후로는 좀 자유로워졌어요.
작가로서 한계를 느낄 때는 없나요?
늘 한계를 느끼죠. 너무 글이 안 써질 때. 머릿속에서는 항상 쓰고 싶은 게 있지만 안 나올 때가 있어요. 마감이 있으면 어떻게든 써내지만 후루룩 나올 때는 흔치 않아요.
트위터 프로필에 이렇게 쓰셨더라고요. “소설가 허락 없이 기사 금지 함.” 트윗이 기사화가 되는 걸 반대하시나요?
법적 제재는 없다고 해요. 하지만 별로예요. 트위터리안들이 퍼가고 인용하고 그러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언론은 기사를 쓰고 돈을 벌잖아요. 내가 쓴 글로 기사를 채우고 이윤을 추구하는데, 내 동의 없이 하면 안 되지 않나요? 제가 뭐 사건을 만든 것도 아닌데요.
“그 힘은, 그렇게까지 목숨 바쳐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가여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가난해서 마음을 굽혔던 것도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일이지만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일도 사실은 자신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꼭 남을 해칠 필요는 없고 그래서 안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힘이라는 것을.” (74쪽)
이번 작품도 그렇지만, 작가님의 글을 보면 언제나 약자 감수성이 있어요. 갑을 문제에도 예민하시잖아요. 좀 뭉뚱그린 질문이지만 어떤 ‘갑’들을 볼 때, 가장 화나나요?
자기 직원에게 반말하는 상사가 제일 싫어요. 같이 대학을 다닌 친구나 선후배가 중소기업 사장이 돼서 만났어요. 그런데 직원한테 반말을 하는 거예요. ‘얘가 미쳤나?’ 싶었어요. 물론 친해서 사석에서는 반말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도 있는데 “어이, 그것 좀 가져와”라고 말하는 게 말이 되나요? 이것처럼 몰상식한 경우가 없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이런 분을 만난 적 있어요. 존댓말을 하다가 반말로 정정을 해서 다시 말하는 거예요. 습관적으로 존댓말을 했는데 ‘내가 네 위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다시 반말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좀 충격적이더라고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웃음) 할 말이 없네요. 저는 만 20세 이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허락 없이 반말하면 안 되는 법을 만들고 싶어요. 그렇게 하면 정말 달라져요. 언어는 내용의 산물이기 때문이에요. 어른들이 20대에게 함부로 반말하면 항의를 해야 해요. 얼마 전 미국의 한 행위예술가가 두 시간 동안 자기 몸을 마음대로 만져도 되는 퍼포먼스를 했어요. 한 시간까지는 시민들이 매우 정중하게 만졌대요. 그런데 한 시간이 좀 지나자 때리고 성추행하고 정말 난리가 난 거예요. 예술가는 물론 이런 상황을 예상했죠.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저항하지 않는 자의 말로가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틀리고 무례한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저항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정글에서는 언제나 약자를 희생시켜요.
보편과 맞닿아있는 문제적 인물
작품 해설을 강유정 문학평론가가 썼어요. “공지영의 소설 속 공지영은 특수한 상황에 처한 ‘문제적 인물’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어떤 보편성 안에서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개연적 인물’이기도 하다.”(240쪽) 이 말에 반기를 들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정확하게 표현했어요. 나는 문제적 인물이죠. 사람들은 보통 여러 가지 이유로 문제적 행동을 안 하죠. 저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 문제가 이 시대의 어떤 보편과 동떨어진다면 문제로 부각되진 않았겠죠. 보편과 맞닿아있는 문제적 인물이 된 거예요.
소설가는 문제적 인물을 창조하잖아요. 작품 안에서는 그래야만 하죠.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작가에게 어떤 굉장히 정중한 태도를 요구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트위터를 하는 작가들은 모두 언팔하겠다”고 말하는 분들을 꽤 봤어요. 작가님은 트위터를 활발하게 하는 편이시잖아요. 작가 공지영보다는 사람 공지영에게 가까운 창구라고 봐도 될까요?
그러니까 이게 내 성격적 장점이기도 하고 결함이기도 한데요, 일단 입을 열면 계산하거나 숨기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장점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때는 공공성에 있어 물의를 일으키더라고요. 제가 그동안은 잘 몰랐는데 이제 알았어요. 그래서 요즘 생각해요. ‘수많은 사람 앞에서 내가 솔직하게 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맞나?’ 안 하겠다는 생각은 아닌데요, ‘너무 시끄러우니까 되도록 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밖이 소란스러우면 방해를 받아요. 내 글에 집중하고 내 생각을 정리해야 하니까요. 말하자면 사물의 본질을 투시해야 하는데 집중력이 흐트러지죠.
장편소설을 쓰고 계신다고요.
올해 출간을 목표로 쓰고 있어요. 도입은 했는데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책상에 오래 앉기가 좀 힘들어요. 물론 완전 핑계지만.(웃음) 저는 몰입하면서 쓰는 스타일이라 쓰기 시작하면 밖에도 잘 안 가요. 지금은 책이 나와서 그런지 사회가 이래서 그런지, 좀 산만해졌다고 할까요?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구슬이 계속 쌓이니까요. 다 일장일단이 있어요.
요즘 10만 부 이상 팔리는 책이 확실히 줄었잖아요. 예전에는 소설이 나오면 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에 머물렀는데 요즘은 좀 드물죠. 체감하세요?
소설이 안 읽힌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일단 스타 작가가 없어요. 신경숙 표절사태 이후 평단의 태도에 독자들이 많이 실망하지 않았어요? 예전에는 권위 있는 사람이 책을 권해주면 좀 믿고 읽었는데, 이제는 그런 게 사라졌어요. 하지만 이게 꼭 장르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과거에 어린이소설은 절대 안 팔렸지만 지금은 전 세계 독자들이 『해리포터』를 사려고 줄을 서 있잖아요. 오히려 책의 문제가 중요하지 장르로 볼 건 아닌 것 같아요. 지금은 소설 속에 담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닌 것들이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소설이 어떤 외연의 확장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요.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를 내면서 짧은 단편을 많이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제가 무서운 걸 좋아해요. 엽기스럽지만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쓰고 싶어요.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부류의 소설이에요.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 씨와 낸 인터뷰집 『괜찮다, 다 괜찮다』에서 “작가가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고통, 고독, 독서”라고 하셨어요. 지금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요. 더 보탤 것이 있을까요?
아니요. 그때랑 똑같아요. 젊었을 때는 누군가의 말, 반응, 공감을 반영하곤 했는데 지금은 썩 필요하지 않아요. 공감해주지 않아도 제가 공감하니까요. 홀로 자가발전이 많이 이뤄진다고 할까요? 이제는 확실히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덜 반응해요. 그렇다고 생각이 바뀐 건 아니에요. 반응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너무 많이 아는 거죠.
혼자 있는 게 확실히 더 좋으세요?
그럼요.(웃음)
자유로워진다는 것만큼 좋은 게 없어요. 남의 말 한 마디에 휘청대지 않고요.
저도 악플을 가끔 보잖아요? 물론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이 분이 별로 안 행복하시구나’ 그러고 말아요. 이제 좀 편해졌어요. 불필요한 일에 내 마음을 주지 않으니까 편안하죠. 나이가 드니까 에너지가 부족한 게 확실히 느껴져요. 그러니까 정말 에너지를 써야 할 곳에 쓰는 거예요. 왜냐면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점점 소중한 게 뭔지 알게 되니까. 화를 낼 시간보다는 사랑할 시간이 부족한 거예요.
이번 소설집 후기에 쓰신 문장이 생각나네요. “언제나 삶에게 두 번째 통조림을 주려고 합니다. 내가 삶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나는 이 지상을 더 잘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227쪽) 이 문장이 기억에 남는 건 ‘압니다’라고 쓰여 있어서예요. ‘더 잘 떠난다’ 혹은 ‘그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서요.
이 문장을 알아봐줘서 고마워요. 많은 걸 담고 싶어서 공들여 쓴 문장이에요. 이럴 때 글 쓰는 게 참 좋아요. 숨겨놨는데 신통하게 알아봐줄 때, 보물찾기하듯이 발견해주는 독자들에게 참 감사해요. 제가 삶이 너무 힘들었을 때 신경정신과를 다녔단 말이에요. 지독하게 힘들 때가 있었는데 결국 생각해보면 책을 통해 많이 치유된 것 같아요. 너무 진부하지만, 책 속에서 길을 발견할 때가 많아요. 엄마보다 더 잘 가르쳐주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말하자면 책이 엄마였던 것 같아요. 낳게 해주고 간호해주고 앞으로의 길들을 제시해주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독자들에게 사인할 때 ‘더 사랑하는 하루’라고 써요.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가 특히 어떤 독자들에게 닿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나요?
아무래도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읽으면 좋겠죠. 사회문제랑 꼭 연결시키고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고, 작품으로서도 재밌게 읽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