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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데이터 과학자가 본 한국의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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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나(필명 양파)는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대한민국 대사관조차 없던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민을 가 외국인 남편과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다. 그 와중에 일을 하면서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런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한다. 동양인 여성의 신분으로 타지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유명 외국계 기업에서 촉망 받는 분야의 전문가로 일한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노력으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낸 자기계발서의 주인공 같지만, 정작 본인은 ‘노력보다 페미니즘의 덕’이라고 말한다.


양파가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가 사람들의 전폭적인 공감을 받았던 계기 역시 페미니즘이었다. 인종차별로 유명한 남아공에서 유색 소수인종 여성으로 학위도 없이 일을 시작한 자신이 과연 한국에서 비슷한 조건으로 살았다면 이렇게 살 수 있을지 스스로 질문했을 때 답은 ‘NO’였다. 한국은 여성에게 특히 냉혹했고, 여성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국적과 직업에 상관하지 않고 해하겠다는 협박이 들어왔다. 이런 상호작용은 왜 한국에 페미니즘이 필요한지 오히려 역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여성 데이터 과학자가 들여다 본 한국은 『여혐민국』이었다.


한국에서 만난 양파는 생각보다 한국 사정에 정통했고, 인터넷 유행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했다. 이전에 썼다던 책 제목을 알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양파 (3).jpg

 

페미니즘 토크에 사람이 몰리는 이상한 나라


가족이랑 같이 오셨나요? 한국은 언제 떠나신 거죠?

 

네. 아이 낳고 출산 휴가 때 잠깐 나온 적 있었는데, 이민한 이후로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다 더하면 3개월이 안 될 것 같아요. 91년도 갔으니까 초등학교 졸업할 즈음이었네요. 그때 남아공에 한국 대사관도 없고, 도시에는 한국 가정이 세 가정 있었어요.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어와서는 카카오, 구글 캠퍼스, 여세연(젠더정치연구소) 강연 등 스케줄이 빡빡하시더라고요. 처음 강연에서는 한국말이 잘 안 나오셨다고요.

 

들어온 지 일주일 정도 됐어요. 오랜만에 쓰는 언어로 글을 쓰면 힘들다고 하는 게 이해가 안 됐는데, 한국 와서 버벅거리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언제나 직장에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이니까 머릿속으로는 완벽히 알고 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 내용을 동시통역해야 하는 거예요. 아예 모르는 말을 하면 괜찮은데 늘 말하던 스크립트에서 벗어나니까요.


페미니즘 관련 북토크도 하셨어요. 기분이 어떠셨어요?


음, 엄청 신기한 나라다? 왜 페미니즘 토크에 사람이 몰리는지, 이거 정상이 아닙니다. (웃음) 제 주위 젊은 여자들이 페미니즘 강연회에 갈 일은 여성학 전공하지 않는 이상 (없어요). 10명, 20명 오나 보다 해서 중국집 가서 할까 했는데 엄청나게 오셨어요. 역시 이상한 나라에요.


페이스북 페이지에 쓴 글이 책으로 나왔는데, 처음에는 블로그를 운영하셨다고 들었어요.


당시 메갈리아 논란이 많아서 작정하고 봐주겠다는 마음으로 오유와 일베를 쭉 보고 블로그에 글을 썼어요. ‘변방의 블로그니까 신경을 쓰겠어?’ 했는데, 신경 쓰더라고요. 사람들이 몰려와서 논쟁 댓글이 우르르 달렸어요. 그때 놀랐던 게, 제 블로그 글을 다 퍼가더라고요. 아마 공격용이겠죠. 저보고 죽여버리겠다고 댓글을 단 사람이 있었거든요. 무섭진 않았는데 그래도 혹 모르는 거잖아요.

 

이후 페이스북 페이지로 옮기신 건가요?


죽여버리겠다는 댓글은 걱정 안 하던 사람들이 ‘메갈 같은 곳에 빠지시면 안 된다’고 극구 걱정하는 글을 길게 쓰는 거예요. ‘양파님 글을 좋아해서 그러는데 오유를 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다’는 댓글도 있었고요. 피곤해져서 블로그를 닫고 페이스북으로 옮긴 후로는 주로 IT 관련 글을 올렸어요. 아무래도 남성 구독층이 많았죠. 그리고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 사건 전후로 여성이 많이 들어왔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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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마다 다시 다짐한다


‘지난 10년 넘게 블로그를 하면서 성차별에 관한 의견을 약간이라도 피력하면 어떤 협박과 욕을 피드백으로 받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29쪽)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쓰고 책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찌어찌하다 보니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펙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제가 말했을 때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게 다르더라고요. 한국에서 저와 비슷한 30대 후반의 여자가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은 ‘너 그러니까 시집 못 갔지’ 하는 수준으로 무시하는데, 같은 내용으로 제 스펙을 알려주면 다른 말을 하지 않는대요.

 
엔지니어가 느끼는 본능적인 기쁨이 있어요. 누군가는 누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데서, 인기가 많다는 데서, 뭔가를 만든다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데, 엔지니어는 뭔가를 효율적으로 했을 때 되게 기분이 좋아요. 제가 하는 말 중에 딱히 신선하거나 새로운 관점은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데도 훨씬 파급력이 있다고 한다면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 더 낫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한국에 계시지 않고 눈치 볼 일이 없으니 더 편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훨씬 편하죠. 제가 크게 손해 보는 것도 없고, 실제로 제가 얘기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고요.

 

마음 다잡고 갈 데까지 가보자. 나 같이 해외에서 일하고 살면서 뒷일 걱정 안 해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몸 사리면 딴 사람은 어쩌냐. 페친 중 남자가 대부분인 한국 공대 여자들은 어쩌고, 찌질한 개저씨 상사나 선배들이 줄줄이 페북에 포진해 있는 사람들은 어쩌냐. ‘좋아요’ 하나 누르기도 무섭고 뉴스 공유 하나에도 지적질에 시달리는데, 그런 거 하나 없는 내가 도망가고 그러면 안 되지.
- 30쪽

 

페이지를 운영하시기 전에도 페미니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나요?


안 그랬던 것 같아요. 영국에서는 보수 쪽에 속하지 않나 생각하고, 어떤 이슈에서는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국 기준으로는 엄청난 페미니스트가 되어 있더라고요. (웃음) 오해입니다. 지금은 트럼프 당선 전후로 해외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재성찰이 일어나는 분위기인데, 4, 5년 전 영어권에서도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으로 말을 시작했어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힙해진 건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정통 페미니스트 1급 자격증 시험을 본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시험 봐서 페미니즘을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글을 읽었을 때 그렇게 남성들에게 적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적대적이래요. (웃음)


모두 여성혐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 IT 분야의 SOA(Service Oriented Architecture)’ 개념으로 접근해 일일이 분노하기보다 원하는 걸 확실히 해서 받아내자는 말도 있었어요. 기존 페미니즘 운동과는 다른 결로 느껴졌어요.


‘너는 여혐이다’라고 말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냐는 거죠. 내가 너 싫어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게 별로 도움이 되진 않잖아요. 그럼 내가 원하는 게 이 사람을 욕하는 건지, 이 사람이 하는 행동을 그만하게 만드는 건지 생각해 보자는 거죠. 엔지니어의 접근 방식이긴 한데, 마음속에서 어떻게 구현하는지는 상관없지만 앞에서는 얼굴 평가하지 말라는 거예요. 결국, 사람이 변하기는 쉽지 않고, 행동의 변화 정도만 일어나도 어차피 원하는 건 달성한 셈이니까요.


개발자 컨퍼런스도 참석하셨는데, 한국 IT시장은 어떤 것 같나요?


여성 개발자 컨퍼런스에 다녀왔어요.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게, 직장에 관한 조언도 제가 겪은 스타트업과 IT업계의 조언이 한국에서는 안 맞는 경우가 있어요. 저는 중소기업 옮겨 다니다가 지금은 큰 회사에 다니지만, 한국에서는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상황이라 저처럼 하면 좋다고 이야기하기가 힘들더라고요. 10시쯤 출근해서 6시나 7시에 퇴근하는 환경에서는 자기가 뭘 배우고 싶으면 저녁에 공부할 수 있지만 극한 노동 강도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노력하라는 소리로 들릴 것 같아요. 밤 11시에 퇴근하는 사람 보고 관련 업계 모임에 나가서 뭔가 배워보라는 조언을 할 수는 없잖아요.

 

양파 (4).jpg

 

문화 차이로 본 한국의 여성혐오


여성 혐오를 미러링(mirroring) 하는 글을 자주 쓰셨어요. 백인과 동양인 사이 차별을 여성 차별에 빗댄다든지요. 아무래도 해외에서 살면서 겪은 경험이 글을 쓰는 데 녹아들게 되나요?


사실 아니에요. 주로 쓰는 미러링은 미국식 인종차별 인식이거든요. 남아공에서는 동양인은 안중에 없어요. 아시아계가 없어서 시골에 가면 신기해하면서 저보고 뮬란이라고 그래요. 또 80%가 흑인이라 백인들이 위기감에서 아시아인을 백인으로 쳐주는 경향이 있어요. 한국 사람들이 미국 등지에서 느끼는 인종 차별에는 반응하니까 이용한 거예요. 특히 남자분들은 서양에서 아시아계 인종으로서 자기 스펙이나 성격, 계급과 상관없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차별받을 수 있다는 걸 피상적으로라도 이해하고 알아요. 그 말을 하면 이해하는데 한국에서 여성을 말하면 또 인종과 성별이 같냐고 딴지를 걸죠. 그래서 좀 웃겼어요.


그런 식으로 대비를 시키는 비유 중에 전라도 사람들을 차별하는 내용도 있었어요. 한국 상황도 익숙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동네마다 쌓아 온 고유의 역사가 있어요. 얘는 왜 얘랑 친하고 얘는 왜 서먹하고, 이 분식집은 가면 되고 저기는 안 된다는 것들. 이사하면 그걸 싹 잊어버리고 새로 그곳의 역사를 배워야 하는 거죠. 어떤 한 무리에서의 평가나 가치는 다른 곳에 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거든요. 한국에서는 공부 잘하는 게 최고지만 남아공에서는 그런 아이들은 바보취급 받고 운동 잘하고 몸 좋은 애들이 인기 있는 것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아웃사이더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떤 걸 중요하게 여기는지 자세하게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런 게 계속 반복되니까 어렸을 때부터 절대적인 게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모님이 경상도 쪽인데, 엄마 아빠가 말하는 것도 어느 나라나 비슷한 게 있어요. 자신과 조금 다른 무리에 대한 편견이 어디나 있더라고요.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점도 있잖아요. 역차별을 주장하는 남성들의 갈래가 한국과 서양이 다른 것 같다고도 하셨는데요.


처음 받은 협박에 겁을 먹었던 이유가, 영미권에서 안티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테러리스트에 가깝게 무섭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을 연상하거든요. 여성혐오 정서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대놓고 여자들은 이렇다고 하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래서 한국 페미니즘을 싫어한다는 사람들이 테러리스트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 나서 보니까 한국에서는 여성혐오가 그냥 주류사상인 거예요. 보통 사회 계층에 따라서 어떤 발언을 하면 그 사람의 교육 정도나 그 사람이 속한 배경이 측정되는데 한국은 여성혐오 발언이 그냥 다 퍼져 있어요. 그래서 좋은 점은 안 무서워해도 된다는 거, 모든 보통 남자들이 여자들은 어떻다고 얘기하니까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나쁜 점이라면 계급과 상관없이 모두가 피해의식으로 넘치는 반여성주의 남자들과 똑같아요. 그래서 놀랐어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한국은 여성혐오가 너무 보편적이고 평균적이에요.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페미니즘 덕이라고 말한 내용과 연관이 될 것 같아요.

 

저한테 ‘양파 선생님 같은 열혈 워킹맘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제가 욕하는 여자들은~’ 하면서 말하는 분들 있거든요. 한국 워킹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제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더라고요. 그렇다고 영국에서 애 낳고 사는 게 즐겁다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힘들고 출산휴가가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인 동의가 있어요. 한국 여자들이 조리원 간다고 욕하는데 저는 출산휴가를 최대로 받고 남편도 받아서 둘 다 집에 있었어요. 어머니도 계셨고, 병원은 바로 옆에 있고 공짜고요. 외국에서는 출산하면 바로 출근하고 찬물로 샤워한다든가 하는 괴담 수준의 이야기가 있잖아요. 찬물로 왜 샤워를 하는 거예요. (웃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출산하고 나서 감염되지 않으려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게 맞는 말인데, 한국 여자는 진상이고 누릴 것만 찾는다는 프레임이 계속 가더라고요.


특히 워킹맘에게 씌우는 프레임이 있죠.


성공 신화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요. 한국에서 놀랐던 게 어른들에게 학창 시절에 후회하는 게 뭐냐고 물어보면 공부 안 했던 거라고 대답해요. 수학 같은 것도 열심히만 하면 잘 할 거라는 인식이 있어요. 극단적이긴 하지만 영미 쪽은 수학은 잘하는 사람들이 잘하고 억지로 시켜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이 있거든요. 노력해서 된다는 생각은 결국 잘 안 풀리면 개인의 잘못이 되잖아요. 워킹맘이 특히 그런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요.


‘나는 운이 좋았다’는 말도 해주셨어요.


나 혼자 잘났고 독해서 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지 않나요? 소수의 독한 사람들, 운이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명해서 너도 이렇게 노력하라고 하기보다는 간단하게 남자도 12개월씩 출산 휴가를 보내는 걸로 채용 문화를 바꿀 수 있어요. 지금은 남자를 고용하면 당연히 야근시키고 주말에도 출근시키면서 집에서는 부인이나 엄마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어 있는 시스템 아래에서 기업들한테, 특히 중소기업한테 ‘너희가 여성을 챙기라’고 하면서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무책임해요. 돈 나가는 건 누구라도 싫어하잖아요.


양파 페이지의 글이 외국 상황을 전해주는 역할도 했다고 생각해요. 선진국의 휴가 시스템, 오페어(외국인 가정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대가로 숙식과 일정량의 급여를 받는 프로그램), 혹은 외국의 여성혐오 등이요.


당연히 다 알지 않나 싶었는데 아니더라고요. 한 분이 정말 심각하게 출산휴가 제도를 사용하는 게 당연하냐고, 그럼 외국에서는 출산 휴가를 가면 어떻게 그 사람 업무를 대체하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어요. 저도 지금 휴가인데, 이번에 9일 썼어요. 올해 휴가는 36일이어서 아직 25일 남았어요. 보통 휴가를 2주씩 가니까 다른 사람이 일을 분담하는 게 자연스럽고 그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휴가 신청할 때 일에 공백이 생겨서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매니저 잘못이죠. 인력 관리가 그 사람 할 일이잖아요. 물론 중소기업에서는 정부에서 지원이 나와도 귀찮으니까 투덜댈 수 있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 규모에서는 휴가를 내는 걸로 뭐라고 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어요. 한국 내에서도 분위기를 바꿔야 하지만 그게 오래 걸리잖아요. 그래서 강제적으로라도 남자들은 무조건 출산 휴가, 이런 정책도 실행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동성애 관련 글을 올리자 구독자가 쑥 빠져나간 적도 있으시다면서요. 한국의 보수성에 놀라기도 하나요?


성적으로 제일 예민한 것 같아요. 콘돔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게 왜 이슈가 되지 싶었는데, 사귀는 남자와 관계를 가졌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는 말을 피하더라고요. 젊은이들이 사귀어서 놀러 가면 다른 방에서 잤다고 이야기하고요. 솔직히 눈 가리고 아웅인데,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정말 보수적이라고 느껴요.

 

양파 (2).jpg

 

페미니스트 콘텐츠 지원을 더 했으면


기존에 냈던 책이 있다고 하셔서 『개발자를 부탁해』까지는 찾았는데, 다른 책은 못 찾겠더라고요.


선견지명이 있어서 그때도 나중에 이걸 보면 아주 깊이 쪽팔리겠다는 걸 알아서 가명으로 냈어요. 20대 초반에 한창 인터넷 소설 나올 때여서 한국어로 비슷한 내용을 쓴 거라……. 흑역사는 넘어가죠. (웃음) 아예 처음에 쓸 때 영어로 썼으면 더 큰 출판 시장에 나갈 수 있었으려나요?


그때와 지금 책은 느낌이 좀 다를 것 같아요. 주제도 다르고요. 


이제까지 한번도 책을 홍보한다거나 책을 냈다는 이야기를 안 했어요. 저한테는 글쓰기가 누구한테나 있는 나쁜 버릇 같은 거예요. 누구는 자전거를 타고 누구는 도박하고 술을 마시고 저는 책을 쓰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페미니즘을 볼 때 제 책이 도움된다면 최대한 홍보하는 게 맞을 거예요. 지금도 보면 많이 불편하긴 해요. 본명으로 낸 거니 이제는 넘어간다고 말도 못 할 것 같고, 망했네요.


글쓰기를 ‘여성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싫어했다는 고백도 있었어요.


이상하죠. 그런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개발자 회사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SNS를 안 해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가 사회적이고 소통을 원하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것도 여성성의 고정관념 중 하나잖아요. 제 주위 샘플이 그런 남자들이다 보니 여자여서 글 쓴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계속 쓰고 계시잖아요. 쓰다 보면 자기혐오도 좀 줄어들 것 같은데요.


어제 십몇 년 동안 제 블로그 글을 봐주신 분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글 그만 쓰고 싶다는 말이 칭찬받고 싶어서 하는 말인 줄 아셨대요. 그런데 일관적으로 십 년이 넘게 자기 혐오를 하더래요. 지금도 그렇고 저는 시간이 있으면 사색하면서 수학 문제를 푸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안 되려나 봐요. 지금도 책을 보면 제 잉여 짓의 결정체 같고 그래요.


그래도 좋은 결과로 나왔네요. 글은 주로 언제 쓰세요?


아무 때나요. 커피 마시러 가는 대신 10분, 점심 먹고 10분. 엄청 빨리 쓰는 편이어서 정말 아무때나 써요. 주제를 정해놓고 쓰지도 않고요.

 

데이터 과학자도 일종의 스토리텔링일 텐데요. 글쓰기와 연관 지을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나요?


글을 문학적으로 예쁘게 쓰는 사람은 아니에요. 어떤 정보가 있을 때 끼워 맞춰서 주제가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 걸 잘하는 것 같아요. 데이터 과학도 결국 기존에 있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맞추는 스토리텔링이거든요. 논리적으로 아귀가 맞고 사람들이 보기에 말이 된다 싶으면 통하는 영역이라, 그런 면에서는 글쓰기와 비슷하죠.


이야기나 소설, 픽션도 좋아하나요?


픽션 잘 못 읽어요. 사람의 의도를 잘 이해하는 편이 아니더라고요. 예전에는 영화를 봐도 무슨 소린지 이해 못 했어요. 지금은 나이 들고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면서 좀 나아졌는데 여전히 이해가 빠르진 않아요. 논픽션이나 대중과학서를 제일 좋아해요. 자세하게 설명하고 쉽고, 색인도 있어서 찾기 쉬운 책이요.


『여혐민국』초판 인세를 기부하신다면서요.


우선 제가 증쇄를 찍어본 적이 없어서 초판을 기부한다고 하면 2쇄를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돈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한국 계좌에서 돈 빼기가 너무 힘들어요. 이제껏 낸 책 인세도 엄마 까까 사드시라고 그냥 놔두고 있어요.


어디에 기부하실 생각이신가요?


저소득 여학생들에게 생리대를 기부했어요. 다음에는 다른 도시에 기부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는 페미니스트 콘텐츠 지원을 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물론 떼돈을 벌 일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은행 가서 해외에서도 인출되는 카드 만들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도 까까 펀드로 부모님이 빼서 쓰실 거예요. (웃음)


앞으로도 양파 페이지는 운영하실 생각이신 거죠?


예전에는 정말 편하게 신변잡기 올리던 페이지였거든요. 파티 가야 하는데 드레스 뭐 입을지 물어보는 글을 쓰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제는……


한국 페미니즘의 선봉장이 되셨죠. (웃음)


그러게요. 다른 홍보문구에서도 페이지 구독자 수가 계속 들어가는데, 사실 2만 5천 명이 자랑할 게 아니지 않나요? 인사이트 구독자는 백만 명인걸요. 하지만 아무래도 개인적인 글을 올리기는 힘들어졌고, 어떻게 할까 싶어요. 그래도 계속 글은 쓰겠죠?


 

 

여혐민국 양파(주한나) 저 | 베리북
페이스북 페이지 구독자 수 2만5천 명! 『여혐민국』은 런던 마이크로소프트의 데이터 과학자 양파가 한국의 여성들에게 건네는 선물이다. 때로는 톡 쏘는 사이다처럼, 때로는 눈물이 찔끔 나도록 한국의 여성혐오에 대해 솔직하고 치열하게 써내려간 페북 포스트들을 책으로 엮었다. 남편, 남친, 남자사람친구에게 여혐을 이해시키고 싶다면 당장 『여혐민국』을 손에 쥐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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