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의 삶이 그대로 역사라면 한 작가의 삶은 또 어떨까.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유년을 평양에서 보내고 한국전쟁 과정에서 남쪽으로 온 어린 황석영. 그는 4.19로 친구를 잃고, 작가가 되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며 뚜벅뚜벅 역사의 중심으로 향해 간다. 5.18로 잃은 동료들을 가슴에 묻고서 광주를 세상에 알리고, 작가이자 활동가로 살던 황석영은 이후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치며 그 자신이 역사를 써내기에 이른다. 작가 황석영이 써낸 자전 『수인』은 그가 겪어낸 역사와 그가 만난 수많은 역사 속의 사람들을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너른 광장이다.
자유를 잃은 작가의 운명
그러나 『수인』을 쓰는 일은 작가의 영혼을 쏟아 붓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장길산』 같은 대작을 써낸 황석영 작가도 삶의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수인』을 쓰는 도중 심각한 어깨 통증으로 집필을 중단해야 하기도 했던 것.
“촛불 집회를 몇 차례 나갔는데요. 아마 독감이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랬는데 감기가 나가지 않고 계속 아픈 거예요. 병원에 갔더니 폐렴이 지나갔다고 하더라고요. 오른쪽 어깨 통증이 늘 직업병처럼 있는데 거기에 물이 차서 뽑아냈고요. 나름대로 쓰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속에 있는 걸 다 끄집어내니까 너덜너덜 한 거예요. 책을 쓰면서 아팠던 게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몸살을 심하게 앓았죠. 몸에서 뭔가가 쑥 빠져나간 것 같아요.”
초고가 무려 6,000매 분량이었다. “잘한 것보다는 잘못한 것, 회한이 있는 것을 숨김없이” 써내야 한다는 아내의 조언에 따라 2,000매를 덜어냈다. 자전을 쓰며 읽게 된 살만 루시디의 『조지프 앤턴』도 도움이 됐다. 1988년, 이슬람교 탄생을 도발적으로 그린 소설 『악마의 시』를 출간한 후 끊임없이 가해지는 살해 위협을 피해 오랜 도피생활을 한 살만 루시디. 공교롭게도 황석영 작가가 망명생활을 하던 시기에 도피생활을 한 살만 루시디의 이야기를 읽으며 “다른 곳에서 도피와 망명을 한” 작가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혹시 덜어낸 부분 중에 아쉬움이 남는 이야기는 없는지 물었다. 하나를 더 담을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은지, 어리석은 질문에 작가는 꾸밈없이 답했다.
“편집 과정은 내가 파악하고 응낙했으므로 정당했다고 봅니다. 에필로그 부분은 석방 이후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담았고 제목을 붙인다면 ‘세계와 나’정도 되겠는데요. 편집자의 견해는 ‘6,000매를 담으려면 3권이 되는데 판매에 불리하다’였지만 나로서는 ‘아직 제대로 숙성되지 않은 시간으로 보인다’였어요.”
황석영 작가가 쏟아 부은 지난 시간의 기록 『수인』은 작가의 방북과 망명 이후 국내에 귀국해 안기부로 끌려가 취조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태연한 표정을 가장해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작가의 모습이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자전의 첫 장면, 이것으로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었어요. 연대기 식으로 순차적으로 써놓았던 앞부분을 모두 버리고 다시 쓰면서, 감옥의 5년에다 현재 상황을 압축 시켜 놓고 과거와 현재로 드나들면서 천을 짜듯 직조하는 식으로 쓰면서 이렇게 된 것일 뿐이지 별다른 의미는 없어요. 굳이 말하라면 현재 우리의 ‘자유’를 제약하는 제도적 틀 가운데 ‘48년 체제’라는 것이 있는데요. 그것이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개량한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죠. 이 틀거리가 분단체제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이 분단체제를 유지하려는 국가권력의 얼굴이 공안 당국이죠. 그런 그들과 자유를 잃은 작가의 운명과 대면하는 것이 이 자서전의 첫 장면이 된 셈입니다.”
자유였다. 황석영 작가는 자신의 일생을 일컬어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몸부림”이었다고 했다. 자전의 제목이 『수인』이 된 이유 역시 자유를 박탈당한 채 평생을 감옥에서 벗어나려 애쓴 작가의 삶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서 살아온 내가 갈망했던 자유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
이 책의 제목이 ‘수인(囚人)’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수인 2』, 448-449쪽)
“결국은 일생을 돌아보면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몸부림이었어요. 자유의 길이죠. 석방되기 위해 싸우는 것, 그러니까 이것이 ‘수인’이구나 싶어졌어요. 우리는 누구나 시간의 감옥에 갇혀 있고요. 또한 저는 작가니까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까. 정치, 사회적으로는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 갇혀 있죠. 이런 한계로부터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이 나의 평생이었다,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때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 한 권의 ‘역사책’이라고 해도 좋을 자전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김지하, 고은, 수전 손택, 은수미, 이해찬, 이문구, 김남조, 김훈, 조국 등 많은 사람들이 교차하며 역사의 현재를 깨닫게 한다. 단단하게 혹은 성글게 연결된 개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큰 공명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게 한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각자 자기 깜냥대로 여러 일을 겪으며 살아가는데요. 그들이 서로의 주변에 있는 거죠. 누구는 죽기도 하고, 다시는 안 나타나기도 하고요. 누구는 다시 역사 속에 등장하면서 같이 가는 거거든요.”
그중 황석영 작가는 특히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작가는 문익환 목사를 꼽았다.
“다시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참 순수하시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소년 같았어요. 문 목사님과는 많은 일을 함께 겪었습니다. 문인간첩단 사건, 6월 항쟁 등. 대선배시지만 거의 동지, 전우와 같았어요.”
문익환 목사가 정자 위에서 혼자 대동강을 내려다보며 쉬고 있었다. 그는 방금 시 한 편을 썼노라며 수첩에 적은 싯귀를 큰 소리로 낭송했다. 우리 모두 어쩔 수 없는 낙천주의자들이었지만 이제 돌아가면 구속될 험준한 길을 앞에 두고 어쩌면 저렇듯 무사태평인지 나는 문목사가 낭송하는 시를 들으며 그의 순수한 열정에 감복했다.(『수인 1』, 202쪽)
어쩌면 단단하게 묻어두었던, 다시 꺼내보기가 괴로웠을 이야기들도 많았다. 어머니의 임종을 써내려간 작가의 글은 너무나 절절하다. 그밖에 좌절감에 몸을 떨었던 이야기들도, 슬픔에 지배당한 시절도 도무지 시간이 흐른 과거의 이야기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깝게 전해진다. 특히 광주가 그렇다.
당시 황석영 작가는 광대 전용 소극장 공사를 하던 중 자금을 구하기 위해 광주를 떠나 서울행을 해야 했다. 금요일에 서울에 도착했고, 일이 해결되지 않아 주말을 서울에서 보낸다. 바로 그때, 그가 서울에 있던 그 주말이 1980년 5월 18일이었다. 결국 6월까지 광주로 돌아가지 못했고 이 사건은 작가가 “급진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자책감이 많았어요. 당시 죽은 젊은이들 중에 함께 활동하던 분들이 많았거든요. 늘 얼굴이 생각나고 그러니까요. 그것이 아마 그 이후 활동가로 살게 된 원인이었을 것 같아요. 거기서부터 뭐가 뒤엉켰어요. 긴 방랑을 한 셈이죠. 문학으로부터 도망가 활동가로서의 삶을 산 셈이에요.”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기까지 긴 방랑의 시간들이었다. 그렇다면 작가를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게 한 결정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 책에도 나오듯이 문학은‘나의 집’이었으니까요. 나는 자신이 소설가라는 정체성을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문학과 독자에 대한 예의
엄혹한 시절이었다. 『수인』을 읽는 마음은 내내 묵직하다. 잠깐, 좋은 기억을 물었다. 작가가 다시 돌아가고 싶을 때는 언제일까. 황석영 작가는 19살이던 1962년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던 때를 꼽았다.
“『사상계』에 「입석부근」이 신인문학상으로 선정이 되어 제가 수상자가 된다는 것을 신문 기사로 친구가 알게 됐어요. 그리고는 친구들이 술 사주고, 축하해주고요. 그날 첫눈이 왔는데요. 아, 그때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웃음) 싶죠.”
방북 이후 4년 동안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이후 5년 동안 감옥에 갇혀 수인생활을 해야 했던 황석영 작가는 『수인』에서 감옥 안에서 본 풍경을 이야기 사이사이에 사진처럼 보여준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거나 바깥소식에 온 신경을 집중하거나 단식을 하기도 했던 긴 시절이었다. 한 장면에서 작가는 젖은 담배꽁초를 주워 반쯤 피우다가 버리고는 수인 생활 동안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자신은 비록 수인이지만 그 전에 인간이며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겠다는 결연함이었다. 이에 대해 작가에게 물었다. 결코 내어줄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존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세계의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작가로서의 체신을 지키려던 것이었지요. 내 문학과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했고요. 그때에는 대부분의 정치범이 그런 체신을 지키려고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독자라면 어떻게 판단할까, 하는 것이 늘 저의 선택의 기준”이었다는 황석영 작가는 “그들이야말로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진정한 ‘뒷배’”였다고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 현재도 역사가 된다는 사실, 그것은 자명하지만 그런 시선을 갖고 현재를 판단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선택의 기로에 선 어려운 순간, 사람들은 쉽게 흔들리고 유혹에 굴복한다. 그럴 때마다 작가를 흔들리지 않게 해준 것은 문학, 그리고 독자뿐이었다.
그렇다면 그저 범인일 뿐인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지금, 사회의 변화를 보고 미래를 희망하는 시민들이 잊지 말아야 할,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작가는 스스로를 ‘낙천적 비관주의자 동시에 비관적 낙천주의자’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많은 가치와 기준이 있겠지만 우리가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면서 세운 ‘헌법’은 바로 민주주의라는 상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 공동체적 약속만은 지켜가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미래를 망칠 일은 적어 보여요.”
작가는 2016년 가을과 겨울을 뜨겁게 수놓은 광장의 촛불에 대해 “유례없는 본보기를 보여줬다”면서 반가운 마음을 전했다. 등사기로 찍어낸 유인물을 길거리에 뿌리며 진실을 알려야 했던 시간을 지나온 작가에게는 남다른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에 ‘토리노 도서전’에 다녀왔는데요. 그곳에서 만난 이탈리아 작가 친구들이 전부 그래요. 전 세계가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한국만 유난히 사회를 변화시켰다, 저력이 어디서 오느냐, 고요. 제가 한참 자랑을 했죠. 우리가 원래 미디어에 강한 민족이다, 금속활자도 우리가 제일 먼저 만들었다(웃음) 했어요. 70-80년대, 엄혹한 시절에 유인물 몇 장 뿌리고 그걸로 잡혀 가고 그럴 때에 비한다면 지금은 정말 미디어의 막강한 힘을 느껴요. 얼굴도 모르는 개인들이면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연대를 이뤄내는 것을 보고 많은 걸 느꼈어요.”
황석영 작가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은 역시 자유였다. 자신의 생애를 담은 자전에서 독자에게 딱 한 가지를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유다. “자유란 늘 ‘무엇으로부터의’가 전제되는 구체적인 가치예요.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서 빼앗아 몇몇이 독점하려는 ‘자유’는 슬로건일 뿐 나의 것이 아니지요. 끊임없이 쟁취해야 할 나의 자유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으면 해요.”라는 황석영 작가는 이어 현재를 사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오늘은 어제 죽은 자의 내일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람은 내일이나 어제를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늘을 사는 존재입니다. 바로 지금 이 현재가 우리의 생입니다. 함부로 할 수 없겠지요.”
http://ch.yes24.com/Article/View/33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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